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초피산(椒皮山, 253m)
초피산은 마니산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솟아있는 해발 253m의 나지막한 산이다. 그런데 정상부는 경사가 급해 가파르기가 높은 산 못지않다. 산 아래서 바라본 뾰족한 부분은 험상궂은 바위로 정상을 이루고 있다. 정상에는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돌탑이 있다.
"화살촉 같은 초피산, 생각보단 만만찮네!"
오마이뉴스 기사 입력일 : 2007. 9. 30.
오마이뉴스 전갑남 기자
옆집 아저씨는 산행을 참 좋아한다. 일주일에 두세 차례는 배낭을 꾸린다. 그렇다고 멀리 유명한 산을 찾아 나서는 것도 아니다. 우리 동네 가까이 있는 마니산을 주로 찾는다.
"마니산은 오를 때마다 새로워! 계절마다 다르고, 길을 달리하면 처음 오르는 것 같아. 새소리, 물소리, 거기다 풀벌레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깨끗해져. 덤으로 봄에는 나물도 뜯고 가을에는 알밤, 머루, 다래를 선물로 가져오지. 가까이 마니산이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 게다가 영산(靈山)이 아닌가?"
아저씨가 틈나면 산에 같이 가자며 들려주는 말이다.
산은 아무래도 혼자 오르는 것보다는 여럿이 오를 때 즐거움이 더한다. 아저씨도 그걸 잘 안다. 그런데 일손이 바쁜 농사철에는 아저씨처럼 자주 산에 오르기가 쉽지 않다. 가끔 내가 길동무가 되어주지만 아저씨는 혼자 산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
함께 하는 산행은 즐거움이 두 배
연휴 마지막 날(26일) 아침. 날이 무척 맑다. 산행하기 알맞은 가을 날씨다. 아저씨가 채마밭을 둘러보고 있다.
"아저씨, 오늘 바쁘세요?"
"나야 만날 시간이 있지!"
"저랑 산에 갈까요?"
"산에? 듣던 중 반갑네."
술 좋아하는 사람에게 "대포 한 잔 할까?"하면 얼굴에 웃음꽃이 피듯, 내 말끝에 아저씨 표정이 딱 그 격이다. 정말 기다렸다는 표정이다. 나도 요 며칠 운동을 못해 몸이 찌뿌드드하던 터에 죽과 장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아저씨는 "어디가 좋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마니산 장군봉은 어떨까?"라고 묻는다. 그러다 오늘은 나더러 강화에 있는 좋은 산을 안내하란다. 진즉부터 한 번 오르고 싶었던 초피산이 생각났다.
"초피산은 어떨까요? 그리 높은 산은 아닌데…."
"덕포리에 있는 화살촉처럼 뾰쪽한 산 말인가? 그거 좋겠네. 그리로 가자구."
기분 좋은 출발! 아내가 주섬주섬 싸준 간식거리에다 막걸리 한 병을 챙겼다. 아저씨나 나나 막걸리를 참 좋아한다. 가끔 밭일을 하다 얼굴이 마주치면 막걸리를 곁두리로 마시고 지내던 터이다. 오늘은 밭이 아닌 산에서 텁텁한 막걸리를 들이키면 그 맛이 어떨까?
이리 좋은 문화재를 만날 지나치다니
가을 들머리라고 하지만 산은 아직 한여름이다. 녹음에서 풍겨 나오는 푸르름이 꼬리를 내리려면 한참 남았다. 산의 색깔만 보면 가을은 아직 이르다. 그렇지만 들판의 색깔은 완연한 가을이다. 따사로운 햇볕에 영그는 황금벌판을 보면 가을이 깊숙이 들어왔음이 분명하다.
뾰족하게 우뚝 솟은 산세를 뽐내는 초피산이다. 어디로 오르면 좋을까? 화도면 사기리에서 오르는 두 시간 남짓 타는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차에서 내리자 이건창선생생가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보인다. 차도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전통 한옥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大문장가로 충청우도 암행어사와 해주 감찰사를 지낸 이건창 선생이 생전 살았던 집을 복원한 문화재다.
이건창선생생가는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다. 명미당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건창선생은 지행합일 학풍을 내세운 양명학의 마지막 강화학파로서 이웃나라에서 부강을 구하는 비주체적 개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시골 초가집이 정말 정겹다.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3량 가구 구조의 9칸 규모 'ㄱ'자 집이 예전 내가 살았던 집과 흡사하다.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 집을 돌보지 않아 허술하다. 소홀한 관리가 못내 아쉽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 마당에 빨간 고추를 널고 있어 길을 물었다.
