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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현 해설사 ㅡ의왕 바라산 기슭 (추정)고인돌 걸작을 발굴하다(2020.07.15)
바라산 기슭 추정 고인돌을 발굴하다 추정 지석묘(마제,支石墓 )를 찾아가는 선사시대 시간여행 (민속신앙. 민간신앙, 원시신앙, 성혈신앙) 의왕 청계골 동내 한바퀴(의왕의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 유적의 명칭: (가칭)의왕 바라산 고인돌 발견자: 조성현 안양문화유산해설사(2020.07.15) 유적 위치 : 의왕시 학의동 산 58번지 일원 주변 바라산 맑은 숲 공원 초입 구릉(완만한 경사면) 특징 : 고인돌 상석(개석, 덮개돌)에 성혈(알구명, 홈구멍, 컵마크, 원추형 홈)이 여러개 암각 분포 마찰력(회전마찰)을 이용 개석(덮개돌)의 표면을 을 아주 매끈하게 다듬은 흔적 (시간과 비용 및 인건비 등 공력을 많이 투입한 특징) 마제 명품고인돌 (개석외부 표면을 갈아내어 전국에서 가장 매끈한 고인돌 추정, 당대 최고 장인이 만든 고인돌 걸작) 향후과제: 마제 고인돌의 실체(정체) 진품 여부 관계당국 문화재 감정 필요 소견 : 의왕 바라산 고인돌은 마제 고인돌 걸작으로 찾아볼 수 없는 유래가 없어 희소성을 간직한 명품 고인돌로 평가된다. 명품 마제 걸작 고인돌을 제작한 배경에는 마제석기 도구나 마제 무기류 (마제 석검 등)의 제작 기법을 추모시설인 고인돌 제작기법에 적용한 사례로 학술적 연구적 가치 크다. 선사시대 문화유적으로 추정되는 이 고인돌은 역사적 , 학술적, 희소적, 문화재적, 예술적, 고고학적 가치가 매우 크다. 문화재당국의 진품 감정이 필요한 듯하다. (조성현 안양문화유산해설사, 사견) 바라산 추정 고인돌(지석묘) 제원 개석의 길이 가로 130cm 세로 130cm 높이 70cm 특징(마제 명품 고인돌 걸작) 성혈 구멍을 갈아서 마감하고, 마제 석검 등 마제석기 제작기법을 확대 적용하여 고인돌의 개석외부 표면을 매끈하게 갈아내어 다듬었다. 국내에서 마제 고인돌은 진귀하여 희소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고인돌 상석(上石, 덮개돌)에는여러개의 홈구멍〔性穴, cup-mark)이 나타나는데, 민속에서는 ‘알구멍’, ‘알바위’, ‘알터’, ‘알미’, ‘알뫼’ 등으로도 불린다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 바라산 가슭의 추정 고인돌이다. 동전만한 크기의 여러 성혈(홈구멍, 오목한 컵모양, 원추형 홈) 이 고인돌 상석에 암각되어 있다.
동전 만한 사이즈의 작은 성혈과 큰 사이즈(주먹 1개 크기) 포함 약 7개 정도의 성혈이 개석 상부에 파여 있다. 성혈은 북두칠성 등 별자리와의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고인돌 개석(덮개돌)에 수직으로 파인 알구멍인 성혈은 다산과 풍년을 기원하는 원시 종교의 특징을 담고 있다. 별자리와 연관된다는 설도 있다. 한편 인접 의왕시 청계동(淸溪洞) 토골마을 김선 길씨 가옥 안에 고인돌이 1기 있는데. 화강암질 편마암 재질이며 굄돌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개석식 고인돌로 여겨진다 의왕 청계동 고인돌과 의왕 학의동 바라산 기슭 (추정)고인돌은 서로 지근거리에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생을 마감한 고인돌 유적을 통해 선사인류가 거주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의왕의 고인돌은 6기 정도가 확인되었는데, 의왕 학의동 바라산 기슭 (추정)고인돌은 회전 마찰을 통해 다듬은 것으로 보이는 성혈(性穴, 컵마크)이 나타난다. 홈구멍은 농경사회에서 다산(多産)과 풍요(豊饒)를 기원하는 신앙적 의식의 표현으로 생각된다. 고인돌은 경제력과 정치력이 있는 지배층의 무덤 유적으로 여겨진다. 대표적인 청동기 유적을 통해 선사인류가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컵마크 성혈의 제원(제일 큰 성혈, 주먹크기) 지름 10 cm 깊이 5 cm 그외에 크고 작은 성혈이 여러 점 암각되어 있다. 