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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숙 시인과의 인터뷰-권영옥 문학평론가. 시인
고요와 열정, 그 완성에 이르는 길
한 시인이 있다. 허공과 적요가 주는 절묘한 뉘앙스처럼 그녀의 시나 삶은 이 단어와 절묘하게 닮아있다. 그녀는 큰소리를 내는 법이 없다. 조용히 미소 짓고, 조용히 말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시를 발아시킨다. 그러나 그 작은 움직임 속에는 그녀만의 향기를 내뿜는 열정과 욕망이 들어있다. 어떤 때는 나뭇가지에 앉은 새처럼 화르르 깃을 털다가도 또 어떤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이런 움직임은 그녀만의 문학적 가치를 생산하는 시쓰기의 추동이고, 시의 개성이며, 존재의 유일한 원리를 밝히는 시의 길이다. 이처럼 그녀는 제 홀로 떠났다가 투명한 언어를 건져서 시 위에 올려놓는다. 이런 그녀의 시를 필자는 고요와 열정이 녹여낸 완성의 길이라고 말한다. 『창』 이번 호에는 열정과 적요의 시인, 강정숙 선생님을 만나 뵈었다.
권영옥 문학평론가: 강정숙 선생님 안녕하세요. 성남문예비평지 『창』의 권영옥 편집위원입니 다. 선생님이 사시는 일산이라서 그런지 도시 미관이 쾌적하고 평온하게 보여요. 선생님 『창』 독자들께 인사 부탁드려요.
강정숙 시인: ‘창’ 독자님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권영옥: 선생님 시집과 시조집을 낸 지 꽤 세월이 흘렀지요? 시집과 시조집을 그때 읽고 지금 또 읽지만 읽을 때마다 마음에 작은 파문이 입니다. 『천개의 귀』는 강 선생님 개인의 성찰과 반성을 위한 시조이고, 더 나아가 독자들이 읽고 반성해야 할 시조집인 것 같아요. 선생님에게서 시는 무엇일까요? 덧붙여 선생님께서 시조나 시를 쓰게 된 동기가 있을까요?
강정숙 시인: 제게 시란 불행하면서 행복한 작업이며, 삶의 의미이자, 의무 같은 것이지요. 시가 내게로 와주지 않았으면 어찌 살았을까 싶기도 하고, 시가 내게로 와주었으니 나는 시를 죽도록 섬겨야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죠. 어릴 때부터 문학에 심취해서 고전을 많이 읽었어요. 그래서인지 웅변대회 나가는 친구 원고 작성도 해주고, 연애편지 대필도 해주곤 했는데 그 행위가 너무 즐거웠어요 (웃음) 오랜 세월 잊고 살다가 시 강의를 들으러 다녔고, 백일장 같은데 응모하면 꼭 상을 타는 거예요. 행복했죠. 그렇게 동기부여가 된 게죠
권영옥: 선생님의 시를 읽노라면 주부로서의 삶이 진하게 배어있는 소재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물두멍」, 「이불한 채」, 「우수 무렵」, 「청무잎 당신」인데 이 시 속에는 엄마, 며느리, 아내, 즉 여인으로서의 애환과 욕망이 들어 있습니다. 이를 하나의 글로 집약한다면 ‘내 안의 깊은 오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선생님이 생각하는 그 깊은 오지란 무엇이며, 그 오지에 어떤 욕망이 숨어 있을까요?
강정숙: 가사에만 몰두하다 늦은 나이에 등단했으니 나름 일상적 제약이 많았습니다. 시는 혼자 쓰는 것이지만 시를 얻기까지는 부단한 노력이 따라야 하잖아요. 주변의 이해와 응원도 필요하고요. 그런 것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 가슴 속엔 늘 그늘과 생채기가 생겨요. 그것이 마음의 오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오지와 그늘이 시의 자양분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권영옥: 선생님은 시조를 쓸 때와 시를 쓸 때 장르가 약간씩 다르기에 구상하는 방법도 차이가 날 것 같습니다. 시를 쓸 때와 시조를 쓸 때의 구상 방법이 어떻게 다른지 좀 알려주세요.
