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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칼뱅의 생애와 사상]
방황의 시기:오를레앙, 그리고 인문주의와의 만남(2)
프랑스의 법률적 인문주의
16세기 프랑스에서는 법률 연구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남부 지방에서는 로마법의 미세한 점 하나까지도 절대 놓치지않았지만, 북부 지방에서는 로마법이 '나라의 관습'에 지나지 않았다. 북부 지방에서 '법'은 사실상 문서로 작성되지 않았거나 조문으로 규정되지 않은 관습과 동일시되었다. 프랑수아 1세 치하의 프랑스 절대왕정은 행정상의 중앙집권화 경향이 심해지면서 이런 법률의 다양성을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법률 개혁 과정에 속도를 내기 위해서 보편 원칙에 기초한 일반 법계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는 이들을 후원했다. 법률 개혁 과정은 결국 프랑스 전역에 효력이 미치는 보편적인 법률제도를 체계화하는 것으로 이어질 터였기 때문이다. 기욤 뷔데(Guillaume Budé)는 이런 법학자들 중 하나였다. 뷔데는 수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새로운 법률을 요구하는 프랑스의 필요를 만족시키려면 로마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는 중세 법학자들이 쓴 주석과 주해에 따라 고대 법률 문서를 읽어 나가는 '이탈리아의 관습'과 대조적으로 고대 법률 문서를 원어 그대로 읽는 '프랑스의 관습'을 발전시켰다."오를레앙과 부르주의 '법학자들'에게는 부활한 로마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다. 하지만 고전 문서를 해석하는 데 따르는 이론상의 문제를 처리하는 법학자들의 자질과 현재의 필요를 만족시켜야 하는 법률 전환 작업 덕분에 뷔데 같은 법학자들이 그 시대의 지성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존재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비록 이를 뒷받침할 문헌 증거는 없지만, 아마도 칼뱅은 1528년에 오를레앙에 도착했을 것이다. 이듬해 칼뱅은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한 법학자인 안드레아 알차토(Andrea Alciato)가 부르주대학에 새로 부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르주대학에 매력을 느꼈다." 부르주대학은 1527년에 추진한 개혁 작업의 일환으로 다른 기관에서 저명한 학자들을 데려오기 시작했고 신임 교수들에게 높은 급여를 제시했다. 부르주는 명성이 높은 대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보상하는 차원이었다.
부르주에서 제시한 높은 급여에 매력을 느낀 알차토는 아비뇽 대학에서 부르주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칼뱅은 알차토가 부임했다는 소식에 부르주대학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얼마 뒤에는 시들해졌다. 그래서 1530년에 오를레앙대학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오를레앙과 부르주에서 민법을 공부하면서 칼뱅은 인문주의 운동의 핵심 구성 요소를 직접 접하게 된다. 이때 칼뱅이 단순히 법률의 이론적 토대와 법률 성문화의 실질적인 측면에 관한 통찰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이 만남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제네바의 '법률과 칙령'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도와 달라는 요청을 연거푸 받았을 때, 칼뱅은 고대 로마의 민법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계약법과 물권법, 소송 절차를 체계화했음이 분명하다. 엄청난 급여를 제시하는 부르주대학에 매력을 느낀 안드레아 알차토처럼 칼뱅은 인문주의 사상가이자 실용적인 법률가였다. 뷔데의 문헌학적 법학 연구는 고대의 법률 기관이나 법규뿐 아니라 고대의 일반적인 유산이 현재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확신을 드러낸다. 뷔데라는 인물에게 확립된 법과 글 bonae litterae (좋은 글)의 관계가 인문주의 가치관과 방법론과 원전의 세계로 칼뱅을 안내한 듯하다. 뷔데는 《아스와 그 하부 단위들Del - asse et partibus eius》(1514), 《그리스어 해설지 commentarii graecae linguae》(1529), 《24권으로 구성된 판데크텐 주석 An Annotationes in quatuor et viginti Pandectarum libros》(1508)을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 관한 글을 쓰는가 하면, 그리스의 지혜가 기독교 신앙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추적한 <헬레니즘에서 크리스티아니즘으로 가는 통로De transitu bellenismi ad Christianismum》라는 주목할 만한 책을 출간했다. 마지막에 언급한 작품에서 뷔데는 고대에 관한 연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적절한 준비라고 주장하면서 기독교 인문주의의 기본 원리를 포괄적으로 정당화한다. 칼뱅은 1559년판 《기독교 강요>에서 독자들이 키케로를 통해 고대의 자연 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월등한 종교로 나아가도록 안내함으로써 이와 비슷한 접근 방식을 취했다."
