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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땐 빈말로라도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거야.
피가 머리로 솟구치고 속에서 열불이 났다. 정말이지 이 둘은 사람을 존경할 줄 모르나? 아이코는 구역질을 참으며 진료실을 나왔다.
이라부의 원고는 아라이에게 떠맡기기로 했다. 귀찮아서 자신은 읽지 않았다.
“예, 좋습니다. 호시야마 씨의 추천이라면 읽어보겠습니다.”
아라이는 쾌히 승낙했다. 당연하다.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면 꼬투리를 잡을 참이었다.
“추천하는 거 아니야. 뻔뻔한 의사가 억지로 주더라.”
간단하게 사정을 설명하고 착불 퀵서비스로 보내버렸다. 이젠 직접 대처하라고 하면 된다. 내 알 바 아니다.
밤에는 사쿠라와 만나 식사했다. 꼴 보기 싫긴 하지만,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는 이제 이 여자밖에 없다.
“대단하네, 이런 음식점을 예약하고. 물론 네가 사는 거지?”
아자부에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사쿠라는 가게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쿠라는 코르덴 바지에 스웨터 차림이었다. 마치 학생 같다. 화장기도 없다. 서른 중반이나 됐는데도 그런 차림이 어울리다니, 샘이 났다.
“일은 어때? 잘돼 가?” 사쿠라가 말했다.
“잘 안돼. 신경과 다녀.” 아이코가 불퉁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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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놀라는 사쿠라에게 아이코는 요즘 상태가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전부 정직하게. 어차피 사는 세계가 다르니 소문날 일도 없다.
“얘, 우유 가게 아들하고 주유소의 여자애로 하라니까.”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놀리지 마.”
“그럼, 내가 분석해 줄게. 우시야마 씨는 몇 가지 틀을 정해 놓고 거기 짜 맞추는 식으로 연애소설을 쓰다 보니 싫증이 난 거야.”
“뭐? 틀에 짜 맞춘다니?” 아이코가 정색하고 말했다. 남의 일이라고, 말이 너무 지나치다.
“하지만 그렇잖아. ‘암행어사 박문수’처럼 결말이 뻔히 보이거든.”
“너무한다. 이별도 있고 만남도 있는데.”
“그건 살짝 변화만 준 거지. 취향이 같아. 현실감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고.”
“나카지마 씨, 사람을 앞에 두고 어떻게 그런 말을.”
“화내지 마.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잖아. 어차피 지금 네 주변엔 알랑쇠뿐이니까.” 사쿠라가 와인을 입에 대더니 ‘오, 꽤 맛있는데!’, 하며 익살을 떨었다.
“우시야마 씨, 『내일』 같은 장편을 다시 써봐. 그건 걸작이었어. 진짜야.”
“하지만 잘 안 팔렸어.” 아이코는 아래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잘 안 팔렸다니? 그건 네 기준이지. 초판이 3만 부였다고. 배부른 소리 하지 마.”
“나는 베스트셀러가 될 줄 알았어. 인생이 바뀔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아이코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급 아파트를 살 계획까지 세웠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