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혼돈의 물: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욥 38,8)
이스라엘 북쪽 갈릴래아 지역에는 큰 호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갈릴래아 호수”(마르 7,31), “킨네렛 바다”(여호 12,3) 등으로 칭해진 곳입니다.
이 호수는 분명 민물이지만 성경에선 “바다”라고 표현합니다.
고대에는 소금기의 여부로 바다를 구분하지 않고 규모가 크면 담수여도 바다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마태 14,22-33)도 바로 이곳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기적은 오늘 제1독서인 욥기 38장과도 관련 깊은 사건입니다.
옛 이스라엘과 고대근동에서는 큰물을 위협적 존재 또는 혼돈의 세력으로 여겼습니다.
물은 우리에게 주로 생명수라는 긍정적 의미로 다가오기에, 물을 위협과 혼돈으로 여겼다는 말이
의아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물은 양면성을 갖습니다.
적당히 있으면 생명수이지만, 너무 많으면 목숨을 앗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물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예가 천지창조를 서술한 창세 1장과 2장입니다.
먼저, 창세 2장에서는 물이 생명수입니다.
‘에덴동산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고 땅 밑에서 솟아오르는 안개 같은 물이
지면을 촉촉하게 적셔주었다.’고 합니다(5-6절).
이는 창세 2장의 저작 배경이 물이 귀한 곳임을 암시해 줍니다.
이를테면, 영토의 절반이 광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땅 같은 곳 말이지요.
그에 비해, 창세 1장에서는 물이 위협적 존재로 등장합니다.
2절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불모지와 어둠 그리고 심연의 물은 창조 이전의 혼돈을 상징하고, 주님의 영이 심연의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는 말은 그분이 혼돈을 제압하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태초의 혼돈을 내리누르며 세상의 질서를 잡아 천지를 창조하십니다.
하지만 인간의 죄가 한계에 달해 주님께서 세상을 멸하기로 결정하신 날엔
혼돈의 세력인 물이 다시 돌아옵니다.
성경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큰 심연의 모든 샘구멍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들이 열렸다”(창세 7,11).
이는 심연의 물이 다시 세상을 덮어 주님께서 창조 때 확립하신 질서를 깨뜨렸다는 뜻입니다.
바로 여기서 물이 위협적 존재, 곧 창조 질서를 뒤집을 수 있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오늘 독서에 나오는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욥 38,8)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창조주 주님께서 혼돈의 물을 제압해 피조물 세계를 침범하지 않도록 막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바다 위를 걸으신 사건의 의미도 명확해집니다.
피조물들이 사는 뭍에 큰물이 침범하지 않도록 가두신 하느님의 구원 행위가
성자 예수님을 통해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예부터 이어진 이런 구원 역사에 대해 떠올리고 되새길 수 있는 성지입니다.
* 김명숙 소피아 -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박사, 광주가톨릭대학교 구약학 교수, 전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저서 「에제키엘서」 「예레미야서 1-25장」 「예레미야서 26-52장」
「구세사 산책: 에덴에서 약속의 땅까지」
[2024년 6월 23일(나해) 연중 제12주일 의정부주보 2면,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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