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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여김과 드림
로마서 6:6-14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롬 6:6-14 / 우리의 악한 옛 욕망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사랑하던 우리의 육신은 더이상 죄의 지배를 받거나 죄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7)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으니 어떻게 죄의 유혹과 세력이 우리를 구속할 수 있겠습니까? 8) 그리고 죄를 사랑하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리스도의 새 생명과 함께 살 것을 믿습니다. 9)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다시 죽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죽음도 더 이상 그분을 지배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0)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세력을 꺾기 위해 단 한번 죽으셨지만 지금은 하나님과 계속 사귀시면서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산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12) 이제는 더 이상 여러분의 나약한 육신을 죄의 지배에 내맡겨 육신의 욕망에 빠져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13) 여러분은 육신의 한 부분이라도 죄에 내맡겨 악의 도구가 되게 하지 말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처럼 여러분을 전부 하나님께 드려 의로운 일에 쓰일 도구가 되게 해야 합니다. 14) 죄가 다시 여러분의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율법의 속박을 받으며 사는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로운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앞 단락에서 바울은 기독교의 세례가 갖는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인간은 죽어야만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데,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함께 죽은 사람들이기에 죄로부터 자유합니다.
죽은 자와 산 자(6-11) 성도는 한편으로는 계속 죽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삽니다. 죽음과 삶이 우리에게 동시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이유는 죽어야만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않기 때문이며,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는 죽음이 목표가 아니라 결국 생명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의 현실로만 본다면 사람은 죽음과 삶을 동시에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죽었으면서 동시에 살아있다는 말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결코 죽음과 삶의 경계선을 넘나들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가능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10) 죄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죄에 대해 무감각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의의 영역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12-14) 율법이 아니라 새 생명에 대한 소망과 새 생명을 누리는 가운데 살아간다는 점에서 성도의 삶은 은혜입니다. 율법의 세계에서는 우리의 능력이 최대한으로 발휘되어야 하지만 은혜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이 일에 참여하는 예식이며, 법의 질서로부터 은혜의 질서로 바뀐다는 점과 인간의 노력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바뀐다는 점에서 이것은 너무 놀라운 사건입니다. 바울이 욕망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결론적으로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만이 실제로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이 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 용 :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죄에 대해 죽었고, 하나님을 향해 살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 내게 묻다」라는 책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 말고, 너희는 도대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가 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어머니 신앙에서 내 신앙으로, 아버지의 신앙에서 내 신앙으로, 남편이나 아내의 신앙에서 내 신앙으로, 친구의 신앙에서 내 신앙으로 바뀌어야 그때부터 내 삶에 역동적인 믿음의 힘과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고 합니다. 주님을 열심히 배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려 그분으로 숨을 쉬고 사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도현경-
< 설 교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
예레미야 39:17-18, 로마서 6:6-10
유명한 유대인 정신의학자 칼 메닝거는 ‘죄로 인한 결과(Whatever Become of Sin?)’라는 책에서 현대인에게 죄의 개념이 사라진 것을 개탄하였습니다. 그는 “나도 괜찮고, 너도 괜찮다”, “다 그럴 수 있지”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반대한다고 하였습니다. 20세기 중반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죄의 개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그는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무뎌진 우리의 사고를 반성하고 죄에 대하여 더 민감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죄란 어떤 것입니까? 작지만 큰 죄도 많고, 사람들이 악해지는 모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탈법이나 편법을 너무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일도 매일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예사로 여겨 안전을 위협합니다. 최근 불거진 원자력발전소 불순부품 문제를 보세요. 그들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악한 일을 했는지 ‘원전 마피아’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이런 악을 조장하는 일이 이제는 교회에까지 들어와서 교회도 깨끗하고 안전한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윗은 죄에 대하여 무딜 때에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그 후에 나단 선지자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을 듣고 그는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되어 회개합니다. 