그 시대 가장 위대한 성경 해설가로서 칼뱅이 취한 방법론은 아마도 오를레앙대학과 부르주대학의 진보적인 분위기에서 이뤄진 법학 공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칼뱅이 유능한 문헌 학자가 되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문헌 자료에 직접 접근하고, 언어적·역사적 문맥 안에서 해당 문헌을 해석하고, 그 내용을 현재의 필요에 맞춰 적용해야 할 필요성을 뷔데에게서 배웠다는 징후가 농후하다. 그러나 칼뱅은 이 방법론을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성서 연구에 적용하는 대신 먼저 세네카의 소소한 작품을 연구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세네카 주석
1531년 초, 칼뱅은 오를레앙대학을 졸업하고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법학 연구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지만, 칼뱅은 '법학자'가 되려는 야심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칼뱅이 법을 공부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결정이었던 것 같다.) 오히려 칼뱅은 수사와 좋은 글, 그리고 이것들이 가져다줄 명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1531년 6월에 파리로 돌아온 뒤, 칼뱅은 1530년에 오를레앙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할 때 시작했던 주요 학술 연구를 마무리했다. 법률을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을 사랑하게 되었다. 칼뱅은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의 주석을 쓰느라 꼬박 2년을 매달렸다. 아마도 인문주의 학자로서 명성을 얻으려는 시도였던 것 같다. 칼뱅은 1532년 4월에 이 주석을 자비로 출간했다. 자비출판의 세계를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칼뱅은 곧 그 위험성을 깨달았다. 칼뱅은 자기 원고에 관심을 보이는 출판사가 없자 재정 문제로 난감해했다. 그래서 저명한 의사이자 학자였던 기욤 콥의 아들인 니콜라 콥과 니콜라 뒤 슈망(Nicolas du Chemin)같은 친구들에게 어쩔 수 없이 돈을 빌려야 했다." 칼뱅은 자기가 오를레앙에서 유명하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수업 시간에 세네카 주석을 언급하도록 강사들을 설득하는 한편, 이 책을 100권 이상 보유하도록 서적 판매인 필리프로레(Philip Loré) 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칼뱅이 주해 대상으로 선택한 세네카의 이 논문은 에라스뮈스가 1515 년에 편찬한 세네카 전집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에라스뮈스는 히에로니무스의 저술과 신약성경 편찬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네카의 저술을 편찬하는 작업에 충분한 시간과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에라스뮈스는 1529년 1월에 개정판을 출간했다. 칼뱅이 관심을 가진 것은 이 개정판이었다. 아마도 책의 서문 때문이었을 것이다. 에라스뮈스는 자신이 출간한 세네카 저술을 개선할 능력과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누구든 환영한다고 정중히 요청했다. 그것은 명백히 달성할 수 없는 과업에 도전하라는 초대였다. 칼뱅은 학계의 인정을 받을 목적으로 이 도전에 응했다. 그것은 칼뱅의 미숙함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다른 이들은 그것이 불가능한 작업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감히 도전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은 독이 든 성배였다. 문헌 학자로서 칼뱅의 경력은 이 작품과 함께 시작되었고 이 작품과 함께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칼뱅은 세네카 주석으로 부도 명성도 얻지 못했다. 만약 남은 경력을 계속 그 일에 허비했다면, 칼뱅은 고전학 역사에서 가끔 언급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사람들 뇌리에서 완전히 잊힌 채로 은퇴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고대의 역사와 문헌과 문화에 관한 탄탄한 기초를 보여 준다. 칼뱅은 이 작품에서 55명의 라틴어 작가와 22명의 그리스어 작가를 언급한다. 대부분의 인용구를 아울루스 겔리우스 Aulus Gellius의 《아테네의 밤Attic Nights》이나 기욤 뷔데의 《그리스어 해설지》 같은 기존 편집물에서 발췌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인상적인 수치는 아니다. 요즘으로 치면 《옥스퍼드 인용구 사전 Oxford Dictionary of Quotations>에서 필요한 인용구를 발췌해 쓰는 것에 견줄 만한 수준이다." 