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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담대함 // 요한1서4:17- 21절 // 26년 10월 7일 // 찬송 : 518 520 528 184 185
“나는 정말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가? 하나님이 정말 내 안에 계신가?” 믿음의 사람인가 ? 나는 구원받은 사람인가? 사랑한다고 말해 놓고도 미워하게 되고, 용서한다고 말해 놓고도 마음은 여전히 차갑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묻습니다. “내 신앙은 진짜인가? 내가 서 있는 자리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확신이 흔들리면 더욱 공허해지고 신앙은 힘을 잃게됩니다. 이런 질문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질문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감정의 요동에서 건져 내고, 복음의 확신 위에 세우십니다. 흔들리지 말아라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자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한다. 감정보다 중요한 것은 약속의 말씀과 내주하시는 성령입니다. 성령을 주심으로 우리가 그안에 거하고 그 사랑이 우리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10 하나님이 내안에 우리안에 계신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방언이나 신비한 은사보다 바로 삶의 변화 형제사랑입니다. 복음: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 요14:26 모든것 생각나게하시며.. 15:26 그가 나를 증언하리라. 성령님은 언제 찾아오시는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을때 찾아오십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합니다.
16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라 독생성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살리기위한 십자가임이 믿어집니다. 나 대신 죽으신 대속의 죽음임을 고백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사랑임을 보게합니다. 하나님사랑은 십자가에 나타나있습니다.눈물,감격
◈성령은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연합을 알게합니다.13-15
하나님께서 내안에 계신다는 놀라운 신비는 이성이나 감정으로 다 이해할수없습니다. 성령을 주셨기에 가능합니다. 13절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시느니라
안다는 것은 지식으로 이해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해서 아는 것입니다. 맛을 느낀다. 참되고 바른 믿음과 고백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참된 신자인지를 증거해줍니다. 세상의 구주로 보내시고 알아서 믿고 알아서 경험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믿게하고 알게하고 경험하게 하십니다. 창조주하나님, 성육신 예수그리스도 ,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내주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믿는것과 사랑하는 것은 성령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배워서 신맛 단맛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경험으로 알게됩니다. [두리안냄새, 백향과냄새 ] 베드로의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을 알게한 이는 혈과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시니라.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온전한 사랑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께서 임재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깨닫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로시고 부활하사 구원은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고백하고 사랑은 이 고백속에서 시작됩니다. 로마 시민들은 황제 가이사가 세상의 주님이시다. 황제 아우구스투스,가이사. 도미누스등 황제가 신이요 주님이라고 고백하지만 그러나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가이사는 주님이 아니다라고 선포합니다. 누가 진짜 주인인가.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주 되심을 선포합니다. 일본천황, 중국황제 14절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모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노니. 15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서로사랑하면 하나님을 볼수있습니다.
◈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잠재력을 마비시킨다.― 재능을 사용 못하도록 묶어버려 주저하게 만들고 결국은 기회를 놓치게 한다. 두려워서 도전을 하지 못합니다. 블레세 골리앗앞에 모두가 두려워 떨고있습니다. 다윗은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적진을 향하고 담을 넘어갔습니다. 앗수르 랍사게가 군대를 거느리고 쳐들어와서 너희가 도대체 무엇을 의지하느냐? 신뢰하는 것이 이집트냐? 군사력을 보잘것없다. 말이 있어도 탈사람 기병도 없다. 작은 지휘관 하나 물리칠수없다. 히스기야에게 속지마라 .그의 말 믿지마라. 애굽을 의지하느냐? 상한갈대와 같다. 하나님도 너희를 구하지 못한다. 항복하라.결국 조공을 바치는신세로 몰락하였습니다.
