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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몬드 박사의 미신, 자의적 숭배, 성탄절의 축제성 주장에 대한 삼중 논박문
말씀 전도자)
미신에 관하여
1 절
정당하고 체계적인 전개 순서에서 미신에 대한 논의는 자력에 의한 경배의 논의에 앞서야 한다. 전자가 보다 일반적이며, 후자는 그 아래의 특수한 주제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해먼드 박사와의 논쟁에 앞서) 미신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해먼드 박사의 방식처럼) 로마나 그리스 고전작가들의 기념비적 작품들에 나오는 명칭이나 의미를 연구하는 방법은 그다지 적절하지 못한데 왜냐하면 신학자들의 판단처럼, 이 문제는 모든 예술의 중심이자 결론인 경건(종교;Religion)에 속하는 것이므로, 진정한 경건의 의미를 알지 못했던 그들은 지나칠 만큼 미신에 찬 작품을 만들었고 또 미신을 전파하였다.
2 절
미신의 일반적 개념에 대해서 "과도함으로 인해 경건(종교;Religion)에 상반되는 악"이라는 학식 있는 스콜라 학자의 정의는(신성모독이 결여됨으로 인해 경건(종교)에 상반되는 악인 것처럼) 부적절하지 않다. 실제로 인간은 하나님의 명하신 경배를 존중하거나 혹은 경건의 형식적인 덕을 따름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지혜나 의지가 부가하는 행위들이나 외적인 경배 수단들을 추종함으로써 즉 "합당하지 않은 사람에게 경배를 돌리거나 정당하지 못한 수단으로 경배를 드릴 때", 과도한 경건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첫 판의 네 계명들에 따르면, (둘째 판의 계명들의 정의나 사랑과 구별되는) 일반적으로 경건이나 하나님에 대한 경배에서 네 가지가 고려되어야 한다.
1.올바른 대상. 하나님 한 분 2.올바른 수단. 명령하신 경배 3.올바른 방식. 정당하게 경외함(all due Reverence) 4.올바른 시간. 주님이 명하신 날.
그러므로 그 결과 미신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들에 비추어 모두 과도한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은 금지와 행하라는 의미를 모두 가지므로, 우리의 논의를 위해서 우리가 주지해야 할 점은, (표현되었든 이해에 의해서든) 덕들이 양 극단의 중간에 위치하듯이, 경건의 의무(Duties of Religion)는 중간에 자리 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제1계명에 위배되는 두 가지 오류들이 있는데, 하나는 결여됨으로 인해 결코 하나님이 없는 무신론이 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과도함으로 인해 너무도 많은 신들을 용인하는 다신론이 된다.
2. 제2계명의 경우는, 인간이 추가하고 자신이 고안해낸 경배를 준수하는 과도함보다 우선, 하나님이 명하신 경배를 준수하지 않는 결여됨이 있다. 3.제3계명에 대해서도, (종종 신성모독으로도 일부 불리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경외의 부족으로 인한 결여됨과 조롱스런 의식과 제스쳐와 유사한 기타의 것들의 부가로 인한 과도함이 함께 존재한다. 4.제4계명에 대해서 하나님이 명하신 시간인 안식일을 무시하는 결여됨과 함께 열왕기상 12장 32절에서 여로보암이 했듯이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여) 인간이 다른 날에 성일을 제도화하는 과도함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반적 의미에서 첫 판의 계명들에 대해서 과도한 점에서 미신이 존재할 수 있음이 명백하다. 많은 사람들(특히 개신교 신학자들)이 어느 계명에 대해서도 과도한 것을 미신으로 호칭했음은 무척 용이하게 관찰할 수 있다.
3 절 일부 사람들은 미신의 종류를 언급함에 있어서 매우 단편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첫째 사례로 스콜라철학자들은 미신을 우상숭배, 불법적 경배, 점의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와 마지막 사례에 대해서 개신교 신학자들은 제1계명을 언급했고, 나머지 불법적 혹은 명령 되지 않은 경배는 제2계명을 언급했다. 왜냐하면 우상숭배는 참된 신 대신에 거짓 신을 경배하거나 참 신과 함께 많은 다른 신들을 경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점은 악마와 상의하는 일이므로, 하나님 한 분께만 정당하게 드려야 할 영광을 악마에게 바치는 일로 가장 악한 우상숭배에 해당된다. 그래서 그들은 미신을 두 계명으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한 사람 해먼드 박사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는 미신을 하나의 계명, 즉 제2계명에 국한시켰는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미신은 부당한 경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악덕"이란 것이다. 그의 말의 의미는 (스콜라철학자들은 불법적이라고 불렀는데) 하나님이 명령하신 게 아니라 인간에 의해 제도화되고 약속된 이런 경배는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제2계명 한 가지에만 위배되는 것으로 한정하는 경우로서, 바로 자력에 의한 경배(Will-worship)로서 단지 미신의 일종일 뿐이며, 반면에 첫 판의 4개의 계명들 모두에 위배되는 미신들도 존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아테네인들을 포함한 타 민족들에 의한 다신 숭배, 이것은 어느 계명에 반한 것인가? 확실히 제1계명이지만 사도들이 사도행전 17:22절에서 미신이라고 부른 것이다. 나는 그의 주장이 지나치게 미신적임을 인식한다. (우리 해먼드 박사에 의하면) "그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신들을 더 경배한다". 그리고 진실하신 하나님과 함께 골로새서 2:18절의 천사숭배는 제1계명에 반한 과도함이지만, 해먼드 박사 자신은 미신의 범죄로 호칭한다. 또한 바알 제사장들이 경배에서 날뛰며 자기 몸을 베는 야만적인 의식들을 사용했을 때와 교황주의자들이 경배에서 같은 수의 많은 조소할만한 의식들과 제스처를 사용할 때는 제3계명을 위배하는 과도함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는 미신이 분명하다. 끝으로 여로보암이 스스로 축제일을 만들었을 때와 교황주의자들이 성자들을 위한 거룩한 날들을 만들었을 때와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철저히 준수하느라 적의 공격을 방어하지 않았을 때와 같은 경우들은 제4계명에 위배되는 과도한 경건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미신이라고 해야 한다.
4 절 그러면 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과도한 경건인 미신은 첫 판의 계명들만큼이나 종류가 많다. 그러나 행해지는 미신의 모든 종류와 방법을 개별적으로 확인하거나 그것들을 발견하더라도 그것들이 어떤 계명에 해당하는 지를 즉각 파악하기란 결코 용이하지 않다. 그러므로 예의바른 독자들은 개별적인 미신의 종류를 기록하는데 논리적 정확성이 결여되더라도 우리를 이해해 줄 것이다. 개신교 신학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제시한 바가 있어서, 여러 경우에 이것들을 세심하게 설명할 계획인데, 미신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5 절
1. 소극적인 미신
경건이나 하나님의 경배의 개념 하에 인간들이 어떤 대상들을 절제할 때 그것들이 하나님이 금하시지 않았지만 제약이 없이 무관심한(중립적인) 상태로 남아있을 경우, 즉 금하지 않았거나 과거 금지 했더라도 우리의 해먼드 박사의 말대로 이젠 시대에 동떨어진 대상들을 절제할 경우. 이런 종류는 골로새서 2장 21절에서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하는 이것이 바로 미신적이고 소극적인 자력에 의한 경배(superstitious negative willworship)를 말한 것이다.
