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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617책 (탈초본 33책) 영조 2년 5월 16일 정미 28/30 기사 1726년 雍正(淸/世宗) 4년
金時敏 등을 모신 사우에 병향된 李郁 등에게 贈職을 내려줄 것과 論介에게 정표를 내려줄 것을 청하는 崔鎭漢의 상소
○ 慶尙左兵使崔鎭漢疏曰, 伏以臣愚陋賤品, 決拾末流, 地分卑微, 見識窾啓, 鞅掌職事, 尙且區畫之不暇, 瀆擾宸嚴, 何敢僭妄之自干乎? 唯是尙節慕義之心, 顯忠遂良之誠, 所素蓄積于中, 而不肯自後於人矣。玆將隱卒之微忱, 敢陳燭幽之聖鑑, 伏願殿下, 澄省而採納焉。臣於辛丑年, 待罪于本道右兵營, 營卽三去壬癸年倡義軍復矢處, 而中有忠愍·彰烈賜額之兩祠, 年久之後, 未免頹圮, 故其時所見形止, 啓聞後修補, 而審察兩祠位牌, 則忠愍, 卽壬辰戰亡晉州判官臣贈領議政金時敏, 單位牌所享之祠, 彰烈, 卽癸巳戰亡慶尙右兵使臣贈右參贊崔慶會, 忠淸兵使臣贈左贊成黃進, 倡義使臣贈左贊成金千鎰, 泗川縣監臣贈兵曹判書張潤, 倡義使從事官臣贈承旨梁山璹, 贈參議臣金象乾, 巨濟縣令臣金俊民, 奮義義兵將臣贈主簿兪晗, 生員臣李郁, 義兵將臣姜熙復, 守門將臣張胤賢, 判官臣朴承男, 學生臣河繼先, 學生臣崔彦亮, 復讎義兵將臣高從厚, 敵愾義兵將臣李潛, 金海府使臣李宗仁, 右兵營虞候臣成穎達, 僉正臣尹思復, 學生臣李仁民, 義兵代將臣孫承先, 主簿臣鄭惟敬, 守門將臣金太白, 學生臣朴安道, 宣務郞臣梁濟, 奮義義兵將臣姜熙悅, 鎭海縣監臣曺慶亨, 判官臣崔琦弼, 二十八位牌竝享之祠矣。臣次第瞻敬, 繼以訝惑, 噫, 龍蛇之亂, 列郡風靡, 鳥伏鼠竄, 滔滔皆是, 急病攘夷, 寥寥無幾, 而惟彼卄八諸臣, 一般義膽, 力盡孤城, 同日殉節, 炳然義烈, 卓乎如彼故, 表奬之典, 最先於亂定之初, 而咸秩之禮, 竝享於一廟之中, 其在慰忠魂樹風聲之道, 可謂無歉, 而至於贈職一款, 竊有所未解者, 同時死事, 一體祭祀, 而七人位牌, 崇其寵贈, 卄一名位, 獨也蕭條, 或書行職, 或書義兵將, 或書生員, 或書學生, 此臣所以訝惑, 而未解者也。夫諸臣取義, 旣不上下則朝家褒贈, 宜無異同, 而何取何舍, 或贈或不, 一視均典, 似不若是, 瞻聆嗟異, 當復如何? 嗚呼, 睢陽當日, 巡遠之死, 先後異焉, 而唐家崇報, 一體無間者, 誠以斗許丹血, 兩介一腔, 況此諸臣, 死不先後, 而畢竟恩典, 同廟而異施者, 抑獨何哉? 雖取其表著者, 較而論之, 忠孝兩全, 如高從厚者, 果下於金象乾乎? 節義昭著, 如李潛者, 果下於梁山璹乎? 恩延揭厲, 古今通誼則, 義兵將題銜者, 此何義乎? 勿傷汪踦, 聖人衮筆, 則學生題銜者, 獨不冤乎? 臣雖至愚, 無所知識, 而區區一念, 用愍于是, 乃於壬寅年, 以倂施褒贈之意, 枚擧馳啓, 則其時籌司覆啓, 以爲同時立慬之人, 多未蒙一體褒贈者, 當時朝議, 似或出於參酌取舍之意, 則到今過百年之後, 不可率爾輕議, 其說不行, 其事遂寢, 臣誠慨惜, 而不能自已也。臣請拈出參酌取舍之語, 而明其不然, 夫事在疑信之間, 功有彼此之別然後, 始可參酌而取舍之矣。彼諸臣殉國之節, 旣無疑信於其間, 亦無彼此之可別, 則臣未知何以參酌, 而何以取舍乎? 當時實蹟, 雖不可盡考, 而廟焉享之, 額而榮之者, 實在於平亂之初, 則其死之明白可賞, 不待考蹟, 而可證左契, 況且可據實蹟, 昭載於旌忠壇麗牲之文, 取考其略, 則有曰當晉陽城陷之日, 倡義使金千鎰與梁山璹等數十人, 北面再拜, 赴南江而死, 李宗仁及姜熙悅等十餘人, 奮劍斫賊, 力盡而死。又曰, 宗仁將死, 掖二賊赴水, 大呼曰, 金海府使李宗仁, 死於此, 其忠壯氣節, 有令人髮豎者矣。屹然龜頭, 日星輝映, 昭昭赫赫, 照人耳目, 則載實之文, 有不可誣矣。噫, 當時之立廟竝享, 旣出公議, 中間之劖石齊芳, 又是實蹟, 則諸臣心事之昭著, 可謂通天地亘古今, 而不可疑信於其間矣。伊日朝議, 亦奚惜死後之哀贈, 別爲參酌而取舍之乎? 雖彼隷臺之賤, 苟有可賞之事, 則其在酬報之道, 不當分別而視, 豈以諸臣之忠, 俱辦一樣之節, 而獨於贈職之典, 有何差等之異乎? 事在久遠, 不可臆料, 而博採有識之流傳, 參以愚臣之賤慮, 則當亂離甫定之初, 庶事未遑之時, 道臣之請贈者, 未免疎漏之患, 禮官之奉命者, 或有忘忽之弊, 因循至今, 未能提起之致也。此豈由於參酌取舍而然哉? 