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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타지마할 - 세계 7대 불가사의
1648년에 만들어져 현재는 우타르 프라데시 주(州) 아그라 교외
아그라 성(城)에서 동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인도의 타지마할이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이야기이다.
하지만 '왜'라고 물으면 조금 난감하다.
나 역시도 페루의 마추픽추,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포함하여
7개 항목을 줄줄 외울 수는 있어도
'왜 불가사의 한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에피소드를 포함하여 세 번째 인도 방문에서 비로소 알게 된
타지마할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매번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이것이 차곡차곡 더해져
감상의 재미가 깊어지는 것이 유적지의 가장 큰 매력인 듯하다.
당신이 모르는, 세계 7대 불가사의 '타지마할'의 스토리로 빠져보자!
타지마할(문자 그대로 "궁전의 왕관")은 인도 우타르 프라데시주 아그라의
야무나 강 오른쪽 둑에 있는 상아색 대리석 영묘입니다.
이 건물은 1631년 제5대 무굴 황제 샤 자한(재위 1628-1658)이
사랑하는 아내 뭄타즈의 마할 무덤을 수용하도록 의뢰했습니다.
샤 자한 자신의 무덤도 있습니다.
무덤은 모스크와 게스트 하우스를 포함하는 42에이커(17헥타르) 단지의 중앙 장식품으로
삼면이 총안 모양의 벽으로 둘러싸인 정식 정원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영묘의 건설은 기본적으로 1643년에 완료되었지만
프로젝트의 다른 단계에 대한 작업은 그 후 10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타지마할 단지는 1653년에 완전히 완공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비용은 약 3,200만 루피로 추정되었으며 2020년에는 약 300억 루피에 달할 것입니다.
이 건설 프로젝트에는 황제의 궁정 건축가 Ustad Ahmad Lahori가 이끄는 건축가 위원회.
Taj에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반영하기 위해 다양한 유형의 기호가 사용됩니다.
타지마할은 1983년 유네스코에 의해 "인도 이슬람 예술의 왕관 보석이자
세계 문화 유산에서 가장 널리 존경받는 걸작 중 하나"로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무굴 건축의 가장 훌륭한 예이자 인도의 풍부한 역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고 있습니다.
타지마할은 매년 6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을 맞이하며
2007년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2000-2007) 이니셔티브의 우승자로 선정되었습니다.
Abdul Hamid Lahori는 1636년 그의 Padshahnama 책에서
Taj Mahal을 "Rawza y Munawala"(페르소아랍어: روسه منواره, rawdah-i munawwarah)로 언급합니다.
빛나고 영광스러운 무덤을 의미합니다. Taj Mahal의 현재 이름은 우르두어에서 유래했으며
페르시아어와 아랍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여겨지며 Taj Mahal은 "왕관"(tāj)과 "궁전"(mahall)을 의미합니다.
"Taj"라는 이름은 "Mumtaz"의 두 번째 음절이 변형된 것입니다.
Taj Mahal은 많은 관광객을 매료시킵니다.
유네스코는 2001년에 200만 명이 넘는 방문객을 기록했으며
2014년에는 약 700만~800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10월, 11월, 2월의 선선한 계절에 방문합니다.
단지 주변은 공해 차량 통행이 금지되어 있으며,
관광객들은 주차장에서 도보로 이동하거나 전기버스를 이용해야 합니다.
Kawasplas(North Courtyard)는 현재 새로운 방문자 센터로 사용하기 위해 복원되고 있습니다.
2019년에는 오버투어리즘을 방지하기 위해 3시간 이상 체류하는 방문객에게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Taj Ganj 또는 Mumtazabad로 알려진 Taj 남쪽의 작은 마을은 원래 캐러밴세라이,
바자 및 시장이 있는 기관으로 지어졌습니다.
방문객과 근로자의 요구. Taj Mahal은 종종 추천 여행지 목록에 등장합니다.
타지마할은 또한 최근 발표된 최신 여론 조사인 '새로운 세계 7대 불가사의'를 포함하여
현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여러 목록에 포함되어 1억 표를 모았습니다.
구내는 2006년부터 개방되었습니다. 평일: 00-19:00.
그러나 단지는 금요일 12:00부터 14:00까지 모스크에서 기도를 위해 열려 있습니다.
금요일과 라마단 기간을 제외한 보름달과 그 전후 2일에는 야간 관람이 가능합니다.
외국 고위 인사들은 인도를 여행할 때 종종 타지마할을 방문합니다.
사이트를 방문한 주목할만한 사람들은
Dwight Eisenhower, Jacqueline Kennedy, Jimmy Carter, George H.W. 부시,
조지 해리슨, 블라디미르 푸틴, 다이애나 왕세자비, 도널드 트럼프,
저스틴 트뤼도, 찰스 왕세자, 엘리자베스 여왕, 필립 왕자 등.
우리나라의 김정숙여사도 혼자서 방문한 바 있습니다
인도 시민의 입장료는 상당히 낮고
외국인의 입장료는 높은 3단계 요금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2022년 현재 요금은 인도 시민의 경우 1인당 50루피(1천원),
SAARC 및 BIMSTEC 국가 국민의 경우 540루피(1만8백원),
기타 외국인 관광객의 경우 1,100루피(2만2천원)입니다.
인도가치로는 큰 금액으로 생수 한병과 신발 덧신 한켤레를 줍니다.
