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 / 변해명
‘젊었을 때 여행을 하지 않으면 늙어서 이야깃거리가 없다.’는 말이 있다. 여행은 미지를 향해 새롭게 열리는 낯선 세계를 향하고 있어서 육상에서만 움직이던 사람이 수영선수처럼 바다를 헤엄쳐 나가는 것만큼이나 두렵고 신비하고 호기심에 쌓이는 매력을 지닌다. 그래서 같은 여행지를 다녀와도 여행자에 따라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의 견문이지만 기억 속에 많은 이야깃거리가 남게 되어 남들과 즐겨 말하는 대화거리가 되는지 모른다.
여행은 집을 떠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자유가 있다. 낯선 곳을 향한 나그네가 되어 방랑길에 올라보는 기분, 새로운 세계와 만나고 새로운 친구와 만나고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새롭게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완전한 자유와 낭만이 있다. 낯 선 곳에 가서 낯 선 사람들과 부닥치고 낯선 언어 속에서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소외감을 느낄 때 막연한 공포심에 사로잡혀 도망치고 싶은 두려움에 휩싸일 때도 있지만 다른 세상의 사람들과의 만남이 또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본질이 우리와 같음을 공감하게 될 때 아름다운 세상과 만나게 되고 가슴 설렘과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하게 된다. 그 나라의 자연경관, 문화, 전통, 역사며 예술을 접할 때 세상이 얼마나 넓고 아름다운가를 그리고 여행이 얼마나 유익한가를 배우게 된다. 그래서 여행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 같다. 여권과 여행수첩, 비상금, 비상약, 그리고 여행지의 간단한 책자, 관광일 경우는 여행사에서 만들어준 판 프렛을 먼저 챙긴다. 카메라와 여행 중에 읽을 문고판 책 한 권도 챙긴다. 또 그곳 주민들과 교류가 필요한 볼펜이나 양말, 등을 챙긴다. 옷은 가는 곳의 기후와 여행 성격에 따라 최소한으로 싼다. 상의, 하의, 때와 장소에 따라 구별해서 입어야 할 옷을 정하고 나면 내 스스로 이번 여행에서 내 위치가 어떠한가, 한국인의 자존심 외국에 나가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를 생각한다. 호텔에서 입을 정장 한 벌, 산행이면 가벼운 덧옷 한 벌, 우비 등 대체적으로 활동적이고 부담이 없는 옷으로 준비한다. 짐은 가벼울수록 좋다. 길을 떠나려거든 눈썹도 빼어놓고 가라는 말을 거울삼아 간단하게 싸려고 애를 쓴다. 매일 갈아입는 내복이나 양말 등은 낡은 것으로 싼다. 여행지에서 버리는 것으로 짐을 줄인다. 현지에서 옷을 새로 살 것을 염두에 두고 짐의 무게를 조정하려는 것이다. 스카프나 액세서리는 같은 옷을 입어도 연출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니 옷을 가져가기보다 그것으로 대신한다. 옷은 반듯이 입어보고 맞추어서 넣는다. 옷을 쌀 때 옷을 구기지 않고 꺼내고 넣기 편하게 한 벌씩 돌돌 말아 넣는다.
여행 가방은 여행 기간 동안 객지에서 불편 없이 살아야 하는 생활의 축소판이다. 그래서 부족한 것이 없도록 불편하지 않도록 최소한으로 작은 가방 속에 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내 여행 중 불편함이 없음은 물론 일행을 배려하는 작은 마음도 담아가지고 가야 한다. 여행 가방은 그들에게조차 짐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부닥치게 되는 것은 함께 떠난 사람들 속의 일원으로 함께 행동하고 룸메이트와 마음이 맞아야 즐거울 수 있다.
80년대 초 여행지에서의 일이다. 일행 중 한 여인이 미친 여자라는 소문이 돌고 누구도 그와 룸메이트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샤워도 할 줄 모르고 밤새도록 자지 않고 짐을 풀렀다쌌다를 반복한다며 모두가 싫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그래 보이지 않아서 딱하게 된 그녀와 룸메이트를 하기로 했다. 그 시절에 하기 드문 긴 생머리가 어깨를 덮고 옷은 파티복 같은 옷을 입었다. 그의 여행 가방은 위의 지퍼가 달린 큰 가방이었다. 그녀는 외국여행이 처음인 듯 욕조에 물을 받아 욕조 밖에서 그 물을 퍼서 머리를 감고 사워를 했다. 그 물이 방안의 카펫까지 적셨다. 사방이 머리카락이었다. 나는 그녀를 욕실로 데려가 외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법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수건으로 바닥의 물을 전부 닦게 했다. 그녀는 잠자리에 들자 수시로 일어나 짐을 쏟고 다시 싸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가방은 뚜껑을 열면 옷이 양편에 담겨 금방 찾을 수 있는 요즘 여행 가방이 아니라 이민가방과 같은 것이어서 내일 입을 옷을 미리 꺼내놓으려면 밑에 들어있다면 담긴 짐을 전부 쏟아야 하는 가방이었다. 그런데 내일 입을 옷을 골랐으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꺼내야 하니 또 쏟아놓고 싸고 다시 쏟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젊고 아름답고 싶은 그녀는 그래서 밤새 짐을 풀고 쌌던 것인데 그녀는 짐을 쌀 줄도 몰라 장롱에 옷을 넣듯 담는 것이었다. 옷을 하나씩 돌돌 말아 넣고 꺼내기가 편한 정돈을 했다면 그런 수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나와 한방을 쓰면서 많이 변했고 호텔 규정도 잘 지키고 아름답고 얌전한 여행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녀는 그 후 여행을 했다면 다시는 그런 가방을 들고 그런 옷차림으로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행은 언제 어느 곳을 가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그 나라의 특산물을 하나씩 사다 놓으면 그것들을 통해 여행의 즐거움을 다시 음미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사진을 많이 찍어오면 그날의 기억들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여행을 떠날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