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을 살까 / 배혜경
"새것이 이렇게 좋기도 하네." 오래된 것을 좋아하고 그걸 버리지 못하는 남자가 커피 드립할 물을 포트에 붓고 스위치를 내리며 한마디 한다. 하얀색 물건 하나로 주방이 환해 보이고 기분까지 산뜻해지니 그런 말이 나올 법하다. 왠지 커피 맛도 더 신선하게 느껴진다.
오래 사용하던 전기포트가 갑자기 고장 났다. 고쳐 쓸까 하다 수명이 다한 것 같아 그냥 버리기로 했다. 요즘은 물건을 구매할 때도 손쉽고 빠르다. 발품 팔 필요 없이 눈과 손가락만으로 고를 수 있다. 실물을 보는 게 아니니 실패하기도 쉬워 상세설명과 리뷰까지 요모조모 살펴봐야 한다. 반품이나 교환도 가능하지만 시간도 들고 귀찮은 일이다. 손바닥 안의 상점에서 몇 가지 눈에 드는 제품 중 하나를 골라 주문했고, 다음날 바로 문 앞에 물건이 당도했다.
한 해가 저물면 어김없이 새해가 온다. 매일 뜨는 해를 단 한 번뿐인 것처럼 맞이하고 벅찬 마음에 복된 말을 주고받는다. 연속선 상에 있는 시간이 달력을 바꾸어 건다고 해서 새것일 리야…. 그럼에도 내일이면 새날을 맞이하듯 새해를 축복하고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새 마음을 먹고자 하는 건 영원을 살지 못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숙제 같은 게 아닐까. 시시포스의 그것처럼 반복하여 절망을 맛보고 또다시 시도하며 견디고 나아가야 한다는 걸 알기에.
새해를 맞아 작심삼일을 사흘마다 반복하라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로 우리의 계획은 일그러지기 쉽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더 많다는 걸 깨닫기 전에 다행히도 두어 달의 유예기간이 있다. 그래서 안심이 된다면 게으른 자의 변명일지 모른다. 해가 바뀌어도 완전히 새것이라는 느낌이 들기엔 부족한 채로 동면하는 곰처럼 한껏 웅크려 잠을 자다 보면 어느새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어제와 다른 숨결을 내쉬고 있다.
바야흐로 새봄이 찾아온다. 잠에서 깨어나 서서히 동굴 밖으로 나올 시간이다.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긴다. 뒷걸음질할 수 없는 엄중한 시간이다. 새봄이 우리를 호출하는 방식은 다양한데,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처음 맞는 얼굴을 하고 기시감처럼 다가온다. 사계절 중 '새'를 붙여 한 낱말로 굳어진 유일한 계절이 봄이다. 희망의 미소를 짓는 새봄은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존재한다. 이것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던 일 앞에 새봄이 찾아오고 끝일 것 같던 어떤 일 앞에도 새봄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가까이 온다.
새해 첫 달의 마지막 날, 아버지가 응급실에 실려 갔다. 한밤에 욕실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구급차가 오고 발열이 있어 코로나 감염으로 의심되어 음압병동으로 옮겨 갔다. 새벽 세 시에 걸려온 전화 너머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제는 정신이 드셨다고…. 음성으로 판정되어 일반 병실로 옮기고도 사흘을 더 계셨다.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 이상증세를 발견하지 못해 엿새 만에 퇴원했다. 천식을 제외하면 구순에 장기臟器 나쁜 곳이 없으니 다행이지만 건장했던 아버지가 정말로 이제는 나이 드셨구나, 실감했다. 지금은 기력도 회복되어 잘 드시고 평안해져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코로나로 주보호자 한 명만 병실 출입이 가능했다. 병원 로비에서 "검사받으러 들어가는데 보청기랑 틀니랑 다 빼고 나니 사람이 빈털터리더라."고 말하는 어머니 눈동자가 기우뚱했다. 늙은 남편을 간호하느라 엿새를 병실에 계신 어머니도 노인이라 힘드셨을 거다. 어디 아프다는 말을 안 하시는 어머니가 매일 드시는 약도 10가지가 넘는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의 할머니는 변해 버린 사랑 앞에서 아파하는 다 큰 손자 녀석에게 하얀 손수건에 싼 알사탕을 내민다. 알사탕을 한입 가득 물면 울음이 울어지지 않는다. 눈알이 알사탕만큼 커지고 달달한 맛을 굴리며 혀가 녹는다. 플라시보 효과!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연분홍 치맛자락을 봄바람에 나부끼며 먼 곳으로 휘적휘적 떠나 버린다.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그곳이 있어 우리 삶은 매일 새봄처럼 살아볼 만한 것인지 모른다.
건망증이 심해진 어머니를 모시고 며칠 전 치매안심센터에 갔다. 검사 결과, 인지력이 평균보다 더 좋다. 또한 다행이다. 건망증은 뇌의 노화 증상이므로 신체운동을 조금씩 하는 게 도움된다는 처방을 받았다. 3년 정도 더 글을 쓰면 원로작가가 된다며 "끝까지 써야지."라고 말하는 어머니는 젊다. 30년째 서예와 문인화를 하며 생의 징글징글한 욕망을 다스리는 그 마음을 헤아려본다. 청력도 안 좋아진 두 분이 이러쿵저러쿵 동문서답 나누는 대화에 나는 웃음꽃을 피워 화답했다. 무탈하게 소박한 기쁨 나누며 여생을 사시길 마음속으로 바라며 돌아오는 길에 차창을 내리니 거리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새봄은 늘 그저 오지만 값을 지불하지도 대접을 제대로 해 주지도 못한 것 같다. 몸의 계절이 바뀌는 걸 실감하는 올해는 소중한 새 물건 하나 사들인 것처럼 마음에 새봄을 사들인다. 작아도 가치 있는 우리의 새봄이길 조심스레 바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