그러나 인용문을 원전에서 발췌하는 대신 편집물에서 재인용했다 하더라도, 이 작품에는 자료를 다루는 칼뱅의 놀라운 솜씨와 창의력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주석이 의미 있는 이유는 말로 설득하는 능력이 뛰어난 칼뱅의 면모를 잘 보여 준다는 데 있다. 이 초기 작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 인간의 말을 통달한 미래의 웅변가를 엿볼 수 있다. 칼뱅은 자신이 아주 적절한 예증과 잘 다듬은 구절, 우아한 표현, 신중하게 생각해 낸 명문구를 즐기는 사람임을 여러 번 증명한다. (심지어 칼뱅은 세네카가 이따금 횡설수설하듯 글을 쓴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칼뱅이 의사소통의 용이성, 다시 말해서 화자와 청자, 저자와 독자 사이에 다리를 놓는 능력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 이 작품 전반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앵글로색슨족은 '수사라는 표현을 삼가는 대신, 그보다 더 길고 복잡한 '의사소통의 이론과 기술'이라는 표현을 더 괜찮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두 용어는 수사학이라는 동일한 학문을 지칭하고, 칼뱅은 겨우 20대 초반에 이미 이 학문을 통달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이 학문은 훗날 칼뱅이 종교개혁 투쟁을 아주 성공적으로 펼쳐 나가는 무기가 되었다.
평론가들 중에는 세네카 주석이 종국에는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나무를 키워 낼 작은 겨자씨였다고 말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칼뱅이 세네카의 논문을 해설할 때 활용한 방법론을 두고는 이런 평가를 내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방법론을 통해 얻은 결과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평가하기 어렵다. 이 작품에서 칼뱅은 본질보다 표현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용 면에서는 따분하고 새로울 것이 전혀 없는데, 표현 면에서는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요소가 눈에 띄는 이유도 아마 이런 집착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주석에서 칼뱅은 구절 또는 단어의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 언어학적 설명을 제시하는 한편, 단어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문법과 수사학을 동원한다. 그리고 세네카의 다른 저술들은 물론이고 고대의 다른 자료들에서 사용된 용어나 구절을 나란히 보여 주는 방식으로 해석을 최종적으로 다듬었다. 그리스어 단어에 관한 인상적인 어원 연구 사이에 라틴어 용어와 구절에 관한 박식한 설명이 풍부하게 들어가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단어와 언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쓴 글이라는 인상이 풍긴다. 그 때문에 이런 표현을 통해 전달하는 사상이 배경으로 밀려나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만약 칼뱅이 문헌에 접근하는 이 엄격한 과정의 결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아마도 칼뱅이 본질보다는 방법론에 과도하게 관심을 쏟은 탓일 것이다. 끊임없이 문학적 · 역사적 맥락에서 본문을 설명하려는 이런 태도는 훗날 공들인 설교와 성경 해석 작업을 뒷받침해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훗날 성경을 해석할 때는 오히려 본문의 본질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넋을 잃고 매료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서 해설에는 본문에 대한 헌신, 본질에 관한 관심의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는 세네카의 논문을 해설한 진부한 연구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다.
1532년 5월 하반기에 칼뱅은 파리를 떠나 오를레앙으로 향했다. 아마도 법학 공부를 마무리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칼뱅은 1533년 5월 또는 6월에 오를레앙대학에서 피카르디 나시옹의 '임기 1년의 검사 대리'로 재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직책의 정확한 성격은 불분명하지만(명예직이자 행정직이었던 것 같다), 1532-1533년에 걸쳐한 학년도 내내 이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학년도가 끝난 뒤에 칼뱅은 고향인 누아용으로 돌아간 듯하다. 1533년 8월에 주교좌성당 참사회 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두 달 뒤, 칼뱅은 파리에 머무르게 된다.