추정 고인돌 개석(덮개돌)은 산기슭에 덩그라니 놓여 있다. 인접해서 큰 돌이 여러개 있다. 고인돌 개석 표면은 다듬은 석재 처럼 유난히 이쁘다. 바위에 성혈을 새기는 것은 자손의 번창과 풍요 및 다산을 빌고자 하는 등 주술적인 의미로 풀이된다. 개석의 구멍들은 돌 표면을 쪼아서 형태를 잡은 다음 회전 마찰을 통해 다듬은 것으로, 성혈(性穴)이라고도 한다. 주로 고인돌의 덮개돌이나 자연암반에 새겨진다. 의왕 바라산 고인돌은 인위적 물리적 힘을 가해 형성된 성혈자국이 뚜렷하다. 컵마크가 선명한 이러한 성혈(오목한 컵모양, 원추형 홈)은 자연현상에서는 절재 존재할 수 없다. 성혈(性穴)은 바위의 표면을 오목하게 갈아서 만든 컵 모양 혹은 원추형의 홈이다. 민속에서는 알 구멍, 알 바위, 알 뫼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성혈은 일반적으로 선사 시대의 신앙 혹은 별자리와의 관련성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림이나 형상을 표현한 바위그림[岩刻畵]이라고 보기도 한다. 민간에서 알 바위나 알 구멍이라 부르는 장소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을 통해 근세에도 자손의 번창을 빌고자 바위에 성혈을 새기는 주술적인 행위를 지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향토문화전자대전 홈구멍〔性穴, cup-mark〕은 고인돌〔支石墓〕의 덮개돌〔上石〕이나 자연암반에 암각되어 새겨진다. 형태적 차이는 있지만 민속에서는 ‘알구멍’, ‘알바위’, ‘알터’, ‘알미’, ‘알뫼’ 등으로도 불린다<고고학 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홈구멍 의왕의 고인돌 총 6기 의왕 모락산 고인돌 바위(모락산성 정상) 성혈 성혈 (性穴, cup-mark)이란 선사시대 예술의 일종으로, 돌 표면을 깎거나 파내어 도형을 만든 것이다. 위키백과
의왕 바라산 기슭 고인돌은 덮개석을 도구를 이용하여 갈아낸 마제 고인돌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청동기인들이 마제석기 양식 기법인 마제돌칼 등 생활도구를 제작한 예는 흔히 보인다. 의왕의 청동기인들은 이러한 마제석기 제작기법(석기도구의 표면을 갈아서 매끄럽고 세련되게 마감하는 기법)을 고인돌 덮개석에 적용하여 세련되고 정교한 마제 명품 고인돌로 마감했다. 흔히 볼수 있는 일반적 고인돌은 채취한 자연석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한 투박한 고인돌이지만, 의왕의 청동기인들은 개석 덮개돌에 공역을 투입, 돌 외부를 돌 등 연장으로 갈아 정성을 다해 마제고인돌로 마감하였다. 이러한 고인돌 양식은 여간해서 접하기 힘들어 희소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의왕의 청동기인들은 판석의 작은 구멍을 판후 도구로 갈아서 고인돌의 성혈을 완성했고, 고인돌의 개석도 도구의 마찰력(회전력)을 이용, 개석의 표면을 갈아내어 매끈하게 마감했다. 이러한 마제 고인돌은 국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래가 없는 고인돌로 사려되며, 엄청난 공력이 들어간 귀한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고인을 추모하는 추모 시설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의왕의 청동기인들은 (고인돌)무덤의 주인공인 피장자(권력가, 세력가)에 대한 강한 추모의 정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정성을 다해 마감한 마제 고인돌은 고인에 대한 강한 추모의 정을 담고 있다. 의왕의 청동기인은 피장자가 사망 후 모양이 반듯한 방형의 엄선된 자연석 석재를 채석하고, 노동력을 이용 피장지에 운반 후 도구나 마찰력(회전력)을 이용하여 개석의 표면을 매끄럽게 갈아내어 명품 걸작 고인돌을 완성했다. 개석을 매끄럽게 갈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력이 투입되므로 피장자는 지역에서 존경받는 권력자(지배자)로 분석된다. 