우리가 도전하지 못하는 것은 환경이나 능력의 조건이 아니라. 우리 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원초적인 두려움, 바로 ‘편도체’의 과잉 반응 때문이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 오해하고 두려워하여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사건은, 뇌 과학적으로 두려움의 신경망에 사로잡히게하여 아무것도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의 가장 큰 실수는 게으름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그는 주인을 “인색하고 무서운 분”으로 인지했다. 하나님은 속성이 사랑이십니다. 오직 원금을 잃었을 때 겪게 될 주인의 책망과 손실이라는 ‘결과’의 공포에만 뇌가 반응한 것이다. 이 종의 행동은 단순한 불충성이 아니라, 두려움 사로잡히고 묶여버린 뇌의 뇌의 비극이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이기는 의사결정이다
손실의 공포에 속아 당신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지 마라. 두려움을 이기는 의사결정은 당신의 발아래 있어야 할 종이지, 당신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주인이 아니다. 뇌의 주권을 탈환하라. 그때 비로소 두려움을 극복하고 강하고 담대하게 청지기로서 세상을 정복하기 시작할 것이다.
롬 8: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전도두려움: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 전도를 하지못합니다. 두려워서 입을 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권능이 임하고 담대하게 부활의 주님을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것이 아닙니다. 어둠의 영이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 사람눈치 보다 가슴졸이며 살아갑니다. 간이 작아지다 못해 졸아서 없어질 지경입니다. 감정은 장부의 언어입니다. 장부는 감정을 통해 병을 드러냅니다. 모든병 마음에서 온다. 장기로부터 온다.
비장이 허하면 생각이 많으면 기가 뭉친다 입맛이 떨어지고 소화가안되고 더부룩하다.근심과 걱정은 비장을 상하게한다. 소화액의 분비가 억제되어 위장운동이 멈추어서 뭉치게 된다. 만성장염, 소화불량,신경성위염으로 쇠약해진다. 도-단맛슬픔과 우울은 폐를 타격하여 호흡기 질환이온다. 우울해지고 기관지천식에 시달린다 .레-매운맛 욕심은 심장을 공격합니다. 기운이 치밀면 분노가된다. 심장이 흐트러지면 가슴두근거림,불면이 온다 . 불안,초조로 혈압상승으로 심혈관 질환의 씨앗이된다. 솔-쓴맛분노는 간을 상하게만듭니다. 감정폭발.화가나면 기가 위로 올라가 심하면 뇌출혈이 온다. 화를 표출하지 못하면 지방간, 간기능 저하가 온다. 간뎅이가 부은 사람이 화도 잘낸다. 미-신맛 두려움과 공포는 신장을 상하게한다. 기가 아래로 내려가 만성피로감 이명증상이 나타난다. 신장과 방광이 풀린다. 허리통증과 탈모가온다. 나를 파괴하는 무서운 독소가 오장육부를 고장나게 만들어벌비니다. 라-짠맛 /즐거움이 양약이요 근심을 뼈를 마르게하느니라. 마음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 이니라.
사울의 왕: 평생두려움잡혀 쫓기며 살다 끝이 비참하였습니다. 백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있었다. 내가 백성들이 두려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나이다. 골리앗을 두려워하고 , 다윗의 인기를 두려워하고 그러다 다윗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사울이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두려움이 있으면 대적을 하거나 아니면 피해버립니다. 멀리합니다. 적군 블레셋을 두려워하다가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무당을 찾아갑니다.
처방전; 두려움의 골리앗? 사탄이 주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해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막5:36).”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어주리라(사41:10)”.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18두려움 감정에는 형벌이 있다. 누리지 못하고 삽니다. 조마조마 두려움입니다. 사람눈치, 사람판단.평가, 지나치게 의식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사람,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나의 올무가 됩니다. 올무에 걸리면 묶이게 됩니다. 부정적 혼의 묶임이 생깁니다. 평생을 그 두려움에 묶여버립니다. 성령이 임하면 묶임에서 놓임을 받습니다. 새장안에 갇힌 새가 놓임을 받고 자유로이 세상을 나는 것처럼 자유를 얻습니다. 노예의 발에 묶인 착고가 풀려나 자유를 얻습니다. 물질에 묶이고, 질병에 묶이고, 염려에 묶이고.불안에 묶이고..죄책감.. 시124: 7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8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오 우리 영혼이 벗어났도다 사냥꾼의 올무에서 새같이 올무가 끊어졌네 해방되었네... 사단은 불화살을 쏘아대면서 올무의 덫에 걸리게합니다. 두려움은 영적 결박입니다. 혼의 묶임이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면 악한 영이 자리를 잡고 진지를 구축합니다. 두려움이라는 올무에 묶이면 생각이 왜곡됩니다. 분별력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가난이 옵니다. 관계의 갈등을 못 풀게 됩니다. 질병이 옵니다. 정신질환이 옵니다. 우리의 삶에는 많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딤후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살아과 절제하는 마음이라선언합니다. 두려움은 사탄의 환각제입니다. 위기 자체보다 그 결과에 압도당하여 숨을 쉬지못합니다.
