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진 감독의 세 번째 영화 <곡성>을 보았습니다.
1. 달콤한 케이크가 먹고 싶어지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나 ‘나홍진’ 감독의 영화를 아시는 분들이라면 뜬금없는 소리로 들릴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곡성>을 보고 나서 아주 부드럽고 달콤한 크림이 올라간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습니다.
저 스스로도 뜬금없긴 했습니다만, 3시간 가까이 젖어들었던 <곡성>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였습니다.
입안에 케이크의 부드러움과 달콤함이 들어오면 <인셉션>의 ‘킥’처럼 <곡성>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크림이 빵빵하게 가득한 크림빵을 입 안으로 밀어넣는 것으로 케이크를 대신 하긴 했습니다.
2. 아주 쎈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쨍쨍하게 내려쬐는 5월의 햇살이 물색 없어보였습니다. 달력에 표시된 어린이와 어버이, 부처님과 장미도 뻘쭘해 보이더군요.
사실 이 화창한 5월에 개봉한 이 놈이 뻘쭘해야 할 테지만, 오히려 5월의 모든 것을 뻘쭘하게 하는 아주 쎈 녀석입니다.
어쩌면 5월인 게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이 영화를 스산한 계절에 봤다면 달콤한 케이크가 3단짜리는 있어야 할 겁니다.
3. 찜찜하고 불쾌한 영화입니다.
원래 이런 류의 영화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 찜찜함과 불쾌함이 쉬이 가시지 않기 때문이죠. 영화 속의 악마가 제 등에 업힌 듯 한 느낌마저 듭니다.
아마 외국영화였다면 아무리 ‘걸작’의 평가가 있어도 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영화여서 봤습니다.
제가 뭐 ‘전 세계 0.07%에 불과한 땅을 가졌지만, 이제는 전 세계인을 팬으로 가진, 이토록 큰 자부심을 주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남달리 사랑해서는 아니구요.
내가 사는 곳, 내가 쓰는 말, 내가 알고 있는 감성이 그려지는 영화는 장르에 관계없이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특히 무관심 속에 쇠락하고 흉흉해져가고 있는 시골의 모습과 음습한 공기가 느껴지는 숲속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4. 불친절하고 난해한 영화입니다.
명확하지 않습니다. 엔딩, 캐릭터와 이야기, 여러 설정들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습니다. 영화를 본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기본적인 정보와 대략적인 반응들만 봤고, 영화를 보고 나서도 평론가나 관객들의 리뷰를 보지 않고 있습니다.
영화 감상과 정리에 영향을 줄까봐서 말이죠. 그래서 쉽게 정리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농촌스릴러 → <살인의 추억> → <마더>’로 가지치기 되면서,
<마더>에서 ‘김혜자’가 어떤 인물을 돌로 내려찍던 순간, 자신의 허벅지에 침을 찌르던 순간,
그 순간을 파고들어서 영화화 한 게 아닐까 하는 정도의 정리만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차피 아는 만큼 보이는 건데, 종교에 대해서는 아예 무지해서 그런 함의와 상징은 포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 나름대로의 결론은 내릴 수 있을 것 같네요.
5. 아주 반가운 영화입니다.
작년에 <암살>이 개봉되기 전까지 한국영화는 위기설이 돌 정도로 침체였습니다. 올해도 작년과 같은 침체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볼 만한 한국영화가 없는 것도 문제지만, 이야기할 만한 한국영화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뭔가 한물 간 흥행공식을 좇는 듯 한 영화 일색이었죠.
그런 와중에 <곡성>이 나타났습니다. 작년 <암살>보다 일찍 물꼬를 터줬습니다.
영화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평단과 관객들 사이에서 이렇게 뜨거운 한국영화가 실로 얼마만인지.
그런 점에서 작년의 <암살>보다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정말 풍성합니다. 영화에 대한 평가와 각종 해석들이 풍성하게 생산되고 있습니다. 한국영화에서 이런 반응을 보는 것은 정말 반갑습니다.
이 후기를 얼른 정리하고 각종 리뷰들을 읽어봐야겠습니다. 그 자체로도 재밌을 것 같네요.
그리고 곡성 군수의 성숙한 대처가 반가웠습니다. 자치단체장으로서 신경쓰이기도 하셨었겠지만,
‘상영정치 가처분 신청’ 같은 거 걸었으면 ‘곡성군’에 대한 이미지가 더 안 좋아졌을 겁니다. 대처를 잘하셨어요.
6. 정말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영화 초반 ‘외지인(쿠니무라 준)’이 낚시바늘에 지렁이를 끼웁니다. 영화 중반 ‘일광(황정민)’은 절대 현혹되지 말라고 하죠.
하지만 결국 영화를 보는 동안 저는 ‘나홍진’ 감독이 끼운 지렁이를 덥썩 물어버리고, 현혹되어 버리고 맙니다.