명품 마제 걸작 고인돌을 제작한 배경에는 마제석기 도구나 무기류의 제작 기법을 고인돌 제작기법에 적용한 사례로 학술적 가치가 크다. 이 추정 고인돌은 당대 최고 장인이 정성을 다해 만든 명품 고인돌 걸작으로 평가된다. 이 거석바위는 너무 귀엽고 예쁘고 앙증맞아 석재 예술작품 같다. 무덤같은 생각이 전혀 안든다. 고인의 추모시설을 갈돌로 갈아서 아름답게 표현한 청동기인들의 예술성이 돋보인다. 피장자에 대한 강한 효심이 예술성으로 표출된것 이다. 의왕 청동기인은 갈돌과 마제기술을 고인돌 제작에 접목, 투박하고 거친 자연석 석재에 노동력을 투입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명품 고인돌을 완성했다, 이 추정 고인돌은 고인에 대한 추모의 정을 담아 정성을 다해 예술적 감성으로 표현(마감)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의왕 바라산 고인돌은 마제 고인돌 걸작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어 희소성과 예술성을 간직한 명품 고인돌로 평가된다. 이 고인돌은 역사적, 학술적, 희소적, 문화재적, 예술적, 사료적, 고고학적 가치가 크다. 문화재당국의 진품 감정이 필요한 듯하다.(조성현 안양문화유산해설사, 사견) 고인돌(지석묘)로 추정 되는 거석 의왕시 학의동 바라산의 고인돌 추정 바위는 산자락 기슭 낮은 구릉(언덕)에 있다는 점, 이쁘게 잘 다듬은 느낌이 있는 점. 고인돌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성혈(컵마크)이 여실히 암각된 점, 주변에 유사한 거대 바위가 여러개 모여 있는 점(여러개 거석 바위를 옮겨 군락을 이룸, 주변에도 큰 돌 있는 점), 인접 청계동에 또 다른 고인돌이 있는 점, 구릉지 양지바른 곳에 있는 점 등 을 종합 감안시 고인돌(지석묘)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 특히 이(추정)고인돌은 고인돌 상석(개석, 덮개돌)에 크고 작은 성혈(알구명, 홈구멍, 컵마크, 원추형 홈)이 여러개 암각 분포된 점은 그 만큼 지석묘에 공력과 정성이 많이 투입되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 거석은 자연상태에 암석을 채취(채석)운반 후 무덤방(묘실)의 개석(덮개돌)을 가공하여 아주 매끈하게 다듬은 흔적이 보인다. 이 매끈한 방형 (추정)고인돌(개석, 덮개석)은 마제돌창, 마제돌검, 마제갈돌 등 마제석기 제작 기법을 고인돌에 확대 적용한 사례로 분석된다. 의왕의 바라산 마제 고인돌은 시간과 비용 및 인건비 등 공력을 많이 투입한 특징을 담아내어, 전국에서 가장 매끈한 고인돌(정성과 공역을 가장 많이 들인 고인돌)로 추정된다. 필자는고인돌 외부를 마찰력을 이용, 갈아내어 조성한 이렇게 매끈하고 예쁜 (추정)마제고인돌을 본적이 없다. 이 고인돌은 너무 귀엽고 예쁘고 앙증맞아 추모시설이라기보다는 석재 예술작품 같다. 무덤같은 생각이 전혀 안든다. 이 고인돌은 당대 최고 장인이 만든 명품 고인돌 걸작으로 평가된다. 문화재 관계 당국은 이 거석바위의 정체확인과 함께 진위여부 조사가 필요한 듯하다. (조성현 안양문화유산해설사 사견) 고인돌(지석묘)은 지상에 돌(석재)을 괸돌(괴여 있는 돌), 고임돌에서 명칭이 유래되었다. 개석(덮개돌, 상석)하부의 굄돌(고임돌, 괸돌)의 크기나 굄돌의 유무를 고려 고인돌(지석묘)은 바둑판식(남방식, 바둑판 모양, 굄돌이 작다), 탁자식(북방식, 굄돌이 크다), 개석식(굄돌이 없다) 등으로 분류된다. 북방식과 남방식은 개석(덮개돌, 상석)의 하부 무덤방(묘실)의 사방을 굄돌로 막은 구조이다. 고인돌은 개석하부 굄돌의 크기에 따라 북방식(굄돌이 크다)과 남방식(굄돌이 작다)으로 분류되고, 아에 굄돌이 없이 지표위에 덮개돌(개석, 상석)만 있는 것은 개석식 고인돌이다. (조성현 안양문화유산해설사) 정원석으로 활용되는 자연석 암석바위 (추정)고인돌 옆에 있는 거석이다. 정원의 조경 석재(정원석)로 이용되면서 원위치에서 이탈되었다. 이전전 원위치는 주변에 있다. 이 암석은 정원의 조경석재로 활용되고 있다. 이 거석군들은 조경 작업을 하면서 원위치에서 이탈되었다. 주변에 4개의 거석 바위들이 있다. 