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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문안
딤후 4:17-22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19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20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21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22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딤후 4:17-22 / 그러나 주께서는 내 곁에 계시며 모든 나라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담대하게 복음을 설교할 기회를 내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자 우리에 던져진 나를 구해 주셨습니다. 18) 주께서는 언제나 모든 악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하늘나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 영원토록 영광이 함께 하소서. 아멘. 19) [작별인사]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그리고 오네시보로 집안 사람들에게도 문안해 주시오. 20)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이 나서 밀레도에 남겨 두었습니다. 21) 그대는 겨울이 되기 전에 어서 이곳으로 오도록 하시오. 으불로가 그대에게 문안해 달라고 합니다. 부데와 리노와 글리우디아와 그 밖에 모든 사람들도 안부를 전해달라고 합니다. 22)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대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보살펴야 할 사람과 동료들에 대해 안부를 전합니다. 그리고 고난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힘을 주시고 건져 주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전합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17-18) 첫 번째 재판 때에 바울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함께하시기에 자신이 지금까지 전력을 다해 복음 전파의 사역을 할 수 있었다고 확신에 차서 고백합니다(17). 18절은 바울이 1차 투옥에서 석방된 것을 기억하면서 주께서 자신을 모든 악한 상황에서 건지실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결국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바울은 죽음을 면하지 못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소망했던 것처럼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도 현실에서의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19-22) 바울은 편지를 마치면서 디모데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각처에 있는 동역자들에게 문안하라는 명령과 함께 믿음의 형제들에게도 문안을 대신 전합니다. 먼저 브리스가와 아굴라, 그리고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고 합니다(19).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바울과 함께 생활하고 동역했던 부부입니다(행 18:2-3, 18, 26; 롬 16:3; 고전 16:19). 이들은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에베소에 있었고 디모데의 사역을 돕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그를 방문하고 격려했던 사람입니다(1:16-18). 이어서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있고, 드로비모는 병을 앓고 있어서 밀레도에 남겨두었다고 합니다. 에라스도는 바울이 신뢰하는 동역자 중 한 사람이며 디모데의 가까운 동역자입니다(행 19:22). 디모데는 그의 상황이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 등 모든 형제의 문안을 전합니다(21). 감옥에 있던 바울을 떠난 동역자도 있고, 재판 때에는 바울 곁에 아무도 없었습니다(16). 그런데도 바울은 모든 형제와 안부를 주고받기 원합니다. 바울은 핍박과 어려움 속에 있는 디모데와 모든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축복합니다.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바울의 유언과도 같은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22). 핍박과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과 그 은혜가 심령에 있으면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또 다른 시작이 있습니다. 바울의 죽음 이후에 바울이 언급한 동역자들이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지나 그 복음이 오늘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적용: 주께서 곁에 서서 당신에게 힘을 주셨던 경험을 생각해 봅시다.
바울의 가슴을 뛰게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디모데의 가슴을 뛰게 했습니다. 디모데의 가슴을 뛰게 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복음으로 가슴이 뛰는 성도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에 천국의 기쁨과 평안이 충만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능력이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 설 교 >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
딤후 4:17-18 / 양인순 목사
바닷가 한 섬에 등대지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불쌍한 할머니가 허기진 모습으로 등대기지를 찾아왔습니다. 기름을 조금만 주면 그것을 팔아서 쌀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너무 불쌍해 보여서 등대의 기름을 조금 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친구가 찾아와서 긴급하게 차를 움직여야 하는데 기름이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등대의 기름을 빼주었습니다.
며칠 뒤에 아내가 와서 아들의 학자금을 못냈다고 하소연합니다. 급한 김에 기름을 팔아 학비를 해결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폭풍우와 비가 거세게 몰아쳤습니다. 다음 날 아침, 섬에 무서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어젯밤 섬 인근 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이 침몰해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등대의 기름이 떨어져서 등대의 불이 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정심보다 우정보다 더 중요한 등대의 사명이 있습니다. 등대의 사명은 어두운 바다에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등대의 불이 꺼져 있다면 등대지기는 사명을 망각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교회는 세상을 비추는 등대요, 성도는 등대를 지키는 등대지기와 같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교회는 죄로 인해 인생의 방향을 잃고 어둠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밝혀 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소망을 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삶의 무의미 속에 방황하는 자들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생명을 구원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는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은 바로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의 본분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전도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최고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가치입니다. 교회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은 본질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 어느 것도 이것보다 우선순위를 둘 수는 없습니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제자들이 받았던 최후의 명령이요, 지상최대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선교할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참 교회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선교할 때 참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며, 선교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 성지교회의 비전은 바로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의 비전은 바로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우리가 속한 개포동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심히 증거해야 합니다.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로 우뚝 서야 합니다. 이 지역에서 인정받고, 사랑받는 교회로 자리매김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이 땅에는 아직도 4명 가운데 3명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바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써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없기에 농어촌의 미자립 교회를 도와야 합니다. 각 방송선교 기관과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선교기관들을 힘써 도와야 합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속히 임하도록 힘써 기도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더 많이 개척해야 합니다. ‘최고의 전도는 교회 개척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국내에 3개의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대형교회를 이루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지만 복음이 필요한 지역에 교회를 세워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속해서 열방을 품고 선교사를 파송해야 합니다. 더 많은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파송한 미얀마의 망 선교사가 와타와 지역에 유치원 사역을 새롭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리안 선교사가 성지 Youth Center를 중심으로 젊은이 선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중국 쿤밍의 박 선교사를 통하여 교회가 세워지고, 현지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번에 방문하는 몽골 울란바타라르에도 니나 선교사가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몽골 성지교회를 세웠고, 우물을 파서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와 전도에 힘쓰는 교회가 건강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에 힘쓰는 교회가 복을 받습니다. 성지교회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힘차게 사도행전 29장의 새 역사를 계속해서 써내려가야 합니다. 바로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저를 보내주셨고, 우리를 성지가족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디모데후서 4장 말씀의 결론입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가장 마지막에 쓴 편지입니다. 로마의 감옥에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 유언을 한 편지입니다. 바울이 들려주는 유언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다같이 딤후4:2말씀을 읽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
사도 바울이 준엄하게 명령한 마지막 유언은 바로 ‘말씀을 전파하라’입니다.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전파할 것인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 전파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권하라고 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직무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해 자신의 복음 전도의 마지막 간증을 들려줍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으로서 달려온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바로 주님께서 자신 곁에 서서 힘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자의 입과 같은 고난 속에서 지켜주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악한 일에서도 건져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임을 말씀합니다.
이방인을 위한 택한 그릇으로 부름받은 바울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받았던 사랑의 흔적들을 바울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이런 수많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바울이 끝까지 기쁨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투철한 사명감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핍박자요 폭행자였던 자신을 불러주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기억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복음의 빚진자 의식을 지녔습니다. 자신의 사명은 바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증언하는 것임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존심도 내려놓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부귀영화도 포기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 걸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비록 험난한 인생길을 달려왔지만 주님께서 곁에서 지켜 주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통해 선포된 말씀이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바울의 복음의 열정이 타오르기를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소유된 백성으로 부르신 이유는 바로 기인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복음을 선포하게 하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할 때 비로소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39-40)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동하는 자가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인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주님의 마지막 유언이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복음만이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만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할 수 있을까요? 전도 5계명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첫째, 전도는 은사가 아니라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명임을 인식하자.
아직도 많은 분들이 전도는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관계가 좋고, 말을 잘하고, 성경을 잘 아는 특별한 사람들만이 하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전도는 특별한 사람이 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가장 힘써 감당해야 할 일이 바로 전도입니다.