1533년의 파리
여러모로 당시 파리대학교의 상황은 칼뱅이 처음 파리에서 공부할때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루터주의로 간주할 수 있는 모든 견해와 의심스러운 정설을 향한 적대감이 강했다" 1530년 4월 30일,"그리스어, 히브리어, 그 밖의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성경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제언은 언어도단이라며 신학부에서 강하게 비난했다. 신학부에서 이런 비판을 내놓은 이유는 콜레주 루아얄 교수들(기욤 뷔데, 니콜라 콥, 피에르 다녜Pierre Danès, 프랑수아바타블François Vatable)의 권위를 약화하려는 시도로 흔히 풀이된다. 콜레주루아얄은 나중에 콜레주 드 프랑스가 되었고, 콜레주 드 프랑스는 여전히 스콜라철학이라는 익숙한 옛날방식을 고수하는 파리대학교 안에서 인문주의를 수호하는 보루 역할을 했다. 1532년 2월 1일, 신학부는 에티엔 르 쿠르(Étienne Le Court)가 내세운 불온한 교리들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에티엔 르쿠르가 제안한 교리들 가운데는 “이제 하나님은 프랑스어로 된 성경을 주시고, 여성이 주교의 직무를 맡고 주교들이 여성의 직무를 맡게 하시려는 의지를 갖고 계신다. 여성들은 복음을 전할 것이고, 주교들은 어린 소녀들과 잡담(broderont)을 나눌 것이다"라는 급진적인 제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신학부에서는 인문주의자들이 정설을 이해하는 방식이 너무 앞서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1528년부터 1535 년 사이에 신학 교수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532년, 오랫동안 거침없이 신학 교수들을 비판해 온 장 뒤 벨레 (Jean du Bellay)가 파리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파리대학교 신학부와 파리 고등법원 사이의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프랑수아 1세와 신학부의 관계도 껄끄러웠다. 파리대학교 신학부는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를 놓고 프랑수아 1세와 대립하다 패했고,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가 사망한 뒤 복음주의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그의 누나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Marguerite de Navarre) 의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을 불안한 마음으로 주시했다. 마르그리트의 후원 아래 복음주의자 제라르 루셀(Gérard Roussel)이 1533년 사순절 기간에 설교로 대규모 군중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설교자들도 루셀의 사상과 말씨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루셀의 영향을 심히 우려한 신학부에서는 1533년 3월 29일에 '루터주의의 오류와 비뚤어진 교리'를 반박하는 설교를 하면서 숫자 6을 거론했다. 이런 움직임은 아주 제한적이나마 성공을 거뒀다. 신학부에서는 루셀을 이단으로 기소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파리 주교 대리의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는 프랑수아 1세의 누이다. 가톨릭 교회 권력의 압박으로부터 인문주의자와 초기 종교개혁가를 보호하고 복음주의 운동에 협력했다.
승인 아래 정보 수집 작업에 돌입했다. 그해 4월, 청중들 중 일부가루셀의 설교에 유달리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는 그런 이단 재판이 루셀의 후원자인 누나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당시 임신 중이었다)에게 불러올 잠재적 결과를 염려했다. 1533년 5월13일, 프랑수아 1세는 루셀을 비판하는 일부 세력과 파리대학교 신학부 이사인 노엘 베디에에게 파리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학장과 부학장 등 기존 상급 교직원의 업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불만 때문에 1520년 5월 5일에이사라는 직책을 만들었다. 이사로 초빙된 베디에는 신학부를 효율적으로 이끌어 왔으며,1533년까지 사실상 이 자리를 지켰다.)
