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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분원의 나눔입니다
+ 루가복음 9,22ㅡ25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힘겨운 일을 감당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고난, 배척, 죽음의 십자가를 몸소 지고 가신 예수님의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입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십자가와 죽음의 신비입니다.
인간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고통과 죽음을 감당해야 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운명에 함께하시는 구원자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사랑으로 감당하며, 당신을 따르면 된다고 앞장서 걸으시면서 우리의 고통이 하느님을 향하게 하십니다.
* 초대
예수님은 무한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 우리의 고통과 죽음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십자가가 부당하고 억울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앞서 가시며 따르라 하시니 우리의 십자가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여정이 되게 하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 기도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하시는 예수님,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기를 바라시며 값을 치르신 당신은 무한한 사랑이십니다.
세상은 이기적으로 흘러가고 있고, 그 결과를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사랑으로 감당하고, 이웃의 십자가를 알아보며 함께 걷는 길이 영원한 생명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당신을 위해 사는 것을 매일 배우게 해 주십시오!
당신은 영원히 살아 계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아멘!
3월6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루카 9,22-25
순교는 십자가의 크기가 아닌 꾸준함에 있다
하퍼 리(Harper Lee)는 젊은 나이에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라는 위대한
작품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 작품은 1960년에 출판되어, 그해 퓰리처상을 받으며 문학계의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 약 50년 동안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하퍼 리가 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주된 이유는 그녀 자신이 그 두 번째 작품에 대한 부담감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퍼 리는 그녀의 출판사와 인터뷰에서 “나는 이미 ‘앵무새 죽이기’로 인생의 목표를 이룬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마거릿 미첼(Sherman Mitchell)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라는 역사적인 소설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이 책은 1936년에 발표되어, 미국 문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미첼의 첫 번째 소설은 결국 퓰리처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그녀는 문학계에서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도 역시 그 이후로는 어떤 글도 쓰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완벽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완벽주의는 열등감에서 옵니다.
더는 좌절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최고의 위치에서 또 다른 책을 썼다가 평이 좋지 않고 팔리지 않으면 자기 위치를 잃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 자존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반드시” 고난을 겪고 죽은 후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단지 일시적인 일이 아니라, ‘부활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길을 함께 따를 것을 요구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저도 사제가 되라는 주님의 뜻이 있었지만, 따를 자신이 없었습니다.
특별히 결혼 안 하고 산다는 게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느 날 마음에 드는 자매와 산 정자에 앉았을 때 오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이 말씀으로 십자가가 나에게 불가능한 무엇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무엇으로 보였습니다.
여기에는 바로 “매일”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평생 혼자 산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힘들지만,
하루하루로 생각하면 큰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여 떨어지면 죽을 것 같이 느끼는 신혼부부라도 어떤 한 사람이 여행 가서
일주일 떨어져 있는다고 상사병으로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순교 또한 내가 얼마나 큰 크기의 십자가를 지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오늘 하루만 버틸 수 있느냐로 다다를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고문과 박해를 생각하면 그것은 넘을 수 없는 산입니다.
그러나 한 발짝씩 올라간다면 언젠가는 그 산을 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명작을 낸 후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후속작을 쓴 대표적인 작가로는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와『에덴의 동쪽(East of Eden)』 등으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로 1939년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큰 명성을 얻었지만, 그 후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을 써 나갔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영감을 받았다기보다는 매일 글쓰는 습관과 끈기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스타인벡은 글쓰기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언급하며, 글쓰기는 ‘영감’이 떠오를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글을 쓰는 습관과 일관성에서 온다고 강조했습니다.
그의 말 중 하나는 “영감은 바로 그 자리에 있다. 내가 앉아서 하루에 몇 시간씩 글을 쓸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떠오른다.”라고 했습니다. ‘분노의 포도’는 1939년 작품이고 ‘에덴의 동쪽’은 1952년 작품입니다.
이 밖에도 그의 작품은 10권이 넘습니다.
장사와 요리의 한국 대표적 전문가인 백종원 대표도 많은 브랜드를 만들었지만, 대부분의 수익은 빽다방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10개 중 1개만 성공한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자세입니다.
인도에 아내의 죽음 때문에 평생 산을 깨서 길을 낸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삶이 영화로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사순을 시작하는 지금 그분의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사순 동안 술과 담배를 끊겠어?’, ‘내가 어떻게 사순 동안 단것을 먹지 않을 수 있겠어?’ 그러나 오늘 하루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안 되면 한 시간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광야에서 그렇게 하루하루 사셨을 것이고 그 하루하루가 모여 40일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삶 자체도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부활’의 희망으로 합니다.
그런데 하루만이라도 십자가를 지고 나면 부활의 기쁨이 마지막 때 한 번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루의 십자가에도 부활의 기쁨이 벌써 온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책을 한 줄 썼을 때 이미 완성된 명작의 희망이 주는 기쁨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그다음 날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평생 지어야 할 십자가는 잠시만 보고 오늘 당장 지어야 할 십자가만 생각하며 살아갑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6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신명기 30,15-20
루카 9,22-25
하느님의 시계는 아주 천천히 돌아갑니다!