다윗은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하는지 벼개를 적시며 눈물로 회개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죄로 잉태되어 태어났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그 죄의 짐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너무 고통스럽고 죄의 압박 때문에 기절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죄에 대한 민감성이 모두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시편 78:38에는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한 긍휼하심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보이셨고 해결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는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조문은 사람에 대한 두 번째 조문이기도 합니다. 이 기도는 누구에게나 가장 절실한 기도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은 암송문이 아니라 실천문입니다. 암송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문자적으로 실천해야 참 기도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의 의미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죄’라는 말을 마태는 ‘빚’으로, 누가는 ‘죄’로 표현하였습니다. 마태의 표현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시고”라는 말입니다. 죄란 빚입니다. 내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갚아줘야 하는 큰 빚입니다. 이 빚을 예수님은 갚을 수 있고, 십자가에서 갚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무자비한 종의 비유’가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주인에게 탕감을 받았습니다. 그가 나오는 길에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이 종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요즘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3조 원 정도 됩니다. 일백 데나리온이란 조금만 노력하면 갚을 수 있는 빚입니다. 요즘 돈으로는 500만 원 정도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갚을 수 없는 빚을 용서받고 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당시 유대 전역에서 로마에 낸 세금이 일 년에 800달란트라고 합니다. 그러니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돈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3:23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죄 사함이 필요합니다. 모두에게 십자가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죄는 인간에게 필연입니다. 누구나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도 필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묵상하는 이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죄의 몸이 죽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6절에는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까?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가 십자가에 스스로 못 박히는 것이 필요합니다.
옛 사람이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비결은 십자가에서 옛 사람인 죄의 몸이 죽어 죄의 종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옛 사람이 죽습니다. ‘십자가’에 박혀야 죄의 몸이 죽어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건은 반복적인 사건이 아니라 단일회적인(once for all)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번으로 영원히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의 한 번의 십자가 사건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죄 사함의 사건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면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이 삶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며 자유입니다.
에베소서 4:22에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옛 사람을 벗어야 합니다. 옛 사람을 벗어야 새 사람을 입습니다.
파충류나 곤충을 보면 허물을 벗고 새 단장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허물을 벗어야 비로소 새로운 것으로 태어납니다. 사람은 허물을 벗는 것은 아니지만 헌 옷을 벗어야 새 옷을 입습니다. 밤에 잘 때 입는 잠옷을 벗어야 아침에 일하는 새 옷을 입습니다. 헌 옷을 그대로 입고 새 옷을 입는 사람은 없습니다. 새 옷을 입기 위하여 헌 옷을 벗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4에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새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은 어디서 만들어집니까? 바로 십자가상에서 만들어집니다. 무엇으로 만들어집니까?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로 만들어집니다.
죄란 히브리어로 ‘아본’입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하나님의 법에 대한 위반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입니다.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가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사야 53:6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의 길을 가지 못하고 각자 자기 길로 갑니다. 과녁에서 한참 빗나가 살고 있는 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죄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아직 죄가 드러나지 않은 경우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아직 죄를 지을 기회가 없었던 경우입니다. 세상에는 죄와 무관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이 “죄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죄인이라고 인정해야 사함도 받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을 의인이라고 말하는 죄인과 죄인이라고 말하는 의인이 있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죄를 더 깊이 느끼게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영성의 최대 역설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죄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치유 받지도 못합니다.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치유도 받지 못합니다. 용서함을 받는 것은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죄를 알고 용서함을 받아야 진정한 자유도 있습니다.