至於到今過百年之後, 不可率爾輕議云者, 尤有所不然, 苟有卓卓之節, 烈烈之名則, 雖或湮沒於當時, 猶且褒揚於異代, 矧惟我聖朝崇奬旌表之方, 不間於歲月之久近者乎? 臣不必旁引而曲證, 請以死節於壬辰, 而贈旌於近日者明之, 忠淸兵使臣贈兵曹判書成應吉, 副司果臣贈承旨李瑋, 俱是倭亂殉身之人, 而乃於百餘歲後八九年前, 始因其子孫之呼籲, 特擧其贈旌之恩典, 則何獨於此, 不可輕議乎? 果若定取舍於當時, 不輕議於今日, 寵贈均典, 終始獨靳, 則彼卄一人忠魂義魄, 不亦冤鬱於冥冥之中耶? 此臣所以激切于心, 而愍惻于中者也。且臣嘗閱柳夢寅所著野談一冊, 有曰論介者, 晉州官妓也。當萬曆癸巳之歲, 金千鎰倡義師, 入據晉州, 以抗倭, 及城陷軍散, 人民俱死, 而論介, 凝粧靚服, 立于矗石樓下峭巖之前, 其下萬丈, 直入波心, 群倭, 見而悅之, 皆莫敢近, 而獨一倭, 挺然直前, 論介, 笑而迎之, 遂抱其倭, 直投于潭, 彼官妓淫倡也。而視死如歸, 不朽於賊, 渠亦聖化中一物, 不忍背國從賊, 無他, 忠而已, 猗歟哀哉。夢寅, 以文章名, 爲此傳, 頗詳密, 臣每讀至此, 未嘗不擊節, 而嗟異之, 及到晉營, 矗石之下南江之上, 果有峭岩, 而義巖二字, 大刻其上, 臣訪於古老, 則乃是論介殺身殱賊之處, 而其所傳說, 頗與古記無異, 臣見其巖而聞其說, 不覺義膽之自激也。噫, 當時之亂, 屈節賣身者, 不知其幾何人哉, 而孰謂一娼妓, 能辦士君子所難乎? 昔者薜仁杲降將旁地仙之復叛也。有王氏女, 取地仙所佩刀, 因刺地仙而斃之, 詔封崇義夫人, 以旌其義, 夫論介之所成就, 詎下於王氏之後哉? 嗚呼, 野記一編, 芳名昭載, 蒼巖半面, 義字不爛, 而泯沒至今, 獨無旌美, 此不但賤臣之所歎惜, 實是南士之共咨嗟者也。如臣愚賤, 地卑言微, 前日再啓, 俱未得行, 則事不當更爲煩瀆, 而且臣所管事務蝟劇, 凡於恤軍賑飢之方, 尙未自遑, 則誠知此等事, 不急於目前, 非關於分內, 而猶且不避猥越, 妄自論列者, 哀彼諸臣一妓之取義抱冤, 而旣無子孫之呼籲, 終絶天聰之登徹, 故不容泯默而止, 玆敢冒昧而陳, 伏願殿下, 勿以人廢言, 特於卄一諸臣, 均施贈職之典, 官妓論介, 亦加旌表之章, 用慰抑鬱之魂, 以爲激勸之方, 不勝幸甚, 臣無任激切屛營祈懇之至, 謹昧死以聞。答曰, 省疏具悉。當初區別, 必有委折, 義巖雖存, 野談所記, 何可憑信, 且百餘年之事, 似難輕擧, 而卿之欲褒忠烈之意, 嘉矣。其令廟堂, 稟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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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년 병오(1726)5월 16일(정미) 맑음
02-05-16[28] 창렬사(彰烈祠)에 배향된 이욱(李郁) 등 21인에게 증직하는 은전을 균등하게 시행할 것 등을 청하는 경상 좌병사 최진한(崔鎭漢)의 상소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최진한(崔鎭漢)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어리석고 미천한 신은 말석에 있는 무관으로 지위가 낮고 식견이 좁아 직무를 담당하는 것도 조리 있게 처리할 겨를이 없으니, 성상을 번거롭게 하는 일에 어찌 감히 망녕되이 간여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절의를 숭상하고 의리를 사모하는 마음과 충신을 드러내고 현량(賢良)을 천거하려는 정성은 평소 마음속에 쌓여 있어 스스로 남에게 뒤지려 하지 않습니다. 이에 죽음을 애도하는 작은 정성으로 은미한 곳까지 통찰하시는 성상께 감히 진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밝게 살펴 받아들여 주소서.
신은 신축년(1721, 경종1)에 본도에서 우병사(右兵使)의 직임을 맡고 있었는데, 우병영(右兵營)은 바로 세 번 지나간 임진년(1592, 선조25)과 계사년(1593)에 창의군(倡義軍)이 온몸에 화살을 맞은 채 죽어간 곳입니다. 이곳에는 사액한 충민사(忠愍祠)와 창렬사(彰烈祠) 두 사당이 있는데, 세월이 오래 지난 뒤라 퇴락하였으므로 그 당시 본 상황을 장계(狀啓)로 보고한 뒤에 보수하였습니다.