"아저씨, 이 길이 초피산 가는 길 맞나요?"
"잘 들어오셨네요. 이 길을 따라 산에 오르고 덕포리 쪽으로 내려가세요."
"그런데 사기리 탱자나무가 어디 있어요?"
"생가 오시기 전 못 보셨나? 저기 보이잖아요."
사기리탱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79호이다.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 한계선인 강화도에 자리하고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아저씨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 길 건너 좀 왜소해 보이는 탱자나무가 한 그루가 보인다. 저게 천연기념물 사기리탱자나무라는 건가? 우리는 좀 의아한 생각으로 다시 길을 건넜다.
가까이 다가가자 멀리서 볼 때와 사뭇 다른 분위기의 나무이다. 오랜 풍상을 견딘 흔적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땅 위 나지막한 높이에 세 갈래로 갈라져 용트림하는 듯한 모양이 어떤 나무보다 멋져 보인다. 마침 노랗게 익은 탱자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가 상큼하다.
산행 길로 접어들며 아저씨가 좋은 문화재를 보았다고 흡족해 한다.
"수도 없이 이 길을 다녔을 텐데 이런 문화재를 놓치고 다녔을까? 멋진 문화재가 이곳에도 있다니! 강화는 어디를 가도 좋아!"
깔볼 수 없는 초피산 산행의 아기자기함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산행을 시작한다. 푹석푹석 밟히는 낙엽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사람 흔적이 없는 산길이 호젓하다.
어디서 들리는지 목청껏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풀벌레들의 합창이 정말 청아하다. 일상에서 듣는 소란스러움과는 차원이 다르다. 자연의 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잦은 비가 내린 뒤라 그런지 지천으로 버섯이 돋아났다. 낙엽이 쌓인 흙을 헤집고 고개를 내민 버섯이 꽃처럼 아름답다. 하얀 색을 띤 소박한 버섯, 화려한 색깔을 뽐내는 버섯, 거기에 수더분한 버섯까지 저마다 멋을 부리고 있다.
아저씨가 요모조모 버섯을 살펴보시며 말을 덧붙인다.
"오랜 세월을 살았다지만 버섯 이름도 모르고. 독버섯인지 먹는 버섯인지 알지를 모르니, 눈앞에 보물을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격이야."
비단 버섯뿐일까. 산에 있는 나무며, 풀이며 이름을 제대로 아는 게 얼마나 있을까? 자연을 몰라도 너무 모르지 않나 싶다. 그러니 자연의 소중함을 잃고 사는지도 모른다.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산길이 지루하지 않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 보니 급경사 길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지금까지 낙엽이 쌓인 흙길과는 딴판이다. 지금부터 본격적인 산행을 해야 할 성싶다.
온몸에 열기가 휘감기고 숨이 가팔라진다. 앞서 가는 아저씨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물로 목을 축이니 그 시원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아? 쉽게 생각할 산이 아냐!"
"초피산의 뾰족한 모습이 산길에서 그대로 나타나네요!"
초피산은 마니산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솟아있는 해발 253m의 나지막한 산이다. 그런데 정상부는 경사가 급해 가파르기가 높은 산 못지않다. 산 아래서 바라본 뾰족한 부분은 가까이 와서 보니 험상궂은 바위로 정상을 이루고 있다.
드디어 산 정상. 산 정상이 코딱지만한하다.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돌탑이 보인다. 숨을 헐떡이며 올라온 사람들이 하나하나 돌을 얹어 탑을 쌓은 건가? 돌무더기가 있어 정상의 운치를 자아낸다.
아저씨가 주위에서 돌멩이를 주어 돌무더기 맨 꼭대기에 올려놓는다. 무슨 소원이라도 담아내 듯 정성스럽다.
그리고서 산 아래를 펼쳐진 아름다운 가을풍광을 보며 기분 좋은 말을 꺼낸다.
"돈 달라고 하지 않으며 사람을 끌어안는 산! 들판의 황금물결을 보니 내 배가 다 부르네! 야! 이 맛에 산에 오르는 거 아냐?"
틈만 나면 산에 오르는 아저씨의 산 사랑 이유를 길게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시원하게 들이키는 한 잔의 막걸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맛이 있다. 산과 바다 그리고 황금벌판이 발아래 펼쳐져 있다.
강화도 [마니산&정수사&이건창 생가&초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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