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속의 섬 영주 무섬마을 둘레길 트레킹 #2
08:02 수도교를 건너 무섬마을 입구에 도착한다.
양반마을로 유명한 봉화 닭실마을과 안동 하회마을에 이웃한 양반마을이자
선비마을인 영주 무섬마을은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있는 전통마을이다.
무섬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수도리(水島里)'의 우리말 이름이다.
수도리는 이름 그대로 내성천이 마을의 3면을 감싸 안고 흐르고 있는데
중국 섬계 지역의 지형과 비슷하다고 하여 '섬계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안동 하회마을을 연상시키는 영주 무섬마을은 휘감아 도는 맑은 강을 따라 은백색 백사장이 반짝이듯 펼쳐지며
소나무와 사철나무 등이 숲을 이룬 고즈넉한 산들이 강을 감싸 안고 이어지는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평화롭고 고요한 마을이다.
이런 아름다운 마을의 역사는 16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남(潘南) 박씨인 휘(諱)수가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후 선성(宣城) 김씨가 들어와
박씨 문중과 혼인하면서 오늘날까지 두 집안의 집성촌으로 남아있다.
40여 가구 전통가옥이 지붕을 맞대고 오순도순 마을을 이루는 무섬마을은 수백 년의 역사와 전통이 오롯이 남아있다.
이 중 30여 채가 조선 후기 사대부가 가옥이며, 역사가 100여년이 넘는 가옥도 16채나 남아있어 조상들의 자취와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특히 경북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인 'ㅁ'자형 전통가옥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라 하겠다.
그리고 30년전까지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던 유일한 통로, 외나무다리가 마을의 대표 상징물로서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천지인 전통사상 체험관 종합안내도
영주 무섬마을은 조선 중기 17세기 중반 입향시조(入鄕始祖)인 박수(朴燧)와 김대(金臺)가 들어와 자리를 잡은 이래
반남박씨(潘南朴氏)와 선성김씨(宣城金氏)가 세거하고 있는 전통마을이다.
산수의 경치가 절경을 이루고, 해우당고택, 만죽재고택 등 격식을 갖춘 전통가옥과 다양한 양식의 가옥들이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2013년 8월 23일 마을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무섬마을 관광안내소
장근석. 윤아 주연의 KBS 월화드라마 사랑비(2012)를 이곳 무섬마을에서 촬영하였다.
치류정(峙流亭)
영주 무섬마을 주차장 옆에 설치한 공용 화장실
<선비의 품격 도약하는 영주>
아도서숙(亞島書塾)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박씨와 김씨 집성촌인 무섬마을의 뜻있는 주민들에 의해 세워져
항일운동의 지역 구심체 역할을 하다가 1933년에 일제에 의해 소각되었으나
후손들의 열정과 영주시의 지원으로 2014년에 다시 복원을 하였으며 2022년 11월 15일 현판제막식을 가졌다고 하며
5명의 독립운동유공자를 배출한 곳이어서 마을 단위로는 전국에서 제일 많은 독립운동유공자를 배출하였다 하고
그 외에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아도서숙(亞島書塾)은 1928년 10월 무렵 김화진(金華鎭)이 영주군 평은면 수도리에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김화진은 일본 유학을 다녀와 영주청년동맹과 신간회 영주지회에서 활동하던 인물이다.
무섬마을로 불리는 수도리는 선성 김씨(宣城 金氏)와 반남 박씨(潘南 朴氏)의 동성마을이었기 때문에 학교는 이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김화진·김종진(金鍾鎭)·김성규(金性奎)·김종규(金宗奎)·김계진(金季鎭)·김명진(金命鎭)·김광진(金光鎭)·김희규(金熙奎)·박찬하(朴贊夏) 등이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 운영위원들은 모두 영주청년동맹 회원이었으며 일부는 신간회 영주지회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와 안동콤그룹과도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학교의 명칭은 '아세아의 조선반도 내 수도리'를 의미하였고, 아동의 빈약한 교육현실 극복과 민족교육을 실시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이에 따라 아도서숙은 문맹퇴치, 우리글 교육, 민족정신 고취 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와 안동콤그룹 조직이 드러나면서 위기를 맞게 되었으며
1933년 7월 일제에 의해 폐쇄되었다.