두 사당의 위패를 살펴보았더니, 충민사는 바로 임진년에 전사한 진주 판관(晉州判官) 증(贈) 영의정 김시민(金時敏)의 위패를 단독으로 제향하는 사당이고, 창렬사는 바로 계사년에 전사한 경상 우병사 증 우참찬 최경회(崔慶會), 충청 병사(忠淸兵使) 증 좌찬성 황진(黃進), 창의사(倡義使) 증 좌찬성 김천일(金千鎰), 사천 현감(泗川縣監) 증 병조 판서 장윤(張潤), 창의사 종사관 증 승지 양산숙(梁山璹), 증 참의 김상건(金象乾),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 분의 의병장(奮義義兵將) 증 주부 유함(兪晗), 생원(生員) 이욱(李郁), 의병장 강희복(姜熙復), 수문장 장윤현(張胤賢), 판관 박승남(朴承男), 학생(學生) 하계선(河繼先), 학생 최언량(崔彦亮), 복수 의병장(復讎義兵將) 고종후(高從厚), 적개 의병장(敵愾義兵將) 이잠(李潛),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 우병영 우후(右兵營虞候) 성영달(成穎達), 첨정 윤사복(尹思復), 학생 이인민(李仁民), 의병 대장(義兵代將) 손승선(孫承先), 주부 정유경(鄭惟敬), 수문장 김태백(金太白), 학생 박안도(朴安道), 선무랑(宣務郞) 양제(梁濟), 분의 의병장 강희열(姜熙悅), 진해 현감(鎭海縣監) 조경형(曺慶亨), 판관 최기필(崔琦弼) 등 28인의 위패를 함께 제향하는 사당입니다.
신이 차례로 공손히 바라보며 경의를 표하다가 곧이어 의아함을 느꼈습니다. 아, 임진년과 계사년의 왜란에 여러 군(郡)이 휩쓸려 새가 움츠리는 듯 쥐가 달아나는 듯하여 온 나라가 걷잡을 수 없이 모두 그런 지경이었습니다. 시급한 문제는 왜적을 물리치는 것이었으나 그렇게 한 사람이 매우 적었는데, 저 28인의 신하들만은 똑같이 의로운 마음으로 구원도 없는 외로운 성에서 사력을 다하다 같은 날 순절하여 빛나는 의열(義烈)이 저처럼 우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왜란이 평정된 초기에 표장(表奬)하는 은전을 가장 먼저 내리고 모두 추증하는 예를 거행하여 아울러 한 사당 안에 제향하였으니, 충성스런 혼령을 위로하고 풍교(風敎)를 세우는 도리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증직(贈職)하는 일에 대해서는 적이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동시에 죽은 일로 함께 제사 지내면서 7인의 위패는 융숭하게 은총 어린 추증을 하였는데, 21명의 위패에 대해서만은 덩그렇게 행직(行職)을 쓰기도 하고 의병장이라 쓰기도 하며 생원이라 쓰기도 하고 학생이라 쓰기도 하였으니, 바로 이 점이 신이 의아스러워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 여러 신하가 의리를 행한 것이 우열을 가릴 수 없으니 조정에서 기려 추증하는 것도 다름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은 취하고 무엇은 버리며 누구는 추증하고 누구는 추증하지 않았으니, 똑같이 균등하게 은전을 베푸는 도리가 이와 같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보고 듣는 이들마다 얼마나 탄식하며 괴이하게 여기겠습니까. 아, 수양(睢陽)이 함락되던 날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의 죽음에 선후의 차이가 있었으나, 당(唐)나라 조정에서 융숭하게 보답하여 일절 차이가 없었던 것은 한 말 쯤의 붉은 피를 가진 두 사람의 마음이 똑같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이 여러 신하는 죽을 때 시간적인 차이도 없었는데, 필경에 은전이 같은 조정에서 다르게 시행된 것은 유독 무엇 때문입니까. 비록 그중에 공이 뚜렷이 드러난 사람을 취하여 비교해서 논한다 하더라도 고종후처럼 충성과 효도를 다 온전히 한 사람이 과연 김상건만 못하겠습니까. 이잠처럼 절의가 분명히 드러난 사람이 과연 양산숙만 못하겠습니까. 은혜를 연장하여 드높이고 격려하는 것은 고금의 공통된 의리인데 ‘의병장’이라고 직함을 썼으니 이 무슨 의리입니까. 왕기(汪踦)에게 상례(殤禮)를 쓰지 말라고 성인(聖人)께서는 기려 기록하였는데, ‘학생’이라고 직함을 쓴 것은 유독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어 아는 것이 없으나 구구한 한 생각으로 이를 가엾게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임인년(1722, 경종2)에 아울러 추증을 베풀어 달라는 뜻으로 낱낱이 거론하여 급히 장계를 올렸는데, 그때 비변사가 복계(覆啓)하여 동시에 위용(威勇)을 떨친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일체로 추증을 받지 못한 것은, 당시 조정의 논의가 혹 참작하여 취사하는 뜻에서 나온 듯하니 100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다 해서였습니다. 따라서 그 주장이 시행되지 않고 그 일이 결국 중지되었으니, 신은 참으로 개탄스러움과 애석함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은 참작하여 취사하였다는 말을 집어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대체로 일이 의심스럽고 공이 피차의 구별이 있어야 참작하여 취사하는 것입니다. 저 여러 신하가 순국한 절개는 이미 의심할 수 없는 일이고 또한 피차의 구별도 없으니, 신으로서는 무엇을 가지고 참작하고 무엇을 가지고 취사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시의 실제 자취를 다 고찰할 수는 없으나, 사당을 세워 제향하고 편액을 하사하여 영광스럽게 한 일이 실로 왜란을 평정하고 난 초기에 행해졌으니, 그들의 죽음이 명백히 상 줄 만하다는 것은 자취를 살피지 않고도 부절(符節)의 한쪽처럼 분명히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근거할 만한 실제 자취가 정충단(旌忠壇) 앞의 비석에 뚜렷이 실려 있습니다. 그 대략의 내용을 살펴보면 ‘진양성(晉陽城)이 함락되던 날 창의사 김천일과 양산숙 등 수십 인은 북쪽을 향해 재배하고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죽었으며, 이종인과 강희열 등 10여 인은 칼을 빼들고 왜적을 베어 죽이다 힘이 다하여 죽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이종인이 죽을 때에 왜적 2명을 겨드랑이에 끼고 강으로 뛰어들며 「김해 부사 이종인이 여기에서 죽는다.」라고 크게 고함을 질렀다.’라고 하였으니, 그 충성스럽고 장렬한 기개는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쭈뼛하게 만듭니다. 우뚝 솟은 비석이 해와 별처럼 빛나고 밝고 뚜렷하여 사람의 이목을 비추고 있으니, 사실을 기록한 비문은 속일 수 없는 법입니다.