전도의 출발은 바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입니다. 놀라우신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부터 우리의 전도는 출발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는 더욱 힘써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둘째, 주님의 마음으로 전도 대상자(VIP)를 작정하고 기도한다.
누군가를 전도하려면 대상자를 분명히 정해야 합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 앞에 초청하고 싶은 분을 꼭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대상자를 매일 만날 수는 없지만 기도로 만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관심이 생깁니다. 관심이 생기면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 영혼이 불쌍해집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백성으로 살아야 하는데 영원 형벌을 받는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믿는다면 전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셋째, 대상자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섬긴다.
대상자를 정하고 매일 기도를 드리기만 해도 절반은 전도가 이뤄진 셈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사랑의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최고의 전도는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대상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랑의 섬김이 필요합니다.
보험왕이나 자동차 판매왕들의 공통점을 보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는 것입니다. 상품을 팔기 전에 먼저 자신이 믿을만한 사람임을 각인시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의 생일이나 자녀들의 입학 졸업까지 챙긴답니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열매는 저절로 맺어진다는 것이죠.
상품 하나를 팔기 위해서도 그렇게 애를 쓰는데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사랑의 수고를 하고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며칠 전 시내를 지나가는데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빨간색의 소형차에 커다란 광고판을 부착한 자동차의 행렬이었습니다. 10대 정도의 자동차가 지나가는데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나이트 클럽 로마! 100% 부킹 보장! 한번 와보시면 끝내줍니다’ 나이크 클럽 광고를 위해서도 저렇게 애를 쓰고, 돈을 투자하는데 우리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반성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우리도 광고한번 했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헤븐 클럽 성지교회! 100% 천국보장! 한번 와보시면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넷째, 전도 대상자를 교회로 인도하여 성경책을 선물한다.
평상시에 교회로 초청하기 힘들면 구역으로 초청하면 됩니다. 집에서 차 한잔 하자고 초대하는 것은 쉽습니다. 자연스럽게 구역원들과 접촉하고, 그 후에 교회로 오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특별한 행사나 잃은 양 찾기, 예수 생명잔치에 초대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 주에도 오후 찬양예배 시간에 주대준 박사를 초청해서 그의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듣습니다. 이럴 때 남편들이나 회사 동료들을 초청하면 쉽게 복음을 접할 수 있습니다. 전도 대상자를 특별 행사에 초대하면 효과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리고 VIP들에게 성경을 선물로 주는 것이 좋습니다. 거룩한 부담을 주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으시면서 전도 대상자에게 성경책을 선물한 경험이 있으신지요? 없으시다면 이번 기회에 한 번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섯째, 교회에 등록한 새가족의 멘토가 되어 준다.
전도 대상자가 교회에 처음 나오면 모든 것이 어색합니다. 따라서 유치원생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처럼 곁에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예배당의 분위기와 찬송, 성경, 설교, 헌금시간 등 모든 것이 어색하기만 합니다.
제가 전에 북한산에 등산을 간적이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도선사 입구까지 절에 운행하는 셔틀버스가 있었습니다. 망설이다가 탔는데 얼마나 어색하던지요? 똑같은 버스인데도 정말 그 십 분의 시간이 길게 느껴졌습니다. 차 안의 향 냄새가 다르고, 연등 장식도 어색했습니다. 들려오는 찬불가 또한 귀에 거슬렸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았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새가족이 들어올 때 바로 이런 기분이겠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새가족이 오시면 무엇보다 기쁘게 맞아주시고 인사하십시오. 그리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일 먼저 배려해 주십시오. 자리를 안내할 때도, 주차를 할 때도,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도,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먼저 양보를 해주세요. 새가족을 잘 섬기는 교회, 가족처럼 따듯하게 맞이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전도를 해야 할까요? 내 얼굴이 전도지임을 기억하시 바랍니다. 내 얼굴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나침판과 같습니다. 항상 긍정적이고 축복의 말을 하십시오. 좋은 이미지와 인상을 안겨주십시오. ‘저분은 뭔가 달라’ 이런 인상을 주어야 합니다. 같이 어울려 살지만 내가 상대방을 전도하려면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을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애플 전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동네에 열심히 전도하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동네 가게에 사과를 파는 아주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래서 매일 교인들이 가서 전도를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낙공불락의 성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 날, 그 아주머니가 말쑥하게 옷을 차려입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의아한 눈초리를 바라봅니다. 예배 후에 어떻게 해서 오게 됐는지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씩 가게에 사과를 사러오는 신사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항상 제일 못생기고 덜 싱싱한 사과를 사갔습니다. 미안해서 덤으로 더 드리면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습니다. 지금 당장 먹을 것이기에 좀 썩은 것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 싱싱한 사과를 팔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분에 대해 조금씩 존경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분이 제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분이 믿는 하나님, 그분이 다니는 교회라면 믿을만 할 것 같아서 왔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때로는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바보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자신의 것을 양보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생명을 구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지불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바로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고통을 당하셨는데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을 회피한다면 무슨 영광이 있겠습니까?
쉰들러 리스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우주를 구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던지셨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사랑을 되돌려 주어야 할 때입니다. 내가 받은 그 사랑과 은혜를 아직도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자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 권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권사님은 보험회사의 설계사로 일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보험에 가입시켰는지, 보험실적이 전국에서 상위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영업소 소장으로 승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은 보험회사 직원으로서의 보험실적만 좋은 것이 아니라, 전도하는 일에도 열심이었습니다. 이 분은 늘 가방 안에 성경책을 넣고 다니면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전도하였습니다. 이 권사님의 경우가 바로 '나는 주의 일을 하고, 주님은 나의 일을 해 주시는' 그런 경우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서 많은 사람들을 보험에 가입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도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50세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위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도 이 권사님은 금은방에 가서 십자가가 새겨진 18K 금반지 100개를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웃 사람들에게 금반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비록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더라도 자신이 죽고 난 후에 이 반지를 보면서 예수님을 믿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그 순간까지도 전도의 사명감에 불타는 이 권사님의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일으키고 많은 영혼을 교회로 인도하였습니다. 틀림없이 그 권사님은 주님 앞에서 칭찬과 영광을 존귀함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들을 옳은 길로 돌아오게 하는 자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비추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스타는 바로 생명을 살리는 전도자입니다.
생명에 관심을 가지고, 생명을 살리는 자에게 주님은 오늘도 항상 곁에서 도와주십니다. 어려울 때 힘을 주십니다. 심지어 사자의 입에서도 건져주십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내가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불신 영혼들이 주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아름다운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든 성지가족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복음을 선포하여 생명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로 아름답게 쓰임받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날 너는 나의 뜻을 이루었노라고, 나의 가장 큰 기쁨이 되었노라고 인정받는 주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딤후 4:17-18 / 양향모 목사
세상 살아가기가 참 힘드세요? 그럭저럭 살만하세요? 모든 일이 잘되고 늘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세상이 그리 녹록하지가 않습니다. 옛날에는 대부분 모든 사람이 어려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인생이 그런 것이려니 하고 살았는데 요즘은 빈부 차이가 크고 또 그런 차이가 너무 잘 보이니까 못사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힘든 삶을 삽니다.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 앞에 서보면 우리는 참 힘이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돈의 위력 앞에 서보면 가난한 사람은 참 초라한 삶을 산다는 것을 느낍니다.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인생의 세월 앞에 서보면 우리 인생은 참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느낍니다.