사람들은 이 사건으로 신학부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학부에서는 신속히 새로운 이사를 선출했고, 10월에는 마르그리트의 시 <죄 많은 영혼의 거울(Miroir de l'ame péchteresse)〉을 비판함으로써 프랑수아 1세에게 앙갚음을 하는 듯했다(고등법원에서 정한 대로 출판업자는 응당 출간할 작품을 신학부에 제출해서 승인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이 절차를 무시했다는 주장이었다)." 10월 1일에 신학 교수들의 근거지로 유명한 콜레주 드 나바르의 학생들이 이 인쇄물을 연극으로 올리려 했기 때문에 더욱 그런 인상이 강해졌다. 이 연극에서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는 미친 듯이 성경을 읽는 가정주부로 묘사되었다. 칼뱅은 '자신의 형제이자 좋은 친구이며 오를레앙의 법률가인 [프랑수아] 다니엘 씨'에게 편지로 이 사건들을 이야기하면서 재미있어했다. 칼뱅은 이 편지에서 마치 큰일을 함께 모의하는 상대에게 경의를 표하듯 아주 은근하게 'M. G.'를 언급하는데, 이는 칼뱅이 '제라르 [루셀] 씨(Monsieur Gérard)’의복음주의적 견해에 호의적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루셀이 연관된 온건한 개혁 프로그램과 칼뱅의 입장이 어느 정도 일치했음을 가리킨다.
1533년 10월이 거의 끝나 갈 무렵, 파리에서는 개혁 분위기와 상충하는 징후들이 나타났다. 신학부에서는 루터주의와 인문주의에 여전히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기세는 꺾인 듯했다. 한편 프랑수아 1세는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복음주의 견해를 참작하는 방향으로 점차 기울었고,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이나, 루셀 같은 데타플의 제자들과 연계된 온건한 개혁을 지지하는 견해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가톨릭교회의 영적 상태를 무척이나 염려했고, 자신들이 가톨릭교회 안에서 교회를 갱신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훗날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개혁가'는 아니었다" 개혁의 명분에 동조하는 이들은 이런 긍정적 징후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복음주의자들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굳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불길한 지표들을 쉽게 간과했다. 니콜라 콥은 1533 년 가을에 파리대학교 신임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취임사를 통해 교회 개혁과 갱신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로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결심은 파국을 부르는 판단 착오였다.
만성절 연설
1533년 11월 1일, 니콜라 콥은 새 학기의 시작을 알리는 관례적인 연설을 했다. 테오도르 드 베즈의 지휘 아래 1580년에 제네바에서 작업한 《프랑스 개혁 교회의 역사Histoire ecclésiastique des églises reformées auroyaume de France》 최종판이 출간된 이후, 니콜라 콥의 연설이 '마튀랭의 교회'에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칼뱅의 파리 체류 기간과 관련하여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새 학기의 시작을 알리는 연설은 전통적으로 신학부 정기 모임 장소인 성 마튀랭의 삼위일체 수도회 예배당에서 이루어졌지만, 1533년에는 허리에 꼭 노끈을 둘러매서 흔히 '코르들리에회'로 알려진 '프란체스코회 원시 회칙 준수파'의 예배당에서 이루어졌다. (연설 장소는 1533년 12월 9일에 로드리고 만리케Roderigo Manrique가 루이스 비베스 Luis Vivés에게 보낸 편지에 명시되어 있다. 코르들리에회에서 니콜라 콥의 연설을 가장 먼저 비판한 이유도 이것으로 설명된다.)
이 연설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제안은 온건했고(제라르 루셀의 입장과 비슷한 르페브르파의 견해를 반영했다) 신학은 새롭지 않았지만(에라스뮈스와 루터의 견해를 살짝 걸치긴 했지만 동정녀 마리아를 향한 기도와 같은 전통 가톨릭의 소재를 많이 담고 있었다), 청중들은 그 연설을 불쾌하고 무절제한 연설로 받아들였다. 이런 격렬한 반응이 나온 이유는 역사적 관점에서 풀어야 할 문제다. 그러나 그 연설에 종교개혁 원칙에 충실했던 자가 연설문을 작성했다는 흔적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청중의 반응이 이토록 격렬했던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 흔적이 드러났다고 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이 사건이 있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쓴 글에서 로드리고 만리케는 이 연설이 파리 사회 전반에서 격렬한 분노를 촉발했다고 설명한다."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가 니콜라 콥을 대신해 진화에 나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11월 19일, 파리대학교 총장은 니콜라 콥의 바로 앞 전임자였던 포르투갈 교수 안드레아스 드 고베이아(Andreas de Gouveia)로 교체되었다. 전임 총장 니콜라 콥은 다음 날 고등법원에 출석해야 했다. 당시 파리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니콜라 콥은 나타나지 않았다. 12월 13일, 리옹에서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난 프랑수아 1세는 니콜라 콥이 파리를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둔 고등법원 담당자를 체명령을 내렸다"