청국장 정식으로 유명한 무섬식당
해우당(해우당) 古宅
해우당 고택은 예안 또는 선성 金氏 입향조 金臺 (김대)의 셋째 손자 김영각이 1830년에 建立하였고
의금부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 (金樂灃)이 고종 16년 (1879년)에 중수 한 산림집이다.
김낙풍의 曾孫子로 이 지역 抗一운동 지도자였던 김화진 (金華鎭)의 生家이기도 하다.
"海愚堂" 이란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로 有名하다.
해우당 사랑채
수도교
1979년에 차량 통행이 가능한 이 수도교가 건설됨으로 인해 약 330년 동안 무섬마을 주민들에게 헌신해왔던
외나무다리의 고단했던 짐이 가벼워졌고 외나무다리가 지금은 아련한 향수를 느껴볼 수 있는 아름다운 문화재가 되었다.
반남박씨 판관공파 청퇴정 방향 표시석
08:17 청태정(淸退亭)
마을 안쪽에 위치한 정자 청퇴정은 40여 년 동안 관직 생활을 하며 병조참판까지 역임한 오헌 박제연 선생이
흥선대원군에 따르지 않고 물러난 것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이층 정자라고 한다.
정자가 지어질 당시에는 흰색 재질의 석조 정자였으나
무섬마을이 국가 재정 민속문화재 마을로 지정된 이후 붉은색 페인트가 칠해졌다.
五軒 박제연(朴濟淵) 詩碑 '나의 조용한 삶'
평온한 시냇가 한 구비 물가에다 조용한 나의 살 곳 정했도다
초원 모래톱엔 송아지 잠들고 밝은 모래밭엔 해오라기가 평온하네
신빛은 마땅히 나의 집 비추고 물굽이 감기는 곳 난간이 떠 있는듯
어부와 나무꾼 이야기도 끝나기 전 어느새 둥근달 누각위에 떠 있네
김성규 가옥(조지훈 처가)
해우당 옆의 晩雲古宅(만운고택)은 시인 조지훈의 처가로
그의 대학 시절 그의 아내가 되기 전 김난희를 찾아와서 시심을 키우고는 했던 곳이라 한다.
만운고택은 유실되었던 가옥을 복원한 것으로 독립운동가인 김성규의 집이라고 한다.
晩竹齊 (만죽재) 고택
만죽재는 무섬마을 입향시조인 박수가 1666년에 건립한 집으로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수수하면서도 단아한 고택이었다.
처음의 당호는 섬계당, 이후 섬계초당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가 이 집이 중수되면서 지금의 당호인 만죽제가 되었다고 한다.
건립 당시의 ‘ㅁ’자 집 구조가 그대로 유지된 고택으로 무섬마을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조선 후기 양반 사대부 집안의 가옥 구조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넓은 마당과 아름다운 후원이 있는 오헌고택
오헌 고택의 마을 안길을 걸어 올라가면 마당이 꽤 넓은 고택으로 들어선다.
爲堂(위당)이라는 편액이 걸린 이 고택은 집도 마당 앞 정원도 아름답다.
초가카페
무송헌 종택
撫松軒 宗宅 사랑채
무송헌 종택 祠堂
무섬자료 전시관
영주 무섬마을 청룡자락 끝에는 예전에 텃밭으로 쓰던 곳인데 이곳에 무섬자료전시관을 세웠다.
무섬마을에 대한 내력과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무섬자료전시관 앞에 있는 섬계 박선생 시비
박제익(1806 ~ 1841년) (왼쪽)
자 학중, 호는 섬계이다. 박수의 5대 주손이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사서삼경을 소년의 나이에 완성하였다.
영주시에서 복원한 만죽재 내에 있는 섬계초당은 당시 후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설립한 서당으로 만죽재의 이전 당호는 섬계초당이었다.
섬계 박제익이 학문을 연구하던 곳으로 이곳에서 섬계회를 주최하여 계회에 참석한 선비들과 시문을 나누었다.
일찍 돌아가셔서 후학의 계보는 잇지 못하였으나 후대에 미친 글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문장이 영남일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벼슬보다는 선비로서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였다(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무섬자료전시관 앞에 있는 조지훈의 별리 시비 '별리(別離)'- 조지훈(오른쪽)>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나즉히 흰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 말 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連峰)을 바라보나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 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 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고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 꺾어서 채찍 삼고 가옵신 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