코로나 19 같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우리 인간이 큰소리를 치며 살지만 참 무기력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인생을 좀 산 사람들이 살아온 과거를 되돌아보면 참 험한 고비들을 많이 넘기며 살았습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생사의 기로에 서서 어쩔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가슴 치며 통곡하던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인생을 좀 살았다는 사람들은 다 이런저런 어려운 사연이 있었고 그 어려움 앞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참고 견디고 싸워서 이기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사도바울 생애의 마지막 장면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회상하면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바울에게 힘을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힘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이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기도 제목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말로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내게 하신 말씀이고 다른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나에게 하신 말씀이고 정말로 나의 삶에 적용되기를 간절히 믿고 바라면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본문 17절에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읽는 개역 개정에서는 번역하지 않았지만 헬라어 성경이나 다른 번역에서는 오늘 본문을 “그러나”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바로 앞 절인 16절에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와서 재판을 받는데 바울과 함께 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고 다 바울을 버리고 떠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분 복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 계셨고 바울에게 힘을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바울 한 사람만 남아서 외롭게 재판을 받는 것 같지만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고 만왕의 왕이시고 최후의 심판을 하실 재판장이 되시는 그 예수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바울에게 힘을 주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재판 때만 주님께서 바울과 함께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 주님은 늘 바울 곁에서 바울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의 핵심을 알고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일평생을 고난을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에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고난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라고 했습니다.
이런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늘 그와 함께 계셨고 이길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 개인의 힘으로는 이런 고난들을 당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해주시고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만 이런 약속을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예수님께서 곧 이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오해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데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재림하시기 이전에 세상에 오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씀은 또 다른 하나님인 성령님께서 오셔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앞에 인용한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셔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하신다고 했습니다. 여기 보혜사는 성령님을 말씀하는 것이고 또 다른 이라는 말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과 똑같은 분 즉 같은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 곁에 오셔서 힘을 주신 주님이 성령님이시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분도 성령님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 성령님께서 늘 함께하시고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이 믿음의 길이 힘들고 어렵게 보여도 너무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제가 바라기는 말로만 지식으로만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으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느끼며 사시기 바랍니다. 의지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더 강한 힘을 주시라고 기도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1)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사도바울과 함께하시면서 힘을 주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이방인들이 듣게 하기 위해서 이런 힘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아”라고 했는데 “나를 통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사도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울 자신이 바울의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선포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모르거나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목회자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자신의 지식이나 자신의 철학으로 설교하기를 좋아합니다. 성경으로 설교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보다는 자신이 깨닫고 연구한 것에 더 중점을 둡니다.
우리가 경험했든지 안 했든지 내가 가진 지식으로 이해가 되든지 이해하지 못하든지 깨달았든지 깨닫지 못했든지 복음의 진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정확 무오한 말씀입니다.
“선포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선포된 말씀이란 전파된 말씀이라는 뜻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달하신 말씀이라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왕이 왕명을 신하를 통하여 백성에게 전달하듯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명을 선포자를 통해서 인간들에게 전달하셨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를 선포자라고도 합니다. 설교자들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명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설교자들이 복음을 변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변호하고 증명해서 알아듣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증거들을 가지고 이 말씀이 정말로 사실이고 틀림이 없다고 변증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설교자들이 설득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좀 믿어봐 이렇게 좋은 것을 왜 안 믿으려고 해 믿으면 너무나 좋다고 설득하기도 합니다. 요즘 전도라는 것은 대부분이 이렇게 설득하는 것입니다. 믿어달라고 사정하는 것처럼 비굴하게 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 전도는 선포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설교는 선포입니다. 왕명의 전달입니다. 구차하게 변호하고 증명할 필요도 없고 믿어달라고 사정하고 설득할 필요도 없습니다.
특별히 이 왕명은 재판을 받으라거나 벌을 준다거나 힘든 일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 최고의 은혜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 명을 받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너무나 귀한 말씀입니다.
2) “온전히 전파되어”라고 했습니다.
온전하게 전파된다는 것은 완전하게 널리 전파된다는 뜻입니다. 조끔씩 맛보기만 해준다든지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복음을 세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복음을 전파한다고 하지만 그 복음이 부분적이든지 조금 잘못되었든지 완벽하지 못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욕심이 많은 장사꾼처럼 사기꾼처럼 감추고 속여서 자기의 이익을 취하려고 거짓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복음에다가 뭘 섞으면 안 됩니다. 복음에 있는 무엇을 빠트려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 그대로를 전달해야 합니다. 주시는 하나님도 은혜로 선물로 주시는데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중간에서 이익을 취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3)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과 함께하시면서 힘을 주신 것은 사도바울을 통하여 선포된 말씀이 온전하게 널리 전파되기를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파된 복음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한곳에 머물러 목회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온 세계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와 같은 일을 했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감당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하여 선포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디모데나 디도 같은 목회자들이 나와서 지역 교회를 담당하고 성도들을 양육하는 일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6-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씨를 뿌리고 아볼로나 디모데 같은 목회자들은 그 복음의 씨가 열매를 맺도록 물을 주지만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에게 배운 복음의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잘 자라도록 성경 말씀으로 저들을 양육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일 뿐이고 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믿음 생활 잘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런 노력만으로는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성령님께서 그 곁에 오지 않으시고 성령님께서 그에게 힘을 주지 않으시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고백하지 못합니다.
긍정적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전하기만 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셔서 믿음을 가지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이 복음을 우리 주변에서 세상 끝까지 전하면 됩니다. 이 복음을 세상 모든 사람이 듣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7절 마지막 부분에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자의 입은 실지로 기독교인들이 원형경기장에 던져져서 사자의 밥이 되기도 했기 때문에 그런 형벌을 받지 않았다는 말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에게는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어도 원형경기장에서 사자 밥이 되게 하는 이런 극형에 처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도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극형에 처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본문은 바울이 로마 시민권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힘을 주신 것에 의지한다고 했기 때문에 사자의 입은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바울의 복음전파를 방해했습니다. 그런 방해 공작을 하는 사람들이 사자처럼 달려들어도 주님께서 다 지켜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별로 어려움이 없이 교회에 잘 다니고 평생 신앙생활 잘합니다. 그런 사람은 참 복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가족들과 함께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비교적 평안한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잘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은 가정에서 혼자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참 어렵습니다. 가족들의 반대도 있지만 혼자 신앙 생활할 때 사탄의 유혹이 많습니다. 무엇이든지 함께 더불어서 하는 것이 좋은데 혼자서 할 때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 전도를 많이 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인이 되도록 계속 신앙생활 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세상의 유혹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한 계단 두 계단 올라갈 때마다 낙오자가 생깁니다.
성령님께서 특별하게 역사하시지 않으시면 신앙생활이 힘듭니다. 주님께서 곁에 서서 그런 유혹들을 이길 힘을 주시라고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곁에 계시는 주님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앞에 있는 사자의 입은 무엇일까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 우리를 믿음에서 떠나게 하려고 유혹하는 세력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로 전하는 일을 방해하는 세력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5장 8-9절에 그 사자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사자를 믿음을 방해하는 대적 마귀라고 했습니다. 그 마귀가 마치 배가 고파서 우는 사자처럼 믿는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여기저기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가만히 있으면 그래도 쉽게 신앙생활 계속할 수 있겠는데 이 마귀가 믿음이 좀 약한 사람 초신자들을 찾아다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마귀는 귀신같이 우리의 약점을 알기 때문에 우리의 약한 것을 공격하거나 유혹을 합니다. 약점을 공격하여 죄를 짓게 만들고 타락하게 만들어서 이 귀한 믿음의 자리에서 떠나게 만듭니다.