타지마할 가까이 올라갈 때 반드시 덧신을 신발 위에 신어야 하기 때문에
잘 보관했다가 이때 사용하면 됩니다.
타지마할 -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인도 무굴제국의 대표적 이슬람 건축
1983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인도의 대표적 이슬람 건축이다.
타지마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 중의 하나이다. 엄청난 건축비용이 들었지만,
이 하얀 대리석의 웅장한 사원은 한 여인을 향한 한 남자의 간절한 기념비가 되었다.
타지마할은 1631년 샤 자한이 같은 해 6월 17일
14번째 아이인 가와라 베굼을 낳다가 사망한 아내 뭄타즈 마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습니다.
건축은 그의 1632년에 시작되었고 영묘는 그의 1648년에 완공되었으며
주변 건물과 정원은 그로부터 5년 후에 완공되었습니다.
Mumtaz Mahal의 죽음 이후 Shah Jahan의 슬픔에 대한 연대기인
The Court는 Taj Mahal에 영감을 준 사랑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현대 역사가 Muhammad Amin Qazvini, Abdul Hamid Lahori 및 Muhammad Saleh Kambo에 따르면
그는 평생 동안 그녀에게 보여준 애정 수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슬픔으로 인해 그는 일주일 동안 왕실 행사를 피했고
2년 동안 음악을 듣지 않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샤 자한은 라자 자이 싱의 저택이 서 있는 아그라 남쪽 땅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습니다.
이 장소는 뭄타즈의 무덤 건설을 위해 샤 자한에 의해 선택되었고
자이 싱은 그것을 황제에게 기부하기로 동의했습니다.
◈ 타지 마할(Taj Mahal) 사원의 전설이야기,
무굴제국황제 샤자한과 뭄타즈 마할의 무덤
세계에서도 그 비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궁전을 꼽자면 타지 마할(Taj Mahal : 세계문화유산, 1983)
궁전을 꼽을 수가 있는데, 타지 마할은 인도가 남겨놓은 최고로 아름다운 문화적 건축물이라고 칭송받는 궁전으로서,
지금도 전세계의 수많은 관광객들이 타지 마할의 그 아름다운 균형미를 감상하기 위해서 방문하고 있는 중이다.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궁전 '타지 마할'은 말이 궁전이지, 원래 인도 무굴제국의 황제가
자신의 부인이 죽은 것을 비통해 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추도하기 위한 분묘로서 건축한 것이다.
즉, 타지 마할 궁전은 죽은 황후 뭄타즈 마할의 묘비궁전인 셈이다.
세계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궁전묘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판타지한 일이지만
그만큼 황제 샤자한이 죽은 왕비 뭄타즈 마할을 끔찍히도 사랑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타지 마할은 무굴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이 지시로 만들어진 자신의 부인 뭄타즈 마할의 묘역으로
뭄타즈 마할이 죽은 지 6개월 후부터 건설을 시작해서,
22년 동안이나 계속된 축조과정을 통해서 완성했던 무덤사원이다.
그런데 타지 마할의 완공에는 매우 슬프고 잔혹한 사연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었던 타지 마할의 저주 이야기가 그것이다.
무굴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자신의 사랑스런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궁전묘 타지 마할을 건축했다는 것은 내심 이해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우리나라의 고려의 공민왕이 자신의 총애하는 부인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거대한 노국대장 신전을 지으려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으로,
그만큼 끔찍히 사랑했던 부인을 잃어버린 비통함과 애절함이 컸기 때문일 것으로
오히려 그 커다란 사랑의 마음을 높이 살 만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무굴제국의 황제 샤자한이 타지 마할을 건축하기 위해서 소요되는 엄청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었다는 것과 타지 마할 건축에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착취했다는 점과
무려 22년이라는 엄청난 긴 시간을 들여서 무리해서 공사를 벌였다는 점이다.
샤 자한이 거대한 건축물 타지 마할을 건축하기 위해서 전국에서 엄청난 세금을 무리하게 징발했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을 도탄에 빠뜨리게 했고, 이로써 백성들의 커다란 원성을 사기도 했다.
황제 샤 자한은 원래 무굴제국을 번영과 안정으로 이끌었던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런데 샤자한은 그의 총애하는 아내 뭄타즈 마할이 죽은 뒤로부터 이상하고 괴팍한 성격으로 변해갔다.
황제 샤 자한은 자신의 세 번째 부인인 뭄타즈 마할을 아주 끔찍하게 사랑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샤자한이 그렇게도 총애했던 부인 뭄타즈 마할이 샤자한의 아이를 임신하였고
아이를 출산하다가 39세의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도 사망했다.
샤 자한은 자신이 가장 총애했던 부인 뭄타즈 마할을 잃고서 비통한 슬픔속에 빠져 지내다가,
그녀를 추도할 수 있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묘역건설을 구상하게 된다.
이때 사쟈한이 뭄타즈 마할을 추도하기 위해서 구상했던 궁전묘가 바로 '타지마할'이다.
황제 샤 자한은 죽은 뭄타즈 마할을 위해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묘지를 짓도록 지시했고,
이탈리아, 프랑스, 이란 등 세계 전역에서 뛰어난 건축가와 전문 기술자들을 불러모았고,
기능공 2만 명을 동원해서 22년 동안 대역사를 벌인 끝에 타지 마할을 완공시켰다.
최고급 대리석으로 타지 마할의 외벽을 장식했고, 타지 마할 궁전의 벽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서
터키, 티벳, 이집트, 중국등 세계 곳곳에서 값진 보석들을 엄청난 물량으로 수입했다고 한다.
