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막힌 동작
사람은 뇌에서 지시하지 않으면 행동하지 못한다.
미사 중에 영성체를 하러 나가는 신자들을 위해 일일이 한 사람씩 내가 기도를 선물하고 있을
때이다. 예비신자들이 가슴에 양손을 교차하여 얹고 예비신자라고 알리면 신부님이 영성체 대신
안수를 해준다. 그러자니 나는 자연스럽게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사제의 손을 처다보게 되었다.
보좌 신부님의 손가락이 이상하다. 엄지와 검지가 들려있고 나머지 세 손가락을 사용하여 안수를
하고 있다.
아하! 머릿속에서 엄지와 검지는 영성체를 집는 손가락이므로 거룩하게 생각되어 머리카락이 닿는
손가락과는 달리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는가 보다. 그 손가락을 볼 때마다 나는 영성체에 대해
특별한 경외감을 갖는 신부님이 달리 보였다.
생각이 그렇게 행동에 반영된다. 어느 신부님은 만약 자신이 안수를 하여 신자들에게 변화가 오지
않을까봐 걱정이 되는 나머지 머리통을 쥐어잡고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하며 누르는지 손가락이
파고들 지경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사제의 손을 빌려 흘러내리면
신자의 믿음을 통해 전달되는 것인데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최근 우리에게는 다양한 기계의 정보가 새롭게 들어와 혼란을 빚는다. 검지로 핸드폰 문자를
복사하려고 눌렀는데 마치 손가락에 내용이 들러붙어 있는 것처럼 인식되어 그 손가락을 들고
가운데 손가락으로 옮겨 내려둘 장소를 찾아 붙이는 나를 보았다.
그런가 하면 이번에는 최신 대문 키를 단 딸네집에 갔는데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었어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옆으로 밀어보기도 하고, 위로 올려보기도 하고, 열어보려고도 해보았지만,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니 손바닥을 대면 숫자가 등장하는 대문 키였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기계를 사용할 때의 약속이 너무나 다양하게 늘어서 기계와 타협을 하기가
어렵다.
컴퓨터 화면이 정밀하지 않으면 은연 중에 스마트폰의 사진을 확대하듯 두 손가락을 화면에
대다가 그만 두게 된다. 어느 것은 꾹눌러야 하고, 어느 것은 가볍게 건드려야만 하고, 어느 것은
살짝 돌려서 해결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최근에 새롭게 익힌 사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이 등장
하는게 아주 불편하다. 설명서의 글자가 너무나 작아서 익숙한 작동을 시도하나 안될 때가 더러
있다.
어느새 초등학생에게 우리가 배우고 있다. 오래된 영화를 올레 tv에서 찾아보고 싶은데 아직
음성으로 찾는 시도를 해보지 않았으나 아이들은 만화영화를 다 찾아본다. 드러내 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응용력을 발휘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겨우겨우 살아가는 셈이다.
'이제 그만' 하고 싶은데 과학은 제자리 걸음을 원하지 않는다.
앞으로 어떤 착각을 하며 내 동작이 이상하게 변할지 은근히 두렵다. 오늘도 새 보온 물병을
여는데 누름장치가 되어 있어서 눌러서 사용을 하기는 했지만 그 뚜껑이 돌려서 여는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함부로 이리저리 해보지도 못한다. 잘못 건드렸다가 망가질 것
같은 공포감도 있다.
뇌를 비롯한 모든 기관이 싱싱하게 유지될 수는 없겠지만, 결국 기막힌 행동의 원인은 뇌에
있을 것이니 세상이 변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뇌가 문제다. 뇌를 젊게 유지하는 방법은 뇌에
과부화가 걸리지 않도록 유쾌하게 활동하도록 돕는게 우선이리라. 굳은 땅을 파서 글을
새기려면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남듯이 뇌를 이해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긍정적으로 기막힌
동작을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으리라. 번호 키의 번호를 잊어버려도 몸이 기억하는 대로 누르고
문을 열듯이 우리의 무지를 열고 막힌 곳을 뚫어가면서 기막힌 동작을 생산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