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산동 옻골
요즘 한옥 보기가 어렵다. 예전 가옥은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깡그리 없애고 아파트를 지어 주거공간이 된지 오래다. 아마 살기에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농경시대에는 공간이 있어야 농사짓기에 편했지만 맞벌이 시대에 들면서 주부도 바깥일에 종사함으로 간단하고 편리함만 추구하여 아예 한옥은 푸대접 받는지 벌써다. 그래서 대구에서는 한옥을 보려면 남평문씨 세거지나 둔산동 옻골에 가야 한옥다운 한옥을 접할 수 있다.
대구 둔산동 옻골은 동촌 k2 비행장 뒤 후미진 곳이라 대구사람들조차 낯설어 한다. 한옥 마을이나 고택을 간다면 표정들이 별로다. 아마 한옥이라면 ‘그게그게’라는 인식들이다. 한때 초가집에 살던 시절에 기와집은 고래등으로 비유했다
둔산동 옻골은 해안역을 지나 방촌역 못미처 신호등에서 좌회전하여 좁은 길로 들면 옛 대구선 철길이 나오고 곧 K-2 담벼락을 거치면 해안초교가 나온다. 여기서 산쪽으로 더 가면 둔산동 옻골이다. 그래도 이 일대는 옛날에는 해안현이었다.
마을입구에 훤칠한 회화나무 두 그루가 객들을 맞는다. 수령 3-400년의 이 나무를 ‘최흥집나무’라 한다. 대구에는 인명을 붙인 나무들이 많다. 그냥두면 노거수라도 잘라 없애기 때문이다.
여기쯤에서 뒷산을 보면 산봉우리 정상에 바위가 보인다. 사람들은 생이(행상)바위라 부르지만 흡사 거북이가 기어 나오는 형상이다. 마을로 들면 대구민속자료 제1호 '百弗古宅'을 만날 수 있다. 이 집은 400년 동안 경주최씨들이 세거해 온 종택이다.
대문에서 보면 一자형으로 백불고택 현판이 달린 건물은 대청2칸 뒤로 數咎堂(수구당) 현판이 걸렸다. 고택 중심으로 가묘와 보본당 뒤로는 종손이 살던 살림집이다. 가묘와 별묘에는 입향조 대암 최동집님, 지묘동 삼충사에도 모신 2대 최계님, 5대 백불암 최흥원(崔興遠·1705~1786)님 3분을 불천위로 모신 사당일 것 같다.
百弗고택의 백불은 '百弗能 百弗知'라 '백 가지 능 하는 것도 없고, 백 가지 아는 것도 없다'는 뜻이리라. 대문채 광에는 量入爲出(양입위출) 綽有餘裕(작유여유)이라 쓴 한지가 붙어 있다. 量入爲出 ‘들어온 물량은 나가기 위함이고, 綽有餘裕 여유는 너그러움을 나온다는 말일게다 결국 남을 위한 적선의 말씀이고 너그러움을 깨우쳐 준 큰 가르침이었다
고택 옆 보본당(報本堂)은 향사나 제사를 모시는 건물이지만 근본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결국 조상을 유지를 기린다는 말이다. 보본당은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 문집을 편찬한 공간이다. 옛날에야 출판이 어려워 귀한 문집은 나라에서 각 감영에다 의뢰하여 책을 간행 하였다. 반계수록은 1770년 경상감영의 몫이라 당시 이 댁 종손이 주관하고 인근의 유학자들이 목판으로 26권13책을 편집 하였을 것이다. 반계수록에는 당시 사회개혁 차원의 토지 조세 교육 군역 등 다양한 항목으로 관리나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보본당은 一자형으로 4칸이다. 좌우 1칸씩은 방이고 가운데 2칸은 대청이다. 대청에서 양쪽 방 위쪽으로 보면 작은 문짝이 붙어 있다. 아마 이 문으로 방 천장을 다락으로 이용했으리라고 짐작해 본다.
臥雲 金景郁님의 주신 말씀에는 보본당 2칸 대청위의 양쪽으로 달린 문짝은 방 천정을 다락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 문짝을 내려서 펼치면 대청을 방 처럼 사용할수 있게 한것이지요 내 외가가 경주 최씨 집안이고 몇 대를 대구에서 살아왔기에 그 집을 좀 압니다
기둥은 둥글고 기둥의 주춧돌은 화강석을 네모지게 다듬어 바쳐 비바람에도 견디게 했다. 혹 天圓地方의 뜻을 의미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이 가문은 대대로 선행이 이어져 500가구가 살았던 부인동(夫仁洞)에 기근이 심하자 '선공고(先公庫)나 휼빈고(恤貧庫)'를 설치하여 가난한 주민들의 세금을 대납해주었고 땅이나 양식을 대여해 선처하였다. 1739년에는 ‘부인동 향약’을 만들어 인근 동네와 함께 마을의 질서를 잡았다 한다. 1941년 대흉년에는 13세 종손 최두영씨가 식산은행으로부터 15.000원(20억원 상당)을 대출받아 굶주린 이웃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고 1750년부터 한 200년간은 종손이 돌아가면 꽃상여를 만들어서 보내는 전통이 이어졌다 한다. 6·25때는 공비들이 이 집을 불 지르자고 했지만, 동네 머슴들이 '그 집 어른이 우리한테 어떻게 했는데…'라며 막았다고 한다.