6 절
2. 적극적인 미신
인간들이 스스로의 생각대로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경건의 방법들을 설정할 경우. 그리고 (이야기 되었듯이) 첫 판의 4개의 계명들 중 하나라도 위배하여 행해지는 것이다. 해먼드 박사는 이 구분(소극적 미신과 적극적 미신)을 주장하며, 다른 사람과의 논의에 사용하고 있다. "무관계한 대상들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경건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적극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범죄적이며 미신적이다. 예를 들면 무릎 꿇지 않는 것과 무릎 꿇는 것, 의식들의 세심한 절제와 남용은 차이가 없다." 이처럼 우리는 사람들 적어도 개신교도들이 미신적이 되는 한 가지 이상의 방법들에 대해 그의 동의를 확보하고 있지만, 이 후 47절, 48절에서 그는 실제로는 이것을 대부분 부인하고 있다. 이제 이 적극적 미신은 많은 개별적 사례로 아래와 같이 예시될 수 있다.
7 절 1. 우리의 번역자들이 사도행전 25장 19절과 다른 곳에서 미신으로 번역한 것
이런 미신은 많은 신들을 경배하거나 (참신과 함께) 다른 한 신을 경배할 경우를 말하는데, 이 때문에 아테네인들은 "과도한 공포 즉 하나님이 명령하시거나 금하시지도 않았는데, 마치 하나님이 그러신 것처럼 스스로를 제약하면서 불필요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미신적이라고 불리운다. 이것들은 아래의 46절에 나오는 해먼드 박사의 말이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 내지 금지사항이라는 식으로 경건하게 간략히 표현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외양만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비굴한 공포를 가질 때 그들을 미신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하다.
8 절
2. 보다 엄밀하게 말해서 자력에 의한 경배 즉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았는데, 인간의 고안에 불과하거나 인간이 제도화한 것들에 하나님의 경배를 두는 것.
교황주의자들이 그 풍부한 사례를 제공한다. 그들은 미사의식, 은자생활과 수도원생활, 고해성사, 성지순례 등과 같은 습관들을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경배들로 존중하고 실행하는데 대해 개혁교회들이 미신적이라고 칭하는 것은 정당하다.
9 절
3.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 어떤 의식을 도입할 때.
이것은 바알신자들의 행위처럼 조소할 만 하거나 복음적인 경배의 단순성에 적절치 못한 것이 된다. 이것은 미신과 다를 바 없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이러한 풍부한 사례를 제공한다. 이런 것들이 인간이 고안해낸 경배들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명하신 경배를 추가하는 일이며 그래서 과도한 경건에 해당하며 미신으로 칭하는 것이 정당하다.
10 절
4. 하나님이 성별하심으로써 인정하지 않은 것들을 사람들이 거룩한 것으로 간주할 때.
여로보암은 임의로 예배일, 교회, 예복 등을 정하면서, 이 미신의 죄를 깊이 지었다. 그는 먼저 단과 베델에서 자신의 금 송아지를 위한 예배당과 제사장들을 성별한 후, 자신의 신을 위한 성일과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에 하나님이 명하신 유다의 절기와 같이 절기를 구분했다.(열왕기상 12:29, 32?33) 로마교회와 최근 우리 자신들의 일부에서의 일상적인 그릇된 헌신처럼. 그러나 50절에서 살펴보겠지만, 해먼드 박사는 그것에 대해 미신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기를 거부한다.
11 절
5. 일부 생활의 상태와 조건에 대해 하나님께서 부여한 적이 없는 고도의 완벽함을 부여하는 것.
하나님이 명하시거나 요구하시지도 않았는데, 미신의 창고인 로마교회에서 행하는 자발적 빈곤, 동정, 독신주의, 자발적 순교처럼. 그리고 맨마지막의 순교에 대해 해먼드 박사는 자신의 자력에 의한 경배에 관한 책자 44절에서 최고의 완벽함을 부여하는 듯하다. 자발적 순교에 대한 그의 의미는 (원시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야심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소명 없이 그것을 결행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고도의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며, 최상의 개신교 신학자들의 판단에 따르면 순교로 불릴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아니면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감당하도록 요구하실 때를 순교라고 한다면 어떤 완벽한 상태라기 보다 일종의 의무(혹은 최소한의 특권)인 셈이다.
12 절
6. 임의적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경배나 예배를 드림으로써, 사람들이 다른 계명들을 위배하여 자신들의 죄 사함을 받으려 할 때.
"내가 화목제를 드려서 서원한 것을 오늘날 갚았노라(잠 7:14)…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잠 7:18)"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지 않은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제사이다. 즉 내가 이전에는 우상숭배로 빚을 졌지만, 이젠 자유의지에 의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만족시켰고, 계산을 마쳤다는 것이다. 혹은 교황주의자들이 용이하게 행하듯이 명하시지 않은 것을 행함으로써, 적어도 대부분은 스스로를 위한 영광을 구매하고 타인들을 위해서 공덕을 베푸는 것이다. 해먼드 박사가 이런 종류의 미신에 얼마나 근접하는가를 자력에 의한 경배 50절에서 곧 입증할 것이다.
13 절
7. 사람들이 하나님이 명하신 예배나 경배보다 명하시지 않은 예배나 경배를 통해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고 더 인정받기를 기대할 때.
사도는 고린도전서 8장 8절에서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고 하면서 스스로의 생각으로 어떤 식물을 삼가는 것 같은 인간의 교만을 암시했다. 그리고 해먼드 박사는 자신의 '자력에 의한 경배'란 책자 16절과 19절 그리고 52절에서 자신의 자발적 경배(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경배)가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더 인정받으리라는 의견과 기대를 나타내고 있다.
14 절
8. 마지막으로 어떤 대상들에게 하나님의 본성이 그것들에 부여하는 것 보다 더 많은 덕과 효능을 부여하는 것
해먼드 박사는 이것을 일종의 과도함이기 때문에 미신으로 인정한다(45절). "자연스럽게 혹은 하나님의 말씀의 규칙에 의해 혹은 더 순수한 시대의 교회의 평가에 의해 어떤 대상들에게 속한다고 생각되는 것보다 그것들에게 더 많은 덕을 부여하는 것은 과도함의 죄를 짓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제시한 사례는 매우 적절하며 고려할만하다. 1. 교황주의자들이 악마를 쫓기 위해 스스로 성호를 긋는 것뿐만 아니라, 많은 무지하고 잘못 교육받은 개신교도들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세례에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성호를 그어줄 것을 요구할 때, 십자가 표식에 대해 덕이나 힘을 부여하는 것 2. 여성들의 par vula evangelia. 3. 모든 자연인들과 위선자들의 공통된 미신, opus operatum. 이것들에 관한 그의 판단은 올바르다. "그런 행위는 근거가 없으므로 우행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가 복음에서 하지 않았던 어떤 약속을 그분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왜 "더 순수한 시대의 교회의 평가에 의해"-해먼드 박사는 교회의 전통을 더 중시하는 듯함(번역자 삽입 설명)-라는 말을 덧붙였는지 잘 이해할 수 없지만 적절한 자리에서 그것을 고려할 것이다.