아, 당시에 사당을 세워 함께 제향한 것이 공의(公議)에서 나왔고 중간에 비석에 새겨 꽃다운 이름을 함께 드러낸 것이 또한 실제 자취이니, 여러 신하의 뚜렷이 드러나는 심사는 천지에 통하고 고금에 이어지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조정의 의론 또한 어찌 사후의 애모와 추증을 아껴 따로 참작하여 취사했겠습니까. 저 미천한 하인이라 하더라도 참으로 상 줄 만한 일이 있으면 보답하는 도리상 분별하여 대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찌 여러 신하의 충성으로 모두 똑같은 절개를 갖추었는데, 증직하는 은전에서만 무슨 차등이 있겠습니까.
오래전의 일이라 짐작할 수는 없으나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널리 수집하고 어리석은 신의 미천한 생각을 참고한다면, 왜란을 겨우 평정한 초기에 정사가 많아 겨를이 없던 시기에 증직을 청한 도신(道臣)이 꼼꼼하게 처리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고 명을 받든 예관(禮官)이 혹 소홀히 한 폐단이 있었는데도 어영부영하며 지금까지 온 것은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 소치일 것입니다. 이 어찌 참작하여 취사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1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는 말은 더욱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참으로 뛰어나게 우뚝한 절개와 열렬한 명성이 있다면, 혹 당시에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해도 후대에서 표창하는 법입니다. 더구나 우리 성조(聖朝)에서 융숭히 장려하여 정표(旌表)하는 도리는 세월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와는 상관이 없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신이 광범위하게 인용하여 증명할 필요는 없으니 임진왜란 때 사절(死節)한 사람으로 근래 추증하고 정려(旌閭)한 사례를 들어 보이겠습니다.
충청 병사(忠淸兵使) 증 병조 판서 성응길(成應吉)과 부사과(副司果) 증 승지 이위(李瑋)는 모두 왜란 때 순절한 사람들인데, 100여 년이 지난 뒤인 8, 9년 전에야 그 자손의 호소로 특별히 추증하고 정려하는 은전을 거행하였으니, 어찌 이들에 대해서만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과연 당시에 취사를 결정하였으므로 오늘날에 가볍게 의논할 수 없어 똑같이 추증하는 은전에 대해 끝내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저 21인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혼백이 또한 황천에서 억울해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 점이 신이 마음에 격동하고 가슴에 측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유몽인(柳夢寅)이 지은 야담(野談) 1책(冊)을 훑어본 적이 있는데 ‘논개(論介)는 진주의 관기(官妓)이다. 만력(萬曆) 계사년(1593, 선조26)에 김천일이 거느리는 창의군(倡義軍)이 진주성을 거점으로 왜적과 항전하였는데 성이 함락되고 군대가 패하게 되자 백성이 다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자 논개는 곱게 단장하고 화려한 의복을 입은 채 촉석루(矗石樓) 아래 가파른 바위 앞에 서 있었으니, 그 아래는 만 길 낭떠러지로 곧장 강물 속으로 떨어지는 곳이었다. 왜군들이 논개를 보고 기뻐하였으나 모두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는데, 한 왜장이 몸을 빼 곧장 앞으로 나왔다. 논개가 웃으면서 맞이하여 마침내 그 왜장을 껴안고 곧바로 깊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저 관기는 음란한 창기인데도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고 왜적에게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으니, 그 또한 성군(聖君)의 교화를 입은 존재로서 차마 나라를 배반하고 적을 따르지 않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충성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아, 슬프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몽인은 문장으로 이름났는데, 이 이야기를 쓴 것이 자못 자세하여 신은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무릎을 치며 탄식하고 기이하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진주 병영에 도착하였을 때 촉석루 아래 남강 가에 과연 가파른 바위가 있었는데 ‘의암(義巖)’이라는 두 글자가 그 위에 크게 새겨져 있기에 신이 노인에게 물어보았더니 바로 논개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왜적을 죽인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전하는 이야기가 자못 옛 기록과 다름이 없었으니, 신은 바위를 보고 이야기를 듣자 저도 모르게 의로운 마음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아, 왜란 당시에 절개를 굽혀 자신을 판 자가 부지기수일 텐데, 어느 누가 일개 천한 기생이 사군자(士君子)도 어렵게 여기는 일을 능히 해내리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옛날에 설인고(薛仁杲)의 부하로서 당(唐)나라에 항복한 장수 방선지(旁仙地)가 다시 배반하였을 때, 왕씨(王氏) 여인이 방선지가 차고 있던 칼을 빼들어 방선지를 찔러 죽였으므로 조서를 내려 숭의부인(崇義夫人)에 봉하여 그 의로운 행동을 정표하였습니다. 저 논개가 이루어 낸 것이 어찌 왕씨보다 못하겠습니까. 아, 야기(野記) 한 편에 꽃다운 이름이 뚜렷이 실려 있고 오래된 바위 한쪽에 ‘의(義)’ 자가 희미해지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그 자취가 묻혀 유독 그 아름다운 행적을 표창하지 않으니, 이는 미천한 신이 탄식하고 애석해할 뿐만 아니라 실로 남쪽 지방의 인사들이 모두 탄식하는 것입니다.
