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로 인한 75년의 발자취” / 동면 대평리 김하겸 1950년 6.25전쟁, 그해 나는 고향 동면 대평집에서 군선 조카집 동흥리 소재 이원군청 앞길에서 동면 이원항을 통해 북진하는 유엔군 행렬을 환영하던 15세 소년이었다, 그날이 1950년 10월 29일, 그 소년의 12년 년상의 형 김하준은 일찍이 서울로 유학가 1943년도에 5년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와서 잠시 이원군청에 다니던 시절 결혼도 하고 1945년도 8.15 해방을 맞아 다시 고려대학교 복학을 위해 서울로 남하하여 우리 형제는 남북으로 갈라져 지내고 있었다. 서울에서 형은 1948년도 6월에 고려대학교를 졸업후 금융조합연합회에 취직하여 고향의 부인을 남하시켜 새 살림을 꾸려 자유롭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2세를 잉태 해산을 앞둔 1950년 초여름 6.25 북의 남침으로 동대문구 제기동집에 숨어 있던 그해 7월 초 어느날 직장에 출근하라는 통보를 받고 출근한날 직장 다른 동료 5명과 함께 남침한 인민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강제 투옥되었다. 그후 9.28 우리 국군의 인천상륙 서울 재탈환 수복시 투옥된었던 애국시민들은 강제로 포승줄에 묶인채 북으로 끌려가며 죽음을 당하였다. 1950년 10월 국군의 북진으로 남한의 형님의 사망 소식도 알았고 고향 이원군에서도 후퇴하던 저들은 사상이 다른 애국시민들을 방공호등 구덩이에 포승줄에 묶은채로 지하땅굴에 밀어넣고 사살하다 총알이 없으면 총칼로 찔러 생명을 앗아가면서 퇴각하였다. 국군의 계속 된 북진의 전세는 그렇게 끝나 갈 줄만 알고 지내다 중공군과 규합한 인민군이 다시 남으로 처들어 와 12월 7일 그리운 내고향집 동면 대평리집에서 아버님과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15세 어린 나와 동행해 소달구지에 괴나리봇짐을 싣고 함께 차호항을 향해 가다 남송면 각종리에 출가하신 누님을 잠시 뵙고 차호 4촌 누님집에 도착하여 배를 타고 남한으로 피난준비를 하던 날 밤이었다. 갑자기 퇴긱했던 공산당의 총소리에 추운 겨울 강풍이 멎을 날만 기다리던 야밤에 급히 남으로 떠날 작은 어선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날이 12월 12일 밤이였다. 난생 처음 탄 배는 3일간의 항해후에 강원도 속초에 닿았으나 그 3일간 멀미로 당한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길 없었다. 3일후인 18일 속초를 떠나 주문진에 도착 군선항을 출발한 다른배에 환승해 12월 20일 다시 주문진 항을 출발 계속 남으로 향한 배는 22일 경상북도 강구에 도착 1박후 12월 23일엔 강구를 출발해 포항에 도착하여 드디어 피난민 수용소로 지정한 포항시 중앙교회 마루바닥에 안착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행사를 보았던 그때 느낌은 75년이 지난 오늘 날 까지 기억들이 생생하다. 임시 피난민수용소 중앙교회에서 8일 밤을 지새며 주변에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건축물 나무토막등을 주어 불을 피워 배급 받은 안남미로 밥을 지어 멸치국에 말아 먹던 추억, 당시 중앙교회만 달랑 남고 주변의 모든 건물은 공습에 불타고 허허벌판이였다. 1951년 새해를 맞아 1월 3일 당숙님께서 포항 항구동 2구의 어느 바닷가 초가 한칸 얻어 당숙네 식구랑 5명이 방 한칸에서 피난생활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세는 점점 더 불리해 그곳 포항을 떠나야 하는 신세였다 피난민들은 또 다시 대형 군 상육함(LST)에 실려 1월 14일 포항 출발 22시간 후인 1월 15일 전라남도 여수 신항에 도착 진남관 아래 적산가옥인 대형 건물을 임시 피난민 수용소로 지정해 기거했다 다음날 각 가족별로 분산 정착지를 찾아서 16일에 오림동 구 동사무소에 18여명이 1월 18일엔 연등동 양옥집(도수네) 방 한칸에 8명이 나뉘어 호구지책을 연구해 뿔뿔이 살아 갈 연구를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1951년 8월 2일엔 시내에서 조금 먼 오림동 여수 순천간 찻길 변 초가집을 헐값에 사서 우리가족 3명은 일명 밤과자(쌀가루떡을 잘게 잘라 설탕과 함께 튀긴 것)를 만들어 행상을 시작하였다 1년여 장사로 얻은 수익으로 1952년 7월 30일 여수시내 서교동 3반 이화숙(유준수)님네 집으로 이사하여 부둣가에서 노점상(껌 담배 과자등)을 하며 주경야독 중학교에 다니다 월반으로 1954년도엔 드디어 고등학교에 진학 1957년 졸업후 서울로 상경 이듬해에 회사를 다니게 되었다. 안장된 직장생활로 그 기나긴 피난민 딲지를 벗고 회사와 가까운 곳에 서 하숙하며 책과 벗을 하다 직장에서 상사의 큰 배려로 일찍 퇴근할수 있어 주경야독으로 대학교를 졸업하여 전공을 살려 30여년의 직장 생활을 하게되였다. 남한에 피난해 땅굴에서라도 3개월 정도 피난하면 월동후 국군의 북진으로 다시 고향에 갈수 있을것이라는 믿음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75년이란 긴 세월 지금도 객지에서 서글픈 타향생활에 가슴이 메일뿐이다 오늘날 먼저 가신 선친님들 기리며 6.25동난때 공산군에 끌려가신 형님의 위패와 유물등이 모셔진 임진각을 찾아 추모기념관과 북에 계신 선조분 들께 분향하는게 전부인 불효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소원은 하루빨리 남북통일 이루어 내고향 찾아 부모형제 만나보는 겁니다. 고향이 그리워 지금 살고 있는 집 건물이름도 “대평원”(집)이라 지어 달았지오
75년 지난 어려웠던 시절 물심양면으로 도움 주셨던 고마우신 분들께 은혜도 미처 갚지 못하고 제가 90노인 되어있군요.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2025년 12월 일 동면 김하겸 |
첫댓글 호미님의 일평생 지나오신 발자취를 읽으며 우리세대의 애환을 다시 느낍니다
매우 꿋꿋하게 살아오신 기개가 모두에게 본 받을만 합니다
통일이 되어 지나온 이산의 슬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날이 기대됩니다
힘 내시며 앞날의 장도를 더 빛내시길 기원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