평소 너무 바빠 미처 보지 못했는데,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목에 기가 막힌 명당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 지금은 관리가 전혀 안 된 상태입니다.
잡목에, 가시덤불에, 키가 허리만큼 오는 잡초에...
그래서 톱과 낫을 들고 열심히 정리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벚꽃이며 수선화가 필 무렵에는, 저희집을 찾는 피정객들이 바다가 지척인 명당자리, 키 큰 소나무 아래 설치된 평상에 앉아, 차도 마시고 기도도 할 수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잡목과 잡초 제거 작업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가시덤불이 사람을 괴롭힙니다.
자칫 방심하면 가시에 찔리고, 손과 팔에 생채기가 나곤 하니, 아주 조심조심 가시덤불부터 제거합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면서, 제 안에 잔뜩 도사리고 있는 가시덤불들, 이번 사순시기 말끔히 제거해야 할 가시덤불들은 어떤 것들인지 묵상해봅니다.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참으로 많은 가시덤불들을 없애버리지 못한 채, 불편한 상태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가시덤불 속으로 들어가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따끔따끔 찌르니 두려움도 큽니다.
가시덤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지나친 욕심은 금물입니다.
이번 사순시기 동안 하루에 한 줄기씩 차근차근 내 안의 가시덤불을 제거해나가자고 다짐해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사순시기는 하느님께로 돌아 서는 기간입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도달하기 위한 첫째 조건으로 하느님께 돌아섬을 강조합니다.
모세의 눈을 크게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렇게 주의를 줘도 또다시 이방신에게로 한눈을 파는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시계는 참으로 느리게 돌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셨지만, 속전속결로 이루어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40년의 광야 생활을 겪게 하신 후, 그들을 단련시키시고 정화시키신 후,
마침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급했습니다. 당장 이번 달 안으로, 늦어도 올해 안으로,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눈감기 전에 약속의 땅에 발을 들여놓을 것을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광야 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조급한 마음에 사람들은 눈을 돌립니다.
당장, 순식간에 청을 들어줄 것 같은 이방신에게로 말입니다.
하느님께 돌아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세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느님께 돌아선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간절히 매달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대체 무엇을 듣고 있습니까? 인생에 단1도 도움이 되지 다양한 매체들, 거짓 미디어,
가짜 뉴스를 보고 듣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정작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데는 너무나 인색합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에 매달리고 있습니까? 천박한 자본주의, 극단적 물질만능주의가 온 나라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돈이 가장 우선적인 가치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집값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내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이 조금이라도 하락세를 보이면, 세상 다 잃은 표정을 짓습니다.
오늘 우리는 돈이라는 이방신에게 깊이 빠져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다시금 제반 사항에 대한 가치평가가 다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첫 자리에 두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어떤 것인지? 조금 뒤로 물러나도록 조정해야 할 대상은 어떤 것인지 깊이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강론>
(2025. 3. 6. 목)(루카 9,22-25)
<십자가는 의무와 멍에가 아니라, 은총이고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2-25)”
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밀알 하나’를 심는 일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이 말씀에서 ‘많은 열매’는 ‘많은 사람의 구원’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당신을 하나의 씨로 심어서 ‘많은 사람의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은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인 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지만, 우리는 ‘내가’ 구원받으려고 십자가를 집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부활과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십자가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에 참여하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야고 5,7-8).”
만일에 십자가만 바라보고 부활과 생명을 보지 않는다면, 그 신앙생활은 힘들기만 하고 아무 기쁨이 없는 생활이 될 것이고, 기쁨 없이 생활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노동을 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의사가 병자를 살리기 위해서 수술을 권할 때, 병자 쪽에서 살고 싶으면 그 권고를 받아들여서 수술을 받을 것입니다.
또 의사가 어떤 약을 처방할 때, 병자는 살고 싶으면 그 약이 아무리 쓴 약이라도 먹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수술과 약이 십자가라는 뜻이 아니라, 힘들어도 수술을 받아들이고 약을 먹는 일이 십자가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어쩔 수 없이 실천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은총이고, 신앙인들을 부활과 생명으로 연결해 주는 특권과 같은 것입니다.
2)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베드 1,6ㄴ-9).”
이 말은, 십자가로 생각되는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 그것을 참고 견뎌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말이기도 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라는 말은, ‘힘들어 할 수밖에 없다.’로 생각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받아들여야 할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괴롭고 힘든 일입니다.
그럼에게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서 지고 가는 것은, ‘내 신앙’의 단련과 정화를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영혼의 구원’을 얻기 때문이고,
‘그날’이 되면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의 말씀에서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만 집착하면서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 갖지 않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그런 사람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 자신이 얻으려고 하지 않아서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현세적인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는 사람”입니다.
<‘잃는’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뜻으로는 ‘버리는’입니다.>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허무하게 사라질 이 세상 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