바라산 낮은 구릉지에 약 4 개 정도의 거석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전문가 집단이 고인돌인지 여부 정체 규명이 필요해 보인다. 주변에는 바라산 계곡이 있어 맑은 물이 쉼없이 흐르며 지석묘가 있는 낮은 구릉지는 양지 바른 곳으로 거주적 입지가 양호하다 . 바라산 기슭 거주하는 선사인들은 산속 물가 계곡에 정착생활을 하며 주변에서 채집과 수렵활동을 영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선사시대 신앙유산인 고인돌을 통해 권력의 분화와 원시적 형태의 민간신앙(민속신앙, 성혈신앙)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조성현 해설사, 사견) 이 추정 고인돌 바위는 방형의 예쁜 석재를 엄선했다 주술적 신앙의식을 표현한 성혈을 여러개 표현했다 고인돌 외부를 갈돌로 갈아내어 매끈하게 마감했다. 고인돌이 투박하며 거칠지 않고 예쁘고 앙증맞아 예술품 같다 고인에 대한 효심내지 추모의 정을 담아낸 이 고인돌은 예술작품으로 승화된다. 이 추정 고인돌은 작품성이 뛰어나 고인에 대한 추모의 정을 예술적 감성으로 표현(마감)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추정)고인돌 개석에는 손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구멍을 인위적으로 파낸 큰 성혈(알구멍)을 비롯하여, 곳곳의 작은 성혈 등 총 7개 정도 크고 작은 구멍이 음각(암각) 되어 있다 이러한 성혈은 자연 상태에서는 절대 불가능하여, 인류가 도구를 이용하여 인위적 물리적인 힘을 가해 조성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러한 성혈신앙(민속신앙, 원시신앙) 풍습은 안양자유공원 내 평촌고인돌(1기), 의왕 삼동고인돌, 의왕 이동 고인돌, 수원 금곡동 고인돌(칠보산 고인돌) 등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성혈 자국이 선명하여 청동기시대 진품 무덤유적으로 여겨진다(사견) 성혈(알구멍, 컵마크)은 고인돌 무덤의 개석 상부에서 나타나는 민간신앙으로 분석된다. 청동기시대 고인돌 유적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성혈(컵마크)자국으로 보아, (추정)의왕 바라산 지석묘는 고인돌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잘 담아 내고 있다. 따라서 바라산의 잘다듬은 거석은 고인돌이 유력하다(조성현 해설사, 사견) 제법 크 싸이즈의 성혈구멍이다 생을 마감한 흔적인 지석묘를 통해 이 일대에 선사인류가 거주한것으로 분석된다. 무덤인 고인돌을 세우기 위해서는 인건비와 노동력이 수반된다. 이 거석은 지배자의 사후 무덤으로 분석된다. 이 추정 고인돌은 앙증맞고 아름다워 작품성과 예술성이 뛰어나다(사견) 크고 작은 선명한 성혈자국이 보이는 상석이다 오목한 컵모양 또는 원추형 홈통 모영의 성혈 자국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별자리 구멍이 아닌 듯하다. 성혈의 크기는 주먹 크기에서 동전 크기로 다양하다 이 고인돌 개석은 표면을 회전력이나 마찰력을 이용, 구멍 및 표면을 갈아내어 매끄럽게 마감 처리했다. 고인돌의 개석을 갈돌로 갈아 매끈하게 마감한 고인돌은 유래가 없는 듯하다. 마제석기(갈아 마감한 석재 도구, 마제 돌검 등)의 제작 기법을 추모시설인 고인돌 조성에 응용한 사례이다. 따라서 초기 청동기보다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유물 유적으로 분석 다. 다른 고인돌에서 찾아보기 어여운 제대로 시문된 성혈이다. 성혈은 동전 사이즈에서 주먹이 들어가는 사이즈까지 다양하며 약7개의 구멍이 바위그림(암각, 음각)처럼 조각되었다. 큰 성혈 좌측에 작은 성혈군이 목격된다 큰 성혈 2개를 나란이 암각했다. 2개의 성혈은 지근거리라 시간이 흘러가면서 풍화되어 하나로 연결되었다. 주변에 작은 성혈이 보인다. 크고 작은 성혈 7개가 덮개석 표면의 곳곳에 시문(음각, 암각)되었다. 안양권 선사 유적의 분포는 고인돌 유물과 유구 유적을 통해 확인된다. 