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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수요일
✠ 마태오복음 6,1-6.16-18
거룩한 사순절 첫날입니다.
1독서에서 요엘예언자는 '돌아오라'는 주님의 호소를 들려줍니다.
2독서에서는 '지금이 은혜로운 때, 바로 구원의날'이라고 합니다.
이 은혜로운 구원의 때를 놓치지 않고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복음으로 가보겠습니다.
열심한 종교인들, 지도자들의 눈에 예수님은 율법을 거슬러가는 분으로 비쳐졌습니다.
사실 율법에 정면 도전하는듯 보이는 행동을 서슴치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복음 5장에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듯이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은 없애는 일이 아니라 완성하는 일입니다. 그일은 모든 것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커다란 값을 치루어서라도 그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도 그 길을 따르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모든 종교인들의 실천 덕목은 옛부터 <자선> <기도> <단식>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결코 이것을 폐지하거나 바꾸지 않으십니다.
다만 . <무엇을, 누구를 위하여 그 모든 일을 행하는가?>라고 물으심으로써 가장 핵심, 정곡을 찌르시고 계십니다.
1절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그리고 두 번 5절. 16절 "드러내 보이려고" 행하지 말라 하십니다.
우리 존재가치는, 아니 존재 이유까지도 우리는 타인의 눈에서 발견합니다. 혼자서는 결코 자신이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지를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숨겨 두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숨겨둘 수 있는 힘을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강조하고 계시는
4. 6. 16"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 의 눈길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눈길에 내 눈길을 마주치게 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눈길은 우리를 구속하지만
아버지의 눈길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개신교 신학자 본회퍼는 선행으로 우리를 더럽힐 수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선행을 행하는 내적지향을 두고 말한 것이겠지요.
사람의 눈길에서 자유로워지려면, 하느님을 뵙게 하는 깨끗한 마음을 가지려면, 자만과 자기애의 노예에서 해방되려면 내 눈의 초점은 하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눈길을 하느님의 사랑의 눈길에 마주치게 하는 일입니다. 이 마주치는 눈길이 우리를 자유의 길로 나아가게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할 것입니다.
우리의 눈길을 들어올리는 것, 이것이 '돌아감'의 시작입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3월5일 [재의 수요일]
마태오 6,1-6.16-18
육체를 태우면, 심장은 사랑을 위해 뛰기 시작한다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자선과 단식과 기도에 대한 필요성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세속과 육신과 마귀라는 신앙인이 싸워야 할 세 욕망을 이기는 무기입니다.
이 세 욕망을 한 마디로 육체적 욕망이라고도 합니다.
이 유혹을 이길 때 청빈과 정결과 순명이라는 덕이 맺히게 됩니다.
이 욕망에게 힘을 주는 것이 심장입니다.
그런데 심장이 육체를 위해 뛸 때는 영혼을 위해 뛸 에너지를 잃습니다.
심장이 육체를 위해 뛸 필요가 없어질 때만 사랑을 위해 뛰기 시작합니다.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공동체 평화의 오아시스, 임 파우스티나 수녀가 쓴 ‘복녀 끼아라 루체 바다노’에 관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좀 길지만 원문 그대로 써 봅니다.
어떻게 육체를 향한 심장이 약해질수록 사랑을 향해 심장이 뛰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복녀 끼아라 루체 바다노는 2010년에 시복되었습니다.
끼아라 루체는 1971년 이탈리아 사셀로에서
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찾는 신심 깊은 부부의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도록 바다노 부부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없는 결혼 생활은 상상할 수 없었던 아빠 루제로는 성모님께 봉헌된 성지에 가서 11년 동안 하느님께 생명의 선물을 주시길 기도하여 오랜 기다린 후에 드디어 끼아라를 품에안게 되었습니다.
투명하고 큰 눈을 지닌 끼아라는 “맑고 밝다”는 뜻을 지닌 이름처럼 삶도 그러했습니다.
생기있고 활발한 끼아라는 스케이트, 자전거 타기, 테니스 등의 스포츠를 좋아했고 특히 바다를 좋아했습니다.