신처럼 어리석고 미천한 자가 지위가 낮고 말이 권위가 없어 과거에 두 번이나 아뢰었지만 모두 시행되지 않았으니 더 이상 번독하게 해 드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관장하는 직무가 극히 번잡하여 군대를 어루만지고 기민(饑民)을 구휼하는 방도에도 오히려 겨를이 없으니, 참으로 이런 일은 지금 당장 급하지 않고 직분에 관계된 일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함부로 논열하는 까닭은 저 여러 신하와 한 기생이 의를 행한 뒤 원통함을 품게 되었는데도 호소하는 자손이 없어 끝내 성상께 알려지는 길이 끊어지는 것을 애처럽게 여겨서입니다. 그러므로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어 이에 감히 염치를 무릅쓰고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미천한 사람의 말이라 하여 버리지 마시고 특별히 21명의 신하들에게 증직하는 은전을 균등하게 시행하고, 관기 논개에게도 정표하는 표창을 내려 억울한 넋을 위로하여 격려하고 북돋우는 방도로 삼으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너무도 격렬하게 떨리는 간절한 마음을 견딜 길 없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당초에 구별한 것은 틀림없이 곡절이 있을 것이다. 의암(義巖)이 남아 있다 하나 야담(野談)에 기록된 것을 어찌 신뢰할 수 있겠는가. 또 100여 년 전의 일을 가볍게 거론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경이 충의(忠義)를 위해 장렬하게 희생한 사람들을 드러내 장려하고자 하는 뜻이 가상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내게 물어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주-D001] 창의군(倡義軍)이 …… 곳 : 진주(晉州)를 가리킨다. 1592년(선조25) 진주 목사(晉州牧使) 김시민(金時敏)은 민심을 다독이고 성과 못을 수축하며 무기를 정비하여 10월 5일 2만의 왜적을 맞아 3800여 명의 병력으로 6일간의 공방전 끝에 대첩(大捷)을 거두었으나 39세의 나이로 이마에 적탄을 맞아 순절(殉節)하였다. 그러나 1593년 6월 14일에 김천일(金千鎰)이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입성하자 관군과 의병이 모여들었는데, 10만에 가까운 왜적이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대공세를 감행하였다. 아군은 중과부적임에도 분전하였으나, 구원병이 이르지 않아 성이 끝내 함락되자 촉석루(矗石樓)에서 남강(南江)으로 몸을 던지기도 하고 끝까지 맞서 싸우기도 하며 모두 순사(殉死)하였다. 《宣祖實錄 25年 12月 5日, 26年 7月 16日》[주-D002] 수양(睢陽)이 …… 있었으나 : 당(唐)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연간에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장순(張巡)은 군사를 이끌고 수양성으로 가 태수(太守) 허원(許遠)과 합세하여 1년이 넘도록 성을 지키다가 적장 윤자기(尹子琦)가 거느린 10만 대군의 공격에 끝내 함락당하였다. 장순은 요은(姚誾), 남제운(南霽雲) 등과 함께 사로잡혀 곧바로 죽음을 당했고, 허원은 잡혀 낙양(洛陽)으로 압송되었다가 안경서(安慶緒)가 패주할 때 죽음을 당했다. 《舊唐書 卷187下 張廵許遠列傳》[주-D003] 왕기(汪踦)에게 …… 기록하였는데 : 왕기는 노(魯)나라의 동자(童子)인데 제(齊)나라와의 전투 중에 사망하였다. 사람들이 공자(孔子)에게 “그에게 상례(殤禮)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비록 동자이지만 무기를 가지고 사직(社稷)을 위해 싸웠으니 성인(成人)의 예로 장례를 치러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상례(殤禮)는 미성년자의 죽음에 적용하는 상례(喪禮)이다. 《禮記 檀弓下》 《春秋左氏傳 哀公10年》[주-D004] 정충단(旌忠壇) : 1593년(선조26) 진주성(晉州城) 싸움에서 끝까지 왜적에 항전하다 순절한 김천일(金千鎰) 등 28인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창렬사(彰烈祠)의 가까운 산기슭에 세운 단(壇)으로, 봄가을에 그곳에서 제사 지냈다. 《西河集 卷14 旌忠壇碑, 韓國文集叢刊 144輯》[주-D005] 유몽인(柳夢寅)이 …… 1책(冊) : 《어우야담(於于野談)》을 가리킨다. 유몽인(1559~1623)의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ㆍ간재(艮齋)ㆍ묵호자(默好子)이다. 임진왜란 중 대명 외교를 맡아 큰 활약을 하여 영양군(瀛陽君)에 봉하여졌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광해군의 복위 음모를 꾸민다는 무고를 받아 국문을 받고 사형되었다가 정조(正祖) 때 신원되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주-D006] 방선지(旁仙地) : 원문은 ‘旁地仙’인데, 《신당서(新唐書)》와 《흠정속통지(欽定續通志)》에 ‘旁仙地’라 한 것에 근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방선지의 이름은 일정하지 않은데, 《구당서(舊唐書)》에는 ‘방기지(房企地)’로 되어 있고,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방기지(旁企地)’로 되어 있다.[주-D007] 옛날에 …… 정표하였습니다 : 왕씨(王氏)는 위형(魏衡)의 처로 재주(梓州) 사람이다. 무덕(武德) 초에 방선지(旁仙地)가 양군(梁郡)을 침략하여 왕씨를 사로잡아 억지로 자기의 처로 삼았다. 후에 방선지가 군대를 거느리고 양주(梁州)로 향하던 중 술에 취하여 누워 있자 왕씨가 방선지의 목을 베어 양주성으로 들어가니, 고조(高祖)가 기뻐하며 숭의부인(崇義夫人)에 봉하였다. 《舊唐書 卷193 列女傳》
ⓒ 한국고전번역원 | 허선휴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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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군(倡義軍)이 …… 곳 : 진주(晉州)를 가리킨다. ->창의군(倡義軍)이 …… 곳 :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 입성한 창의사(倡義使) 김천일의 의병 군대를 가리킨다.