시27:1.3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여나리로다. [절대 평안에 요동치않는다= 약속]
미래에대한 두려움, 건강, 실패,사람평가에 대한 두려움,무대공포증으로 심장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편도체를 과도하게 활성화시켜 뇌에 경보시스템을 작동시켜 심박수를 높이고 긴장을 유발합니다. 코르티솔이 분비되어 몸은 늘 긴장상태에 놓이고 생각은 불안의 덫에 걸려 묶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뇌를 진정시키는 사랑을 받을때입니다. 누군의 따뜻한 말, 포옹,위로를 통해 세로토닌과 옥시토신이 분비되어 뇌는 불안의 경보 스위치를 끄고 안정시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사람을 옥죄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불안입니다.
본문의 요한은 더 깊은 차원의 두려움을 말합니다. 하나님심판대 앞에 서게될 형벌의 두려움입니다. 죄인이 본능적으로 경찰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죄인도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놀라운 복음을 선포합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아버린다. 제거한다. 뽑아버린다. 두려움을 내쫓는 길은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입니다. 하나님사랑이 독생자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신다는 절대적 확신이 들어오면 모든 악한 상상과 두려움과 불안은 빛앞의 어둠처럼 자동으로 소멸됩니다. 성도의 삶은 두려움에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사랑에 붙들린 삶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느 내 얼굴을 도우심을 인하여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심판에 대한 담대함입니다. 이미 그 사랑을 받았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평안입니다. 세상법정에 서는 것도 두려운 일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법정에 인생전부를 놓고 육적 영적 모든일이 심판을 받는데 두려운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사랑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평안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완성되는 날이 심판의 날입니다. 형제사랑이 심판날의 소망을 가지게합니다. 사랑의 목적은 담대함입니다. 우리가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라.
아담은 범죄후 고백이 내가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공포였습니다.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평생 형벌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날수 없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고의로 죽인후 두려움에 몸서리칠때 표를 주어서 죽음을 면하게합니다.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아 에덴의 동쪽으로 떠나갑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썩은이빨 뽑듯이 두려움을 뽑아버린다. 귀신을 쫓아 내실때 단어입니다. 엑소 발레이. 강력한 힘으로 집어던져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완전한사랑이 들어오면 어둠과 공포와 두려움을 영혼 밖으로 끄집어내어서 완전히 던져버리십니다. 두려움을 내 쫓아 버리는 방법은 사랑입니다.
인간에 가장큰 두려움은 죽음과 하나님심판입니다. 성도는 그 큰십자가사랑을 믿음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아멘.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이미 죄에 대한 심판을 예수님이 나대신 받으셨기에 이미 지나갔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요한복음 5장 24절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아직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직 알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사랑을 알지 못하면 세상 모든 것이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은 두려움을 없애버리고 쫓아 버립니다. 안될까봐, 버림받을까봐,정죄....실패...두령움입니다. 사람에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사랑의 통로는 늘 우리 곁의 사람들 사이에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나는 하나님과만 잘 지내면 된다” 이꼴 저꼴 안보고 사람과 관계를 차단하면 고립된 영적 고백으로 끝나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 안으로 부르셨고, 서로의 삶이 부딪히는 그 자리에서 사랑이 실제가 되도록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함정에 빠집니다. 사랑을 말하면 곧바로 “해야 할 일”처럼 들립니다. “그러니까 더 친절해야 한다, 더 참아야 한다, 더 베풀어야 한다”라는 방식으로 들립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은 다시 무거운 짐이 됩니다. 사랑을 해내지 못할수록 죄책감이 커지고, 죄책감이 커질수록 마음은 더 닫힙니다. 복음이 말하는 사랑은 우리에게 짐을 더 얹는 방식으로 오지 않습니다. 복음의 사랑은 먼저 우리를 살립니다. 사랑은 명령이기 전에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먼저”라는 말은 단지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원인의 순서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다가간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이 나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잡으셨습니다. 내가 사랑할 자격을 갖춘 다음에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자리에서 이미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준비되었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을 때 구원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 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34 주님찾아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영광중에 계신주 모시어 들이세 영원복락 누리세 모시어 들이세.....