끼아라는 9살 때 포콜라레 운동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포콜라레는 끼아라 루빅 여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폐허가 된 세상에 ‘서로 간 사랑과 모든 이의 일치’를 위해 1943년에 창설한 영성 운동입니다.
끼아라는 포콜라레 운동의 창시자 끼아라 루빅과 영적 모녀 관계를 맺었습니다.
특별히 투병 중에 끼아라 루빅 여사로부터 “끼아라 루체”라는 새로운 이름과 편지를 받기도 합니다.
17살 때 테니스 경기 도중 어깨에 강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여러 가지 검사 후 결과는 암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기로 악명높은 골육종이였습니다. 이름대로 뼈에 생기는 종양이었습니다.
진단 결과를 알게 된 끼아라는 울지도, 반항하지도 않았습니다.
즉시 침묵 속에 깊이 잠겼지만, 25분이 지난 후 그녀의 입에서는 하느님의 뜻에 “네”라는 응답이 흘러나왔습니다.
새로운 고통이 닥칠 때 마다 “예수님,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저도 원합니다.”라고 하며 단호하게 말하며 자신의 고통을 바침으로써 모든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항구한 결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끼아라는 매일 미사를 통해 성체 모시며 다시 힘을 얻었습니다.
항암치료로 머리가 한 줌씩 빠지기 시작했을 때 끼아라는 “예수님, 이 고통을 십자가에서 저를 구원하신 당신을 위해서예요.” 라 말하며 그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육신의 고통의 강도는 점점 커졌으나 끼아라는 예수님과 함께 그 고통을 잘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끼아라가 예상치 못한 커다란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이제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힘들었던 두 번째 수술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는 그녀에게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엄마는 끼아라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끼아라야, 예수님께서는 다리가 없는 너에게
날개를 주실거야.” 끼아라는 “엄마, 제가 걷는 것과 천국에 가는 것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주저 없이 천국 가는 걸 선택할 거예요.
지금 제 마음을 끄는 것은 천국뿐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친구들에게는 “너희들은 지금 예수님과 내 관계가 어떠한지 결코 상상할 수 없을 거야…
하느님께서 내게 무언가 더 큰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느껴. 어쩌면 오랫동안 이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지도 몰라.
하지만 내게는 하느님의 뜻만이 소중하고 현 순간에 그것을 잘하는 것이야.
지금 사람들이 내게 걷는 것을 원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야.
이 상태의 내가 예수님께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마치 어두운 굴 안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온 힘 다해 사랑하려고 나 자신을 다시
던졌고 빛은 되돌아왔다.”
“순간을 잘 산다면 모든 것은 의미가 있다. 만약 그 끔찍한 고통의 순간을 예수님께 선물로 드린다면, 이 끔찍한 순간까지도….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한 의미 있는 선물로 바친다면 고통은 그냥 고통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끼아라는 작은 종이에 성모님께 바치는 글을 적었습니다.
“천상의 어머니, 제가 회복될 수 있는 기적을 당신께 청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굴복하지 않는 힘을 제게 주시기를 청합니다.”
끼아라는 투병 중에도 빛나고 환한 미소를 절대 잃지 않았습니다.
평온하고 강하게 남으며 고통스러운 치료를 감수했고 그녀를 찾아오는 이들을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이끌었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끼아라는 아주 활동적이었습니다.
그녀는 전화를 통해 또 그녀를 찾아오는 이들을 사랑을 다 해 맞음으로 오히려 그녀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밝은 모습으로 힘과 용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간 친구들은 도리어 그들이 위로받고 돌아갔습니다.
1990년 여름, 의료진은 끼아라에 대한 치료를 중단하기로 하였습니다.
병의 진행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끼아라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그분의 십자가상의 수난을 나누고자 하는 원의와 명료한 정신을 유지하고자 진통제인 모르핀 투약을 거부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 고통만을 바칠 수 있는데 모르핀은 제 정신을 흐리게 해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제 고통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을 가능한 한 많이 나누고 싶습니다.”