돈에 약한 사람은 돈으로 명예에 약한 사람은 명예로 이성에 약한 사람은 이성으로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쾌락으로 유혹을 합니다. 마음이 약한 사람은 고난을 당하게 하고 어려움을 당하게 하여 믿음을 버리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선포한 복음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사자의 입에서도 건짐을 받았고 모든 마귀의 권세를 물리쳐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 귀한 믿음을 지키고 살게 하기 위해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서서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이 귀한 믿음에서 빼앗아가기 위해 우는 사자같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지만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에게 함께하신 그 주님이 우리의 삶에도 함께하실 줄 믿습니다. 이 말씀 붙잡고 기도하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공격에 사탄의 공격에 두려워하지 말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씀을 의지하고 맡기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겨울 전에 어서 오라
디모데후서 4;21 / 윤영택 목사
11월 첫 주일, 가을이 깊어가고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섬머타임이 해제되면서 낮의 길이가 갑자기 줄어들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지 않아도 해가 짧은데 구름이 하늘을 덮는 날은 햇빛을 보기 어려워 저녁이 더 빨리 오는 것 같습니다. 차가운 비바람을 견디지 못해 떨어져 길가에 뒹구는 낙엽이 애처롭게 보입니다. 드디어 춥고 습한 영국의 겨울이 시작되나 봅니다. 이럴 때 오늘 읽은 말씀 중에 ‘겨울 전에 어서 오라’는 바울의 편지글이 더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찬서리가 내리고 바람 부는 늦가을날이나 추운 겨울에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보고 싶구나 할 수 있는 대로 속히 와라’ 부모님께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는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부모님을 자주 찾아뵐 수 없는 우리들의 마음은 늘 부모님이 계신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자식들이 보고 싶으시지만 멀고 먼 길, 비용도 시간도 많이 드는 것 잘 아시기에 자주 오라 하시지 못하는 어른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부모님으로부터 ‘보고 싶다 가능한 한 빨리 와주기 바란다’는 소식을 받았다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은 연령으로나 건강상태로 보나 찬바람 부는 인생의 겨울 중심에 있었습니다. 건강도 좋지 못하지만 로마의 어두운 감옥에 갇혀 사형이 집행될 날만 기다리는 상황이었으니 그의 모든 환경은 춥고 고달프며 외로운 계절 겨울이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형편을 염두에 두고 오늘의 말씀을 읽어봅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생이 거의 마쳐가고 하나님께서 부르실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주님께 갈 준비가 다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디모데야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당부하며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그 중에는 바울의 마음을 섭섭하게 만든 사람의 이름도 나오고 괴로움을 안겼던 사람의 이름도 나오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기쁨을 주는 더 많은 사람들의 이름들이 나옵니다.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 보며 나와 연관이 있었던 사람들을 떠올릴 때 누군가는 섭섭하고 아쉬움으로 가득하며, 어떤 이는 가슴이 답답하고 그 힘들었던 시절의 아픔이 되살아나는 듯하여 기억조차 하기 싫은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기억들이 있습니다.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으니 교우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은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름들 중에 데마라는 사람은 처음에는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하던 동역자였지만 전도자의 삶이 너무 힘들어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데마는 십자가의 복음보다 이 세상을 더 사랑하여 떠나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은 성령으로 시작하여 보기 좋았지만 그의 나중이 육체로 돌아선 사람, 그것도 바울이 외롭고 힘든 시기에 자기만 살겠다고 나몰라라 하고 떠나버린 사람이었으니 바울의 마음에 두고두고 섭섭함을 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동역자들은 복음 전하는 일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떠나갔습니다. 그중에는 그레스게와 디도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는 바울의 사역에 정면으로 맞서 핍박하며 괴롭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문득 생각나면 춥고 외로운 인생의 겨울을 더 춥게 만드는 그런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도 혹시 이런 사람이 과거에 있었거나 지금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바울이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런 아픔을 얼마든지 이겨내고 격려가 되는 더 많은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었고 바울을 위하여 기도하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 끝에 그런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인생의 여름과 가을을 함께 했던 믿음의 동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모두 곁을 떠나갔습니다. 바울보다 먼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누가 한 사람만 바울 곁에 있습니다. 누가는 바울에게 소중한 친구였고 동역자였으며 긴 세월 험한 여행길에 늘 함께 하며 바울의 건강을 돌보았던 의사였습니다. 누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바울에게 없어서는 안될 고마운 믿음의 형제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편지를 받고 있는 디모데는 바울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너는 속히 오라’ 한 것은 이렇게 외로운 인생의 겨울에 나에게로 와서 함께 지내자는 간절한 부탁이었습니다. 언제 사형장으로 끌려갈지 알 수 없고 건강도 좋지 못하여 감옥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바울의 마음이 더 급했던 것 같습니다.
‘네가 올 때 마가를 데려오라 그는 나의 일에 유익한 사람이다’ 했으니 마가 역시 바울의 겨울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마가는 제1차 전도여행 중에 힘들다는 이유로 대열에서 이탈하여 바울의 마음을 섭섭하게 만들었던 철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동료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기도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마가의 마음이 변화되어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적인 사람이 되었으며 바울의 말년에는 너무도 소중한 일군으로 함께 일하고 있었습니다. 생애 마지막 겨울을 맞이하게 될지 모르는 바울에게 디모데와 마가는 꼭 보고 싶고 만나고 싶으며 함께 있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곁에도 이런 따뜻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지금은 멀리 떠나 있지만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여 춥고 힘들고 외로울 때 언제라도 부르면 내 곁으로 찾아와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내가 염려해 주고 아껴주고픈 사람들을 곁에 두고 지냅니까? 물론 여러분에게는 가족이 있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출가하여 평생 독신으로 살며 복음 전하는 일에만 전념했던 바울에게는 찾아와 줄 가족이 없었습니다. 대신 혈육 못지않게 바울을 사랑하며 협력했던 많은 믿음의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하나 둘 곁을 떠나가고 바울에게 겨울이 찾아왔을 때 지금은 누가 한 사람만 남았습니다.
9절에, ‘너는 어서 속히 내게 오라’ 했는데 다시 21절에,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고 한 것을 보면 디모데를 빨리 보고 싶은 바울의 간절한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겨울 전에 어서 오라는 바울의 부탁은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죽기 전에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바울 시대에 부친이 숨을 거두면 아들이 그 시신을 거두어 땅에 묻었습니다. 혈육이 없던 바울에게 디모데는 믿음으로 낳은 아들이었고 법적으로도 아버지 바울의 장례식을 주관할 사람으로 정해놓았던 듯 합니다. 그만큼 디모데는 바울에게 사랑스럽고 의지할만한 동역자였고 제자였으며 아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내가 죽기 전에 디모데가 빨리 와주기를 바라며 겨울이 되기 전에 속히 오라고 당부합니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보면 겨울 전에 속히 오라는 바울의 당부에 젊은 동역자 디모데를 아끼고 사랑하는 노선배 바울의 마음이 담겼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오기 전에 여러 차례 소아시아와 그리스 지역을 방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육로를 통해 걷기도 하고 바닷길을 통해 여러 번 항해를 하며 온갖 위험을 경험했습니다. 겨울철에는 지중해 항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고대 지중해는 바람이 심한 11월1 0일경부터 다음해 3월 10일경까지 겨울 항해가 중단이 되었다고 합니다. 겨울 뿐 아니라 9월 중순부터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기에 위험한 시기로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가 항해 중에 위험을 만나지 않게 하려고 겨울 전에 어서 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 바울의 마음입니다.