이렇게 엄청난 물량과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 타지 마할이 완공되고 나서, 탐욕에 눈이 먼 황제 샤자한은
건축에 참여했던 건축가와 기술자들에게 결코 해서는 안될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타지 마할을 완성한 직후 황제 샤자한은 타지마할 건축을 설계했던
제로니모 베로네오를 비롯한 수십명의 기술자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황제 샤 자한은 자신의 평생의 숙원이었던 타지 마할을 완공시키는 데에 큰 기여를 했던
뛰어난 건축가와 기술자들에게 상을 내리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목숨을 빼앗아버린 것이다.
황제 샤 자한이 자신의 평생 소원이었던 타지 마할을 완성시킨 이들 건축 기술자들을
모두 처형한 이유는 무엇일까? 완성된 타지 마할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일까? 결코 아니다.
샤 자한은 완성된 타지 마할을 보고 무척 아름다운 궁전이라고 극찬하면서 만족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황제 샤 자한이 이들 기술자들을 모두 죽인 이유는
다시는 이와같이 아름다운 궁전을 더 이상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즉,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인 타지 마할보다 더 아름다운 궁전이
또다시 만들어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수십 명의 기술자들을 모조리 죽였던 것이다.
황제 샤 자한의 아름다운 궁전에 대한 지나친 욕심 때문에,
죄도 없는 수십 명의 건축 기술자들이 억울하게도 목숨을 잃게된 것이다.
또한 황제 샤 자한은 타지 마할 건축에 동원되었던 2만 명의 인부들에게도 처참한 짓을 했는데,
2만 명의 인부들 모두의 오른손목을 잘라버렸다고 한다.
황제 샤 자한은 자신의 부인의 궁전묘 타지 마할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원으로 남게 하기 위해서,
죄없는 수십 명의 기술자들을 죽이고, 2만 명의 인부들의 오른손을 잘라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같은 내용은 하버드대학의 건축학과 교수인 에바 코흐가 집필한 책 '완전한 타지 마할'에 나온 내용이다.
오랫동안 인도를 돌아다니면서, 타지 마할에 관한 연구조사를 벌였던 에바 코흐는
황제 샤자한이 타지마할의 건축에 동원된 기술자들과 인부들을 죽이거나,
불구자로 만든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많은 기술자들은
죽는 순간에 샤 자한과 무굴제국에 저주를 퍼부으면서 죽어갔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피를 뿌리면서 타지 마할을 완공시킨 후, 4년 뒤인 1658년
놀랍게도 샤 자한의 아들 아우랑제브가 갑자기 유혈쿠테타를 일으켰고,
쿠테타로 정권을 잡는데 성공한 아우랑제브는 자신의 친아버지인 샤 자한을
왕위에서 끌어내린 후에 아그랑성에 감금시켜 버린다.
자신의 친아들에 의해서 왕위에 쫒겨나고 아그랑성에 감금된 샤자한은 8년 뒤에 감옥에서 사망하고 만다.
이와같은 샤 자한의 비극을 놓고, 많은 사람들은 타지마할의 저주라고 불렀다고 한다.
황제 샤 자한이 타지 마할을 완공시켰던 충성스러운 뛰어난 수십 명의 기술자들을 무참히도 살해했는데,
그 당시 억울하게 죽어간 기술자들의 원혼들이 나타나서, 샤자한과 무굴제국에 저주로 앙갚음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타지 마할의 저주'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는데,
새롭게 황제로 등극한 샤자한의 아들 아우랑제브는 집권한 후에
비이슬람교도에게 인두세를 거두려는 정책을 실시하자, 반대파에 의해서 암살당하고 만다.
이렇게 샤 자한과 아우랑제브 모두 죽고 난 후, 무굴제국이 다스리는 인도지역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고, 무굴제국은 여러개의 나라들로 분열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후에는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나라 자체가 없어져버리고 만다.
샤 자한의 집권초기까지만 해도 번영과 안정을 구가했던 무굴제국이
이렇게 삽기간에 붕괴되어 버린 것도 바로 '타지마할의 저주' 때문이라고 한다.
17세기 초반까지 그렇게 번성했던 무굴제국이 이렇게 삽시간에 붕괴되고 몰락의 길을 간 것이,
타지 마할 완공 후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수많은 원혼들의 저주 때문이라는
하버드대학의 에바 코흐교수는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인도의 역사기록물에는 황제 샤 자한이 타지 마할 기술자들을 죽였다는 기록이나
인부들을 불구로 만들었다는 기록들은 전혀 없다고 한다.
단지 무굴제국이 존재했던 일부지역에는 이같은 타지 마할의 참변이
전설이나 민담으로 전혀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샤 자한이 기술자들을 무참히 살해했다는
에바 코흐교수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고 전설로서 치부해 버렸다.
그런데 2011년 파키스탄지역의 닐라 굼바드지역에서 한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이 굼바드지역은 과거 무굴제국의 영토였다고 한다.
이 무덤을 파키스탄 고고학자들이 정밀조사를 벌인 결과, 무굴제국시대에 지어진 무덤으로 밝혀졌고,
무덤의 주인은 놀랍게도 제로니모 베로네오(Geronimo Veroneo)였는데,
그는 샤 자한의 지시에 따라서 타지 마할 사원을 총설계했던 건축책임자였다.