강정숙: 자유시를 쓸 때는 시적 영감이 떠오르면 앉은 자리에서 시작과 끝을 봅니다. 시조는 전혀 그렇지 못해요. 한 음보를 찾기 위해 며칠을 헤매기도 하지요. 개인적으로 시조가 훨씬 어렵습니다.
권영옥: 코로나 시대에 선생님의 작품 근황에 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강정숙: 외부와의 단절이 자연스레 내적인 침잠을 가져올 수밖에요 역설적으로 글쓰기 좋은 환경일 수도 있죠. 그런데 불안과 답답함이 오히려 글쓰기를 방해했어요. 얼마 전에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코로나19 예술로 기록’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각기 다른 상황의 현장 시를 쓰면서 코로나가 사람의 몸과 마음에 끼친 영향력을 절감했습니다.
권영옥: 선생님의 작품 소재를 살펴보면, 대체로 불교적 상상력이 많이 가미되어 불교적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선생님께서 불교를 신앙으로 하기보다는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불교적 깨달음과 명상을 통해 시의식이 불교적 색채로 변했다고 봅니다. 그 불교적 색채가 곧 타자와 사물을 향한 대자대비의 자비심과 인간애로 나타난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시에 임할 때 불교적 사유에 대해서 고민하시는지요?
강정숙: 어릴 때 할머니 따라 절에 다녔습니다. 윤회를 강력하게 믿었지요. (웃음) 그러다보니 불교적 사유가 내재화되었고요. 특별히 의도해서 쓰진 않았습니다만 자기 성찰과 이타심 없이는 시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글처럼 살지는 못합니다. (웃음)
권영옥:(웃음) 선생님 문학인이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요. 참, 시조집 『천개의 귀』와 시집 『환한 봄날의 장례식』을 통해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선생님만의 주제랄까, 이야기랄까, 그런 것이 있으면 한 말씀 부탁드려요.
강정숙: 첫 시집이 『환한 봄날의 장례식』인데요. 죽음이 어둡고 슬픈 것만이 아닌, 밝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나름의 철학을 내보인 거고요. 시조집 『천개의 귀』는 관념화를 떨쳐낸 일상적 언어가 얼마나 아름다운 가락이 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권영옥: 와, 선생님 너무나 멋있는 말씀입니다. “일상적인 언어가 얼마나 아름다운 가락이 될 수 있는지”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선생님께서는 국어 사랑이 절절해서 저도 아주 공감하게 됩니다. 선생님은 신춘문예 중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시조부문에서 「흔들의자」로 상을 타셨습니다. 오래되어 생각이 잘 안 나는 부분도 있겠지만, 선생님께서 그 상을 타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요. 아니면 후배 시인들을 위해 조언도 괜찮으시고요.
강정숙: 그전엔 신춘문예였다가 2000년 이후에는 신인문학상으로 타이틀이 바뀌었어요. 매월 입상자를 뽑고 그 입상자들이 년 말 장원에 응모하는 시스템이죠. 월 장원에 뽑힌 제 시조 3수 종장에 쓴 ‘먼저와 엎드린 고요’라는 구절이 절창이라는 칭찬을 해주셨는데요. 그때 심사평 해주신 선생님의 말씀이 저를 시조시인으로 이끈 것 같습니다. ‘흔들의자’는 년 말 장원 작품입니다. 실제 모델인 ‘흔들의자’는 지금도 제 옆에 잘 있습니다. 제 경우 시조는 상상력만으론 직조되지 않습니다. 직⸱간접의 경험에 의한 체화가 따라야 하는데요. 그래야 공허함이 덜해요. 이 어려운 작업을 잘 해내는 후배들에게 조언이 아니라 위로해드리고 싶어요.(웃음)
권영옥: 강정숙 선생님의 『환한 봄날의 장례식』은 시집 제목이고, 시 제목이기도 하지요. 이 시에 대한 시평을 해보겠습니다.