취향에 맞지 않아도, 영화를 모두 이해하진 못해도 저는 스크린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얼마 전부터 영화를 보면서 간단한 메모를 하기 시작했는데, <곡성>을 보면서는 어느 순간 메모지와 펜을 놓아버렸습니다.
‘나홍진’이 정말 무섭고 대단한 감독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흡인력과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것 하나만큼은 정말 탁월한 것 같습니다.
‘신정원’ 감독의 <시실리 2km>가 연상되는 ‘장르 교배 블랙 코미디’ 같은 장면들도 인상적이었구요.
다시 보고 싶지만 다시 보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찜찜함과 불쾌함의 벽을 넘어야 해서 말이죠.
7. 호불호가 극명한 영화입니다.
평론가들의 극찬도, 악평을 하는 관객도 이해가 갑니다. 분명히 모두가 좋아할 영화는 아니죠.
실제로 제가 영화를 보던 상영관에서는 중간에 나간 분들도 있었고,
‘황정민’의 이름만 보고 들어왔다가 옆 사람과 잡담만 하다가 나간 중년 부부(?)도 있었습니다.
그러게 어떤 영화인지 조금이라도 확인하고 오시지, 돈 아깝게...
아무튼 1점과 10점으로 명확하게 갈리는 영화죠.
저는... 찜찜하고 불쾌해서 1점, 돈 아깝지 않아서 10점.
데이트 무비로는 부적절해서 1점, 어차피 데이트 할 사람도 없어서 10점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별 5개 중에 4개 정도 되는 것 같구요, ‘나홍진’ 감독의 영화 중에는 아직까지는 <황해>가 더 좋습니다.
8. 연기만큼은 깔 게 없는 영화죠.
우선, ‘종구(곽도원)’의 아내 역할로 나온 ‘장소연’ 배우는 원래 좀 좋아하던 배우였습니다.
출연작들에서 비중은 크지 않았지만, 현실의 인물을 보는 듯한 ‘배우스럽지 않은 연기’가 좋았습니다.
<멋진 하루>와 <황해>에서의 모습이 특히 인상적으로 남아있습니다.
<곡성>에서 본 ‘장소연’ 배우의 모습은 조금 놀라웠습니다.
특히, 영화 초반 ‘종구’와 벌이는 자동차 안에서의... 그... 음... 암튼 '장소연' 배우의 처음보는 모습이었습니다.
‘라디오스타’에서의 ‘쑥대머리 프로포즈’가 겹쳐지면서 웃기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장소연’ 배우의 가장 괄괄(?)한 연기를 본 것 같습니다.
‘천우희’ 배우에게는 뭔가 있나봅니다. <써니>의 ‘본드걸’, <손님>의 ‘무녀’에 이어 <곡성>에서도 ‘신’이 들락날락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도드라진 광대와 조금은 부리부리한 눈매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연기를 해나가고 있고,
확실한 건 갈수록 예쁘지네요. ‘황정민’도 그녀의 미모에 피를 토하더라는...
아무튼 <마더>의 ‘탕평책’ 소녀가 이렇게 정변했네요. <한공주>도 얼른 봐야 할텐데...
차기작인 ‘이윤기’ 감독의 <마이 엔젤>에서는 좀 더 밝고 쾌활한 역할이라니 기대가 됩니다.
‘효진’ 역의 ‘김환희’ 배우는 <곡성>에서 가장 회자되는 연기자입니다.
사실 너무 익숙한 아역배우여서 역할과 연기를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검은사제들>의 ‘박소담’ 못지않은 ‘신들린’ 연기를 보여줬죠.
하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촬영현장에서 아역을 보호하는 장치들을 한다는 말도 신뢰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극단적인 연기가 이 아이의 성장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지 괜한 노파심이 생깁니다.
‘장모’ 역의 ‘허진’ 배우도 좋았습니다. 전 이 분을 볼 때마다 참 여러 이미지를 가졌다고 생각했거든요.
‘나홍진’ 감독도 그런 것을 염두에 둔 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의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리는 이미지였습니다.
‘곽도원’ 배우는 첫 주연작입니다. <황해>에서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한데, 그새 충무로의 중요한 배우로 성장했습니다.
첫 주연임에도 ‘기 빨리고, 혼 털리는’ 이 영화를 성실하게 책임져 줬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을텐데요.
특히 가정에서나 파출소에서의 일상 연기가 좋았습니다. 다만, 후반부에서는 너무 달리기만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완급을 조절할 수 있는 디테일을 요소요소에 심었으면 더욱 폭발력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굳이 짚어보자면 그렇다는겁니다.
‘황정민’ 배우는 대중이 인식하고 있는 ‘황정민’이라는 색깔에 새로운 포인트를 찍어주었습니다.
최근 다작과 성공을 거듭하면서 대중에게 믿을만한 배우로 자리잡는 만큼 캐릭터와 연기가 겹친다는 느낌도 들 즈음이었죠.
특히 이전 작품인 <검사외전>은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는 작품이기에 <곡성>에서 보여준 ‘황정민’ 배우의 새로운 모습은 반가웠습니다.
