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국교 재개 이후 열여덟의 일본 대사가 한국에 왔다.
더러는 돌아가 한국 비난을 일삼는 이도 있지만 양국 우호에 대사가 훨씬 많다.
두 번째 대사를 지냔 가나야마 마사히데는 '시신을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19년 전 작고 후 유족들이 유골 일부를 경기도 파주의 한 묘원에 묻혔다.
이따금 지인들이 모여 그를 기린다.
한,일 우호의 상징 같은 것이다.
와키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전 주필을 6년 전 서울에서 처음 만났다.
한국 문화계의 代母로 이름났던 故 전옥숙 여사가 소개했다.
'일본에 와카미야만 한 사람이 없다'는 전 여사의 괄괄한 목소리가 생생하다.
몇 년 뒤 정년 퇴임한 그가 서강대 한국어교육원에 입학했다는 소식에 놀랐다.
자식뻘 되는 학생들에게 '오빠' 소리 들으면서 반장까지 맡았다.
그 역시 언젠가 이 땅에 뼈를 묻을 일본인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와카미야는 11년 전 '독도 양보'를 시사하는 칼럼으로 우리에게 횐영받았다.
반대로 일본에선 살벌한 협박에 시달렸다.
양국 사이에 마찰이 일 때마다 상대를 이해하자는 쪽에 선 언론인이었다.
한국을 위해서였을까.
그보다는 역사의 짐을 지고 동북아와 공존할 수밖에 없는 일본을 위해 그랬을 것이다.
작년 말 한국 검찰이 위안부 기술 문제로 박유하 교수를 기소했을 땐 미.일 지식인의 항의 성명을 주도했다.
이번엔 한국의 良識을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일본엔 한국 전문가가 많다.
종종 그들의 끈질긴 취재와 방대한 지식에 놀란다.
하지만 애정이 사라지면 지식은 쉽게 흉기로 변할 수 있다.
얼마 전까지 양국 우호를 함께 걱정하던 사람이 갈고닦은 지식을 돌연 혐한 상품으로 팔아 먹는 현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한.일 관계가 나빳던 십수 년 동안 인내하면서 상대에 대한 애정과 예의, 겸손을 잃지 않은 일본인은 몇 안 된다.
와카미야는 그런 드문 일본인이었다.
엊그제 그가 동북아 협력을 모색하는 심포지엄에 참석하러 간 베이징에서 급서(急逝)했다.
읽주일 전 그는 서울에서도 같은 목적의 심포지엄에 나갔었다.
그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와카미야만 할 일본인이 없다'는 전옥순 여사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3년 전 한국어교육원 졸업 앨범에 그는 주먹을 불끈 쥔 사진을 남겼다.
'덕분에 뇌도, 마음도 젊어졌습니다.!'라는 소감도 적었다.
양국 관계가 그만큼 어려웠던 것일까.
68세, 너무 빠르다.
두 나라 사이에 그의 역할을 대신할 수 일본인이 다시 나타날 수 있을까. 선우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