사도행전 27장과 28장을 보면 바울이 로마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죄수의 몸으로 호송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이 탄 배가 지중해를 항해할 때 바람이 거세어 해안가 가까운 곳으로 배를 몰아 간신히 그레데 섬의 미항이라는 곳에 정박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죄수를 호송하는 로마 백부장에게 이번 여행에 많은 사람의 생명과 화물에 큰 피해가 있을 듯 하다는 조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선장과 선주는 미항이 겨울을 나기에는 불편하니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뵈닉스 역시 그레데 섬의 항구였습니다. 백부장은 당연히 바울보다는 항해 전문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기여코 뵈닉스 항구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처음에는 남풍이 순하게 불자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 우리 말이 맞았다 하며 신이 나서 향해를 시작했지만 얼마 못 되어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바람에 밀려 가다 멜리데 섬에서 멀리 벗어나 지중해 한 가운데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그들은 엄청난 위험을 만났는데 열나흘 동안이나 해와 별도 보이지 않는 지중해 한가운데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사공들이 모든 짐을 바다에 다 풀어 버렸고 배의 기구들까지 자기들 손으로 다 버렸습니다. 여러 날 동안 먹지도 못하고 죽을 고생을 했으니 바울이 우려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바다 전문가 선장과 선주가 겨울에 지중해를 항해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모른 것이 아니었지만 좀 더 안전하고 편한 항구로 이동하여 겨울을 나려고 했던 계획이 완전히 실패하였고 엄청난 재물의 손실을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항해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여러 번 바다의 위험을 경험했던 사람이라 이번 여행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디모데에게 험난한 여행길을 피해 겨울이 오기 전에 속히 로마로 건너오라 했던 것입니다.
황 장로님이 이 집사님과 함께 지중해 지역으로 휴가를 떠나려는 계획중인데 아직 부킹을 못하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청년 시절에 고생하며 일했던 그리스의 크레타(Crete) 섬으로 늦여름 휴가를 다녀오려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미루다 11월에 가볼까 하고 알아보았더니 그곳 관광 시즌이 끝나버려 모든 시설들이 문을 닫아 목적지를 몰타(Malta)로 변경했다 하는 말을 듣고 사도행전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의 크레타 섬이 우리말 성경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레데 섬입니다. 지중해는 좋은 날씨와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 유명하지만 역시 그곳 그레데 섬은 예나 지금이나 겨울 여행지로는 적합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행선을 변경한 몰타(Malta)가 바로 바울이 탄 배가 유라굴로 광풍을 겨우 통과하고 생명을 건져 가장 먼저 도착한 멜리데 섬입니다. 그러고 보니 황 장로님이 바울의 일행이 그렇게도 고생한 그레데 (Crete) 섬을 포기하고 구원의 항구였던 멜리데(Malta)로 바꾸었으니 잘 결정한 일입니다. 이번에 그곳에 가셔서 편안히 휴식하며 사도행전 28장을 묵상하면 바울의 형편을 더욱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고 은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자, 이제 오늘의 말씀을 다른 각도로 생각해 봅시다. 바울이 외로운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 하여 인생을 후회하며 슬퍼하고 외로움에 떨며 낙심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는 오늘 읽은 편지 속에 충분히 드러납니다. 바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 외로울 때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고 겨울 추위에 대한 고통, 그리고 갑갑한 감옥생활에 대한 불편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곁을 떠나가고 외로울 때 그 외로움을 이기려고 디모데를 속히 오라 불렀습니다. 곧 추운 겨울이 다가올 것을 대비하여 감옥에서 추위를 막을 수 있도록 겉옷을 가져다 달라 했습니다. 감옥생활 중에서라도 책을 읽으려고 가죽으로 쓴 책을 가져다 달라 부탁했습니다.
생의 마지막 시기를 살고 있는 바울에게 삶을 포기하거나 원망하는 모습이 보입니까?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킨 군사답게 바울은 총사령관이신 주님께서 주실 면류관을 생각하며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순간까지 주님 가신 그길을 따르며 젊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성숙한 삶의 마침을 보이는 바울에게서 인생의 멋진 겨울을 봅니다.
바울이 로마 법정에 처음 섰을 때 함께 한 사람이 아무도 없고 다 나를 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곁에 계시며 나를 강건하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오히려 바울이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때 말씀을 전할 기회가 되어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게 하셨으며 잔인한 사자의 입으로부터도 건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과거 뿐 아니라 앞으로도 주님이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 또 그의 천국으로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주님께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습니다 하고 찬송하였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겨울을 맞이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멋진 모습입니다.
‘겨울 전에 어서 오라’는 바울의 당부를 춥고 외로운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주님께로 오라는 말씀으로 설명해 봅니다. 스위스의 내과 의사 폴 토루우니에(1898년생)는 그의 책 ‘인생의 사계절’에서 사람의 일생을 20대씩 사계절로 구분하였습니다. 유아기부터 20세는 봄, 20부터 40은 여름, 40부터 60을 가을이라 하고 60 이후를 겨울로 상징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의 평균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던 110여년 전에 태어난 사람이 말한 것이고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고령사회로 들어선 우리 나라에서는 ‘인생은 60부터’ 라고 하니 60세는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가 아니라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새출발로 정하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신체적인 나이로 인생의 사계절을 정하는 법도 있지만 계절이 매년 반복 순환하는 것처럼 우리의 생애 가운데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다양한 상황과 환경이 반복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꿈과 희망 속에 봄같은 시절을 지내고, 때로는 춥고 고달픈 겨울을 지나기도 합니다. 봄같은 시절이 오래 계속 되는가 하면 불볕 무더위 속에 진땀흘리는 계절이 있고, 또 힘들고 외로운 추운 겨울이 끝날 줄 모르고 지속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상황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떤 계절에 이르렀던지 그 순간마다 내 속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주님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2, 30대에 해당하는 젊은이 여러분,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도서 12:1)는 전도서의 말씀을 꼭 기억하며 살기 바랍니다. 여름같은 여러분의 젊음이 끝없이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가지 않아 머리에 하얀 살구꽃이 피고 눈이 침침해지며 단단한 것도 와지끈 깨뜨리던 이가 시려 맛난 것도 맘대로 먹지 못할 때가 옵니다. 마음은 저만치 앞서 가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 내가 왜 이럴까 놀랄 때가 금방 찾아옵니다. ‘아, 나는 이제 아무 낙이 없구나’ 할 때가 가깝기 전에 여러분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분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인생의 겨울이 가까웁기 전에 어서 속히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젊은이들이 되기 바랍니다.
3,40대 여름을 지나는 연령층과 5,60대 가을을 지나는 연령층의 여성분들이 모이면 나누는 대화의 주제가 완전히 다릅니다. 좀 젊은 분들은 주로 어린 자녀들의 학업과 진로문제로 이야기 꽃을 피우는데 그 단계를 지난 가을의 여인들은 대부분 건강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면 저마다 한 두가지 고장난 육신에 대한 하소연입니다. 그쪽은 어떠세요? 나는 여기가 저기가 정상이 아니라는 등 갱년기 증상과 내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아픈 사람이라고 알리려는 듯 온통 아픈 몸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어쩌겠습니까? 그 나이가 되면 피할 수 없이 찾아오는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5,60여년 동안 열심히 육신을 부렸으니 이제 고장이 날만도 하고 휴식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인생의 가을을 지나고 있는 가을 추, 추남과 추녀 여러분,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하는 여러분의 가을을 서글퍼하며 너무 아쉬움과 후회로 채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11월 초순은 아직 단풍이 한창입니다. 울긋불긋한 가을의 단풍을 가리켜 제2의 꽃이라고 노래한 싯구를 읽었습니다. 화려한 빛깔을 자랑하며 마지막 남은 생명을 발산하는 단풍의 계절 가을을 살고 있는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주신 그 아름다움을 감사함으로 나누기 바랍니다. 힘차고 푸르렀던 여름의 젊음을 지났으면 이제 가을의 열매와 성숙함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창 아름다운 꽃을 피워야 할 제2의 봄을 너무 우울하게 만들지 맙시다. 화려하게 물들어가는 제2의 봄꽃을 멋지게 피우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 집 뒷뜰에 낙엽이 엄청나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걸 다 치우려면 큰 휠빈으로 대여섯 통 이상은 버려야 합니다. 저는 마당에 수북이 쌓인 낙엽이 색깔도 좋고 운치가 있어 가을을 느끼려고 그냥 두고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옆집 할아버지가 워낙 부지런하셔서 거의 매일 낙엽을 거두어드리는 바람에 보조를 맞추느라 가을 분위기가 깨집니다.