그런 끼아라에게 하루는 햐안 옷을 입은 천사가 찾아왔습니다.
빛으로 싸인 천사는 끼아라의 손을 꼭 잡아주며 “힘을 내렴!”하고 말하고선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병은 진전되었으며 고통도 늘어났습니다.
불평 한마디 없이 그녀의 입에서는 “예수님, 당신과 함께; 예수님, 당신을 위해서”라는 말만 나왔습니다.
끼아라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께 오셔서 천국으로 나를 데려가시기를 청하지 않아요.
그분과 조금이나마 십자가를 나누기 위해, 그분께 내 고통을 계속 바치고 싶기 때문이에요.”
그녀 없이 홀로 남게 될 것을 걱정하는 엄마에게 계속해 말하기를 “하느님께 믿고 맡기세요.
끼아라는 모든 것을 다 생각해 두었습니다. 장례식에서 부를 노래, 꽃들, 머리 모양, 신부가 입는 흰 드레스에 분홍색 리본 허리끈까지.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저를 준비시킬 때 이렇게 계속 말하셔야 해요: 지금 내 딸 끼아라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
아주 고통스런 밤이 지난 후 1990년 10월 7일 새벽 정배는 그녀를 데리러 왔습니다.
끼아라는 아직 18살. 그녀의 19번째 생일 파티는 하늘에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이 되자 끼아라가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나는 천국으로 갈 거야. 그곳에서 나는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정말 행복하게 살아갈 거야.
안녕! 엄마! 나는 행복하니까 엄마도 행복해야 해.”
키아라가 병에 걸리기 전에 하던 일들을 계속했다면 그만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육체는 영과 반대입니다.
사랑의 에너지를 빼앗습니다.
그래서 육체에는 최소한의 에너지만 써야 합니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머리에 재를 얹는 것입니다.
복녀 키아라 루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저에게는 아직 심장이 있고 그렇기에 언제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5일 [재의 수요일]
복음: 마태 6,1-6.16-18
언젠가 반드시 우리 모두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기원전 5세기경, 남유다는 휘황찬란한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하고, 높고 든든한 성벽도 쌓아 올리며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있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런 것 같습니다. 잘 나갈 때 더 겸손하고, 더 노력해야 하는데, 매사가 안정적이다 보면 즉시 나태해지고 안주하려는 경향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런 순간에 등장한 예언자가 있었으니 요엘이었습니다.
그는 경신례에도 밝고 언어 구사가 탁월한 문학가였습니다.
그는 옛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며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심판과 구원을
힘차게 선포했습니다.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는데, 요엘 예언자가 불쑥 등장해서 강력한 경고성 메시지를 남발하니, 군중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가야할 길을 걸어가며, 외쳐야 할 말을 가감 없이 외쳤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삶은 늘 외롭고 고달프고 황량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서 달콤한 하느님 위로의 말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격려나 칭찬, 해방의 기쁜 소식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온 말은 섬뜩하기 그지 없는 메시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신랄한 고발과 강력한 경고, 공포로 가득한 멸망의 예고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가슴을 쥐어 뜯으면서 울부짖으라고 외쳤습니다.
“사제들아, 자루옷을 두르고 슬피 울어라. 제단의 봉사자들아, 울부짖어라.
내 하느님의 봉사자들아, 와서 자루옷을 두르고 밤을 새워라.
너희 하느님의 집에 곡식 제물과 제주가 떨어졌다.”(요엘 1,13)
그러나 요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해서 코너로 몰아넣지만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있는 회개와 참된 단식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가 베풀어질 것임을 선포합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요엘 2,12-13)
요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에게 닥친 대재앙, 그로 인한 시련의 원인이 바로 자신의 죄와 부족함이라는 것을 인식하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옷만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고 강조합니다.
형식적이고 외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내적 회개를 촉구합니다.
또한 그는 특정한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의 회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범국민적, 범국가적 회개를 요청했습니다.
또 다시 재의 수요일입니다.
재를 머리에 얹으며 생각해보니, 우리 모두는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너나 할 것 없이 손톱만한 도토리들입니다.