15 절
미신의 본성을 입증함으로써 우리는 해먼드 박사에 대한 논의를 위한 준비를 마쳤으므로, 이제 리스트로 들어가서 그가 주장하는 바를 고려할 것이다. 우리는 그의 책자의 1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무지하거나 다른 사람의 최상의 행위에 대해 중상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부 사람이 미신의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부당한 비난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를 그런 범죄를 저지른 바가 없다고 양심으로 확신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범죄로 비난을 받는 게 정당할 수 있다. 보통 가장 미신적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순결과 경건을 가장 확신한다. 다수의 로마카톨릭 개종자들은 자신들의 고귀한 자력에 의한 경배는 결코 이런 범죄가 아니며, 사람들에게서 칭찬받고 하나님에게서 인정 받을 자격이 있지 결코 어느 쪽의 비난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논의에서 그들의 미신에 대한 이해는 해먼드 박사와 전혀 차이가 없다. 즉,
16 절
라틴어의 "미신"은 superstitum cultus(2절 참조)로, 이 세상과는 분리되어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어떤 것을 경배하는 것이다. 이교도들의 정의가 그렇다는 것과 과거 그들의 경배와 현재의 교황주의자들의 경배가 창조주를 포함하거나 제외한 피조물에 대한 경배로서 제1계명에 위배되는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미신의 일종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인정한 바 있다. 그러나 해먼드 박사에 의하면 이것이 그때나 지금 이 세상의 유일한 미신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교도 가운데 또다른 종류의 미신으로 신에 대한 과도한 공포와 곧 다루게 되겠지만 그리스도교인 가운데 또다른 미신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supra statutum의 super와 sto 혹은 statue처럼 하나님의 법 위에 인간들이 도입한 일부 경배들을 두는 경우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미신은 과도한 점에서 경건에 위배되는 악덕이다"라는 스콜라학자들의 정의는 다른 계명들에도 해당되지만, 해먼드 박사는 제2계명의 위배에만 한정하고 있다.
17 절
미신에 대한 그리스어는 … 으로, 해먼드 박사가 의미하는 superstitum cultus에 더 근접해 보이지만, 이 그리스어의 어원은 많은 것을 내포하기 보다 신에 대한 비굴한 공포를 의미하며, 해먼드 박사가 13절에서 "많은 폭군들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9절에서 "겁쟁이처럼 전율하는 공포이자 악령에 대한 주의와 공포"라고 했듯이 잔인하고 폭군과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신이란 말의 라틴어 어원은 악마나 다른 세상의 영들을 나타내지만, 그리스어의 어원은 경배가 아닌 공포를 의미한기 때문이다. 즉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경배를 의미하는 경외가 아니라 그들의 경배 대상인 하나님을 비굴하게 두려워해서, (명하신 경배를 알거나 그것에 만족함 없이) 자신들의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화해하기 위해 스스로 경배 방법들을 고안했다. 이것들이 미신이나 자력에 의한 경배가 되며, 전자는 제1계명에 대한 위배이며 후자는 제2계명에 대한 위배인 것이다.
18 절
4절에서 10절까지 해먼드 박사는 …한 단어의 많은 의미를 설명한 후 " ….는 최고의 한 분 하나님이 아닌 세가지를 언급하는데 첫째는 시적인 신들, 천사들 그리고 죽은자들이나 진정한 어떠한 것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전에 있었던 내가 주장했듯이, 이 그런 것들에 대한 경배는 제2계명을 어기고 참되신 하나님에 대해 거짓되고 명하시지 않은 경배를 드리는 미신이라기 보다, 한 분인 참된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이나 그 분과 함께 그들을 경배하는 다신주의를 금하는 제1계명에 명백히 위배되는 우상숭배에 해당한다.
19 절
그러나 그는 11절에서 덧붙이기를 "사도행전 17:22에서 바울이 아테네인들에게 그들이 범사에 종교성이 많다고 말했을 때, 그는 로마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신들이나 마귀들을 경배한다거나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신실하고 경건하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내 의견은 그들이 많은 신들을 경배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웠다면, 그들은 제1계명을 위배하는 다신주의자들이다. 그들이 참되신 하나님을 거짓된 방식으로, 무지할 정도로 경배하는데에 더 신실하거나 경건(오히려 불경건)했다면, 그들은 제2계명을 위배한 것이며 어느쪽이든 여러 종류의 미신에 해당된다.
20 절
사도행전 25:19에서 베스도가 …란 말로 뜻한 바는 그리 실체적인 것이 아니며, (해먼드 박사는 그에게만 제한하는데) 바울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전 유대 종교에 대해(그 말들의 의미가 그렇고 우리가 그렇게 번역하는 바이다) 다분히 경멸의 뜻으로 말한 것 같다. 그러나 전자를 옹호하기 위해 이 구절을 거론하는 것, 즉 "죽은 예수에 대해 그를 …(죽은 영웅이다)라는 속된 개념 하에 놓고, 그에 대한 경배를…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해먼드 박사식 비판론으로 명백한 성경본문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베스도는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 뿐이라"고 했지 …나 영웅으로 그를 경배한다는 언급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해석은 더둘로가 바울을 고소할 때 그들의 법 23조, 29조를 들어 다른 중범죄인 선동죄, 교사, 신전모독 등을 언급(행24:5?6)한 것을 볼 때 더 신뢰성이 높다. 그러나 해먼드 박사는 (흔히 자신의 방식대로) '그들'이라는 통상적인 번역보다 ('그의'와)...로 임의로 조작하여, '경건(종교)'으로 의미를 바꾸었고 적어도 '미신'을 정당화 시켰다. 계속해서 그는 자신의 주장을 위해, "바울의 경건(종교)을 예수를 ..나 죽은 영웅으로 경배하는 것으로 만든" 반면에 바울은 그 분이 다른 세상의 마귀들처럼 부분적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로부터 온전한 사람으로 부활했음을 주장했던 것이다.