이 제로니모 베로네오의 시신에 많은 외상의 흔적들이 발견되었는데,
제로니모 베로네오는 타지 마할 사원의 건축을 완공한 후에,
타인으로부터 죽임을 당했던 것이 조사결과,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즉, 파키스탄지역에서 발굴된 타지 마할의 설계자 제로니모 베로네오의 시신분석을 통해서,
그가 황제 샤 자한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이 사실로써 입증된 셈이다.
결국 옛 무굴제국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인 타지 마할을 설계하고 건축했던
뛰어난 기술자들이 악덕군주 샤 자한에 의해서 집단으로 몰살을 당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으로 유명한 타지 마할은 수십 명의 기술자들의 희생과
2만 명의 불구자를 양산하고 만 슬픈 역사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럼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기술자들의 저주로 인해서, 무굴제국이 분열되고
멸망의 길로 빠지게 되었다는 에바 코흐교수의 주장도 사실이었을까?
자신의 부인을 사랑하는 데에는 모든 것을 바쳤지만,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인색했던 황제 샤 자한,
부인 만큼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컸더라면 후대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타지 마할을 완성한
존경받는 훌륭한 군주로 남을 수도 있었는데, 그의 이기적이고 편협한 사랑 때문에
백성들을 희생시킨 너무도 안타까운 군주였다.
사진과 함께 읽는 타지마할(Taj Mahal)의 사랑이야기
1. 타지마할은 왜 만들어 졌는가?
2. 샤 자한 왕은 한 번도 타지마할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3. 타지마할은 왜 세계 7대 불가사의인가?
4. 숨겨진 감상 Point
Cecilia - Love of a Silent Moon
1. 타지마할은 왜 만들어 졌는가?
타지마할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뽑는 이유는
아름다운 외관에 애틋한 배경 설화가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외모에 이끌려 만났는데 알고 보니 마음마저 착한 격!
무굴 제국의 5대 황제였던 샤 자한(Shah Jahan)이 가장 사랑했던 세 번째 부인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은 15번째 아이를 낳다 죽고 말았다.
39세의 젊고 아름다운 나이였기 때문에
왕은 며칠 만에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로 큰 슬픔에 빠졌다.
뭄타즈 마할은 정략결혼이나 부모의 소개가 아닌,
연애로 맞이한 부인이었기 때문에
유독 그녀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다고 한다.
뭄타즈 마할
뭄타즈 마할, 본명: 아르주만드 바누로, 샤 자한의 아내이다.
그녀는 누르 자한의 오빠 아불하산 아사프 칸의 딸이다.
뭄타즈 마할이라는 경칭은 샤 자한이 무굴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후에 수여 받은 것이다.
출생: 1593년 4월 27일, 인도 아그라
사망 정보: 1631년 6월 17일, 인도 Burhanpur
묘지: 인도 아그라 타지 마할
자녀: 아우랑제브, 자하나라 베굼, 다라 시코흐, 로샤나라 베굼,
배우자: 샤 자한 (1612년–1631년)
부모: 아불 하산 아사프 칸, Plondregi Begum
손주: 바하두르 샤 1세, 무하마드 아잠 샤, Zeb-un-Nissa,
상심한 왕은 부인만큼 아름다운 건축물을 그녀와 연애할 동안
자주 만났던 곳에 지어 평생 추모하기로 결심한다.
1631년부터 이탈리아, 이란, 프랑스, 터키 등
세계 각국의 기술자와 건축가 2만 명을 동원하였다.
야무나 강을 뒤로 눈부신 백색의 대리석으로 본관을 짓고
건물 외관을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을 하였다.
타지마할(Tajmahal)이란 '마할의 왕관’이라는 뜻을 가지며,
무굴제국 황제 샤 자한(Shah Jahan)은 17년 동안 14명의 아이를 낳고
15명째 아이를 낳다가 1629년 사망한 그의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
(Mumtaz Mahal)을 위하여 1631년부터 짓기 시작해서 1653년에 완공을 보았다.
사원은 좌우 대칭의 총 대리석으로 높이 5.5m, 종횡 94m의 기단상의 중앙에는
높이 58m의 사당, 四遇에는 높이 42m의 첨탑이 세워져 있다.
1631년부터 18년 동안 국고를 탕진해 가며 완성하였고,
온갖 재보(財寶)와 미술/공예품을 한데 모아놓았다.
Taj Mahal은 Indo-Islamic 및 초기 Mughal 건축의 전통적인 디자인을 통합하고 확장합니다.
구체적인 영감으로는 Guri Amir(사마르칸트 무굴 왕조의 창시자인 Timur의 무덤)와
Charbag Gardens 및 그 부지의 Husht Behesht(건축) 계획에 영감을 준 성공적인 Humayun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것은 Timurid와 Mughal Empires의 건축에서 나옵니다.
Itmad-ud-Daula(Baby Taj라고도 함)의 무덤과 델리에 있는 Shah Jahan 자신의 Jama Masjid.
초기 Mughal 건물은 주로 붉은 사암으로 지어졌지만 Shah Jahan은
준보석이 박힌 흰색 대리석의 사용을 권장했습니다.
그의 후원 아래 건물은 새로운 수준의 정교함에 도달했습니다.
무덤은 전체 Taj Mahal 단지의 중심입니다.
정사각형 주추 위에 있는 커다란 흰색 대리석 구조로,
큰 돔과 끝이 있는 이완(아치형 출입구)이 있는 대칭 건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Mughal 무덤과 마찬가지로 기본 요소는 Indo-Islamic 기원입니다.
