永川皇甫門(영천황보문) 皇甫仁(황보인):(?~1453)-(覇氣가 衰하여 失敗한 領議政)
朝鮮朝(조선조) 5代王(대왕)文宗(문종)은 在位(재위) 2年만에 눈을 감으며,臨終(임종)을 지켜보던 領議政(영의정)皇甫仁(황보인), 左議政(좌의정)南智(남지), 右議政(우의정) 金宗瑞(김종서)等(등) 믿을만한 側近(측근)들 앞에 열두 살 든 世子(세자)를 앉혀 놓고,“이 아이를 卿(경)들에게 다시 한番(번)付託(부탁)하오 하는 마지막 哀絶(애절)한 한마디를 남기고 숨을 모았다.
1352年 5月의 일로 이날 文宗(문종)의 遺言(유언)을 들은 重臣(중신)들을 歷史(역사)는‘文宗(문종)의 顧命大臣(고명대신)’으로 記錄(기록)하였다. 그러나 左議政(좌의정) 南智(남지)가 中風(중풍)으로 곧 물러나자 金宗瑞(김종서)가 左議政(좌의정), 鄭奔(정분)이 右議政(우의정)으로 올랐는데, 所謂(소위) 顧命大臣(고명대신)들은 權力(권력)만 쥐고‘顧命大臣(고명대신)’이라며 우쭐하기만 했지 時勢(시세)에는 매우 어두웠고, 注意力(주의력)과 智謀(지모)가 不足(부족)하여 結局(결국) 虎視耽耽(호시탐탐)탐 틈을 엿보던 野心(야심)찬 首陽大君(수양대군)一派(일파)에게 一網打盡(일망타진)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中(중) 가장 職位(직위)가 높으면서 누구보다 虛妄(허망)하게 當(당)한 人物(인물)이 곧 領議政(영의정) 皇甫仁(황보인)이었다. 皇甫仁*황보인)은 複姓(복성)으로 이름이 仁(인), 本貫(본관)은 永川(영천), 字(자)는 四兼(사겸), 또는 春卿(춘경), 號(호)는 芝峰(지봉)이라 했다. 皇甫仁(황보인)의 家門(가문)은 高麗(고려)때 매우 繁盛(번성)하였다. 本貫始祖(본관시조) 皇甫能長(황보능장)은 高麗太祖王建(고려태조왕건)을 도와 永川府院君(영천부원군)에 被封(피봉)되었고, 皇甫仁(황보인)의 6代祖(6대조)皇甫兪義(황보유의)는 高麗中期(고려중기)에 文下平章事(문하평장사)에 올랐다. 高麗末(고려말)에 晉州牧使(진주목사)를 지낸 皇甫安(황보안)이 皇甫仁(황보인)의 祖父(조부)였고,恭愍王(공민왕)때 紅巾賊討伐(홍건적토벌)에 큰 功(공)을세워 名聲(명성)을 날린 都元帥(도원수) 安祐(안우)가 바로 皇甫仁(황보인)의 外祖父(외조부)였다. 皇甫仁(황보인)의 아버지 皇甫林(황보림)은 그의 丈人 (장인)安愚(안우)의 그늘에서 成長(성장), 李成桂(이성계)의 威化島回軍(위화도회군)에 副元帥(부원수)로 參與(참여), 回軍功臣1等(회군공신1등)에 올라 知中樞院事(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이에 皇甫仁(황보인)은 아버지의 後光(후광)으로 科擧(과거)를 거치지 않고 官職(관직)에 나가, 첫 벼슬로 從7品(종7품) 內資寺直長(내자시직장)을 받았는데 宮中(궁중)에 쓰는 食料品(식료품)과 宴會等(연회등)을 管掌(관장)하는 자리였다. 有能(유능)했던 皇甫仁(황보인)은 곧 司憲府監察(사헌부감찰)에 올라 1414年太宗(태종)14年에 親詩文科(친시문과)에 及第(급제),떳떳하게 登科(등과)하니, 이로부터 皇甫仁(황보인)은 昇進(승진)을 거듭, 1418年 世宗(세종)이 登極(등극)하자 左正言(좌정언)을 始作(시작)으로 左獻納(좌헌납)·江原道敬差官(강원도경차관)·司憲府掌令(사헌부장령)·漢城府小尹(한성부소윤)·司憲府執義(사헌부집의), 承政院(승정원)의 同副大言(동부대언)·左副大言(좌부대언)·知申事(지신사)·刑曺參議(형조참의)·江原道觀察使(강원도관찰사)·刑曺參判(형조참판)·兵曺參判(병조참판)等(등) 要職(요직)을 두루 歷任(역임)하고, 兵曺判書(병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議政府左參贊(의정부참찬)·左贊成(좌찬성)·右議政(우찬성)· 左議政(좌의정)을 거쳐 1451年 領議政(영의정)에 오르니 皇甫仁(황보인)의 벼슬길은 매우 順坦(순탄)했던 셈이다.