21 절
에피쿠로스학파의 교리나 이교도들이 경건(종교)란 말에 대해 생각하는 바는 우리의 주장과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통용되는 그 말의 진실되고 적절한 의미와 달리, 해먼드 박사는 의도적인 조작을 통해서 우리를 오도할 목적으로, (자신의 저작) 14절에서 27절에 걸쳐서 수많은 교양과 학식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교도들은 그 말을 각종 나쁜 의미로 해석하거나, 그 말을 사용하여 자신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들을 장식했다. 플루타르크는 현저하게 드러나는 두 가지 미신으로 유대인들을 비난했다. 1.그들은 자신들의 미신에 그물처럼 걸려있다는 점. 즉 침략을 당해도 안식일에는 대항하지 않는다는 점. 이것은 제4계명을 위배하는 과도함이며 심한 미신이다. 왜냐하면 불가피하면 안식일을 어길 수 있기 때문이다. 2.자신의 아이들을 죽여서 가공할 미신인 몰록에게 제물로 바치는 일은 참된 하나님에 대한 경배의 의도였더라도, 시편106:37처럼 악마에게 제물을 드리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다른 관점에서는 (그분이 명하시지 않았고 그분의 마음에 합하지도 않는데) 그 숭배를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경배로 삼는다는 점에서 제1계명에 위배되는 심한 우상숭배이며, 고린도전서 … 의 사도의 말에 의하면, 제2계명에 위배되는 미신이기 때문이다. 단언하자면 어원학자가 우리가 의미하는 바를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 23절의 해먼드 박사의 인용대로, "이교도들 가운데 이 말(미신)은 선한 것을 의미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경건한 것을 뜻하는" 것이다.
22 절
27절에서 장황한 논의를 거친 후 드디어 해먼드 박사는 그것을 자기 목적을 위해 활용하여, 미신이란 말에 대한 우리의 통상적인 용법이 갖는 세가지 모순을 밝히고 있다. 첫째는 "미신을 단순하고 추상적으로 이해하여, 권위있는 작가들이 모두 사악한 것, 특히 거짓된 경배를 가리키는 것으로 결론 짓는 것은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도 양해하듯이, 이것은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이든 정통적인 개신교 신학자들이든 그 말을 언급할 때 반드시 악한 것 특히 과도하고 거짓된 경배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미신에 대한 어원학자의 의견과 그리스도인들의 통상적인 의견이 차이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것이 더 타당성이 높은 이유는 교황주의 주석가들조차 이 말을 나쁜 것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을 좋은 의미는 전혀 없는 미신이란 말로 해석하기 때문인데, 그렇게 함로써 분명히 자신들의 자력에 의한 경배와 미신을 위장하고 은폐할 의도인 것이다. 해먼드 박사의 의견의 근거를 다시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자신의 경배를 표현하기 위해 미신이란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신뢰할만 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다면 그런 명칭으로 부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해먼드 박사의 주장.
분명히 이교도들은 자신의 경배를 선하게 생각하지만, 그것이 거짓된 경배이기 때문에 더 나은 것일 수가 없다. 그리고 해먼드 박사는 이전의 장황한 논의를 통해서 이 말의 의미를 입증하는데 이교도들만을 언급했을 뿐, 한 사람의 개신교 신학자나 그리스나 로마의 교부 혹은 어떤 현대적 작가, 교황주의자 혹은 그것을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언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것을 그가 선의가 부족한 것으로 이해한다.
2. 그의 다음 근거는 "사도행전 25:19에서 바울사도의 종교가 이 이름으로 불리웠을 때, 베스도는 비난이나 나쁜 의미가 아니라, 바울의 종교를 일반적으로 지칭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해먼드 박사의 주장. 이것에 대해 20절에서 이야기했듯이, 오히려 그의 의견상으로 볼 때 나쁜 것을 나타낸 것 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베스도는 그다지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유대인의 종교에 대해 어떤 신뢰를 줄 만큼 존경심도 없어서, 사람들이 중상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종교가 아닌 모든 것에 대해 미신이라고 한 것처럼 이야기했던 것이다(해먼드 박사 24절).
3. 그의 세 번째 근거는 "사도 바울 자신이 사도행전 17:23에서 아테네인들에 대해, 그들이 무지하게 참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신으로 생각하지만, 그들이 그 분을 경배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참되신 하나님을 무지하게 자신들이 고안해낸 경배로 경배하는 것은 마땅히 정죄 되어야 할 미신이 아닌가? 참되신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경배하는 것은 이스라엘백성의 심한 우상숭배이자 죄로 가득한 미신이 아닌가?
4."그가 어떤 사악한 의식과 상관없이 알지 못하는 신을 경배하는 것을 가지고, 그들이 다른 백성들보다 더 종교적이라고 지칭했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논점을 교묘히 회피하는 것으로, 너무도 많은 거짓 신들을 경배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자신들의 무지한 경배와 사악한 경배의식으로 섬김으로 인해,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too superstitious)"라고 한 본문 내용 자체에 어긋난다. 이 의미는, 해먼드 박사 자신이 11절에서 이야기하듯이, 너무도 미신적이라는 말은 너무도 종교적이라는 뜻이지만, "나는 너희들이 모든 일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미신적인 사람들로 간주한다"는 뜻으로, 이것이 바로 경건의 과도함이며, 본문 16절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에서 사도가 우상숭배라는 이름으로 경계한, 많은 거짓 신들을 경배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무지하게 경배하는 것이 진정한 종교라는 이름으로 불릴 가치가 있다고 해먼드 박사가 생각하지 않는다면 악한 의미의 미신이라고 불러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22절에서 종교성이 많다고 한 말을 속되게 해석하는 것은 좋은 의도가 될 수 없고, 해먼드 박사는 31절에서 적극적으로 미신적인 것은 상대적으로 그런 것보다 과도함을 지칭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23 절
(그가 말하는) 두 번째 모순은 이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배에서 의식이나 의례의 도입은 그리스도의 모범이나 가르침으로 분명하게 지시되지 않았다면 미신으로 불려 마땅하며 그 때문에 정죄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내 의견으로는 이것은 오류이며, 그런 결론을 내릴 이유는 전혀 없고 오히려 이런 결론이 옳다. 어떤 의식이나 의례건 경배의 일부가 되는 경우 성경의 예나 가르침이 없다면 미신이며 그러므로 정죄 되어야 한다.(그리스도의 모범이 기준이 아니라, 성경적 근거를 의미함-번역자 삽입 설명)
24 절
세 번째 모순은 더 나쁜 오류인데, 경건의 이름으로 사람들은 합법적 권위에 의해서 명령되었든 교황주의자들에 의해 남용되었든 일부 관계없는(중립적인) 의식을 미신으로 회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경우에 대해 나는 합법적 권위의 명령 때문에 관계가 없는 식전을 회피한 적이 있는 이해심 있는 그리스도인의 예를 한 사람이라도 그는 제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것들이 관계가 없기 보다, 경배의 일부로 그들에게 강요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회피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 대해 교황주의자들이 그것들을 도입한 것이 전부가 아니며, 그들이 그것들을 남용함으로써 경배의 일부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25 절
일부 권위있는 특히 거룩한 저자들에 의한, 미신이 과도한 경건을 지칭한다는 주장을 우리는 인정한다. 이것에 대한 그의 의견은 무엇인가? 첫째 그는 고백하기를 "미신적인 것이 그런 과도함들을 가리키고 종교적인 것도 마찬가지지만 미신은 종교 이상의 아무것도 지칭하고 있지 않다. 이견이 없듯이 종교 자체는 거짓 종교에 적용될 때, 종종 미신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지시되지 않은 경배에 있어서 그러한 모든 과도함은 미신에 대한 악한 심판관인 A. Gellius가 어떤 생각을 했든 과도함이며 죄가 되는 것이다.