기본 구조는 각각 약 55m(180피트) 길이의 4개의 길이가 있는 고르지 않은
8면 구조를 형성하는 모따기된 모서리가 있는 대형 다중 챔버 큐브입니다.
옆. iwan의 각 측면은 거대한 피스타크 또는 아치형 아치로 둘러싸여 있으며
양쪽에 비슷한 모양의 아치형 발코니가 두 개 쌓여 있습니다.
쌓인 피스타크의 모티프는 모따기된 모서리에 재현되어
건물의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대칭적인 디자인을 만듭니다.
4개의 첨탑이 무덤을 둘러싸고 있으며,
받침대의 각 모서리에 하나씩 모따기된 모서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메인 룸에는 Mumtaz Mahal과 Shah Jahan의 가짜 석관이 있습니다.
실제 무덤은 지하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가장 멋진 특징은 무덤 위의 대리석 돔입니다.
돔의 높이는 약 35미터(115피트)로 베이스 길이와 거의 비슷하며
그 위에 약 7미터(23피트) 높이의 원통형 "드럼"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모양 때문에 이 돔은 종종 양파 돔 또는 Amrud(구아바 돔)라고 불립니다.
윗부분은 연꽃무늬로 장식하여 높이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돔의 모양은 모서리에 배치된 4개의 작은 돔형 차트리스(가게)로 강조되어
메인 돔의 양파 모양을 재현합니다.
돔은 약간 비대칭입니다.
기둥 모양의 바닥은 무덤의 지붕을 통해 열려 내부에 빛을 제공합니다.
높은 장식 첨탑(guldasta)은 돔의 높이를 시각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하단 벽의 가장자리에서 확장됩니다.
연꽃 모티프는 chatrices와 gurudasthas 모두에서 반복됩니다.
돔과 채트리스는 전통적인 페르시아와 힌두스타니 장식 요소를 결합한 황금 장식으로 덮여 있습니다.
주요 장식은 원래 금으로 만들어졌으나 19세기 초에 금도금 청동으로 만든 복제품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 기능은 전통적인 페르시아와 힌두교 장식 요소의 통합에 대한 명확한 예를 제공합니다.
피니알은 전형적인 이슬람 모티프인 하늘을 향해 뿔이 뻗은 달이 꼭대기에 있습니다.
각각 높이가 40미터(130피트)가 넘는 첨탑은 대칭에 대한 디자이너의 성향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기능하는 첨탑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이것은 모스크의 전통적인 요소이며
무아딘이 무슬림 추종자들을 기도에 부르기 위해 사용합니다.
각 첨탑은 타워를 둘러싸고 있는 두 개의 기능적인 발코니에 의해
세 개의 동일한 부분으로 효과적으로 나뉩니다.
탑 꼭대기에는 무덤의 디자인을 반영하는 차트리가 있는 마지막 발코니가 있습니다.
chatrices는 모두 동일한 장식 요소를 공유합니다. 황금색 끝을 얹은 연꽃 디자인입니다.
미나렛은 당시의 많은 고층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붕괴 시
탑 재료가 무덤에서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 주추 바깥쪽에 지어졌습니다.
인도 아그라 교외의 야무나 강(줌나 강) 남쪽 연안에 있는 타지마할 영묘(마우솔레움).
북쪽에 야무나 강이 흐르고...좌, 우에 모스크와 그 밖으로 성벽이 있다.
타지마할 영묘 앞 정원 한 가운데에는 긴 수로가 만들어져 있다.
영묘의 동서 양쪽에는 완전 대칭을 이루는 2개의 건물이 붙어 있는데,
서쪽(오른쪽)에 있는 것은 모스크이며
동쪽(왼쪽)의 것은 미학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세운 이른바 '자와브'이다.
타지 마할은
인도, 페르시아, 중앙 아시아 등지에서 온 건축가들의
공동 설계에 따라 1631년경에 착공되었다.
오스만투르크제국 최고의 모스크 전문 건축가 우스타드 라호리가 초빙되었고,
아지메르 지방에서 최고급의 흰 대리석들이 재단되어 속속 아그라로 도착되었다.
인도 전역에서 내노라하는 조각가들이 불려졌고,
이탈리아와 터키, 심지어 남미산 유색 대리석과 오닉스가 수입되었으며,
루비와 사파이어, 그리고 옥이 중국과 아라비아 등지에서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매일 2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1643년경에 영묘가 완공되었고,
1649년경에는 모스크·성벽·통로 등 부속건물이 완공되었다.
타지 마할 전체가 완공되기까지는 22년의 세월과 4,000만 루피의 비용이 들었다.
▲ 타지마할 영묘로 출입하는 문
타지마할은 남문 동문 서문 모두 3개의 문이 있다.
소지품을 보관할수 있는곳은 남문에만 있어 남문으로 입장.
카메라 물 여권 지갑 이외 모든 소지품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검문도 공항보다 더 까다롭다.
남쪽 구역은
타지 마할로 들어가는 사암 출입구와 거기에 딸린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 구역은 야무나 강가까지 뻗어 있고 거기에 영묘가 있다.
▲ 300m에 달하는 본관 앞의 정원
타지마할 전체가 완공되기까지는 22년의 세월과 4,000만 루피의 비용이 들었다.