길가에 뒹구는 낙엽이 슬프고 안스럽게 보이지만 자기 사명을 다하고 땅에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는 엄숙한 과정을 통과하는 중입니다. 내년 봄에 나올 새생명에게 영양분을 제공하는 사명을 이루기까지 아직 낙엽이 할 일이 남았습니다. 길가에 떨어져 밟히고 있다고 모두 쓰레기처럼 쓸모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을의 계절을 지내는 분들은 여름의 열정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한숨으로 지낼 것이 아니라 갱년기도 늙어감도 자연스런 과정이라 겸손히 받아들이고 단념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싱싱함으로 옷입었던 젊음을 하나 둘 떨어뜨리고 있는 내 모습이 그냥 서럽고 슬프지만은 않을 겁니다. 아름다운 인생의 가을을 감사함으로 지내며 다가올 겨울을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폴 토우르니에의 말처럼 인생의 겨울은 내 인생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계절입니다. 겨울에 나무의 나이테가 생기고 나무가 한층 더 단단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겨울은 그냥 춥고 쓸쓸한 시기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고독과 아픔 속에 더욱 단단하게 다져지는 시간입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소망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견고하게 다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힘입니다.
여러분의 겨울이 춥고 두렵거나 외로운 계절이 되지 않도록 디모데와 마가와 누가와 같은 믿음의 친구들을 곁에 두며 살아갑시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함께 찬송하고 함께 기도하며 삶을 아름답게 정리하는 의미있는 계절로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말처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을 굳게 믿고 오직 주님께 영원토록 영광을 돌리는 건강한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012년 겨울이 젊은이나 연세 드신 분 모두에게 믿음과 영혼의 성숙함을 더해주는 은혜로운 계절이 되기 바라며 인생의 겨울이 갑자기 찾아오기 전에 어서 속히 주님을 만나고 남은 생을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딤후 4:21 / 김흥규 목사
한국에서는 지난 주 화요일부터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기 시작해서 서울에 첫얼음이 얼었다고 합니다. 한국 기상청에 따르면 엘니뇨 현상 때문에 평년보다 겨울이 빨리 찾아왔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제 김장을 하고 연료를 준비하는 등 본격적인 월동(越冬) 준비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텍사스에 사는 우리는 겨울 걱정을 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겨울이 찾아오면 눈도 많이 내리고 기온도 뚝 떨어져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추위를 견뎌내기 위하여 연료비도 적지 않게 들 것이고, 두꺼운 겨울옷을 사느라고 경제적인 지출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또한 겨우내 빙판 길에 운전하는 일 역시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래저래 한국에 사는 분들이나 미국의 북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 비하여 텍사스 사람들은 겨울 추위가 심하지 않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기온이 영하로 뚝뚝 떨어질 한겨울에도 반소매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는 사실! 아마 이 사실이야말로 텍사스에 사는 진짜 맛을 느끼게 해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텍사스에도 겨울은 곧 다가올 것입니다. 아무리 추위가 심하지 않고, 눈도 거의 오지 않고, 겨울의 길이도 짧다고 할지라도, 결국 텍사스에도 겨울은 오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는 겨울을 대비해야하겠습니다. 겨울이 오면 봄과 여름과 가을에 할 수 있었던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겨울이 되면 한 해의 끄트머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겨울이 되기 전에 마땅히 했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할 때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솝의 우화(寓話) 중에 「개미와 베짱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미는 햇빛이 쨍쨍 내리 쪼이는 한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일합니다. 눈오는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서이지요. 그런데 베짱이는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만 부르고 있습니다. 드디어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먹을 식량이 떨어진 베짱이가 개미를 찾아갑니다. 먹을 것을 달라고 구걸하기 위해서이지요. 개미는 여름 내내 놀기만 한 베짱이가 얄미워서 거절합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베짱이가 굶어서 죽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일할 수 없는 겨울이 오기 전에 부지런히 일하라는 교훈이지요.
<겨울이 오기 전에 디모데를 보기 원한 바울>
여러분, 오늘 봉독한 말씀 중에 먼저 딤후 4: 21의 상반부에 있는 말씀을 한번 주목해 보세요.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Do your best to come before winter." 에베소에서 이 편지를 읽고 있었던 디모데에게 바울은 겨울이 이르기 전에 자신이 갇혀있는 로마로 속히 오라는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딤후서는 바울이 네로 황제의 대대적인 박해로 로마 감옥에 두 번째 투옥되었을 때 믿음의 아들이요, 젊은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썼을 때 자기의 최후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딤후 1: 8, 16; 4: 6-8 참조). 겨울이 가까워져서 차갑기만 한 로마 감옥에서 바울은 비장한 각오로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겨울이 오기 전에 디모데에게 서둘러 자기를 보러 오라고 했을까요?
제일 먼저 전설에 따르면 이 편지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바울은 로마 남문(南門) 교외에 지하수가 세 줄기 솟아나는 곳, 'Tre Fontane'에서 칼로 목이 베어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감한 바울이 서둘러 디모데를 보기 원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의사인 누가 한 사람만 빼놓고 대부분의 동역자들이 위기에 처한 바울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딤후 4: 11, 16 참조). 죽음 앞에서 외로워진 바울이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를 목매어 보기 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이유는 고대 지중해는 겨울(10월부터 4월까지)에 여행하기가 무척이나 힘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육로(陸路)를 따라 여행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배를 타고 바다 여행을 하는 것은 거의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행 28: 11에 보면 바울 일행이 멜리데(Malta) 섬에서 석 달 동안 겨울을 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겨울에 바다 여행을 하는 것이 위험했기 때문이지요.
주후 60년 가을에 바울 일행은 그레데(Crete) 섬을 거쳐 항해하다가(행 27: 8-12), '유라굴로'(Eurakylon or northeaster: 동풍을 의미하는 헬라어 'euros'와 북풍을 의미하는 라틴어 'aquilo'의 합성어로서 '위험한 북동풍'의 뜻을 가짐)라는 광풍(狂風)을 만나 거의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살아남아 멜리데 섬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추운 겨울이 닥쳐서 항해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바울은 멜리데 섬에서 석 달 동안을 '과동'(過冬), 즉 겨울을 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대 지중해는 겨울 항해가 대개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할 수 있으면 피하려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서 바울은 사랑하는 후배 동역자 디모데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자기 있는 곳으로 속히 오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주님께 속히 돌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눈오고 바람불고 추워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겨울이 오기 전에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아직도 나이 젊어서 인생의 봄 가운데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태양이 뜨겁게 내리 쪼이는 한 여름에 와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분들은 낙엽도 다 떨어지고 쓸쓸한 가을, 그것도 늦가을에 와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어떤 계절에 처해 있든지 간에 이제 겨울이 오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겨울이 이르기 전에 주님을 만나십시오! 겨울이 오기 전에 주님의 일을 하십시오! 디모데가 인생의 대선배요, 믿음의 아버지요, 영혼의 스승인 바울을 아무리 뜨겁게 만나고 싶어도 겨울이 오기 전에 만나야 합니다. 겨울이 되면 뱃길이 위험해서 디모데는 바울에게 가기가 힘듭니다. 거기다가 바울은 곧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겨울이 오기 전에 서둘러 자기를 보러 오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도 여러분들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빨리 주님께 나아오라고!