*"김천일이 거느리는 창의군(倡義軍)이 진주성을 거점으로 왜적과 항전하였는데"
본문에 김천일이 거느리는 창의군(倡義軍)이라고 명기한 것이 있는데 왜 딴 소리를 주석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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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821책 (탈초본 45책) 영조 12년 3월 11일 을사 31/36 기사 1736년 乾隆(淸/高宗) 1년
○ 獻納金廷潤疏曰, 伏以臣踪地, 決難復玷於臺端, 連値動駕, 慶禮且迫, 不敢以區區情勢爲辭。黽勉出肅, 以爲挨過冊禮之計, 而昨日陪班罷歸之後, 宿患邊頭之痛, 挾感復發, 達夜叫痛, 滿面浮高, 小若觸風, 則症勢輒加, 以此病狀, 旬月之內, 萬無起動供仕之望。玆敢疾聲呼籲於天地父母之前, 伏乞聖慈, 特許鐫遞, 俾尋生路, 千萬幸甚。臣於乞免之章, 不宜贅及他說, 而適有一二所懷, 敢此略陳焉。臣待罪嶺幕時, 伏承東萊·南海·晉州等地, 壬辰死節諸臣致祭之命, 馳進該邑, 次第擧行。此乃曠世稀有之盛典也。邊裔士民, 莫不聳動, 而第其享禮贈職, 多有闕章。贈判書臣宋象賢及贈贊成臣鄭撥, 立祠內外之別, 贈職高下之殊, 道臣旣已狀聞。方有令該曹, 稟處之命, 臣不必復陳。而至於晉州之忠愍·彰烈兩祠, 則贈議政臣金時敏·贈贊成臣金千鎰·贈贊成臣黃進·贈參贊臣崔慶會·贈判書臣張潤·贈承旨臣梁山璹·贈參議臣金象乾·贈主簿臣兪晗七人外, 其餘諸臣則俱未蒙褒贈之典。臣未知當初朝家處分之如何, 而其中或有曾經守令者, 或有曾經內職者, 或有無官職者, 而一片孤城, 同時立殣。其所樹立, 如彼卓爾, 列聖之崇報無憾, 邦人之尊奉靡懈, 一體俎豆, 以彰義烈, 則獨於贈職一款, 何可異同乎? 臣意則竝皆褒贈, 以施一視揭厲之恩, 則不但忠魂義魄, 感泣於九泉之下, 亦可爲用樹風聲之一道。宜令該曹, 竝與東萊事而稟處也。且於嶺南田政, 亦有所慨然者, 一自改量之後, 沿江諸郡, 蘆荻成林之地, 近峽陳田, 蓬蒿成藪之處, 皆入於實摠之中。故都事敬差覆審之時, 雖知其冤狀, 拘於朝令, 無以擅自變通, 俱未免白地徵稅之歸, 哀我生民, 將何保存乎? 洛江荒蕪之處, 則道臣前已狀聞而得請, 今方査實變通, 嶺民無不欣聳, 庶幾有更蘇之望, 而至於南江一帶, 被災陳棄, 與洛江無異, 而未及擧論於狀聞之中。故獨未霑均施之澤, 無告生民, 亦豈無向隅之歎乎? 朝家方以白骨徵布, 爲切急之憂, 而此等陳廢之處, 一竝徵稅, 則民之難保, 呼冤甚於白骨徵布, 亦豈非大可矜念處乎? 臣於今番覆審往來之時, 目見其慘然之狀, 心甚愍惻。玆敢附陳, 亦令道臣, 與洛江一體査減, 以紓嶺民白徵之弊焉。近來稅船致敗, 實爲痼弊, 至於嶺南, 昨年而極矣。此蓋有由, 年凶則米價甚貴, 京江船人輩, 利其船價, 圖受備局·惠廳帖文, 而爭先下去, 趁時裝載, 故得免臭載之患矣。數年以來, 年事稍稔, 米價至賤, 在渠無利, 故京船絶不下去, 各邑艱得地土船。節晩裝發, 所謂地土船, 不但器械之堅固, 不如京船, 沙格輩, 皆是其土之人。故與監色輩, 潛自符同, 裝載之後, 多數偸竊, 及至中路, 故爲致敗者居多云。臣巡行列邑時, 詳探物情, 則果如所聞, 事之寒心, 莫此爲甚。而近聞諸道各邑敗船之類, 一竝歸之於大洋, 致敗絶無, 依法處斷者, 果是大洋致敗, 則監色沙格輩, 豈有生出之理? 而所沈穀物, 亦安得拯出乎? 此則故敗丁寧, 而一任緩治, 滋其奸萌, 則其流之弊, 無以防塞。宜令該廳, 完固船隻, 趁早定送, 而故敗之類, 一一摘發, 施以梟示之律, 則庶可爲懲勵之道矣。臣經年嶺外守令之治否, 無不目睹而耳聞, 撮其中大妨於政, 大害於民者而論之。柒谷府使李震煥, 劫婚官吏, 貽笑道內。鎭海縣監高處亮之不戢官屬, 作挐民間。新寧縣監金相寧之寺奴推刷, 受賂操縱, 俱極可該[駭]。此三邑守令, 決不可仍置字牧之任, 竝宜譴罷其職也。槐院之選, 乃是新進初程也。其中若有濫竽者, 則臺臣之指名請汰, 未爲不可。而向者憲臣所論七人中, 柳觀鉉·柳正源兩人, 俱是嶺南望族, 爲人文翰, 允合是選。韓德孚則自是京華世族, 渠之族黨, 曾無見枳於槐選者, 則公議可見, 而一例請汰, 此必憲臣未及詳聞, 而有此論劾也。臣愚以爲, 宜卽收還刊汰之命也。臣之情勢, 不可以臺官自處, 而往來嶺南, 旣有所聞, 不避煩猥, 仰瀆宸嚴, 惟願聖明, 竝加照察焉。臣無任云云。答曰, 省疏具悉。所陳事俱皆處分, 而守令事竝依施, 其勿辭速察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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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2년 병진(1736)3월 11일(을사) 맑음
12-03-11[30] 병세를 이유로 면직을 청하며 향례와 증직에 인물이 누락된 문제와 영남의 전정에 대한 소회를 아뢰는 헌납 김정윤의 상소
헌납 김정윤(金廷潤)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의 처지로는 결코 사헌부의 말단을 다시 맡기 어려웠지만, 연이어 동가(動駕)하는 때를 맞은 데다 경사스러운 예식 또한 임박하였기에 감히 구구한 정세를 이유로 사직할 수 없어 마지못해 나와 숙배하고 그럭저럭 책례(冊禮)를 치룰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배종하는 반열이 파하여 돌아간 뒤 묵은 병인 편두통이 감기를 틈타 다시 발작하는 바람에 밤새 고통에 울부짖었고 얼굴이 온통 부어올랐습니다. 