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는 백성들이 동요할 것을 염려해 홀로 반란지로 들어갔다. 자신의 목숨보다는 나라를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나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을 겁내겠는가?" 박문수는 달아난 백성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다고 안심시키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 농사를 짓게 했다.
"너희들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죄를 묻지 않을테니 다시 돌아와 농사를 짓도록 하라."
"조정에 박문수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이 아마 그 일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영조의 경우에도 박문수가 자신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진심을 다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인정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정만조 교수(국민대 국사학과)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박문수는 분무공신(奮武公臣)에 책봉 되었다. 그리고 그해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됐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 경상도 관찰사 임명 교지(敎旨)
6 관찰사 박문수의 선택
'내가 문책을 당하는 것은 작은 문제요, 굶주린 백성을 구하는 것은 큰 문제다'
영일만. 관찰사 시절 박문수는 영일만에서 관이 떠내려오는 것을 목격한다. 바다를 덮을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 가재도구와 관이 바다를 덮을 정도로 떠내려와 연일과 모포 변에 쌓였다."
/ <박문수 연보>
박문수는 함경도 지역에 물난리가 나서 가재도구가 떠내려오고 있다고 직감했다.
"분명 관북 지방에 물난리가 났을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곡 3천석을 모두 배에 실어 보내도록 하여라."
"박문수 옆에 있던 관료들이 '조정의 명령도 없이 곡식을 보냈다가는 나중에 문책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했는데 박문수는 '내가 문책을 당하는 것은 작은 문제요, 굶주린 백성을 구하는 것은 큰 문제다'
이래서 미리 함경도에 쌀을 배에 실어 보냈습니다."
/ 정만조 교수(국민대 국사학과)
쌀을 실은 배가 도착하자 백성들은 크게 놀랐다. "북쪽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北人大驚-북인대경)"
박문수가 곡식을 보내준 덕분에 함경도 백성들은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박문수에 감사하는 비를 새기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새겨넣었다.
* 영남관찰사 박문수 북민감은비(北民感恩碑) 탁본 조정의 눈치만 보는 관리들 틈에서 박문수는 소신있는 선택과 처신으로 백성들을 구해냈다.
박문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할 말은 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야 마는 매우 강직한 성품의 인물이었다. 이런 강직한 성품으로 박문수는 백성들 편에 서고, 백성들을 구하는 입장에 섰다.
암행어사직을 마친 박문수는 이제 조정에 돌아와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게 된다.
7 양역(良役)의 혁파를 주장하는 박문수
"신이 양역(良役)의 혁파를 제안한 것은 전부를 줄이자고 한 것이지 한필만 감하고자 한 것이 아니며, 크게 변통하고자 한 것이지 조금만 바꾸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전하."
/ <영조실록 1750년 7월 3일>
조선 시대 백성들의 가장 큰 고통은 나날이 늘어나는 세금 징수였다. 전남 신안군. 세금 징수는 이제 육지를 벗어나 섬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신안 지역의 섬지역은 왕실에서 세금을 거둬가 백성들은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세금을 부과를 했을 때 한군데서만 거둬가면 농민들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처리되어야 하는데,
중앙 왕실에서 거둬가고, 지방 행정과 관련된 곳에서 또 거둬가고, 토지는 한정되어 있는데 여러곳 거둬감으로써
시간이 흐를수록 농민들의 부담이 배가 되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 최성환 국장(신안문화원)
16세~60세 양인 남자, 군역 대신 군포 납부. 16개월에 두 필은 큰 부담이었다.
토지세와 더불어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 시킨 것은 군역(軍役)이었다. 조선 시대 16세에서 60세 사이의 양인(양반, 중인, 상민) 남자들은 군역의 의무를 졌다. 즉 군포(軍布)를 내야 했다.
군포는 16개월에 두필을 냈는데 양반들은 내지 않고 일반 백성들에게만 부과되었다. 군포를 내지 못해 도망가는 백성들이 늘어만 갔다.
"두 필을 내는 것은 굉장한 부담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을 두 필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 농촌의 부녀자들이 짜야 했는데 농사는 언제 지을 것이며, 군포의 값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 이세영 교수(한신대 국사학과)
군포의 폐단은 갈수록 더해갔는데 당사자를 대신해 친척이나 이웃에게 거둬가거나(族徵, 隣徵-족징, 인징) 군역의 의무가 없는 어린아이에게나(黃口簽丁-황구첨정)
죽은 사람에게도(白骨徵布-백골징포) 징수하였다. 백성들은 부과된 군포를 내지 못하면 다른 재산으로라도 그만큼의 몫을 빼앗겼다. 이 때문에 남자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며 스스로 성기를 자르는 일(自割其陽-자할기양)도 일어났다.
그러나 백성이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수령이 처벌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조선 초기부터 존재했던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때문이었다. 법에 따르면 수령을 고소한 백성은 곤장 백대와 징역 3년에 처해졌다.