안양권 고인돌 및 청동기 집터 분포 현황은 의왕 모락산 고인돌 바위(모락산성 장상) 광명 가학동 고인돌 시흥 조남동 지석묘 수원 금곡동 고인돌(칠보산, 성혈) 안산 선부동 고인돌군 안양 평촌 신도시 출토된 고인돌 군(평촌 자유공원 내 5기, 1기는 성혈) 안양 칠성고인돌 안양시 관양동 인덕원 사거리 청동기집터 유적(움집) 등 이 있다. 고인돌 분포를 생활 권면을 토대로 살펴볼때, 안양 평촌벌에서 (관양동)인덕원 사거리 청동기 집터유적, 의왕 포일동 구석기유적, 의왕 청계 고인돌 및 (추정)학의동 바라산 고인돌에 이르는 선사인류의 분포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특히 의왕 포일 2지구에서 구석기 유물이 집중 출토된 점 및 인접 안양 인덕원 사거리 관양동 청동기 집터유적지를 종합 감안시, 인덕원 사거리부근은 구석기인과 청동기인이 함께 생활하던 중첩된 공간이다. 따라서 인덕원 사거리 부근은 청동기인과 구석기인이 시기를 달리하며 생활및 활동했던 영역으로 풀이된다. 인덕원 사거리 주변은 구석기인 이래 청동기인이 활동했던 공간으로 의왕 및 안양을 따로 구분한 행정 권역이 아닌 생활 권역으로 선사시대 안양의 역사를 살펴 볼때, 안양은 청동기 이전인 구석기시대부터 선사인류가 활동했다고 볼 수 있다. 안양의 선사시대의 시작은 청동기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하지만 안양 인접 의왕을 포함한 넓은 생활권역을 중심으로 안양의 선사인류거주 시점을 살펴보면 이러한 통설이 달라질 수 있다. 안양시 관양동 인덕원 사거리 인접, 의왕포일지구 구석기인의 활동반경을 행정 권역이 아닌 생활 권역으로 조명시, 안양의 선사인류 거주 역사는 시대를 올려 구석기 시대라 볼 수 있는 있는 여지가 있다. 또한 인덕원사거리 안양시 관양동 청동기 유적 조사 발굴시 청동기 선사 인류의 생활사를 알 수 있는 청동기 유물과 집터 유적이 출토되었으며, 구석기 유물도 일부 수습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인덕원 사거리 안양시 관양동의 구석기 매장출토 유물과 인접 의왕 포일동 구석기인의 매장 출토 유물 등을 토대로, (행정 권이 아닌)생활 권을 종합적으로 감안시 안양의 선사시대 역사는 청동기가 아니라, 시대를 올려 구석기로 시대를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조성현 안양문화유산해설사 사견) <참고> 의왕시 '포일동 출토유물'으로 포일2지구 개발과정에서 출토된 발굴 출토된 전시유물들을 보면 구석기부터 조선까지 다양하며 총 1,300여점이 출토되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양지바른 산 기슭은 청동기 인들이 정착생활을 영위하며 채집과 수렵 등 선사 인류가 정착하며 살기 양호한 최적의 입지이다 코로나19 장기화여파로 인한 심신의 피로와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답답한 요즈음이다. 집콕과 언택트(비대면) 사회적 분위기에 따른 언택트 힐링여행이 각광을 받고 있다 바라산 맑은 숲 공원(의왕시 학의동 산 58번지 일원)일원은 바라산의 숲길을 따라 거닐면, 작은 폭포, 암석원 및 식물원(초화원) 등을 대자연 속에서 만나볼 수 있다. 한여름에는 바라산 속에서 쉼없이 흘러 내려오는 냉기로 바라산 계곡일원은 도심 속 대비 기온이 한층 낮아 시원하고 청향감이 있다. 맑고 청정한 이곳의 숲 트래킹은 도심 속에서 찌든 마음을 개운하게 비우며 심신을 정화해 준다. 계곡에서 탁족은 자유이다. 때묻지 않은 청정한 자연을 품은 바라산의 호젓한 테크산책로는 피톤치드 산림욕 제공과 함께 찾는이들에게 무량한 힐링과 안식을 선사하며 삶의 위로를 전할 것이다. 한여름 계절의 정취를 만끽하며 바라산 계곡으로 떠나는 고즈넉한 힐링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조성현 안양문화유산해설사) 데크 산책로와 계곡 및 대자연을 품은 의왕 바라산, 피톤치드 내음 풍기는 산길의 숲향은 일상에서 찌든 심신의 피로를 말끔히 걷어내며, 찾는 이들에게 무량한 힐링과 위로를 선사할 것이다. 고즈넉한 계곡의 시원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은 무료이다. 의왕의 숨겨진 보물(보배)을 찾아 의왕 바라산으로 떠나보면 어떨끼? 바라산 계곡의 작은 폭포가 시원한 청량감을 준다. 