차기작들인 <아수라>와 <군함도>도 이목이 집중된 기대작인데, <곡성>은 ‘황정민’ 배우에게 중요한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나저나 차기작들까지 감안하면 당분간 이 기세는 사그라들지 않겠네요.
‘쿠니무라 준’은 더할 나위 없습니다. 외모만 봐도 이 역할에 어울리는 이보다 잘 어울리는 배우를 찾기 쉽지 않을 겁니다.
<킬빌>에서 댕강 잘려나간 머리가 아직도 뇌리에 박혀있는데, 이번에는 ‘충혈된 골룸’과 같은 모습으로 각인을 하눈군요.
영화를 보고 가장 오래 남는 이미지는 바로 이 분의 이미지입니다.
마지막에 낫을 들고 찾아 온 ‘부제’에게 마수를 뻗치는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부제’ 역의 ‘김도윤’ 배우는 비리비리하니 잠깐 나오다 말겠다 싶었는데, 제법 비중도 크고 인상적인 여러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얼굴이 물어뜯기는 장면에서는 눈을 감아버렸죠. 비리비리하기만 하던 교인이 당당히 악마의 실체를 마주하지만,
이내 무너져버리는 모습은 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인 것 같은데, 연기로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배우의 영화 스틸은 찾아 볼 수가 없네요;;
첫댓글 가장 충격인건 장소연과 곽도원이 실제 커플이라는 점인걸 알아버렸을때였죠
저때는 짝사랑이었을걸요?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쑥대머리'가 결정타였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밀어붙여야 하는건데..^^;
마지막 닭이 세 번 우는 구간이 루즈해질 수도 있을법한 상황이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흡입력을 잃지 않더군요. 저는 호 쪽인데 2시간 반동안 단 한 순간도 지겹다는 느낌이 없었던 영화였습니다. 또 살굿 장면에서 압도당하게 만드는 사운드도 좋았구요.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마지막 일본인이 변한게 확 깨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그 변한 모습이 자꾸 떠올라요. 그 이미지가 머리 속에 맴맴...ㅠ 그런데 그 변신 장면 덕분에 영화를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풀코트프레스 저는 오히려 사진찍는 정도로만 마무리 짓는 쪽이 더 여운이 남는 결말이 아니었을까 싶어서요. 아무튼 말씀하신대로 이렇게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영화는 정말 오랜만이고 반갑네요.
@KBtoDH 말씀하신 선에서 마무리되는 것도 괜찮겠네요. 그럼 좀더 많은 이야기가 나왔을수도^^ 아무튼 할 얘기가 많은 영화입니다^^
저도 호쪽이긴하나 솔직히 두시간 쯤 지났을때 좀 지루해지기 시작했는데 막판 널부러져있다고나할까한 퍼즐을 한번에 맞춰버리려는 느낌이 확들며 집중해서 다시 보게되었슴다.. 엔딩은 먼가 부족한듯 궁금해지려는 찰나 영화는 끝났지만ㅠ
@respectmj&lin 엔딩이 갑작스러워서 더욱 찜찜하고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죠. 보는 동안에는 완전 집중해서봤네요.
@4webber 아휴~ 또 생각나네요^^;
쿠니무라 준 볼 때마다 야쿠자 영화 아웃레이지에서 기타노한테 맞아죽는 게 자꾸만 떠올라서 ㅋ
전 킬빌에서 루시 리우한테 목 잘린게 자꾸...ㅎ
나홍진 감독의 불친절함과 낚시, 떡밥에 환장하고 있는 1인입니다.
아무리 떡밥을 많이 던지고
낚시를 하려해도
몰입감이 없다면 도로아미타불인데
곡성의 몰입감은 제게 어떤 영화보다 대단했습니다.
본문에 말씀하신 "킥"이 절실했어요 저도 ㅎㅎ
좋은 글 잘봤습니다
몰입감 하나만으로도 본전치기는 하는 영화죠. 저도 차근차근 퍼즐을 맞춰가봐야겠어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미친' 영화라는 표현이 딱 적당하네요. 이런 '미친' 영화가 한국영화판에서 나오다니 놀랍고 다행이고 그렇습니다.
찌라시는 뒤로 하고라도 영화만 봐서도 나홍진 감독은 친해지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에요^^;
제가 아는 사람도 영화의 장면이 계속 떠올라 고생이었다고 그러더군요ㅎ
너무나도 동감되는 리뷰입니다.
감사합니다(__)
공감 되는 좋은 글 봤습니다. 아역에 대한 걱정이 저랑 참 비슷하시네요,, 그리고 쿠니무라 준이 어디서 낯이 익다 햇는데 몇일전 SK BTV에서 공짜로 봤던 아울레이지의 바로 그 조폭두목이었더군요 ㅎㅎ
조폭두목...ㅎㅎ
이분도 예사로운 인물을 연기할 마스크는 아니세요ㅎ
이케모토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