26 절
일부 저자들이 그렇게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많은 반대 의견들을 제시하고 있다.
1."가장 천박한 고대 이교도들은 아니더라도 일부가 에피쿠로스주의 신성을 근거로 그렇게 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경배의 의미를 결코 알지 못했던 이교도중 최고수준의 자들이 경배의 문제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지 고려하고 있지 않음을 고백한다.
2."그리스도교 저자들의 경우, 그런 의미에서 단어의 사용은 너무나 가볍고 일상적이어서 그 단어에 대해 악한 성격을 규정짓기에 불충분하다."
이것은 그의 말처럼 그렇게 가볍거나 일상적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문제를 거론하는 모든 개신교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악한 이름과 명성을 가진 것으로 그것을 비판하고 있으며, 심지어 교황주의자들조차 그런데, 그들 대부분이 볼 때 그것이 일반적인 원칙에 비추어 경건의 과도함이자 불법적인 경배이기 때문이다.
3. "요점을 적절히 파악한 사람들은 매우 드물고 근대인들이어서, 권위가 부족하고 경박함과 경멸로 말할 뿐 작품으로 탄생하는 일은 매우 희귀하다."
그러나 해먼드 박사는 왜 이 모든 논의에서 우리에게 그것을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그 많은 권위있는 정통 교부들의 이름들을 제시하지 않는 것일까? 그는 풍부한 권위들을 확보하고 있는 곳에서는 그다지 인색하게 예를 사용하지 않는다. 4. 마지막 것은 문제에 더 근접한 것이다. "과도한 것 등과 같이 나쁜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질이나 양(혹은 행위들의 정도나 숫자)의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먼드 박사를 양자 모두에 대해 언급한다.
27 절
…을 그가 찾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현실성이 없다. 어떤 사람이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그 분을 섬기도록 허용되었다면, 죄없던 아담이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땀흘려 일하는 소명을 받았다. 성자 오스틴으로부터 그가 인용한 "경배나 제도 자체가 미신적이 아니라면, 기도의 빈도도 미신적일 수 없다"는 주장은 우리에게 이중의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첫째, (인간에 의한) 경배 제도는 미신적일 수 있다. 둘째 자기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기도처럼 명하신 경배에서 인간은 계속해서 기도만하고 자신의 소명을 무시한다면, 그 사람은 미신적일 수 있다. 전자(계속해서 기도만 하는 것)만을 실행한다면 후자(자신의 소명의 무시)도 실행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28 절
"따라서 의식들과 예식들 자체가 미신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수가 많은 것일 뿐이다“라고 해먼드 박사가 말하듯이, 과도함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 과다한 의식들과 예식들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외연상의 확장의 문제일 경우.
첫째 우리 의견은 수다한 의식들과 예식들은 복음에 따른 단순한 경배에 대해 편견을 갖게 하므로, 미신적이거나 향후 그렇게 되리란 것이다.
(둘째) 더 나아가 경배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면, 아무리 극소수일지라도 그러한 의식들과 예식들은 미신이며 자력에 의한 경배에 불과한 것이다. 구약의 율법에서 그랬던 것처럼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이 명하신다면 최소한의 의식과 예식도 경배의 일부가 되었으며, 현재도 어떤 것이 하나님이 명하신 것으로 파악된다면 경배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교회의 많은 의식들이 그렇듯이 인간들이 만든 것들이 경배의 구성요소를 이룬다면 이것이 미신이다.
(셋째) 약간의 의식들과 예식들은 경건(종교)에 필수적이지만, 그것들은 고린도전서 14장 40절의 말씀처럼 “적당하고 질서있는” 것들이어야 하며, 인간의 지혜나 의지를 따라 인간적 기준에 적합한 성격의 다수의 것들을 받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들이 만든 것들은 일부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계명, 일부는 사물들 자체의 본성, 그리고 상황에 따라 바뀌게 되는 주변적 요소들의 결합이다. 즉 종교적이고 시민적인 사항들의 통상적인 부대조건인 시간, 장소, 제스처와 같은 경배의 주변적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경배의 구성요소로 받아들여야 할 경건한 교회 의식들과 예식들은 경시한다.
29절
개신교 신학자들은 경배에서 일부 의식들과 예식들(혹은 주변적 요소들)을 수용하지만, 로마교회에서 중시하는 예식들은 정죄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미사처럼 그리스도가 명하시지 않은 것들이거나, 서약할 때 손을 들거나 기도할 때 하늘을 쳐다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의미를 부여하게 되거나 성경의 사례가 있는 경우가 아닌 것들이 거기에 해당된다.
30절
그가 구체적으로 예시한 세 종류의 중요한 예식들이 이런 성격의 것들이다.
1. 자연스럽게 의미를 부여하게 되거나 의미를 갖게 된 것. 예를 들면 하늘을 쳐다보는 것은 열정을 나타낸다.
2. 관습으로 인해 의미를 갖게 된 것. 예를 들면 무릎을 꿇는 것은 겸손을 나타낸다.
3.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부활절주간과 성령강림절 주간의 중간을 택하는 것과 같은 교리의 문제나 사실의 문제를 나타낼 목적을 지닌 것.
이런 것들과 스스로 미신으로 타락해 버린 것들은 결코 경배의 일부가 될 수 없는데도, 그렇게 된 것은 필요한 것으로 혹은 그것을 준행하는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경건하고 하나님이 받으실 만하게 만들어 주는 것처럼 가르쳐지고 실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중요한 예식들은 미신일 뿐이며, 자체적인 본성이나 하나님이 지정하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들이 그러한 예식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에게 얻은 약간의 은혜를 드러내고자 인간들에 의해 제도화된 것인데, 로마교회는 이런 예식들을 다수 가지고 있다.
31절
“과거 유대의 예식들이 우리에게 금지되는 유일한 이유는, 그리스도를 예시하는 것들을 준수하고 그것들의 필요성을 가르치는 것은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라는 해먼드 박사의 주장은 다시 오류이다.
그것도 이유가 되지만 유일한 것은 아니다. 벨라르미노는 인간이 만든 새로운 예식들의 강요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논의에서 그렇게 답변했다. “(그는 주장하기를) 그리스도는 모세의 과거 예식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신약의 예표였으며,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것들이 없다고 해서 교회에 어떠한 예식들이나 법들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학식있는 샤미에르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벨라르미노는 감추었지만) 이런 예식들의 폐기에 대한 또 다른 이유는 그것들이 수다한 예식들로 양심에 멍에를 씌우기 때문이며, 이것은 그러한 인간의 유전들에는 흔한 일이다.