이 복합 건물은 너비 580m, 길이 350m인 직4각형으로, 남북으로 늘어서 있다.
22년간의 긴 공사 끝에 78m의 높이에 달하는 신비로운 팔각 건물이 완성되었다.
이후 다시는 이런 건물을 만들 수 없도록 기술자들의 손가락을 잘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왕은 이 건물을 보자 부인의 이름인 '타지마할!'을 나지막이 외쳤고,
이로써 왕비의 이름이 건물의 이름이 되었다.
타지마할은 인도, 페르시아, 중앙 아시아 등지에서 온 건축가들의 공동 설계에 따라
1632년경에 착공되었고 1643년경에 영묘가 완공되었고 1649년경에 부속건물이 완공되었다.
2. 샤 자한 왕은 한 번도 타지마할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8년간이나 유폐되어 죽기까지 뭄타지마할을 그리워 했을 샤자한이 머물렀던
바로 그 아그라성의 창틀을 통해 아련히 바라다보이는 타지마할
22년간 타지마할의 완공을 누구보다도 애타게 기다렸을 샤 자한 왕은
평생을 두고 단 한 번도 타지마할에 들어가지 않았다.
죽은 부인 생각에 너무도 침통해서일까?
슬프게도 샤 자한 왕은
자신의 친아들 아우랑제브(Aurangzeb)가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황제로 등극하는 난을 일으켜 생의 마지막 8년을 유폐된 채 보낸다.
무굴제국…타지마할의 저주
아틀라스뉴스 김현민 기자
2023.01.11
5대 샤자한이 황후를 위해 만든 무덤…아들에게 강제 퇴위후 아내 곁에 묻혀
인도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관광명소가 타지마할이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무굴왕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순백색의 대리석으로 장엄하게 꾸며졌으며, 입구엔 수로가 조성되었고, 좌우 대칭의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한다.
궁전인줄 착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무덤이다.
무굴제국의 제5대 황제 샤자한(Shah Jahan)이 황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을 추모해 만들었다.
건축기간만 22년이 걸려 1648년에 완공되었다.
무굴제국은 물론 이탈리아, 프랑스, 투르크, 페르시아의 외국 건축가와 기술자들이 불려오고,
기능공 2만명이 동원되었다. 최고급 대리석과과 붉은 사암은 인도에서 조달되었고,
궁전 내부를 장식한 보석은 이집트, 중국, 티베트, 투르크, 미얀마 등 세계 각지에서 수입되었다.
이 무덤은 사랑의 금자탑으로 알려져 있다.
황제가 사랑하는 황후의 영생을 기려 만든 사후의 집이다.
황후가 그 집에 먼저 들어가고 황제는 나중에 들어갔다. 살아서의 사랑이 죽어서 이어졌다.
인도의 윤회 철학을 이슬람 묘지에 실현한 것이다.
하지만 무덤을 만들어준 샤자한의 인생은 동화 속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는 냉혹하고 잔인했으며, 그의 인생도 비참했다.
그는 부인 뭄바즈 마할이 죽은 후 타지마할의 저주에 휩싸여 말년을 보냈다.
샤자한의 왕자 시절 이름은 쿠람(Khurram)이었다.
10대였을 때 아그라 궁궐에서 열리는 축제에서 아주만드 바누라는 한 살 아래 소녀를 만나 첫눈에 반했다.
그의 아버지는 황후 누르자한의 오빠 아사프 칸으로 무굴의 실세 장군이었다. 일석이조였다.
예쁜 여자와 결혼도 하고 장인의 힘을 이용할수 있는 기회였다.
스무살이 되던 해 쿠람은 이 소녀와 결혼했는데, 그녀가 뭄타즈 마할이다.
쿠람 왕자는 권력욕이 강했다. 그의 뒤에는 장인이 든든하게 버텼다.
그는 경쟁자인 형 쿠스라우 왕자를 살해했다.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용서를 빌고 목숨을 건졌다.
아버지 자한기르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왕자의 난이 격화되었다.
황후는 샤르야르 왕자를 밀었는데, 황후의 오빠 아사프는 사위 쿠람을 밀었다.
자한기르가 사망하자 샤르야르가 황제에 올랐으나 장인이 황제 즉위를 보류시키고
사위가 수도로 올라오길 기다렸다.
쿠람은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들어와 무력으로 황제 자리를 차지했다.
황제가 된 후 쿠람은 경쟁자였던 동생 샤르야르 왕자의 눈을 멀게 해 감옥에 가두고
형과 동생, 삼촌, 조카들을 모조리 죽였다. 아버지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했던 계모 누르자한을 유배보냈다.
그러던 쿠람이 황제에 오른 시기는 1628년 36살이었다.
샤자한은 황후를 끔찍이 사랑했다. 둘 사이에 자식이 열넷으로, 아들 여덟, 딸 여섯이었다.
그는 전쟁터에도 아내를 데리고 다녔다.
즉위한지 3년째 되던 1631년, 샤자한은 데칸고원으로 원정길에 나섰다.
뜨거운 여름, 데칸의 천막은 숨도 쉬기 어려웠다. 황후는 열네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딸을 낳았다. 하지만 황후는 산후후유증으로 죽음을 맞았다. 나이 38세였다.
아내를 잃은 샤자한은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전쟁을 중단하고 회군했다.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다.
뭄타즈 마할은 죽기전에 자기를 기억하기 위해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달라는 했다.
샤자한은 아내의 시신을 수도 아그라로 가져와 야무나 강가에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었다.