계곡의 있는 자연석과 (추정)고인돌 석재의 암질은 동일하여, 선사 인류는 바라산 기슭 주변서 방형의 잘생긴 암석(거석)을 수습 및 운반하여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무거운 암석을 운반하는 데는 노동력과 경제력이 수반 되는 바, 무덤 조성을 지휘한 권력자(지배자, 계급 분화)가 있던 것을 볼 수 있다. 고인돌의 성혈은 원시종교의 일면을 간직한 신앙유산으로 풀이된다(조성현 해설사 사견) 수렵과 채집 등 선사인류가 누볐을 것으로 보이는 바라산 기슭이다. 주변에 백운호수 효성헤링턴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인접해서 청계산과 백운호수가 있다. 경기도 의왕시 바라산 추정 고인돌 인접해서 인접해서 청계동에도 고인돌 유적이 잔존한다. 청계동(淸溪洞) 토골마을 김선길씨 가옥 안에 자리한 고인돌로 화강암질 편마암 재질이며 굄돌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개석식 고인돌로 여겨진다. 바라산 맑은 숲 공원 앞 다리에 기대어 서서 (조성현 안양문화유산해설사) ----- < 공부합시다 > -------- <관련자료> 모락산성 고인돌바위(모락산 지석묘) <의왕 모락산 고인돌 바위> 의왕 모락산성지 정상부(추정, 지휘부)에 있는 (출처)모락산여행기 블로그 전국맛집여행기 --참고자료-- <의왕의 고인돌 유적> 두산백과 의왕 청계 고인돌 [義王淸溪-]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토골마을에 위치한 청동기시대 고인돌.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淸溪洞) 토골마을 김선길씨 가옥 안에 자리한 고인돌로 화강암질 편마암 재질이며... 의왕 청계 고인돌[ 義王淸溪- ]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淸溪洞) 토골마을 김선길씨 가옥 안에 자리한 고인돌로 화강암질 편마암 재질이며 굄돌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개석식 고인돌로 여겨진다. 덮개돌은 맨 처음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이나 이 곳을 밭으로 개간하면서 한쪽 부분을 깨뜨렸다고 한다. 남아있는 규모는 250×150×80cm 정도이며 가장자리를 돌아가면서 손질을 많이 하였고 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이며, 일부는 땅속에 묻혀있다. 현재 덮개돌은 마당의 화단장식용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집 뒤편 밭에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 1기가 더 있다. 의왕 고천동 고인돌유적 [義王古川洞-遺蹟]경기도 의왕시 고천동에 있는 청동기시대 고인돌.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古川洞) 안골마을 198-2번지에 있는 고인돌로 덮개돌은 화강암질 편마암 재질이며, 길이 650cm, 폭 560cm, 두께 230cm이다. 현재 민가의... 의왕 고천동 고인돌유적[ 義王古川洞-遺蹟 ] 요약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古川洞)에 있는 청동기시대 고인돌.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古川洞) 안골마을 198-2번지에 있는 고인돌로 덮개돌은 화강암질 편마암 재질이며, 길이 650cm, 폭 560cm, 두께 230cm이다. 현재 민가의 담장과 붙어 있어 담장의 경사면을 따라 기울어져 있다. 외형적인 형태를 보면 일정한 꼴을 이루고 있지 않지만, 주변에 큰 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외부에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참조항목제공처 정보---------------------경기도 의왕시 오전동 오전초등학교 정문 앞쪽에 있는 청동기시대 고인돌.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五全洞) 오전초등학교 정문 앞쪽에 있는 높은 구릉 위에 있는...