장제지 건너편의
주유소 음악소리 쾅쾅대며 흩어진다
갈색머리 붉은 유니폼의 여자아이는
까딱까딱 발장단 맞춘다
옆구리가 샌드백처럼 흔들린다
기름 묻은 목장갑을 또르르 말아쥐고
세차장 물보라 속에 뛰어든다
물방울 터지고
일곱 빛깔 소리가 튀어오르고
가로수 꽃잎 쏟아져내리고
버스정류장 철제의자에 앉아 있는
모녀의 목덜미가
희고도 붉다 그리하여
잠시 한순간의 풍경에
가벼워져가는데
대낮 네거리에
전조등을 밝히며 건너오는 영구차
차창에 내걸린 슬픔들이
흰 망울처럼 벌어진다
조등弔燈 없이도 환한 봄날이다
- 「환한 봄날의 장례식」 전문
시인은 대상의 경쾌한 소리와 이미지를 보고 봄의 상상력을 촉발하게 된다. 예컨대 봄은 “주유소의 음악 소리의 흩어짐”과 “까딱까딱 발장단 맞추는” 행위, “옆구리가 샌드백처럼 흔들리는” 여자아이의 경쾌한 이미지와 흡사하다. 이 시행은 감정선보다는 대상 자체의 이미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 1.2연에서는 화자의 감정이나 정서를 배제하고, 갈색머리 여자아이의 이미지만 부상하게 된다. 돌려 말하면, 시인은 이야기의 내용보다 이미지의 주체인 대상의 행위에 중점을 둔 객관적 사물 묘사 시점으로 여자아이를 본 것이다. 2연에서 시인은 “또르르”, “물보라”, “물방울”, “일곱 빛깔 소리”, “꽃잎의 쏟아져 내리는” 더 많은 소리와 이미지로 환한 봄날의 상상력을 밀어 올린다.
3연에 오면 이미지는 상상력의 추동 속에서 죽음 이후 탄생이라는 인간 원형 이미지로 변화 양상을 보인다. 통상적으로 인간에게서 죽음은 슬픔과 연결된다. 그런데 시인은 죽음을 슬픔과 연결하지 않고, 환한 봄날로 전화해 버린다. “영구차의 차창에 내걸린 슬픔” 까지도 “흰 망울처럼 벌어져” 환하다고 하는 시행이 그것이다. 시인은 한 인간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죽음 이후 탄생이라는 이승과 저승의 계를 수레바퀴, 즉 하나의 윤회사상으로 보고 있다. 그 점에서 시인은 불교적 세계관에 천착해서 시를 썼다고 할 수 있는데, 결국 이 시의 이미지는 슬픔보다, 죽음 이후 ‘탄생’을 말한다는 점에서 창조성이 이끄는 재현이다. 강정숙 시인의 이와 같은 사상은 이후에 발간된 『천개의 귀』에서 불교적 색채를 드리우며 독자들에게 인드라망의 인과적 관계인 자비의 윤리를 보여주고 있다.
권영옥: 저는 선생님의 『환한 봄날의 장례식』을 몇 번 읽었어요. 시의 내용과 독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잔잔하면서도 윤회적인 내용, 경쾌한 이미지 속에서 드러나는 생의 욕망, 상상력이 주는 환기성, 이것이 선생님의 시를 가장 시답게 해주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요. 이 부분이 실제 현대시가 추구하는 면이기도 하지요. 이 외에도 선생님의 시 속에는 구체적인 이야기시도 적잖게 있습니다. 1930년대 백석 시인이나 1960년대 고은 시인처럼 담백한 남성 스타일의 시를 구사하는 게 아니고, 실생활의 경험에서 오는 여성 스타일의 조곤조곤한 이야기시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이야기시를 쓰게 된 동기가 재미있을 것 같아요.