그는 무덤의 이름을 “선택된 자의 거처”라는 뜻으로 타지마할(Taj Mahal)이라고 했다.
샤자한 시기의 무굴제국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화려한 무덤을 짓기 위해 막대한 국가재정이 투입되었다.
당시 돈으로 500만 루피나 소요되었는데,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0억 달러에 이른다.
이 정도는 무굴 제국에 큰 돈이 아니었다.
당시 유럽은 처참한 30년 전쟁(1618~1648)의 와중에 있었다.
유럽 각국이 인도산 화약을 사가는 바람에 돈이 흘러 넘쳤다.
중국은 명청 교체의 혼란한 시기였다.
타지마할은 당대 최고의 국력을 보유한 무굴제국의 상징이 되었다.
샤자한은 수도를 아그라에서 델리로 옮겼다. 아그라는 도시가 팽창해 길이 비좁았다.
인구가 팽창해 황제가 코끼리를 타고 장엄한 행렬을 펼칠수 없었다.
델리는 무굴제국에 앞서 300년간 다섯 술탄국의 수도였다.
황제는 구도시를 개조해 신도시로 만들었다.
수도 이전은 1638년에 발표되어 10년간 공사를 했다.
1648년 공사를 마쳤을 때 델리는 세계적인 도시가 되었다.
당시 인구 20만이 넘는 도시가 인도에만 9개나 되었는데, 유럽에는 3개에 불과했다.
델리는 1857년 무굴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200년간 수도로서 역할을 다했다.
샤자한의 가장 큰 걱정은 사랑의 씨앗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었다.
황제의 자리는 하나인데 황제가 되려는 아들은 많았다.
딸들도 아버지의 애정을 독차지하려고 서로를 견제했다.
무굴제국엔 장자계승이란 원칙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도 형제 싸움에서 승리해 황제가 되었기에
그는 아들이 더 크기 전에 교통정리를 해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일찌감치 자신의 후계자로 장자인 다라시코(Dara Shikoh)를 지정했다.
다른 아들들이 아버지의 방침에 반발했다.
반발한 아들은 샤슈자, 아우랑제브, 무라드였다. 왕위계승전에 4파전이 벌어진 것이다.
딸들도 편이 갈렸다.
죽은 어머니를 대신해 왕실 일을 보던 자하나라는 다라시코의 편이었다.
둘째 딸 로샤나라는 아버지가 언니만 이뻐하는 것에 질투를 느끼고 야심만만한 아우랑제브를 지지했다.
아버지 샤자한은 아들 가운데 아우랑제브를 가장 싫어 했다.
그는 자신이 죽기 전에 아우랑제부를 제거할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다라시코와 짜고 아우랑제브에게 편지를 보내 델리로 오라고 했다.
셋째 아들이 수도로 오면 감옥에 가두고 죽일 생각이었다.
이 음모를 로샤나라가 알아채고 아우랑제브에게 델리로 오지 말라고 일러주었다.
다라시코는 증조할아버지 악바르를 닮아 모든 종교에 관용을 베풀자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이슬람과 힌두교의 공통점에 관심을 가졌고 종교적 화해를 역설했다.
정통 무슬림들은 황태자의 종교적 견해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아우랑제브는 독실한 무슬림이었다.
그는 힌두교를 비롯해 이교도들이 제국 내에 번성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이런 종교적 갈등이 형제간 권력투쟁을 부채질했다.
1658년 샤자한이 병이 들어 맏아들 다라시코에게 섭정을 맡겼다.
그러자 세 아들이 아버지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일제히 궐기했다.
샤슈자는 벵갈에서, 무라드는 구자라트에서 무기를 들었고,
아우랑제브는 데칸에서 일어나 무라드와 연합했다.
아우랑제브와 무라드의 연합군이 델리를 공격했다.
다라시코가 이끄는 군대가 반군을 제압해 동생들의 군대가 밀려났다.
이때 첩자가 다라시코에게 코끼리에서 내려 말을 타고 반란군을 추격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말을 듣고 다라시코는 말로 갈아탔는데, 그때 다라시코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병졸들이 코끼리를 보니 대장이 없었다. 다라시코의 군대는 빠른 속도로 붕괴되었다.
무라드와 아우랑제브는 전세를 역전시켜 쿠데타에 성공했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보다 더 잔혹했다. 그는 함께 싸운 무라드를 구금했다.
벵갈의 샤슈자는 아우랑제브에 패해 버마로 도주하다가 살해되었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에게 퇴위를 요구했다. 샤자한은 강제로 퇴위당한채 구금되었고,
아우랑제브가 꿈에도 그리던 황위에 올랐으니, 무굴제국 제6대 황제다.
아우랑제브는 차마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는 맏형 다라시코를 죽이지 못했다.
누나 로샤나라는 다라시코를 죽이라고 아우라아제브를 압박했다.
동생은 형 다라시코를 더러운 코끼리에 태워 델리 시내에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선 겁에 질린 조카들이 보는 앞에서 형을 죽이고, 머리를 잘라 아버지에게 보냈다.
아버지는 대경실색했다. 아우랑제브는 야차 그 자체였다.
다라시코의 시체는 2대 황제 후마윤의 무덤에 매장되었다.
2020년 인도 정부는 다라시코의 유해를 찾기 위한 고고학적 발굴에 나섰는데,
후마윤 무덤에서 나온 140명의 유골 가운데 다라시코의 것을 구분하는데 실패했다.