삼동 고인돌〔支石墓〕은 원래 3기가 있었는데 안양∼부곡 간 도로공사 때 2기가 없어져 1기만 발굴되었으나 발굴된 고인돌 역시 원래의 위치가 부정확하다. 해발 47.37m의 약간 경사진 밭에 입지한다.... 지역의왕 삼동 고인돌[ 儀旺 三洞 支石墓 ]
경기도 의왕시 삼동 금천마을 416번지에 위치한다. 1987년 충북대학교박물관에서 발견하고 1988년 서울대학교에서 발굴支石墓〕은 원래 3기가 있었는데 안양∼부곡 간 도로공사 때 2기가 없어져 1기만 발굴되었으나 발굴된 고인돌 참고문헌
출처지식백과1-10 / 10건경기도 의왕시 이동에 있는 2기의 청동기시대 고인돌. 경기도 의왕시 이동(二洞)에 위치한 고인돌로 2곳에서 발견되었다. 1호 고인돌은 길가의 경사면을 따라... 두산백과 의왕 이동 고인돌[ 義王二洞- ]
경기도 의왕시 이동(二洞)에 위치한 고인돌로 2곳에서 발견되었다. 출처제공처 정보의왕 모락산 고인돌(모락산성 내)
6·25전쟁 당시 이곳에서 북한군을 무찌른 국군 제1사단 15보병연대의 전승기념비가 있으며 고인돌로 보이는 큰 바위가 남아 있다. 산행은 산 북쪽의 계원조형예술대학 후문... 위치경기 의왕 오전동과 내손동 높이385m 모락산[ 慕洛山 ]모락산[ 慕洛山 ]
높이는 385m이다. 산 전체가 바위로 되어 있다. 특히 북쪽 사면은 절벽안양시가 넓게 펼쳐지고 그 너머로 그 너머로 수리산과 관악산청계산 [네이버 지식백과] 모락산 [慕洛山] (두산백과) 출처제공처 정보--------------------------- <고인돌 상석의 성혈>
홈구멍홈구멍〔性穴, cup-mark〕은 바위그림고인돌〔支石墓〕의 덮개돌〔上石〕이나 자연암반에 새겨진다. 형태적 차이는 있지만 민속에서는 ‘알구멍’, ‘알바위’, ‘알터’, ‘알미’, ‘알뫼’ 등으로도 불린다. 참고문헌
동의어성혈(性穴), 알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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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경상남도 창원 지역에 있는 선사 시대 고인돌 상석이나 민간 신앙의 기원을 담아 바위 표면에 새긴 원형의 홈. 개설성혈(性穴)은 바위의 표면을 오목하게 갈아서 만든 컵 모양 혹은 원추형의 홈이다. 민속에서는 알 구멍, 알 바위, 알 뫼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성혈은 일반적으로 선사 시대의 신앙 혹은 별자리와의 관련성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림이나 형상을 표현한 바위그림[岩刻畵]이라고 보기도 한다. 민간에서 알 바위나 알 구멍이라 부르는 장소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을 통해 근세에도 자손의 번창을 빌고자 바위에 성혈을 새기는 주술적인 행위를 지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미성혈은 한반도 뿐만 아니라 유럽,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등 세계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시대에 걸쳐 나타나는 인류 공통의 문화유산이다. 성혈(性穴)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목한 홈을 여성의 성기(性器)로 여기며, 이것을 여성의 생산성에 비유한 의례 행위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즉 오목한 홈을 만들고 다른 도구로 구멍 속을 비비면서 마찰하는, 남녀의 성적(性的) 교합과 비슷한 행위를 통해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모방주술(模倣呪術)의 일종이며 민간신앙[祈子信仰]의 한 형태이다. 현황과 특징울산광역시 울주구 삼남면 방기리에는 계곡의 양편에 크고 작은 바위마다 성혈이 가득 새겨져 있는 장소가 있다. 아마 선사 시대 제의를 지내던 신성한 장소였을 가능성이 크다. 창원시 북면 내곡리와 외감리, 동읍 죽동리와 화양리, 창원시 천선동 등 여러 곳에서는 알 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있는데, 그 표면에 수십 개의 성혈이 새겨져 있다. 