※ 다니엘 샤미에르(Daniel Chamier, 1564–1621) : 프랑스 종교장관. 몽텔리마르대학 설립자이자, 저술가. 루이 13세에 저항하다가 개 신교 도시 몽토방에서 살해됨. ※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o Bellarmine, 1542-1621) : 이탈리아의 추기경이자 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와 갈릴레 오 갈릴레이에 대항하여 가톨릭교회를 변호하는 일에 앞장 섰다. ‘교회박사’라는 별명을 소유함.
그러나 우리의 주장은 그 이상이다. 1. 거짓사도들은 그에게 할례를 결부시키면서 그리스도가 육으로 오신 것을 인정했지만, 그것들을 준행한 죄의 책임이 있다.
2. 그들이 비난받는 것은 단지 할례가 필요하다고 가르쳤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랬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도행전 15장, 갈라디아서 5:1절에서 벗겨버린 할례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다시 씌웠기 때문인가?
3. 그것들을 준행하는 것과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부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내가 제기하는 질문은 만약 그렇다면, 오실 그리스도를 예시하지 않지만 (그게 필요하다고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과거 중요했던 어떤 유대 예식들을 준행했다면, 사도는 그 때문에 그것들을 미신적이라고 비난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혹은 그들이 어떤 새로운 의식들과 예식들을 고안했다면, 사도는 또한 그것을 이유로 그것들을 지나치게 미신적이라고 비난하지 않았겠는가?
32절
그러나 해먼드 박사는 “예식들은 극소수여야 하고 건전해야 한다”는 오랜 규칙에 동의한다. 극소수여야 하는 것은 우리가 타당하다고 인정하는 많은 이유들로 인해 그렇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이 건전하고, 소극적인 의미에서 해가 없을 뿐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로 교화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들을 과도하다고 비난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헌신을 도우므로 오히려 그 수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으로 그것들이 다수가 되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랜 규칙을 부분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정신적으로 유익하고 건전하다면 아무리 다수일지라도 좋다는 식이기 되기 때문이다. 즉 “소극적으로는 해가 없다”는 것은 로마 카톨릭의 미신들의 대부분을 허용하도록 문을 크게 열어 놓는 것이다. 그것들이 다수인들 무슨 해가 있는가? 일부가 지칭하듯이 선하고 결백한 예식들일 뿐이다. 하지만 (모든 자력에 의한 경배자들이 스스로의 창안물들에 대해 생각하듯이) 적극적인 교화의 역할을 조건으로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배에 다수의 예식들을 추가함으로써 사람들을 붙잡아 두려는 시도가 아닌가? 그리고 사람들이 판단하기에 예식들이 극소수이고 건전하다고 가정하자. 만약 다른 예식들이 예배의 일부로서 혹은 은혜의 획득 아니면 하나님의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으로서 부가된다면, 아무리 처음엔 극소수이고 건전하다고 생각할지라도 그것들이 지나치게 많아지지 않겠는가? 결국 누가 그것들의 수와 정신적 유익을 판단할 심판관이 되겠는가? 확실히 모든 개개인은 아니다. 55, 56절에서 “그것들의 추잡함에 대한 유능한 심판관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들의 수와 건전성에 대해서는 더더욱 심판관이 될 수 없다. 그러면 누가 가능한가? 그는 55절에서 교회나 시민사회나 고위권력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 혹은 어떤 한정된 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배의 유능한 심판관들이 될 수 있다면, 사람의 지혜가 그것들을 장황하게 하고 무질서하게 만들지 않겠는가? 어떤 한 사람이나 교회가 이것이 교화와 헌신을 위해 대단히 건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현명한 또 다른 사람이 다른 하나를 추가할 것이며, 결국 교회는 자신의 목에 유대인들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지우게 된다. 누구나 무수한 건전한 로마카톨릭의 건전한 예식들이 이런 식으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33절
그런 사항들에 관한 유능한 심판관의 문제는, 해먼드 박사가 세상적인 지혜로는 할 수 없는, 건전한 예식들에 관한 매우 많은 구분들을 짓기 때문에 선결되어야 하는 사항이다. 심판관은 “과도함이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그러한 행위들에 관해, 하나님의 목적에 비추어 준수할 만하고 적절하다거나 아니면 준수할 가치가 없고 부적절한 것으로 구분을 짓는다”고 그는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배에 만족하는 양심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어떤 보통 사람이 그러한 구분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가? 그는 로마교회 안에 이러한 준수할 가치가 없고, 부적절한 예식들이 엄청나게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는가? 하지만 그런 사항들에 대해서 심판관은 해먼드 박사와도 의견이 같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해먼드 박사에 의하면 그는 그러한 사항에 대한 하나의 답을 갖고 있다. “이 경우 어떤 것이 과도한 것이며 결여됨이 있다고 할 있지만, 여전히 미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행과 허영심으로 인한 결여됨일 뿐이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에 대한 경배에서 무엇이 미신이고, 우행이나 허영심이 아닌지 묻는다. “우상들과 모든 거짓된 경배가 허영심이자 우행이 아닌가?“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막7:8~9)“”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막7:7)“
해먼드 박사가 자기 좋을 대로 심판관이 그러한 것들에 대한 혐오감을 보이게 하더라도, 만약 사람들이 심판관이 될 수 있다면, 예식의 숫자와 건전성에 대한 기준은 무엇인가? 이전 사람처럼 다음 사람이 자신의 기준대로 판단한다면, 결국 그리스도인은 유대교인보다 더 많은 짐을 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지금은 비록 소수라고 가정하더라도, 이후의 모든 교회들이나 교황들에게 자신들이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식들이나 교회의 법들을 제정할 권한이 주어진다면 결국 그 숫자가 얼마나 많아질지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멍에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경험에 의하면 그 수는 항상 증가하기 마련이다“라고 한 학식있는 샤미에르의 말대로, 그것들을 시행할 권한이 특정 교회나 어떤 개인 혹은 사람들에게 있다면, 극소수일지라도 많은 해악이 있을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미신이 경배에 대한 성문화된 법 위의 Superstatutum이기 때문에, 즉 하나님에 대한 경배에 부가된 과도한 예배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되었다면, 이러한 부적합한 예식들은 그렇게 간주되어야 마땅하며, 해먼드 박사는 그 도련님께 미신이란 이름을 부여하기를 아까워할 필요가 없다. 그런 사소한 것들에 미신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하는 사람들은(아마 해먼드 박사에게 그것들은 사소한 것들에 불과할 것이다) 결코 그런 결여됨이 없는 대상들에게까지 확대 적용하는데, 결국 순환을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한다. 나는 단지 미신이라는 이름을 부여 받을만한 것은 모두 경건(종교)에 있어서 과도함이며 경건의 과도함은 모두 미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해먼드 박사의 다음 주장으로 돌아가자.