■ 어떤 소녀가 자신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교회는 술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교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살아 있는 성자를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세 번째 면담이 끝나자 주교는 진짜 소녀가 예수님과 대화를 하였는지 검사해보자고 하였습니다. “네가 다음번에 예수님과 대화를 나눌 때, 내가 지난번 고해성사에서 무엇을 고백했는지 그분께 물어봐 주었으면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주교는 소녀를 만났습니다. “얘야, 예수님을 만나서 내가 뭐라고 고해성사를 했는지 여쭤봤니?” 소녀가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잊어버렸다고 하시던데요”. 예수님의 죄 사함이란 죄를 기억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옛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고 나도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아무리 큰 죄라도 다 용서하시는 것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십자가는 잊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다시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옛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못 박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고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7절에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죄에서 벗어나면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의입니다. 이것이 죄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모두가 의롭게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죄의식은 아담 이후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보다 제법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일에 열심이었고 책임감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니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들보다 특별한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닙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초대교회 교인들은 “형제들아, 어찌할꼬”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죄의식과 죄의 고백은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죄의식을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이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이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죄의식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윤리적인 면에서 죄의식을 많이 가집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의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전투기의 항법사 폴 버거만은 심한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유의 죄의식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유대교는 죄를 두 종류로 나눕니다. 하나님에 대한 죄와 인간에 대한 죄입니다. 성경의 율법인 토라에는 56종류의 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여러 종류로 나누지만 그러나 근원적으로 죄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입니다.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하나님과 떨어져 있으면 무슨 죄든 다 범할 수 있습니다.
죄란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된 상태입니다.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기 위해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인격적 세력이 있습니다. 틈새를 만드는 재주꾼인 마귀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틈새를 벌어지게 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틈새를 다시 없애고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인간 사회는 개선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재창조하십니다. 이 재창조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세로를 잇는 긴 막대기와 가로를 잇는 막대기가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주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유대교 신자들에게 일 년 중 가장 성스러운 날은 바로 속죄의 날입니다. 그 날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 기도와 단식을 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아뢰고 사함을 받는 속죄와 용서,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고귀한 행동은 죄를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죄의 존재를 완전히 잊으신 것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지혜의 시작은 죄의 고백입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교회가 지닌 가장 큰 선물은 죄 사함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초기 수사 시절에 자질구레한 죄와 건전치 못한 생각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몇 시간에 걸친 자기반성으로 고해 신부의 진을 빼놓곤 했습니다. 루터의 선배 수사 한 명이 홧김에 이렇게 조언하였습니다. “이보게, 하나님이 자네에게 화나신 게 아닐세, 자네가 하나님에게 화가 난 걸세”. 하나님은 우리의 산더미 같은 죄에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천근 같은 무거운 죄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몽테뉴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법의 기준을 들이댔을 때, 평생 교수형에 열 번 정도 처하지 않을 만큼 착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죄와 항상 가까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아시고 십자가에서 아들을 죽게 하시고 우리 모두를 단번에 용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빚을 다 갚았다”는 말입니다. 죄의 종이 되어 종살이에서 해방되려면 속전이 필요한데 예수님은 우리를 해방하기 위하여 속전으로 자기 몸을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몸이 다시 종노릇하지 않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남겨두십니다. 모래 위가 아닌 십자가 위에 남겨두십니다.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피로 쓰십니다. 그분이 남기신 메시지는 단 세 글자입니다. ‘죄 없음’. 예수님이 남기신 이 메시지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죄 사함 받고 죄 없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39:18에는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은 구원받게 하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우리를 구원받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결 론
■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한 히에로니무스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성경을 번역할 때 죽기를 각오하고 곁에 해골을 두고 하였습니다. 이 분의 이름을 영어식으로는 제롬이라고 하므로 제롬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제롬이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예수님, 제가 정성을 다해 주님께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무엇이 주님께 기쁜 선물이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롬아, 하늘과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이 다 나의 것인데 그대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제가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 드리고 싶습니다.” 제롬은 예수님께 졸라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만약 그대가 진정 나를 기쁘게 하고 싶다면 그대의 모든 죄를 나에게 다오. 이것을 위해 내가 십자가에 매달렸으니 이보다 내 마음을 더 기쁘게 해줄 다른 선물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우리가 가지고 있지 말고 다 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합니다.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져 주시고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룬 죄 사함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 밑에 우리 죄 짐을 벗어버리고 용서받은 자유함을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