복음을 제대로 들으면 마음의 방향이 바뀝니다. “나는 무엇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을까”에서 “하나님이 이미 나를 받아 주셨구나”로 바뀝니다. 이 변화가 일어날 때, 두려움이 설 자리가 줄어듭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이 줄어들면, 사람 앞에서의 두려움도 함께 줄어듭니다. 사랑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너는 버림받지 않는다”는 안전을 줍니다. 그 안전이 생기면, 우리는 더 이상 관계를 지키기 위해 거짓된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인정받기 위해 과장하지 않아도 되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무관심한 척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점점 진실해집니다. 두려움이 떠나갈수록 우리는 가식 대신 고백을 선택하게 됩니다. “ 어렵다.” “ 약하다.” “ 부족하다,틀렸다.” 이런 고백이 가능해집니다. 회개가 가능해집니다. 회개는 자기 학대가 아니라, 사랑 앞에서 내 진짜 모습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사랑으로 붙드셨다는 사실이 회개를 가능하게 합니다. 용서는 그래서 억지가 아니라 은혜의 열매입니다. 내 안에 사랑이 들어오면, 내 마음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합니다.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까, 두려움입니까?
살아가면서 가장힘든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은 많은 희생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합니다. 가장힘든 일중에하나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는 것입니다. 동물 좋아하고 식물좋아하는것 어렵지 않습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관계는 노력만으로 안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봄으로 시작됩니다. 온전한 사랑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이없습니다. 하나님안에 거하는 사람의 특징은 사랑을 나누는 일을 합니다.
◈형제 사랑으로 증명되는 신앙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사랑의 시작.기원은 사랑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형제를 사랑하면 사랑은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된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형제자매를 사랑합니다. 불안과 공포는 자동으로 학습되어서 과거와 비슷한 상황이 되면 공포와 불안,초조,긴장,걱정을 느끼면 누르거나 폭발하게됩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상대방에게 투사를 시켜 당대는피해자가됩니다. 관계회복이 어려워진다. 공포와 불안을 이성적으로 억압하려 할수록 분노와 광기로 갑자기 터져나옵니다. 나도모르게 화가나거나 불안안감정이 일어납니다.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먼저 사랑하시고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확증해주시고 성령을 통해서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형제사랑은 자연스럽게 흘러나가는 열매입니다. 그러면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사랑할수 없다고합니다.
사랑은 종종 “해결”이 아니라 “동행”으로 시작됩니다. 즉시 화해가 되지 않아도, 먼저 기도로 그 사람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내 마음의 법정에서 끌어내어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내가먼저 손내밀고 내가먼저 웃음주는것입니다. 때로는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내가 오해했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인정하는 태도, 때로는 먼저 안부를 묻는 작은 행동이 사랑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꼭박힌 미움이 자동으로 빠져나갑니다. 어떤상황에서 미움의 감정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지만 미움의 감정을 품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할수없습니다. 하나님사랑과 형제사랑은 뗄수 없고 분리할수 없는 한 쌍이기 때문입니다.
풀리지 않은 마음 그대로 가지고 와서 고백합니다. 내 마음이 굳어있습니다. 내 힘으로 풀리지 않습니다. 변화의 씨앗을 품고 다가옵니다. 신앙의 핵심은 결국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예수그리스도안에서 나에게 먼저 왔고 성령으로 함께하십니다. 두려움은 관계를 끊게하지만 사랑은 다시 길을 만들어갑니다.
◈계명은 오직하나 첫째도 둘째도 사랑입니다. 21절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계명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사랑과 두려움은 공존할수 없습니다. 사랑이 오면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