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이 병이다
"아는 것이 병이다."
"많은 것을 알기 때문에 도리어 괴로움을 겪는다."는 뜻이다.
"글자를 아는 것이 도리어 우환을 일으킨다."는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사자성어도 그 뜻이 이와 유사하리라.
"아는 것이 병이다."라고 할 때의 '앎'은 어떤 특수한 사안에 대한
앎을 의미하리라. 그런데 반야중관학(般若中觀學)의
가르침에 의하면 '앎' 그 자체가 병이다.
서구의 전통논리학에서는 우리의 논리적 사유가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의 세 가지 법칙에 근거하여 작동한다고 가르친다.
동일률은 "A는 A이다.", 모순율은 "A는 A가 아닌 것이 아니다",
배중률은 "어떤 것은 A이거나 A가 아닌 것이지 그 중간의 것은 없다."는
문장으로 표현된다. 일견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법칙이지만,
이런 법칙의 토대 위에서 우리의 복잡다단한 논리적 사유가 작동한다.
죽은 게 아니면 산 것이고, 내가 아니면 남이다.
같은 게 아니면 다른 것이고, 이어진 게 아니면 끊어진 것이다.
이런 이분법적(二分法的)인 흑백논리를 '분별'이라고 부른다.
분별은 '나누고 구별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흑백논리적인 '분별'을 통해 세상에
대해 이해하는 데, 이런 이해는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과 무관하다.
入此門來莫存知解
이 문안에 들어온 뒤에는 알음알이 내지 말아라
사찰 입구의 주련(柱聯)
비근한 예를 들어서 "비가 내린다."라는 문장은, 하나의 '강우현상'을
'비'라는 주어와 '내린다'라는 술어로 '분별'하여 작성한 것이다.
원래는 한 덩어리의 '강우현상'인데, 이를 '비'와 '내림'이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잘라낸 후, "비가 내린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류가 발생한다. "비가 내린다."라는 말에서 주어로 쓰인
'비'는 이미 '내림'이라는 작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가 내린다."라고 말을 할 경우, '내림을 갖는 비'가
다시 '내린다'는 의미가 되기에 '의미중복의 오류에'에 빠진다.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지금 내리고 있는 창밖의 비가 아니라,
하늘 높은 곳에 '내리지 않는 비'가 있어서 그것이
'내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 높은 곳에 올라가도 '내리지 않는 비'는 찾을 수 없다.
내리지 않는 것은 구름이지 비가 아니다. 따라서 내리지 않는 비가 있어서
그것이 내리는 것이고 분별할 경우, 사실위배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는 판단도 마찬가지다.
불고 있어야 바람이기에, "바람이 분다."고 말을 할 경우 '부는 바람'이
다시 분다는 의미가 되고 말기에 의미중복의 오류에 빠진다.
이와 달리 저 멀리 어딘가에 불지 않는 바람이 있어서 그것이 부는 것이라고
분별할 경우, 그런 바람은 있을 수가 없기에, '사실위배의 오류'에 빠진다.
"꽃이 핀다.", "얼음이 언다.". "꿈을 꾼다." 등등의 표현도 마찬가지다.
의미중복의 오류와 사실위배의 오류를 범한다.
'아는 것이 병"이라고 하지만 불교적으로는 '앎' 그 자체가 질병이다.
이런 질병적 앎이 작동하여 "이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나는 누구일까?",
"태어나기 전에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등등의 철학적, 종교적 의문이 떠오른다.
그러나 반야중관학의 분석을 통해서 분별적으로 작동하는 앎,
흑백논리적으로 작동하는 앎 그 자체가 질병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그런 심각한 의문이 모두 해소된다.
종교적, 철학적 의문을 해결하는 반야중관학의 방식이다.
속담 속에 담은 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