조용헌 칼럼, 백불고택 기사에
‘대구 옻골의 남인 명문가 '백불고택(百弗古宅)' 역사는 'TK남인'이 핍박당한 사례 모음집에 해당한다. 이 집안에서는 부노(府奴)가 2명 있었다. 부노는 백불고택에서 30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던 대구부(大邱府 또는 慶尙監營)에 파견시켜 놓았던 노비를 가리킨다.
경상관찰사가 백불고택에 방문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이 사실을 바로 달려와서 미리 보고하는 일이 주 임무였다. 조선 후기 경상관찰사는 여당인 노론이 부임하기 마련이었고, 대구의 일급 양반 집안인 옻골의 최씨 집안을 우선적으로 제압하거나 노론으로 입당시키기 위해서 자주 방문을 하였기 때문이다.
집안 종손은 부노가 30리를 달려와 관찰사가 방문할 것 같다는 기별을 하면 그 즉시로 후다닥 옷을 챙겨 입고 다른 지역으로 피신을 하였다. '종손이 출타 중이라 집에 없습니다'.고
종택의 선행은 물론 積善之家를 이제야 찾아본다는 것이 계면쩍은 일이지만 뭣 하나라도 마음에 담았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예나지금이나 제 버릇 개 못준다는 속담처럼 오나가나 창피한 짓들로 편치 않은 요즘이다. 善은 善行을 낳고 惡은 惡行을 낳는다는 말을 명심하고 살았으면 한다.
첫댓글 좋은 글에 어울리지 않은 댓글을 달아봅니다-------
요즈음 정권을 탈취하고 청와대에 입성한 문패거리 주사파가ㅡ '6·25때는 공비들이 이 집을 불 지르자고 했다' 를ㅡ copt하여 보수를 완전 박살내고 있군요
대한민국 국민들이ㅡ '그 집 어른이 우리한테 어떻게 했는데' 와 같이ㅡㅡㅡ'대한민국의 보수들이 어떻게 하여, 우리나라를,이렇게 잘 살도록 했는데' 라며 들고 일어나야 하는데--------
보본당 2칸 대청위의 양쪽으로 달린 문짝은 방 천정을 다락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 문짝을 내려서 펼치면
대청을 방 처럼 사용할수 있게 한것이지요 옛날 사대부 양반집에는 그런 문짝이 달린집이 많았답니다
그 당시 감영의 노비들을 관노라고 했지요. 감영에 기생도 속해 있었는데 관기라는 것이고...
관노는 사노((개인집의 노비)와 다른점은 멸문지화를 당하면 친가는 물론 외가 처족까지
노비를 만들어서 소위 삼족을 멸한다는 말이지요
내 외가가 경주 최씨 집안이고 몇 대를 대구에서 살아 왔기에 그 집을 좀 압니다
와운님 주신 말씀 감사합니다
원문에다 실었습니다
그런 뜻을 미쳐 몰랐습니다 의문을 다음에 방문하여 여쭈워 볼까 합니다
내 외할어버지는 대구 수동에 사셨고 내가 중학교 다닐때 까지도 그 집의 일부분이 있었지요
할아버지가 말을 타실때 사용했다는 마대석도 골목에 놓여 있었고 소위 아흔아홉칸 집이라는 것인데
꼭 아흔 아홉칸이어서가 아니라 사대부의 집은 아흔아홉칸이상 지어서는 않되었기에 큰 양반집을
그렇게 불렀답니다
약전골목 제일예배당 비스듬히 뒸쪽이랄까 옛날 희도학교쪽 이었지요 내가 죽포선생님 회상기를 쓸때
장택상씨가 내 이모부님이랑 처남매부 지간이라고 했었는데 장택상씨 아버지가 영남관찰사를 지냈답니다
어머님생각, 외갓집생각, 넋을놓고 상념에 잠겨 있는데... 좋은 글 감사 합니다
내 경북중학교 1 학년때 내 짝이었던 친구가 이현보라는 친구였는데 집이 동촌 비행장뒤에 둔산동
이었다는 기억도 있습니다 1 학년때 옛날 가교사시절 교무실로 쓰다가 본교로 이사하고 음악실과
특활실로 사용헸던 그쪽에 새로만들었던 철봉대 앞쪽에서(이현보는 가끔 평행봉에 잘 매달렸음)
나와 이현보 오명용, 도경 또 누군가가 있었는데 그때 도경,오명용 이는 육군사관학교엘 가겠다고 했고
이현보는 공군사관학교엘 가겠다고 했던적이 있었답니다 그 생각이 나서 언젠가 내가 한국카페에 처음
연결이 되었을때 원평재님이 이현보에 대해서 답을 해 준적이 있답니다 그또한 지금은 추억일뿐...
둔산이란 고려태조 왕건이 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