이 취임 연설 사본 두 개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제네바에서 발견된 사본은 칼뱅이 직접 필사한 원고로 몇 쪽이 누락된 듯하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발견된 또 다른 사본은 16세기에 필사한 원고로 연설 전문이 담겨 있지만, 문법이 맞지 않는 문장이 다수 있는 것으로 보아 미상의 원본을 대충 필사한 것으로 짐작된다. 후자의 필적과 니콜라 콥이 마르틴 부처 Martin Bucer에게 보낸 1534년 4월 5일자 편지의 필적을 비교해 본 결과 전문이 담긴 이 원고는 니콜라 콥이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원고가 연설문의 원본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첫째, 이 원고는 라인란트 북부 지방에서 생산한종이에 쓰여 있다. 아마도 바젤로 추정된다(이는 니콜라 콥이 1534년 바젤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이 원고를 필사했음을 암시한다). 독일 인문주의자 뮈코니우스 Myconius가 바젤에서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동료들에게 쓴1539년 11월 9일 자 편지를 스트라스부르 기록 보관원 장 로트 JeanRott 가 발견했는데, 이 편지지에 스트라스부르에서 발견된 연설문사본 3 면과 4면에 찍혀 있는 독특한 투명무늬와 동일한 무늬가 찍혀 있었다. 둘째, 현존하는 두 원고의 본문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연구한 결과, 둘 다 사라진 원본을 필사한 사본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둘 중에는 제네바에서 발견된 사본의 품질이 더 나았다.
칼뱅 역시 1533년 11월 마지막 두 주 동안 파리를 떠나 있기로 결정했다" 12월 초에는 파리로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니콜라 콥 사건의 여파로 칼뱅이 자신도 파리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는 뭐였을까? 칼뱅이 그 연설문의 저자라거나, 선동적인 연설문을 작성하는 데 칼뱅이 어떤 식으로든 관여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당대의 자료는 전혀 없다. (테오도르 드 베즈가 쓴 칼뱅 전기의 1575 년도 개정판에 칼뱅이 그 연설문을 작성했다는 암시가 처음 등장하지만 근거없는 이야기다. 사실, 앞의 질문에 답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니콜라 콥 사건의 여파로 당국은 '루터'의 사상에 동조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최소 50명에 대해 법적인 조치에 나섰다. 파리에 남아 있었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칼뱅도 법적인 처분을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더 흥미로운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다. 칼뱅이 니콜라 콥의 연설문을 실제로 작성했을 가능성 말이다. 이 가능성에 관한 증거는 암시적일 뿐 확실하지는 않다. 만약 그 연설문이 칼뱅의 작품이라면, 칼뱅은 자신의 문체를 훗날 개발한 셈이다. 그 연설문을 칼뱅의 작품으로 돌린다고 해서 칼뱅에게 문학적 명예나 신학적 명예가 생기지는 않는다. 또한 이 연설문에는 훗날의 종교개혁가 칼뱅의 특성이라 할 수 없는 신학적 태도가 담겨 있다. 그러나 초창기에 칼뱅이 이런 견해를 보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이유도 딱히 없어 보인다. 초창기에 칼뱅은 좀 더 온건한 개혁을 추구하는 '르페브르파'의 구상에 동조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칼뱅이 왜 이 연설문을 자기 손으로 필사했어야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런 행동을 할만큼 연설문이 칼뱅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던 걸까? 그 필사본의 존재는 니콜라 콥의 연설이 칼뱅의 마음에 반향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칼뱅의 신앙 형성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칼뱅의 신앙 형성을 둘러싼 핵심 질문은 인문주의자에서 종교개혁가로의 변신에 관한 것이다. 칼뱅이 온건한 르페브르파 개혁 프로그램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의 이름과 연관된 더 급진적인 행동 강령을 채택한 때는 과연 어느 시점일까? 칼뱅이 이런 결정을 내린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칼뱅의 '갑작스런 회심'의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갑작스럽고 그 영향이 지대하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이라는 대의에 오롯이 헌신하겠다는 대이변에 가까운 비가역적 결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