"관찰사. 수령을 고발하는 자는 모두 받아드리지 아니하고 장(杖, 곤장) 백대, 도(徒,징역) 3년에 처한다"
/ <경국대전(經國大典)"
"수령은 어떤 일을 행하든 백성들에게 고소를 당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시간이 지나면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은 억울한 일이 있어도 호소할 수가 없고 자연 수령들의 비리, 탐학 이런 행동이 자행될 수 있겠습니다."
/ 고석규 교수(목포대 역사문화학부)
박문수는 세금에 짓눌리고, 폭정에 시달리는 조선 백성들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군역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문수의 주장에 따라 조정에서도 몇 년간 논의가 계속 되었다.
마침내 영조는 군포를 두필에서 한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단행한다. "양포를 반으로 감한다(良布減半-양포감반)"
"신이 양역(良役)의 혁파를 제안한 것은 전부를 줄이자고 한 것이지, 한 필만 감하고자 한 것이 아니며, 크게 변통하고자 한 것이지 조금만 바꾸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전하."
/ <영조실록 1750년 7월 3일>
당장은 부담이 줄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부족한 군포는 백성들이 채워야 했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박문수는 '양반도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문수는 양반, 상놈 할 것없이 역에 대한 부담을 지자, 그 방법은 각 호(戶, 가구)마다 돈을 내자, 호전법을 시행하고, 그래도 부족하면 어염세로 충당을 하자고 주장합니다.
그러니 노론 입장에서는 양반과 상놈을 가르는 게 군역을 지느냐 지지 않느냐인데 군역을 없애자는 것은 양반과 상놈의 구별을 없애자는 것이고,
그것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없애자는 거 아니냐며 영조에게 대놓고 반발합니다."
/ 이욱 박사(한국학진흥원)
8 '소금장사꾼' 박문수, 민생 안정을 위해 소금을 만들다
박문수는 군포를 대신해 세수(稅收)를 보충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도 제시했다. 그중에 하나가 어장과 염전에 부과되는 어염세였다.
당시 어민들이 왕실이나 권세가에게 바치던 어염세를 국가 수입으로 돌리자는 것이었다.
조선 시대 미역이 많이 나기로 유명했다는 미역바위(울산시 북구 강동구). 박문수는 당시 개인 소유였던 미역바위를 모두 국가로 환수해 세수를 늘였다.
"세출이 전부 개인 가문에 돌아가기 때문에 국가적인 재정에 상당히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박문수 어사가 이곳을 방문해가지고 열두 개의 미역바위를 전부 국가로 환수했습니다."
/ 이수봉 명예교수(충북대 국어교육과)
양반과 일반 백성이 똑같이 세금을 내고 개인의 수입을 국가로 돌리자는 주장.당시 노론 대신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박문수에 대한 인신 공격이 끊이지 않았다.
"마음대로 망령되게 행동(徑情妄行-경정망행)"
"기질과 성정이 불과 같다(氣性如火-기성여화)"
노론에게 박문수는 제거해야 할 적이었다. "박문수가 국가를 위해 진심으로 노력한다,
몸과 마음을 바쳐서 전력한다 그런 것은 다 인정합니다. 그런 만큼 소론의 대표적인 인물이 박문수였거든요.
결국은 뱀을 잡으려면 뱀의 머리를 잘라야 하는 것처럼, 박문수는 소론의 머리에 해당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박문수를 제거하지 않으면 소론을 제거할 수 없고, 소론을 제거하지 않으면 노론 세상을 만들어 나갈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 정만조 교수(국민대 국사학과)
박문수는 결국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힌다.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받은 돈 수만 냥을 '횡령'했다는 죄목이었다.
"수만 냥을 싸서 서울로 보냈다."
노론들의 철저한 모략이었다.박문수는 이 거대한 벽 앞에서 홀로 싸우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박문수를 구해준 것은 결국 임금 영조였다.
영조는 박문수가 옥에 갇힌 지 한달여 만에 풀어주고 상소를 올린 홍계희를 파직시켰다.
이처럼 영조는 박문수가 위기에 몰린 때마다 박문수의 편에 섰다. 노론 집권 대신들에게 박문수는 그야말로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정치적으로도 소론 소수파의 한계를 안고 있었던 박문수는 늘 노론들의 끊임없는 모함과 공격에 시달려야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문수는 결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박문수가 제안한 또 한가지는 소금이었다.
박문수는 소금을 생산해서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금을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즘은 소금을 햇빛과 바다물에 증발시켜 쉽게 소금을 채취하지만
조선 시대엔 가마솥에서 열 시간 가까이 끓여서 소금을 얻을 수 있었다. 소나무도 베지 못하게 해 땔감을 구하기도 힘들었다(禁松-금송).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박문수는 직접 소금을 구웠다.
노론들은 박문수를 두고 '소금장사꾼'이라고 비난을 했지만, 박문수는 개의치 않았다.