<쓸데없는 핑계로 주인의 초청을 퇴짜 놓은 사람들>
이제 우리 다함께 눅 14: 15-24로 눈을 돌려봅시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 중에 「큰 잔치의 비유」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주인이 큰 잔치를 베풀고 수많은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돈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지위가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잔치에 오게 했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초대했습니다. 아마도 첫 번째 초대는 잔치가 곧 시작됨을 알리기 위한 초대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초대는 모든 잔치 준비를 다 끝낸 다음에 어서 와서 잔치에 참석하라는 정식 초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두 번씩이나 사람들을 잔치에 초청했지만 저들은 깨끗이 거절합니다. 그것도 아주 터무니없는 핑계를 대면서 거절합니다.
본문 18절을 보세요. 초대받은 한 사람이 말합니다. "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좀 보아야 하겠소.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 새로 밭을 산 사람이 그 밭을 둘러보지도 않고 샀을 리 만무합니다. 틀림없이 밭을 철저히 조사해보고 또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본 다음에 그 밭을 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치에 가기 싫어서 핑계 같지 않은 핑계를 한 번 대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19절에 또 한 사람이 초청을 거절합니다. 뭐라고 변명합니까? "내가 소 다섯 마리를 사서 시험하러 가니 못 갑니다. 부디 양해해주시오." 이 역시 억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농사짓는데 쓸려고 소를 샀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쓸 소를 미리 시험도 해보지 않고 샀을 리 만무합니다. 소를 사기전에 소가 힘이 센지 안 센지, 말을 잘 듣는지 안 듣는지 분명히 미리 다 검사해보고서는 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이미 소를 다 산 다음에서야 그 소를 잘 샀는지 못 샀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밖에 나가봐야 한다고 변명합니다. 도무지 설득력이 없는 핑계입니다! 변명을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20절을 보세요. 이 사람은 장가를 간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장가를 들어서 아내를 맞이하였오. 그래서 가지 못하겠소." 이 사람의 변명은 위의 두 사람에 비해서 그래도 좀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으니 집밖에 나가기 어렵다! 장가를 가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신 24: 5에 있는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결혼한 남자들에게는 1년 동안 병역이나 다른 직무를 지우지 않고 1년 동안 자기 아내만 즐겁게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경우 주인 측에서 두 번씩이나 초대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첫 번째 초청했을 때 이 사람은 잔치가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드디어 잔치 준비가 끝나서 두 번째로 오라고 했더니 장가가서 못 오겠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렇게도 빨리 장가를 들 수 있단 말입니까? 결혼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인데 번갯불에 콩구워먹듯이 순식간에 올릴 수 있단 말입니까? 결국 장가들었다는 남자 역시 핑계를 대고 있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믿지 못할 핑계를 대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라는 한국 속담도 있지만 이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핑계를 대면서 주인의 초청을 거절합니다. 결국 사람들을 초청하러 거리로 나갔던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주인은 화가 났습니다. 21절을 보세요.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더러 말하기를 '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하였다." 아무나 가리지 말고 무조건 데려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라도 자리를 채우려고 했지만 여전히 빈자리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주인은 마침내 종들을 보다 큰길과 산울타리로 내보내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자기 집을 채우라고 명령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했던 진리는 매우 단순합니다. 선택받은 백성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초대했더니 얼토당토 않는 핑계를 대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전혀 초대받을 수 없는 이방인들과 죄인들과 볼썽 사납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 유대인 대신에 천국 잔치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엉뚱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말도 되지 않는 핑계를 대면서 그 초대를 거절합니다. 주일에 마땅히 교회에 나와야 하는데 가지가지 변명을 합니다. 땅을 샀는데 그것 보러 가야하고, 장사하는 일이 바빠서, 출장가야 하기 때문에, 무슨 무슨 모임이 있어서, 손님이 찾아와서, 등등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마 22: 14에서 분명히 말씀했던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천국 잔치에 초청을 받지만 택함을 받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초청을 받고서도 택함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순전히 자신의 핑계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BUT-FIRST SYNDROME"에 빠지지 말자!>
여러분, 혹시 "'그러나 이것부터 먼저 해야 돼'라는 증상"('But-First' Syndrome) 이라는 증상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지금 빨래를 하려고 마음먹고 있다고 해봅시다. 그래서 세탁기 있는 쪽으로 가는데 테이블 위에 보니까 신문지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세탁을 해야되지만 먼저 신문지부터 치우기로 했습니다--"BUT FIRST he decides to put the newspapers away." 그래서 신문지를 치우려고 하는데 테이블 위 다른 쪽을 보니까 페이먼트 빌이 들어 있는 우편물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신문지 치우는 일을 당장 해야할 터인데 곧 내야 할 빌(bill)부터 먼저 보내기로 했습니다--"BUT FIRST he'll pay that bill that needs to be paid soon."
그래서 수표책(checkbook)을 꺼내서 돈을 보내려고 하는데, 맙소사, 어젯밤에 아기가 빨던 우윳병이 마룻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표를 써야하지만 먼저 우윳병을 싱크대에 넣기로 했습니다--"BUT FIRST he decides to put the bottle in the sink." 우윳병을 싱크대에 넣으려고 부엌으로 가는데, 젠장, 부엌 바닥 위에 TV 리모컨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우윳병을 싱크대 안에 넣어야 하지만 먼저 리모컨부터 치우기로 했습니다--"BUT FIRST he decides to put the remote away."
그래서 텔레비전이 있는 방으로 걸어가는데 배가 고파서 우는 고양이가 눈에 보입니다. 리모컨부터 제 자리에 놓아야하지만 고양이가 마음에 걸려서 고양이 밥부터 주기로 했습니다--"BUT FIRST he decides to feed the cat." 결국 하루 종일 이런 일이 되풀이되다 보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빨래도 못하고, 신문도 못 치우고, 아기 젖병도 그대로 있고, 첵크도 못쓰고, 고양이는 리모컨을 덥석 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루 종일 바쁘게 왔다갔다했지만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하루해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왜요? 자꾸 자꾸 미루다 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BUT-FIRST SYNDROME'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닫는 말: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 지금 결단하십시오!>
여러분,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는 주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자꾸 미루어서는 안됩니다! 말도 되지 않는 핑계를 대면서 겉돌아서는 안됩니다! 바울이 겨울이 오기 전에 디모데를 속히 보기를 원했던 것처럼, 주 예수님께서도 겨울이 닥치기 전에 여러분들이 주님께 나아오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봄, 여름, 가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계절들을 모두 다 나 자신과 세상일을 위해서 써버렸습니다. 이제 겨울이 멀지 않습니다. 눈 내리고, 바람불고, 날 추운, 겨울이 코앞에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들이 겨울이 오기 전에 주님의 일을 하길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겨울이 오기 전에 주님께 돌아갑시다! 아멘!
