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물리적인 객관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몸의 관점에서, 공간 속의 모습들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것을 보고는 이것에다가 시간이라고 이름 붙인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공간과 물질이 없으면 시간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공간과 물질은 객관적 실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공간은 3차원 테두리를 가진 모습을 출몰시키기 위한 바탕화면이므로 두 개 이상의 모습이 없으면 공간 역시 없습니다. 둘 이상의 모습이 나타나면 동시에 공간이 생깁니다. 공간이 있고 그와 별개로 물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간은 물질이 나타나기 전부터 물질을 담을 준비를 하며 기다리고 있는 물리적 실체가 아닙니다. 물질과 공간은 동시에 나타나고 동시에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같은 것입니다. 물질과 공간은 서로를 창조하고 소멸하는 반대 쌍으로서 우리(의식)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물질-공간 복합체에 의지하며 이들과 융합되어 있으므로 세상 만물(몸-물질-시공간)은 우리(의식) 안에 있습니다. 몸과 만물과 시공간은 다름이 아니라 곧 우리(의식)입니다.
다음과 같은 비유들은 시공간의 상대적 성질을 잘 드러냅니다. 길이가 매우 긴 한 오라기 실의 한쪽 끝이 다른 쪽 끝에 가닿는 데 필요한 시간과 공간은 어느 정도일까요. 하나의 실이기 때문에 실의 모든 부분은 이미 모든 부분에 도착해 있습니다. 그래서 도달에 필요한 시간과 공간은 없습니다. 이것은 실의 길이가 천억의 천억 광년이라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매우 길고 넓은 한 장의 그림의 한쪽에 그려져 있는 사람이 그림의 다른 쪽에 가닿으려면 얼마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할까요. 역시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 장의 그림 안의 모든 장소는 이미 모든 장소에 도달해 있기 때문입니다. 태평양의 한쪽 동해가 다른 쪽 캘리포니아 앞바다에 가닿기 위해서는 얼마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할까요. 태평양의 모든 바다는 이미 태평양의 모든 바다에 도착해 있으므로 그런 것은 없어도 무방합니다. 왼팔이 오른팔에 가닿는 데는 아무런 방법도 시공간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데 영화 속의 주인공이 서울에서 출발하여 때로는 배와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때로는 걸어서 미국 뉴욕까지 몰고 먼 길을 6개월에 걸쳐서 도착했다고 할 때, 주인공이 이동하는데 필요했던 시간과 공간은 얼마입니까. 실제로는 주인공이든 무엇이든 불문하고 시간과 공간 속을 이동하는 일은 전혀 없으며 다만 움직이지 않는 스크린 위에서 빛이 만들어내는 광경들만이 연속해서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주인공이 뉴욕에 가닿는 데 필요한 시간과 공간은 없는 것이며 그 이유는 영화 속의 모든 것은 이미 영화 속에 도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꿈속에서 먼 곳으로 여행하거나 꿈속 밤하늘의 별빛을 본다고 할 때 사실은 시공간을 통과해서 여행하는 일도 없고 별빛이 수백만년 전에 출발하는 일도 없고 그 별빛이 이제야 지구에 도달하는 일도 없습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꿈꾸는 투명한 의식(우리) 안에서 장면전환이 연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꿈속의 모든 것은 꿈 이외 다른 것일 수 없으며 꿈속의 나와 사물과 시공간은 동질의 꿈일 뿐입니다. 따라서 꿈의 모든 것은 이미 꿈의 모든 곳에 도착해 있으므로 먼 목적지에 가닿거나 별빛이 눈에 와닿는 데는 즉 꿈이 꿈에 도달하는 데는 아무런 시간도 공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꿈속 교차로에서 어떤 사람이 “꿈(꾸는 의식)에 도달하는 올바른 길은 어떤 길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모든 길이 올바른 길입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진실은 낮의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밤의 꿈은 작은 꿈이고 낮의 현실은 큰 꿈이기 때문입니다. 낮에 나타나는 몸과 사물과 시간과 공간은 부동 불변의 투명한 의식 안에서 출몰과 생사를 반복합니다. 의식 안에 있는 모든 것 일체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이미 모든 곳에 가닿아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시공간도 이미 모든 시공간에 도착해 있다는 진실로 인하여 몸과 태양과 달과 별과 멀고 먼 목적지와 삶과 죽음 이들 서로는 서로에게 이미 도달해 있으며 그렇게 되는 데 필요한 방법과 시간과 공간은 전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즉 의식이 의식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시공간의 값은 제로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과거 미래 전생 후생 탄생 죽음 여기 저기 거기 한국 미국 지구 태양계 은하계 등 다양한 시간 혹은 공간은 거대한 연극을 위해서 (언어와 생각으로)애써 만들어낸 거짓 이야기며 다만 유일한 진실은 시간은 ‘동시’(同時)뿐이고 공간은 ‘이곳’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족을 붙이자면, ‘동시’와 ‘이곳’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Being : 의식이다)
이런 말들은 종종 공허하게 들릴 수 있으므로 다음과 같은 물음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주를 창조했고 시공간이 마음 안에 들어있다는 식의 말은 누구라도 할 수 있어, 하지만 뭐 하나도 진짜로 증명할 수는 없잖아? 증거가 하나라도 있느냐 말이야, 길거리에 있는 ‘도를 아십니까’라든지 뉴에이지나 사변철학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군!”
이것은 어떤 생각이나 이론이 아닙니다. 간단하고 명료하게 최대한 이것을 증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과거는 기억 이외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기억상실증이 걸린 사람에게 과거는 없습니다. 미래는 추측이나 상상 이외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언어소통 능력이 없는 동물들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사건을 가상으로 떠올려 시험해 보는 일을 할 수 없고 따라서 그들에게 미래란 없습니다. 지난 일이든 다가올 일이든 불문하고 모든 일은 반드시 지금에서만 일어났었고 또 일어날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에 일어날 수 없으며 미래는 미래에 일어날 수 없습니다. 기억과 상상은 항상 지금 일어납니다. 그래서 시간이라는 것은 곧 매 순간 지금이며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누구나 몇 번쯤은 멀리 여행을 합니다. 즉 몸의 상대적 위치를 바꾸는 공간이동을 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여행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기대한 것과는 달리 여전히 우리(의식)는 변함없이 그대로라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몸은 실제로 엄청난 거리를 이동했고 주변 환경의 변화는 매우 심각함에도 우리(의식)가 불변을 느끼는 이유는 공간 안에 우리(의식)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식) 안에 몸과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 중에 언제 한번 눈을 감고 잠시 움직이거나 걸어 본다면 여행에서와 같이 불변의 느낌(몸은 움직일지언정 우리(의식)는 전혀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을 받을 것입니다. (Being : 한 발짝도 움직인 바가 없다)
우리는 매일 밤 꿈도 없는 깊은 잠으로 여행합니다. 이 여행의 목적지에 도착하면 몸도 물질도 시공간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우리(의식)는 여전히 불변으로 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어젯밤에 잘 잤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실들은 아침에 누가 우리(의식)에게 알려줘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식)가 직접 체험해서 아는 지식입니다. 깊은 잠에는 자아(몸-생각)도 없었는데 도대체 누가 체험해서 아는 것일까요. 따라서 우리(의식)는 몸이 아니라 아는 자로서 의식이며, 시공간이 사라져도 우리(의식)는 여전히 불변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직접 체험에 의한 참된 사실이기 때문에, 이로써 우리(의식) 안에 시공간이 있다는 말과 우리(의식)가 세계의 창조자라는 말은 증명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출처 : "자유롭게 살고 유쾌하게 죽기", 이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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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