강정숙: 제가 사는 곳이 경기도 변방인데, 가까운 곳에 시립 승화원이 있어요. 버스를 타면 그곳을 지나가게 되는데, 이런저런 장례 풍경을 목도하게 되어요. 시의 모티브는 거기에서 얻었지만 그 외의 장치는 추론과 사유의 산물이고요. 밝은 쪽에 서 있는 삶의 풍경과 어둠과 슬픔 쪽에서 다가오는 죽음의 풍경을 한 액자 속에 담아보고 싶었고요.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볍게 다뤄보고 싶었어요
권영옥: 2000년대 이후 한국 현대 시인들의 시의 특징을 보면 개인적인 시 형식을 구사하면서 언어 파괴적이고, 맥락 파괴적인 면이 있습니다. <미래파> 이후 언어실험을 하는 시인들의 시의 특징을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강정숙: 언어는 소통을 전제하고 특히 시는 소통하고 공감하고 감동하는 언어잖아요. 소통이 안 되면 감동도 없죠. 다만 정체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봐야 되겠지요. 요새 젊은 후배 시인들의 놀랍도록 장대한 언어 부림은 분명 부러운 부분입니다. 자유시의 경우지만 길이가 몇 페이지씩 넘어가면 읽는데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권영옥: 선생님은 시에서 여성문제를 겉으로 표출하지 않고, 살아온 삶에 비추어 암시적으로 거론하면서 고민하고 있는데요. 21세기 여성 문학인으로서 여성문제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강정숙: 격세지감이랄까요. 이삼십 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여성의 사회적 위상이 굉장히 높아진 게 사실이잖아요. 그래도 개인의 삶에서 여성의 위치는 제약이 많지요. 힘듦 속에서도 꿋꿋이 발전해나가는 젊은 세대들이 대견하고요 앞으로 더 지혜롭게 헤쳐 나가길 바랄 뿐이죠
권영옥: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선생님이 20년 넘게 시를 쓰면서 한국 시 문단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가령, 시인들의 처우개선이라든가, 출판과 문학지의 문제라든가,
강정숙: 지금을 종이책의 위기라고 말하지요. 거의 모든 시인이 자비 출판 형식으로 시집 출간을 하고 있잖아요. 피가 맺히도록 글 쓰고 내 돈으로 책 내고…… 이 길로 들어선 자의 어쩔 수 없는 자기 들볶음인데, 제도적 뒷받침이 좀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최근엔 많이 좋아졌어요. 예술인복지재단 같은 곳에서 문인들을 돕고자 애쓰고 있는 듯해요. 앞으로 더 많은 배려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과 12시에 만나서 나누기 시작한 인터뷰가 어느덧 세 시간을 훌쩍 넘겼다. 사람에게서 향기가 난다는 건 어쩌면 편안하고, 따뜻한 마음결과 그 반대편에 놓인 매의 눈 같은 날카로움이 있어서가 아닐까. 강정숙 선생님과 함께 있으면 자리에서 일어나기 싫고, 또 뭔가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내게서 그런 마음이 샘솟는다는 것은 선생님의 마음이 타인을 위해 열려 있고, 끝없이 배려하고 있다는 뜻일 게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내 마음이 계속 선생님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녀는 세상 보는 눈빛이 따뜻하고, 어질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수처럼 예리하고 날카로운 비판력을 지니고 있다. 이점이 강정숙 시인의 매력이라면 큰 매력일 것이다. 일산 호수공원의 풍경들이 신선하고 싱그럽게 보이는 오늘, 선생님과 나는 미루나무 숲속에 서 있는 것처럼 깊은 정담을 오래도록 나누었다. 떠나기 싫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우리는 서로에게 악수를 권하고는 헤어졌다. 하늘 아래 떠다니는 공기마다 초록색으로 보인다.
- 『창』인터뷰 권영옥 편집장
강정숙 시인 약력:
경남 함안 출생, 2002 <중앙일보>중앙신인문학상 수상
2009 수주문학상 수상, 시집 『환한 봄날의 장례식』, 『천개의 귀』,
<공정한 시인의 사회> 편집위원
첫댓글 타인의 모자라는 글을 아름답게 보듬어 주시는 권영옥 평론가님께 거듭 감사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요.
너무 겸손한 말씀을 하시네요. 카페장님 온 한해 건강하시고 문운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두 분의 멋진 인터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