34절
“십자가의 경우처럼 본질적으로 혹은 말씀의 규칙에 의거하거나 순수한 시대의 교회의 평가에 의해서 그것들에게 속한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보다 어떤 대상들에 더 많은 덕을 부여하는 것”(해먼드 박사의 주장)
이것에 대해 우리는 일반적인 언급을 했지만, 이제 로마교회의 모든 예식들과 존재하는 모든 부가된 경배의 요소들을 부적절하다고 가정할 것이다. 그들은 본질적으로나 말씀의 규칙에 의해서 그것들에게 속하는 것보다 더 많은 덕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미신적이다. 이 가정을 다음과 같이 입증하고자 한다. 그들은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이 기뻐 받으심과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얻고자 그것들에 대해 더 많은 덕을 부여하지만 결코 본질적으로나 말씀의 규칙 혹은 하나님의 제정하심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더 많은 것이 부가되었을 수 있다고 결론 지울 수 있지만, 나는 자제한다.
그러나 해먼드 박사가 위 주장에서 선택지 가운데 “순수한 시대의 교회의 평가에 의해서”라는 말을 추가한 의도는 무엇인가? (사도들 이후) 순수한 시대의 교회는 본질적으로나 하나님의 말씀의 규칙에 의해서 그것들이 갖고 있지 못한 덕들을 그것들에게 부여할 권한을 갖고 있는가? 그가 이것을 부인한다면, 그 추가는 피상적이다. 그가 이것을 긍정한다면, 그는 논점을 교묘히 회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순수한 교회는 경건(종교)의 문제에서 그것들에 대해 덕을 부여할 권한이 전혀 없으며, 본성에 의해서 혹은 말씀으로 제정하심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권한이 있다. 즉 존재한다면, 가장 순수한 교회가 자기 책임으로 그렇게 한다면, 나는 실례지만 부분적으로 해먼드 박사의 말을 언급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우행이거나 그리스도가 복음을 통해 하지 않은 어떤 약속을 그분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거짓말이고 말씀에 대한 추가이며, 그의 표현대로 경건의 과도함이며 죄로 차있는 미신이므로 가장 순수한 교회를 더럽히는 일이 될 것이다.
35절
과도함이란, “하나님이 명하시거나 금하시지 않았는데도, 경건하게(종교적으로) 절제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속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불필요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과도함”임에 틀림없다. (앞서 7절에서 이 문제에 대한 진술을 통해 우리가 언급했듯이), 그의 주장대로 이것이 미신의 일종임을 우리는 수용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미신은 아니며 더 많은 미신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해먼드 박사의 근거를 마찬가지로 제시한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그분의 명령에 추가해서 그리스도교에 결합시키는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예배의 과도함이기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47절의 미신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은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것을 했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그분이 하시지 않은 것을 명령하거나 금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죄있는 과도함”이라고 고백한다. 참으로 하나님이 무관계하고 자유롭게 하신 대상들이라면, 사람이 그것을 행하든 삼가든 이런 종류의 미신에 대해서는 무죄하다. 그러나 그가 다른 종류의 미신을 저지른 죄가 있을 수는 있다. 즉 그가 본질에 의해서나 말씀의 규칙에 의해서 그 대상들에 정당하게 속하는 것 보다 더 많은 덕을 부여할 경우에 그렇다. 그러나 경배의 문제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종종 이야기해 온대로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것을 행하는 것은 과도함이기 때문이다.
36절
“그리스도의 법이 필수적인 것으로 허용하지 않은 것들을 교리화하는 것 즉 필수적인 것으로 부과하는 이 방식은 자신의 의견으로는, 어떤 부류의 개신교도들이 저지르는 특별하고 유일한 성격의 미신”이라고 해먼드 박사가 결론내린 것은 엄청난 오류이다.
1. 왜냐하면 그는 45절에서 또다른 종류의 미신으로, “그것들에게 본질적으로 혹은 말씀의 규칙에 의해서 속하는 것보다 더 많은 덕을 부과”하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2. 인간이 고안하여 하나님에 대한 경배의 일부로 부가한 모든 자력에 의한 경배는 경건(종교)에 있어서 과도함임이 입증되었고, 그래서 미신인 것이다. 그 외에도 앞에서 우리가 언급했듯이 여러 종류가 있다. 그가 덧붙였던, “불길한 사건들과 불길한 날들을 준수하는 것”은 45절의 첫번째 종류의 미신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본질이나 그의 제정하심에 의한 것보다 어떤 대상들에 더 많은 덕을 부과하는 일은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부주의한(이교도들에게 흔하므로, 부주의한 경배이다) 과도함이겠지만, 그것들을 이용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과도함이자, 어떻게 부르든 일종의 종교적 혹은 세속적 미신인 것이다.
37절
이제 우리는 그가 주장하는 마지막 종류의 미신에 대해 고려하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우리 중에서 행해지고 있는 일반적으로 매우 거짓되거나 부적절한 일부 의식들에 대해 거룩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미신이라는 주장이다. 우리는 이 주장을 고찰할 것이다.
38절
1. 거룩성이란 무엇인가? 내재적인 참된 거룩성인가 혹은 통상적인 의식들과의 구별인가? 우리의 대답은 후자 즉 통상적인 의식들과는 구별된 거룩함이다. 즉 대상들이 더 이상 통상적인 의식들에 전용될 수 없도록 거룩한 의식으로 구별하는 것인데, 이것이 본연의 거룩성이다.
39절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것이다. “어떤 대상이 누구에 의해, 얼마나 멀리 구별되는가 즉 그리스도에 의해서인가 사도들인가 순수한 시대의 보편교회인가 아니면 우리가 살고있는 현재의 개별적인 교회인가 혹은 자유로운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인가”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이 구별이 누구에 의한 것인지 말할 뿐, 여러 저자들에 의해 구별된 대상이 얼마나 멀리, 어떤 정도로 거룩하게 되는지 혹은 모든 저자의 경우에 동일한지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이 없다.
개인에 의해 거룩해진 대상은 특정 교회에 의해 거룩해진 것과 동등하게 거룩하고, 교회 일반에 의한 것은 사도들에 의한 것과 동등하게 거룩하며, 사도들에 의한 것은 그리스도에 의한 것과 동등한 지 하는 문제가 우선 결정되어야 한다. 단지 점진적인 여러 단계의 구별을 바탕으로 거룩성의 차이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우리는 (사도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구별과 교회의 구별간에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게다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 혹은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사도들 외의 누가 어떤 대상을 진정으로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증명을 요구한다. 즉 어떤 대상을 진정으로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해먼드 박사가 50절에서 정의했듯이) 통상적인 의식들로부터 단순히 거룩한 의식들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1. 그것을 경배의 일부로 만들고, 2. 그것을 적절하게 시행하는 사람에게 거룩함을 전달하는 효력이 있고, 3. 예배와 사람이 하나님이 더욱 받으실 만하게 만들며, 4.말씀 가운데 있는 그것에 관한 약속에 입각하여 축복에 대한 기대의 근거를 제공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어떤 대상을 통상적인 의식들로부터 구별하고 신성화하여 거룩하게 할 수 없다. 해먼드 박사가 무시하거나 당연시 한 모든 것들은 다른 저자들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주장하기를, “우리가 앞의 대상들 중 어떤 것에 있어서 과도하고(즉 미신들을 행하고), 그것들에게 정당한 것 이상으로 더 많은 거룩함을 부여하는지를 분별하는 방법은 그것들을 구별시키는 사람의 권위에 비례하여 그것들을 거룩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이것에 대해 중요한 사항을 언급할 것이다.
