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22:3) 찬송은 곡조 있는 기도라는 것을 절감하게 하였다. 지난 주 토요일 추수감사절의 기념 기도회에서 울려진 두 분 집사님의 솔로 곡들이 아직도 영혼의 심금에서 한 주간을 울리고 있다. 분명 성령의 임재를 초청하는 강력한 예배의 도화선이었음을 의심할 수 없었다. “주 날개 밑에 거하라”와“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의 가사를 음미하다가 곧 연관된 시편이 떠올라서 기도의 묵상에 잠겼다. 역시 다윗의 기도로 지어진 시 중에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시17:8)와 함께 묵상하였다. 고대 근동 아시아의 왕권 이데올로기는 왕의 보호 기능을 “왕의 그늘”로 표현한 것을 앗시리아의 궁중 편지에서 대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보호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을 전통적인 관념에 의해 표현된 구절이다. 성경에서는 기드온이 죽은 후 세겜에 있는 첩에서 낳은 아들인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들을 미혹하여 기드온의 아들 70명을 죽이고 스스로 세겜의 왕이 된 사건이 발생했다. 기드온의 아들 가운데 오직 요담만이 살아남았다. 요담이 아비멜렉이 세겜의 왕이 된 것을 듣고 세겜인들의 어리석음을 소위 “요담의 우화”(삿9:7-15)로 풍자하였다. 나무들이 자기를 다스릴 왕을 찾다가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로부터 왕의 추대를 거절 받고 마침내 가시나무를 왕으로 추대했고 가시나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권을 잡으면서 자기에게 대항하는 나무들을 협박하는 대목에서 바로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삿9:14)는 구절이 나온다. 가시나무는 다른 세 나무들이 풍성한 과실수인 것과 달리 봄의 한차례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 외에는 열매도 없고 가시가 많으며 꽃으로서의 가치도 없는 생산성이 없는 나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나무는 지키지도 못할 보호의 약속을 한 것이다. 실제로 제공할 그늘이 없는 가시나무이다. 요담은 이런 가시나무 제안의 어리석음을 빗대어 세겜인의 어리석음을 풍자하였다.
이런 묵상과 전혀 반대의 풍성한 은혜와 보호의 의미를 갖는 성경 구절을 묵상하였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아래 거하리로다”(시91:1)의 보호의 비밀을 감추어 놓은 유명한 시편 91편의 시이다 .예수님은 “은밀한 곳”을 마태복음6:6에서는 “기도의 골방”이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서 “거하다”는 히브리어로 “야사브”인데 “머무르거나 체류하다”의 뜻을 가진 단어이다. 중요한 영적 비밀은 은밀한 것이 간헐적인 것이 아니라 “생활 방식”이 되어 은밀한 곳을 성도들의 기도하는 거주지(dwell)로 삼아야 견고한 보호 장벽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구절에서 “거하리로다”의 히브리어는 “루운”이란 단어이다. 이 뜻은 “밤을 지새우다”이다.즉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기 위하여는 지속적으로 은밀한 곳에 나아가며 오늘도 내일도 지속적으로 머고 행해야 할 만나의 말씀이며 기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존하신 하나님은 “엘 엘리욘”으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엘 샷다이”로서 하나님의 존재(성품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호칭으로서 “성명 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서 한 구절로 표현 할 수 없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긍휼하심과 광대하심, 전능하심, 지존하심의 속성으로 존귀하신 하나님의 영으로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 성품을 그 이름에 담으신 자비하시고 긍흉하심의 속성이다. 법정 공판의 판결로 승리와 기쁨의 함성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다. 오랜 눈물과 기도의 응답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본질적으로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엡6:10). 사회법의 판결을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완고함으로 가득 찬 세력이다. 기도 외에는 이런 견고한 진을 허물 방법이 없다. 사회법을 내세워 공권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모든 명분은 우린 손안에 와있다. 진정 그간의 믿음의 행진들이 정작 시험을 받을 상황에 와 있다 진정한 싸움은 이제부터다. 집행부의 결정을 위해 다시금 전심전력으로 기도에 힘쓰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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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