皇甫仁(황보인)이 領議政(영의정)에 오르기까지 世宗(세종)은 皇甫仁(황보인)을 特(특)히 信任(신임), 北方開拓(북방개척)과 邊方(변방)의 防禦(방어)를 튼튼하게 하는 일을 맡기니, 皇甫仁(황보인)은 金宗瑞(김종서)와 雙璧(쌍벽)을 이루는 功(공)을 세웠다. 1453年 10月, 端宗(단종)이 卽位(즉위)했던 그 해, 마침내 首陽大君(수양대군)一派(일파)들이 圖謀(도모)한 癸酉靖難(계유정란)을 맞아, 밤中(중)에 大闕(대궐)로 불려들어가는데, 光化門(광화문)에서 車召(초)軒(헌)을 내려 걸어서 들어가다가, 生殺簿(생살부)를 펼쳐든 韓明澮(한명회)의 信號(신호)로 벌떼같이 달려든 洪允成(홍윤성)·具致寬(구치관)·柳洙(유수)等(등)의 鐵槌(철퇴)를 맞고 脈(맥)없이 죽어갔다. 이어서 吏曺判書(이조판서) 趙克寬(조극관), 右贊成(우찬성) 李穰(이양)等(등)이 次例(차례)로 한자리에서 쓸어져 죽고 말았다. 皇甫仁(황보인)이 官職(관직)에 나선지 40年, 領議政(영의정)에 오른지 2年만에 當(당)한 悲劇(비극)이었다.
皇甫仁(황보인)은 나이가 들고 자리가 높아지자 젊었을 때의 覇氣(패기)는 사라지고, 注意力(주의력)이 모자라는 好人(호인)으로 變(변)해 首陽大君(수양대군)側(측)의 謀議(모의)에 對處(대처)하는 能力(능력)이 모자라 瞬息間(순식간)에 當(당)해버린 셈 이었다. 이에 皇甫仁(황보인)의 집안은 完全(왕전)히 亡(망)해버렸다. 參判(참찬)으로 있던 長男(장남) 錫(석), 直長(직장)이던 次男(차남)欽(흠), 孫子(손자)들인 錫(석)의 아들 源·汶(원,문)은 밤새 逆敵(역적)의 핏줄이라는 陋名(누명)을 쓰고 목이 잘렸다. 다만 3男(남) 銀(은)은 女息(여식)이 없고 黃州(황주)로 避身(피신), 묵숨을 건졌다.
皇甫仁(황보인)의 큰며느리는 世宗(세종)의 사위 尹師老(윤사로)의 종으로, 둘째 며느리는 尹思允(윤사윤)의 종으로 보내져 집안이 風飛雹散(풍비박산) 돼버렸다. 皇甫仁(황보인)의 次男(차남) 欽(흠)의 외아들로 젖먹이湍(단)이 있었는데, 亂離痛(난리통)에 여종 丹良(단량)이 이 아이를 물동이에 숨겨 멀리 慶尙道(경상도) 九龍浦(구룡포) 땅끝 바닷가까지 避(피)해 달아나 숨어서 아이를 키워 그곳에 皇甫仁(황보인)의 後孫(후손)이 나오게하였다. 먼 훗날인 1746年 英祖(영조)22年 비로소 皇甫仁(황보인)의 陋名(누명)은 벗겨지고, 1758年 그에게 忠定公(충정공)으로 諡號(시호)가 내려졌다. 1791年皇甫仁(황보인)은 端宗(단종)의 무덤인 莊陵(장릉)의 忠臣壇(충신단)에 配享(배향)되고, 1804年純祖(순조)때 그가 살던 집앞에 旌門(정문)이 세워졌으며, 1807年에는 祖上(조상)의 墓(묘)를 옮기지 못하게 하는 不眺之典(부조지전))이 내려졌는데, 皇甫仁(황보인)의 墓(묘)는 京畿道(경기도) 坡州郡(파주군) 川縣面(천현면) 東門里(동문리) 桂月山(계월산)에 있다.
출처 歷史와 人物 [출처] 永川皇甫門(영천황보문) 皇甫仁(황보인):(?~1453)-(覇氣가 衰하여 失敗한 領議政)|작성자 풀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