왜냐하면 1.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 그리고 나머지 것들간의 차이는 그다지 제대로 분명히 제시되지 않았다. 사도들의 권한은 그리스도의 위임에 의해서 또한 신성하다.
2. 그러면 사도들의 구별에 대한 권한은 신성과 인성 만큼이나 보편적 교회와 나머지 것들과 무척 다르다는 결론이 나온다.
3. 보편적 교회의 명령이나 모범은 (진실로 소위 공의회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대상을 거룩하게 만든 일이 있었는지 입증할 수 없기 때문에) 앞서 언급된 사항들을 고려할 때 어떤 대상을 진정으로 거룩하게 만들 수 없으며, 단지 하나님이 거룩하게 만드신 대상들이나 의무들의 관점에서 불 때 부적절할 뿐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구별한 시간과 장소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데, 하나님이 신성하게 하신 시간이나 장소는 그것들을 가꿀 거룩한 직분을 필요로 하지만, 사람들이 구별한 시간이나 장소는 거룩한 직분에 부수적일 뿐이다. 전자에서는, 시간이나 장소를 위해 직분이 지명된다. 후자에서는, 시간이나 장소가 직분을 위해서 지명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직분이 수행되는 어떤 시간이나 장소를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후자와 마찬가지로 전자도 거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편적 교회나 특정 교회 혹은 어떤 개인이 어떤 대상을 진정으로 거룩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해먼드 박사는 제대로 입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으며, 단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뿐이다. “그리스도에 의해 구별된 것이라면, 그것을 나는 그만큼 거룩하게 간주할 것이며, 나 자신은 신성한 명령을 지킬 의무가 있으며,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그러므로 나는 법규를 위반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1. 나는 해먼드 박사가 사도적인 제정을 신성한 명령에 의한 것으로 동등하게 지킬 의무가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생각한다. 즉 해먼드 박사에게는 사도적인 것과 신성한 것은 동일했는데, 다시 양자를 구별하여, 마치 사도들이 신성한 것도 인간적인 것도 아닌 양자의 중간인 것처럼, 교회적인 것과 사도적인 것을 구별하였다.
2. 그러나 해먼드 박사의 이런 구별로 인해, 교황주의자들이 그의 답변을 원용함으로써 대상, 시간, 장소에 거룩성을 부여하는 자신들의 최대의 미신에 대해 변명을 할 수 있다. “그들은 교회 일반이나 로마교회의 권위에 의해서 그것들을 거룩하다고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그들은 그것이 결코 미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고 그는 말한다.
40절
그러나 그(해먼드 박사)는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만약 내가 순수하게 자발적인 헌신을 행하고, 그것을 받으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실 것으로 기대한다면, 오랫동안 나는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1. 그의 자발적인 헌신의 의미는 무엇인가? 명령된 경배를 시행하는데 있어서, 그 명령에 상관없이 자발적 의지만으로 올바른 경배를 시행할 수 없다. 즉 명령 없이 자기 의지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경배라면, 그는 받으시겠다는 아무런 약속도 없는 것이며, 그러므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경배로 인해 제2계명에서 약속된 벌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2. 해먼드 박사는 45절에서 “본질적으로 혹은 말씀의 규정에 의해서 그것들에게 속하지 않은 덕을 어떤 대상들에게 부여할 때” 그것을 미신이라고 비난하고, 46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의 약속을 덧붙이며, 그리스도가 하지 않은 약속을 그분에게 돌리는 일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 그는 복음에서 그러한 것이 받으실 만하다는 약속이 있음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자발적인 헌신을 주장할 때 그것이 미신이 아님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자력에 의한 경배에는 아무런 덕이 없으며, 그것을 제정하는 이유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결단과 서원을 행할 경우, 그것에 정당한 사항을 추가한다면 나는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만약 그의 주장이, 결단과 서원이 자신의 자발적 헌신을 더 받으실 만한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라면, 서원과 함께 자력에 의한 경배를 지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미신을 늘려서 하나님의 경배만큼이나 자신의 서원도 모독하게 된다. 만약 서원이 경배의 수준을 높인다고 그가 주장한다면, 자신이 반대하는, 독신 생활이나 빈곤에 대한 서원들이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경배라는 교황주의자들의 주장을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만약 그가 그들의 서원은 불법적이고 나의 것은 합법적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차이점을 인정하지만, 이런 서원들을 하거나 서원한 대상들을 하나님에 대한 경배의 일부로 만드는데 있어서, 그들은 모두 같은 의견이며 미신적이다.
41절
그럴 경우 교회법을 신성한 명령으로 높임으로써 그것의 정당한 지위 이상으로 왜곡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옹호하는 것들을 결점이 있게 만들고 미신이라는 명칭을 얻게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든 그든 그러한 시행들에 대해 신성한 경배 혹은 받으실 만하다(명령하시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더 받으실 만하다는 의미에서) 혹은 보다 완벽하다는 지위를 부여한다면, 그런 것은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든 미신이며 향후에도 미신인 것이다. 게다가 인간이 고안한 경배의 경우, 그리스도가 아닌 단지 교회의 권위에 의해 이것 혹은 저것을 거룩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결코 미신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거룩성의 저자가 누구이든, 그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보다 그것에 더 많은 것을 부여하고 있으므로, 어리석게도 미신을 고집하는 것이다.
42절
아래의 이유로 인해서 교황주의자들과 다른 미신적인 사람들에 대해서 미신적이라고 하는 해먼드 박사의 주장에 대해.
1. 그는 어떤 대상의 그릇된 사용이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진 대상이나 결백한 대상을 타락시키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진리지만, 우리는 자발적인 헌신이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든 자력에 의한 경배처럼 금지된 것으로서 삼가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2. 그는 "미신적이라고 여겨지거나 다른 사람들을 미신적으로 만들 위험성이 없다면, 사람들이 미신적으로 잘못 사용했다고 해서 그것들을 내가 삼가해야만 할 이유는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미신이 아니라 악평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피할 수 있는데 미신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미신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영혼을 더럽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거론하고 있는 것, 즉 최악의 미신의 일종인 자력에 의한 경배에는 적용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력에 의한 경배는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것을 경배로서 하나님께 드리기 때문이다.
43절
이제 자신의 경건함과 진지함에 어울리지 않는 57절, 58절에서의 통렬하고, 거짓되며 무자비한 결론에 해먼드 박사는 만족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부 사람들에게 미신이라는 죄명을 부여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나 그의 무리가 자신들의 의견이자 실천으로 서약하는 것이 개신교 신학자들이 인정하는, 미신이라는 말의 진실한 개념에 따라서 진짜 미신적임이 입증되는 것에 대해 다음의 ‘자력에 의한 경배’에 대한 논문에서 보다 충분히 다룰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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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로 창골산 봉서방 카페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