"박문수를 비롯하여 네 명이 그 일을 했는데, 그중에 두 명이 죽습니다.그렇게 그 일이 힘듭니다.
일은 힘든 데 돌아오는 것은 욕이고, 모두 안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박문수는 잘합니다. 그냥 잘하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해서 6개월만에 3만 6천석의 소금을 생산하는데
그게 쌀로 환산하면 7만석이지요. 굉장한 효과입니다."
/ 이욱 박사(한국학진흥원)
박문수는 궁핍한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영조를 질책하는 말도 서슴치 않았다.
"백성은 궁핍하고 재물은 고갈되어 하나도 믿을만한 곳이 없으니 3백년 종사가 어찌 전하 때에 망하려는 조짐이 아니겠습니까!
국사를 물리치고 마음을 붙이려 하지 않으시니 장차 국가를 어떤 지경에 두려고 그러십니까!"
신하들은 박문수의 거친 말과 행동을 비난했지만, 영조는 박문수의 진심을 알았다.
박문수는 영조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신하였다. 그만큼 박문수는 국사에 중요한 일을 도맡아 했다.
<조선시대 길쌈하는 아낙> <국가 예산 낭비를 막기 위해 제정한 탁지정례 >
<度支定例(탁지정례)>를 편찬한 것도 박문수였다.
조정의 예산을 절약하기 위한 방책을 정리한 것인데 국가 재정의 용도와 규제 사항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탁지정례>가 완성된 후 영조는 또 한번 박문수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재정의 낭비를 막은 박문수의 공로를 크게 칭찬하며 손수 글을 써서 내렸다. "쓸데없는 비용을 크게 삭감했다"
9 영조의 두터운 신임은 무너지고... 박문수 역적의 누명을 쓰다!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박문수이며 박문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 <영조실록 1756. 4.26>
영조 31년(1755) 나주괘서사건.
나라를 비방하는 글이 나주 관아에 붙었다. 역모였다. 이를 주관한 것은 소론이었다.
그러나 역모의 실패로 소론들은 대거 숙청당한다. 이때 박문수도 역적으로 거론되었다. "박문수의 이름이 국문 초사에서 나왔다."
노론들은 이 기회에 박문수를 제거하고자 했다. "영조 31년, 을해옥사 당시에 박문수에 거기에 걸려듭니다. 박문수는 30여 년 영조를 섬겼고, 또 영조가 아꼈던 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어 영조 앞에서 심문을 당하는 이런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 정만조(국민대 국사학과)
영조마저 처음에는 박문수를 믿지 않았다. 박문수는 스스로 죄인임을 자초하여 세상과의 문을 닫아 걸었다. 그리고 역모 사건이 있은 지 일년후 박문수는 생을 마감한다.
영조는 박문수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안타까워 했다. 영조와 박문수는 임금과 신하를 떠나 서로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이였다.
"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박문수이며 박문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 <영조실록 1756. 4.26>
훗날 <영조실록>을 편찬한 노론조차도 박문수의 자질만큼은 높이 평가했다.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다(國事盡心-국사진심)" 살아 생전 승진에 관심이 없었던 박문수는 세상을 떠난 그날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영의정 추증 교지'
"아무리 조선 사회가 양반 사회라 하더라도,
'양반들도 어느 정도는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입장에 섰습니다.
그러니 일반 양반들에게 썩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 이욱 박사(한국학진흥원)
"평생 자신의 임무로 삼았던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국가를 바르게 경영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생 문제를 자기가 꼭 해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 정만조 교수(국민대 국사학과)
백성들이 원하고 기다렸던 암행어사. 박문수는 바로 백성들의 이상을 실현 시켜준 암행어사였다.
원칙과 소신, 강한 개혁의 의지로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던 박문수. 그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정치, 경제적으로 온갖 문제들이 불거져 나왔던 조선 후기. 사회적으로 부조리를 해결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졌던 암행어사는
분명 백성들에게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 희망의 대명사가 바로 박문수였다.
오직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 그 뜻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박문수. 그는 백성들이 원하고 기다리던 관리의 모습을 몸소 실현했다.
박문수. 우리가 그를 전설의 암행어사로 기억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훗날 <영조실록>을 편찬한 노론조차도 박문수의 자질만큼은 높이 평가했다.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다(國事盡心-국사진심)" 살아 생전 승진에 관심이 없었던 박문수는 세상을 떠난 그날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백성들이 원하고 기다렸던 암행어사. 박문수는 바로 백성들의 이상을 실현 시켜준 암행어사였다.
원칙과 소신, 강한 개혁의 의지로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던 박문수. 그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정치, 경제적으로 온갖 문제들이 불거져 나왔던 조선 후기. 사회적으로 부조리를 해결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졌던 암행어사는 분명 백성들에게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 희망의 대명사가 바로 박문수였다.
오직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 그 뜻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박문수. 그는 백성들이 원하고 기다리던 관리의 모습을 몸소 실현했다.
박문수.
우리가 그를, 전설의 암행어사로 기억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