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은 어디에 있나. 진정한 나는 무엇인가. 신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시는가. 이들은 같은 하나의 질문입니다. 이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서는 선결문제 하나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은 의식의 개수와 세계의 개수 간의 불일치 문제입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오랜 선대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배워왔습니다. ‘세계는 객관적으로 단일하게 존재하고, 이런 객관 세계를 인식하는 주관은 개인의 수만큼 별개로 있고 따라서 의식 역시 개인의 수만큼 각자의 몸(특히 두뇌) 안에 존재한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공간 우주는 하나인데, 의식의 개수는 사람 수만큼 존재하며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는 만큼 계속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상은 호모 사피엔스 문명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이른바 ‘세계 내內 존재’로서 내던져지고 소외된 두려운 자아상이 도출되곤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우 당연시하는 관점이지만 그 자체로 심각한 모순을 드러냅니다. 만약 의식이 개인의 수만큼 다수라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며 단일한 세계는 나타나지 않아야 합니다. 100만 명의 사람들이 함께 밤하늘에 뜬 달을 바라볼 때, 1개의 세계에 있는 1개의 달을 일시에 공통으로 보는 것이지 저마다 다른 100만 개의 세계에서 저마다 다른 100만 개의 달을 각자 비밀스럽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달이 실제로 있는 장소는 달이 보이는 바로 그것이며 각자의 머릿속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달을 보는 주체는 몸이 아니며 단일한 의식이 동시에 100만 개의 몸을 통해서 1개의 달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동안은 추상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겠지만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의식은 의식 안에서 의식 자신을 보는 중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보는 중입니다. 꿈속에서 꿈속의 자아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꿈속의 달을 바라볼 때, 달은 1개의 의식 안에 1개 존재하며 다수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실제 경험이 알려주는 소박한 진실이므로 그동안의 오해는 올바른 이해도 대체되어야 합니다.
착각을 대체할 바른 이해는, ‘세계는 1개’고 그 세계를 아는 ‘의식도 1개’라는 사실입니다. 세계를 보고 아는 의식이 1개이고 머리가 의식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면 의식이 있을 곳은 (머리를 포함하여)머리 바깥 공간 전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우리)되는 모든 것은 곧 의식(우리) 이외 다른 것일 수 없으며, 따라서 세계와 의식(우리)은 다르지 않은 같은 것이고(Being : 경계가 없다) 또 그래야만 합니다. 몇백만년에 걸쳐 가르쳐진 생각에 깊이 젖어 있는 자아(몸-생각)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런 뒤바꿈을 수용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사례가 가리키듯이 사회문화적으로 공인된 기본적 관점을 이동시키는 것은 언제나 매우 큰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출처 : "자유롭게 살고 유쾌하게 죽기", 이문호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