은혜받은 그리스도인
딤후 4:22 / 정필도 목사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랍비가 당나귀를 타고 닭 한 마리와 등불과 천막을 싣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도 가도 집은 없고 이미 날은 저물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길옆에 천막을 치고 나귀와 닭은 천막 귀퉁이에 묶어두었습니다. 이 랍비가 닭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꼬끼오하고 아침시간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랍비는 천막 안에서 등불을 켜고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 등잔이 넘어지면서 불이 꺼지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이 성경을 덮고 기도를 올리고 잠을 청했습니다. 이 랍비는 온종일 걸어다녀서 몹시 피곤했기 때문에 눈을 붙이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사이에 맹수들이 이곳을 습격하여 나귀와 닭을 물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찢어진 천막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이 바로 동네 어귀에서 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둘러 동네로 들어가 보니 온 동네가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이유인즉 간밤에 떼강도가 몰려와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해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랍비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만일 등불이 켜져 있었거나 닭이나 나귀가 살아서 소리라도 냈었다면 자기도 틀림없이 죽었을 터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비록 작은 것을 잃었지만 더 큰 것을 얻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순간 순간 얼마나 많은 위기를 넘겼는지 모릅니다. 이 시간도 하나님의 은혜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안내를 잘 하시던 집사님이 그 자리에서 보이지 않아 물어보았더니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는데, 갑자기 다른 차가 자신의 차를 들이받은 것입니다. 차가 부서진 것은 물론 그 집사님도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크게 둘로 나뉘어집니다. 하나는 일반은혜요, 다른 하나는 특별은혜입니다.
일반 은혜는 예수님을 믿거나 말거나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예수 안 믿어도 아들 딸 잘 낳고, 예수 안 믿어도 출세하고 서울대학에 들어가고, 예수 안 믿어도 부자로 살고, 예수 안 믿어도 잘 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특별은혜는 예수 믿는 사람들만이 받는 은혜로,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고 예수 믿어 구원받게 되는 은혜입니다.
택함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학식이 많고 이 세상 지혜가 넘쳐도 도무지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일반은혜에 대하여서도 감사해야 하겠지만, 특별히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 특별은혜에 더욱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신자답게 살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은혜,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면서 살 수 있는 은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 수 있게 해주시는 은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 수 있게 하시는 은혜,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수 있게 해주시는 은혜,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는 은혜, 이런 은혜를 저와 여러분이 받아야 할 것입니다.
헬렌 켈러 여사는 삼중 장애인입니다.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고 말도 하지 못하는 장애를 갖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훌륭하고 귀한 일들을 많이 했으며 저술도 했습니다.
말년에 어떤 기자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이런 육체적 고통과 함께 한평생 살아오셨는데, 당신은 하나님을 원망해 본적은 없습니까?"
그러자 헬렌 켈러 여사는 빙그레 웃으며 "제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없는데,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도 부족한데 어찌 원망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감사하고 그 은혜를 기뻐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은혜 받은 사람이 아니면 이런 고백을 할 수 없는 줄 믿습니다. 이처럼 은혜 받은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런 은혜를 받게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축원했습니다.
갈라디아서부터 히브리서까지의 바울이 교회에 보낸 서신을 보면, 언제나 맨 마지막에 가서는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축원하는 말씀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히 13:25).
은혜 받은 성도들은 은혜 받지 못한 성도들과 다른 점이 많이 있습니다.
1. 회개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 전과 달리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게 되기 시작합니다. 은혜를 받은 순간부터 자신의 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부족하고, 비양심적이며, 거짓되고 악독하고 교만한 인간인가 깨닫게 됩니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합니다. 무슨 설교를 듣고 혹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가 아닙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사람이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 알기 때문에 함부로 잘난 척 하지 못합니다. 또 남들의 잘못을 보고도 함부로 욕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옛날 영국의 황제인 루이스가 민정을 살피기 위해 국내를 순시하는 도중에, 어떤 동리 한 모퉁이에 있는 물레방앗간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물레방앗간에서 기쁘게 부르는 노래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황제는 그 노래소리에 도취되어 듣다가 그곳으로 들어가 보게 되었습니다. 기뻐서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노인이었습니다.
황제는 그 물레방앗간 노인에게 그가 방금 불렀던 노래를 다시 청했습니다. 그 노인은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 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라고 신나게 노래를 불러댔습니다.
황제는 그 노인에게 둘째 소절은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영국 황제 루이스가 날 부러워하네.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라고 부르라고 일러주었다고 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사실 황제는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지만 방앗간 노인만큼 행복하지 못합니다. 이와같이 은혜 받은 사람들은 겸손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회개를 하기 때문에 거룩하게 살게 됩니다.
2.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너무나 감사하고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감사생활을 잘 하고 얼굴에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마태는 전직이 세리였습니다. 그 당시 세리들은 로마의 묵인 아래 백성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그 돈으로 고리대금을 놓아 재산을 불리는데 혈안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과 창기는 전혀 인간대우를 하지 않았을 정도로 천한 인간으로 취급했습니다.
마태는 세리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새사람이 되었고 예수님의 제자까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어준 마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큰 죄인이 구원을 받은 것을 감격하여 일평생 자기 이름을 기록할 때 세리라는 이름을 붙여 “세리 마태”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나는 본래 세리였소”라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선포하며 예수님의 제자로 충성을 다했습니다.
마태와 비슷한 사람으로 존 뉴턴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 때 포악한 노예상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노예 사냥꾼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 받아 목사가 되었습니다. 40여 년을 주의 일을 했지만 존 뉴턴은 마음속에 한 가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주님이 나의 죄를 다 용서하셨다고 하지만, 과연 나 같은 노예상인을 용서하셨을까? 문득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오를 때면 온몸에 소름이 돋고 두려움에 마음이 떨렸으며, 그럴 때마다 그는 벽에다 이사야 43:4의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노라]는 말씀을 써 붙여놓고 그 말씀을 되뇌이며 위로를 받고 다시 회복되곤 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자신이 구원받고 죄를 용서받은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이 말씀을 붙잡은 것입니다.
그는 82세로 숨을 거두면서 “나는 지금 하나님 나라로 간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아마 세 번 놀랄 것이다. 처음에는 하나님 나라에 오리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 나라에 가면 반드시 만나리라고 기대했던 사람이 안 보이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며 세 번째로 노예상인인 내가 그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누구나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사실 하나만 생각해도 너무 놀랍고 기뻐서 감사생활을 잘하고 기쁨이 충만합니다.
3.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품의 변화가 있습니다. 사랑이 많아집니다. 예수를 믿어도 은혜 받기 전에는 자신밖에 모르고 따지기를 좋아하고 똑똑한척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사람이 착해집니다. 의롭고 진실하고 겸손하고 온유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며, 인생관이 달라지고 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점점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은혜 받은 성도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4. 삶의 변화가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은혜를 받게 되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오직 주님을 위해 헌신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로마서 14:6-8에서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며(고전 10:31), 더 나아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12:1).
제가 이번에 미국 LA에 가서 선교대회의 강사로 여러 목사님들을 만나는 중에,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목사님으로서 학위를 따자마자 바로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된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출세가 보장된 평탄한 길을 마다하고 다시 신학을 하게 되었으니 그 부모님과 형제들의 충격이 컸습니다. 그들로부터 미쳤다는 비난의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미국에 건너와 LA에서 6명 모이는 교회로 시작했으나 지금은 수백 명이 모이는 대교회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서울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미국의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목사님이 되신 분이 미국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좁은 길을 택한 분들입니다.
누구든지 은혜를 받으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어하며 주님만을 위해 살고 싶어하는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조차도 드리고 싶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나이 30세가 될 때까지 신학박사, 음악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철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딴 천재와 같은 인물입니다. 그가 아마 보통 사람들의 길을 갔더라도 독일의 유명한 학자로 이름을 날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아프리카로 들어가 흑인들을 위해 의사로 복음전도자로 90평생을 보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미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같이 뜨겁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을 그렇게 바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영육간에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보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 믿은 지 얼마나 오래 되었느냐보다 예수 믿은 후 얼마나 변화되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보다 누구를 위해 무슨 목적으로 지금까지 일을 해 왔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무쪼록 남은 여생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늘 감사하면서 사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서 영육간에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