티격태격, 아옹다옹하면서 ‘내가 더 높네. 내가 더 크네. 내가 더 대단하네.’ 외치지만, 하느님 눈에는 모두가 그놈이 그놈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잠시 떠다니다가 하느님 자비의 품을 향해 사라질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광대무변하시고 영원하신 주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신 주님 앞에 우리는, 너무나 작고 미약한 존재라는 진리를 잊지않고 살아간다면, 우리 공동체의 삶이 한결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내가 선배인데, 내가 연장자인데, 내가 원장인데, 내가 회장인데, 하며 어깨에 힘줄 이유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인간 존재의 영원한 결핍성과 티끌보다 작음을 잊지 않는다면, 서로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도 조금은 부드러워 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이웃을 향한 측은지심이요, 진한 동지의식일 것입니다.
재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타고 남은 것, 아무것도 아닌 것, 무가치한 것, 허무한 것, 보잘것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를 머리에 얹을 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쳐야겠습니다.
“본래 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먼지요, 티끌, 무(無)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토록 보잘것없는 제게 큰 은총을 베푸셔서 생명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지금 저는 여기 서 있지만, 주님의 흘러넘치는 자비가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스스로 설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입니다.
과거에도 저는 흙이었지만, 지금도 흙과 다름없는 존재요, 언젠가 반드시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재의 수요일 강론>
(2025. 3. 5. 수)(마태 6,1-6.16-18)
<누구든지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4).”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5).”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6).”
1) ‘재의 예식’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먼지처럼 사라질 존재라는 것을 묵상하라는 예식이고, 동시에 먼지처럼 사라지지 않으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예식입니다.
구약성경의 시편 작가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3.5-6).”
여기서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이라는 말은, 인간이 먼지로 돌아가거나 돌아가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창조주 하느님은, 우리를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게 하실 수도 있고, 반대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영원히 살게 하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예수님을 믿는 것,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으로는, 또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고, ‘온 삶으로’ 믿음을 실천하는 생활을 해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 실천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믿음의 방향과 신앙생활의 방향을 올바르게 바로잡는 일이고, 하느님께 자비를 간청하는 일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서 자신의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는 일이고,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바로잡는 일입니다.
사실 믿음과 회개는 하나입니다.
믿는다면 당연히 회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믿는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혹시, 회개는 하지만 믿지 않는 경우가 있을까? 없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회개 자체를 아예 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재의 수요일’에 듣는 복음 말씀은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라.”(위선자가 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자선, 기도, 단식뿐만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간에
‘위선’은 하느님을 속이려고 하고, 사람들을 속이는 죄입니다.
사순 시기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극기고행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은혜로운 때인데, 동시에 위선자들이 가장 많이 생기는 때입니다.
진심으로 행하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극기고행으로만 멈추면, 그것은 모두 위선입니다.
<외국의 일부 국가나 지역에서 벌이는 카니발,
즉 ‘사육제’는, 지금은 하나의 문화로, 또 전통으로 자리 잡은 모습이지만, 원래는 사순절의 극기고행을 앞두고 미리 실컷 먹고 마시려는 ‘불순한 의도’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사순절의 극기고행은 위선이 되어버립니다.
금요일에 금육재를 지켜야 하니까 목요일에 미리 고기를 먹거나 토요일에 고기를 먹는 것, 단식재를 지키기 전에 미리 배불리 먹거나 지키고 나서 배불리 먹는 것, 그런 경우에도 그 금육재와 단식재는 모두 위선입니다.
금육재를 지키려고 고기를 안 먹지만, 그 대신에
고기보다 더 비싼 횟집에 가서 회를 먹는 것도 위선입니다.>
4)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들 모르게 하여라.”인데, “너 자신도 모르게 하여라.”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자선을 베풀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의식하지 말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루카 17,10)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기가 자선을 베풀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가 없고, 잊어버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실천한 선행을 잊어버려도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신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인데, 거꾸로 표현하면,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시니까 너 자신은 잊어버려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