조금만 바람을 쐬면 증세가 심해지니, 이런 병세로는 가까운 시일 내에 일어나 공무를 수행할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이에 감히 천지 부모와 같은 성상께 다급한 목소리로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특별히 체차를 허락하여 신이 살 길을 찾도록 해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면직을 구하는 소장에서 쓸데없이 다른 말을 언급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마침 한두 가지 소회가 있기에 감히 이렇게 간략히 아룁니다. 신은 경상 도사(慶尙都事)로 근무할 때 삼가 동래(東萊), 남해(南海), 진주(晉州) 등지에서 임진년(1592, 선조25)에 목숨을 바쳐 절의를 지킨 신하들을 치제(致祭)하라는 명을 받들고 해당 고을로 치달려 나아가 차례로 제사를 거행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세상에 드문 성대한 은전이었으므로 변방의 사민(士民)들 치고 고무되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다만 향례(享禮)와 증직(贈職)에 있어서는 빠트린 전례(典禮)가 많았습니다. 증(贈) 판서 송상현(宋象賢)과 증 찬성 정발(鄭撥)에 대해서는, 동래부(東萊府)의 안팎에 사우(祠宇)를 구별하여 세운 일과 추증한 관직의 고하에 차이가 나는 점을 도신이 이미 장계로 보고하여 현재 해당 조로 하여금 상께 여쭈어 처리하게 하라는 명을 내렸으므로 신이 다시 아뢸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와 창렬사(彰烈祠) 두 사당의 경우는, 증 의정 김시민(金時敏), 증 찬성 김천일(金千鎰), 증 찬성 황진(黃進), 증 참찬 최경회(崔慶會), 증 판서 장윤(張潤), 증 승지 양산숙(梁山璹), 증 참의 김상건(金象乾), 증 주부 유함(兪晗) 등 7인을 제외한 나머지 신하들은 모두 포상하여 추증하는 은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당초 조정의 처분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가운데에는 수령을 지낸 자도 있고 내직(內職)을 거친 자도 있으며 관직이 없는 자도 있지만 모두가 고립된 작은 성에서 절의를 지키다 동시에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룩한 바가 저렇게 탁월하기에 열성(列聖)께서 숭상하여 보답함에 유감이 없었고 나라 사람들이 높여 받드는 데 나태하지 않아 일체 제사를 지내어 그 의열(義烈)을 드러냈으니, 어찌 유독 증직하는 부분에 있어서만 차이를 둘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이들 모두를 포상하여 추증함으로써 만백성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드높여 격려하는 은혜를 보인다면, 충성스럽고 의로운 혼백들이 구천(九泉)에서 감읍할 뿐만 아니라 또한 올바른 기풍을 수립하는 하나의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해당 조로 하여금 동래의 일까지 아울러 상께 여쭈어 처리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은 영남의 전정(田政)에 대해서도 개탄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다시 양전(量田)을 실시한 뒤로 강 연안 여러 고을의 갈대가 숲을 이룬 곳과, 산골짜기 근처 진전(陳田)의 쑥대가 덤불을 이룬 곳이 모두 실총(實摠)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 까닭에 도사와 경차관(敬差官)이 복심(覆審)할 때 그 억울할 실상을 알고는 있었지만 조정의 명령에 구애되어 마음대로 변통할 수 없었으므로 모두 백지징세(白地徵稅)로 귀결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슬픈 우리 백성들은 장차 어떻게 보전하겠습니까. 낙동강(洛東江)의 황폐해진 곳은 도신이 전에 이미 장계로 보고하여 소청을 허락받고 지금 한창 사실을 조사해 변통하는 중이므로 영남 백성들 치고 뛸 듯이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고 다시 소생할 가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강(南江) 일대의 경우는 재해를 입고 묵혀져 버려진 곳이 낙동강과 다를 바 없는데도 장계로 보고할 때 미처 거론되지 못하였기에 유독 고루 베풀어 주시는 은택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하소연할 곳 없는 백성들이 또한 어찌 자신만 소외되었다는 탄식이 없겠습니까. 조정에서 지금 백골징포를 절박한 근심거리로 여기고 있지만, 이런 묵혀져 버려진 곳에까지 아울러 세를 거둔다면 백성들이 삶을 보전하기 어려워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백골징포보다 심할 것이니, 또한 어찌 크게 불쌍히 여길 만한 점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이번에 복심하러 왕래할 때 그 참혹한 실상을 두 눈으로 보고 매우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에 감히 덧붙여 아뢰니, 또한 도신으로 하여금 낙동강과 함께 일체 조사하게 하여 세를 감해 주어 영남 백성에 대한 백지징세의 폐단을 없애 주소서.