이들의 조성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이중에는 선사 시대 신성한 장소에 새겨진 암각화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고인돌 상석에 새겨진 것을 두고 민간에서 그렇게 불렀을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창원 시내를 비롯하여 동읍이나 북면, 진동 각지에 분포하는 고인돌 상석의 표면에 다수의 성혈이 새겨진 경우를 볼 수 있다. 성혈을 새기기 좋은 상석의 윗면에 새겨진 것은 고인돌을 축조한 다음 새긴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성혈을 새기기 어려운 바닥 면과 같은 곳에만 새겨진 것은 성혈이 새겨진 바위로부터 상석을 채취한 경우라 하겠다. 어찌 되었든 고인돌이 조성된 청동기 시대부터는 성혈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단 고인돌과 성혈이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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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조성현(曺盛鉉)
김중업건축박물관 전시유물해설사(도슨트) 전,행정안전부, (재)한국지역진흥재단 지역진흥기자 전,안양문화원 사무국장 전,안양시학원연합회 사무장 <작품 세계> 안양예술공원 초입 박물관마을(석수동) 출신으로 삼성초교를 졸업하고 관양중, 양명고를 졸업하였다. 글의 중심에는 향토애와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필자의 고장인 석수동이 늘 자리하고 있다. 글감의 소재는 2004년 7월 23일 부로 안양시의 안양문화유산해설사로 위촉받은 이래 문화유산 현장에서의 경험이나, 안양향토사 관련 자료를 수집, 발굴, 분석 및 연구하여 안양의 지방사(지역사), 유형문화유산(문화재), 무형문화유산(마을 민속신앙), 김중업건축(근대건축문화유산), 안양예술공원의 관광자원(안양박물관, 김중업건축박물관 등), 폐사지(안양사지, 중초사지), 안양의 전통사찰(염불사, 안양사등) 등 안양예술공원과 삼성산의 문화유적을 주로 다루고 있다. 글감의 내용과 주제 및 성격은 주로 석수동의 역사와 문화를 소재로 취하며, 작성된 글감은 안양문화유산해설사회 다음카페(마애종사랑< 안양자료실)를 통해 네티즌과 널리 공유하며 지역의 정체성 함양 및 역사의식을 고양하고 있다. 안양의 문화유산해설가로서 안양사 절터(안양사지) 등에서 안양의 문화유산 및 지방사, 안양시 지명유래의 정체성 등을 해설로 나누며, '내고장 안양은 극락과 같이 살기좋은 도시'라고 외치고 있다. 안양문화유산지킴이로서 안양의 마을제(석수동쌍산신제 등) 및 석수동 마애종 등 유무형의 지역문화유산의 보존, 관리, 활용, 전승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함께, 매년 문화유산의 모니터링을 통한 발전방안 및 대안을 제시해오고 있다. 필자는 폐기된 문헌 속 호계서원지를 살려 인문인프라를 구축, 서원에 배향된 역사 속 인물인 조선 선비 시인 독암 조종경과 선비 화가 창강 조속의 재조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등 관광 기반시설 조성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또한 지역의 역사문화 관광자원 콘텐츠개발 및 관광정책의 발전을 통한 관광도시 안양의 도시브랜드 가치를 강화할수 있는 정책제안을 지역신문 등의 기고문, 안양시 원탁토론회 참여 등을 통해 꾸준히 건의해오고 있다. 한편 카메라에 담은 안양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산을 온라인 카페에 게시하여, 안양시민들의 지역에 대한 사랑과 애정감을 고취하고 있다. 부족한 글감이지만 글을 통해 지역을 널리 알리고 안양에 대한 관심과 사랑, 향토애 및 지역의 정체성 고취, 안양시민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조성현 안양문화유산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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