근래 세선(稅船)이 치패(致敗)하는 일이 실로 고질적인 폐단인데, 영남의 경우 작년에 극에 달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이유가 있습니다. 흉년이 들면 쌀값이 매우 귀해져 경강(京江)의 뱃사람들이 그 선가(船價)를 이롭게 여겨 비국이나 선혜청의 첩문(帖文)을 도모하여 받아내서는 앞다투어 내려가 제때에 쌀을 선적하기 때문에 취재(臭載)할 염려를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년 이래로 농사가 다소 풍년이 들어 쌀값이 아주 헐해졌으므로 저들에게는 이익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경강의 배는 절대로 내려가지 않아 각 고을에서 어렵사리 지토선(地土船)을 얻어서 절기에 늦게 쌀을 싣고 출발합니다. 이른바 지토선은 기계의 견고함이 경선만 못할 뿐만 아니라 사공(沙工)과 격군(格軍)들이 모두 그 지역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감관, 색리들과 몰래 한통속이 되어 쌀을 선적하고 난 뒤 많은 양을 훔쳐 내고 중간쯤에 이르러 일부러 치패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신이 여러 고을을 순행할 때 물정을 자세히 탐지하였더니 과연 들은 바와 같았으니, 이보다 더 한심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근래 듣건대, 여러 도의 각 고을에서 치패한 부류를 모두 큰 바다에서 치패한 것으로 돌려 버리고 전혀 법대로 처단한 경우가 없다고 합니다. 과연 큰 바다에서 치패하였다면 감관과 색리, 사공과 격군들이 어찌 살아서 나올 리가 있겠으며, 가라앉은 곡물 또한 어찌 건져낼 수 있겠습니까. 이는 일부러 치패시킨 것이 명백한데도, 줄곧 느슨하게 다스리도록 내버려 두어 그 간사한 싹을 조장한다면 그 유폐(流弊)는 막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해당 청으로 하여금 선박을 온전하고 견고하게 한 뒤 일찍 정하여 보내게 하되, 일부러 치패시킨 부류는 일일이 적발하여 효시의 형률을 적용한다면 징계하여 면려하는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한 해를 넘기면서 영외(嶺外) 수령의 치적 여부에 대해 눈으로 보고 귀로 듣지 않음이 없었는데, 그중 정사에 크게 방해가 되고 백성에게 크게 해가 되는 것을 추려서 논해 보겠습니다. 칠곡 부사(柒谷府使) 이진환(李震煥)은 관리의 처를 겁탈한 뒤 혼인하여 도내 사람의 비웃음을 샀고, 진해 현감(鎭海縣監) 고처량(高處亮)은 관속(官屬)을 단속하지 않아 민간에 소란을 피우게 하였으며, 신녕 현감(新寧縣監) 김상녕(金相寧)은 시노(寺奴)를 추쇄할 때 뇌물을 받고 조종하였으니, 모두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이 세 고을의 수령은 결코 목민관의 직임에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니 모두 책임을 물어 파직해야 합니다.
승문원에 선발되는 것은 바로 신진(新進)이 벼슬길에 나서는 첫 관문으로, 그중 만약 분에 넘치는 자가 있으면 대신(臺臣)이 지명하여 태거(汰去)하기를 청하는 것은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대신이 논핵한 7인 가운데, 유관현(柳觀鉉)과 유정원(柳正源) 두 사람은 모두 영남의 명망 있는 집안으로 사람됨이 글재주가 있어 참으로 이 선발에 합당하고, 또 한덕부(韓德孚)는 원래 서울의 대대로 벼슬한 집안으로 그의 족당(族黨)이 일찍이 승문원의 선발에 저지를 당한 적이 없는 데서 공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률적으로 태거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분명 헌신이 미처 자세히 듣지 못하여 이런 논핵을 하였을 것입니다. 신은 간태(刊汰)하라는 명을 거두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정세로 보아 대관(臺官)으로 자처할 수 없지만 영남을 왕래하며 들은 바가 있기에 번거롭고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지엄한 성상을 번거롭게 해 드립니다. 오직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모두 살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아뢴 일은 모두 처분하겠다. 수령의 일은 모두 아뢴 대로 하라.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속히 직임을 살피라.”
하였다.
[주-D001] 모두 …… 일입니다 : 원문은 ‘俱極可該’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該’를 ‘駭’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형도 (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