샤자한은 아들에게 황위를 빼앗긴 후 과거 수도 아그라의 성에 유폐되어 8년을 더 살았다.
그는 아그라 성의 창문 너머로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먼저 간 아내를 그리며 남은 인생을 슬픔과 후회로 보냈다.
그의 옆에는 맏딸 자하나라가 시중을 들었다. 1666년 1월 그는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살아 생전 타지마할 건너편에 검은색 무덤을 만들 계획을 세웠으나, 자신의 무덤을 만들지 못했다.
30년간 대제국의 황제를 지낸 샤자한은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채 아내의 곁에 누웠다.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87
무굴 제국은 16세기초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인도를 통치했던 이슬람 왕조이다
사자한 왕이 갇혀 있던 아그라 요새의(Agra Port) 무삼만 버즈(Musamman Burj) 탑에 서면
저 멀리 타지마할이 아련히 보인다. 혹자는 샤 자한 왕의 유폐 이유가
타지마할 옆에 또 하나의 검은 대리석 궁을 지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미 타지마할을 지으며 국력을 탕진한 상태에서
계속 과거의 향수에만 집착하는 아버지를 아들이 제지한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한 시대를 통치했던 사자한 왕의 로맨스는 비참한 말년으로 끝난다.
다행히도 그의 시신은 타지마할에 부인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건물 안은 화려한 외관과 달리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는데,
타지마할 왕비만을 위한 기념비적 무덤이기 때문에
다른 용도의 방이 없기 때문이다.
3. 타지마할은 왜 세계 7대 불가사의인가?
첫째, 세계 최대의 대칭형 건물이기 때문이다.
당시 무굴제국의 대칭 건축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타지마할은
출입구부터 본관인 묘궁까지 모두 중앙의 연못을 중심으로
아치와 입면이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크게는 흰 대리석으로 만든 본관 묘궁과 동과 서 양쪽의 붉은 사암 건물이
양립하도록 서 있어 색감과 배치 모두에서 안정적이고 웅장한 조화를 자아낸다.
수로가 있는 정원은 무굴제국의 전형적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황혼녘의 타지마할
서쪽에 위치한 건물은 이슬람교의 예배당인 모스크로 사용하였으나
동쪽 건물은 아무런 기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건물을 동쪽에 세운 이유는 단 하나,
묘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어디에서든지 완벽한 대칭적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런 완벽함 속에 옥에 티를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서쪽의 모스크 건물:
타지마할 본 건물에 들어가려면 덧신을 신거나 혹은 맨발이어야 한다.
동쪽의 자와브
모스크 내부의 천정
또한 출입구와 묘궁 중앙에 새겨져 있는 아랍어는 코란에서 발췌한 내용들인데
전부 모양이 다른 각각의 문자이다.
그 중에는 세계가 멸망하고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문타즈와 샤 자한 부부가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적 내용도 적혀 있다고 한다.
둘째, 또 하나는 동서남북 네 방향에 세워진 50m의 탑 미나레트이다.
이 탑이 사방에서 중심의 묘궁을 받치는 느낌 때문에
타지마할이 더욱 웅장하고 권위적으로 보이는 것인데,
멀리서 자세히 보면 이 미나레트가 피사의 사탑처럼 바깥쪽으로 조금씩 휘어져 있다.
당시 자연재해가 잦았던 시대상을 반영하여 지진으로 높은 미나레트 탑이 무너져도
중심의 묘궁은 피해를 입지 않도록 일부러 밖으로 기울어지도록 제작한 것이다.
대칭에 대한 집착으로 커다란 조형물도 거침없이 짓는 한편,
인간에게 불가항력적인 자연에 대해서는
슬기롭게 대처하는 그들의 모습에 감탄사가 나온다.
본관의 주위에 높이 솟아있는 네 개의 미나르(첨탑)는
타지마할의 완성미를 더해줄 뿐 아니라,
본관을 중심으로 5도씩 바깥으로 벌어지게 함으로써 전면에서 똑바로 보았을 때
탑이 원근법에 의해 안쪽으로 구부러지지 않고 반듯하게 보일 수 있게 하였으며,
만에 하나, 지진이 발생하였을 경우 안쪽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한
믿어지지 않는 설계와 시공기술에는 그저 혀를 찰 뿐이다.
대좌의 각 모서리에는 3층 미나레트가 서 있는데,
대좌와의 대리석 접합부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영묘의 대리석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셋째, 건설에 사용된 어마어마한 양의 대리석을
무려 400km나 떨어진 자이푸르(Jaipur)지방에서 운반해 사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기반 전량을 아프리카 나무로 사용하였다.
실제로 무굴제국 제3대 황제 악바르 대왕이 머무른 시크리 성이 무너질 때,
타지마할은 건재하였다고 한다. 22년간 매일 2만여 명의 인부들이 동원되다 보니,
공사현장에는 이들로 구성된 타자간지라는 이름의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큰 규모의 공사는 세계에서도 드문 경우인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공사 규모와
이에 투자된 천문학적인 비용과 인력 때문에 불가사의의 건축물로 꼽는 것이다.
넷째,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이다.
물론 규모나 역사에 있어서는 이집트 피라미드와 같은 유적지가 우수하겠지만
미학적인 면에 있어서는 타지마할을 따라올 건축물이 없다.
이 때문에 타지마할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로 칭한다.
흰 대리석은 밤에는 달빛이 반사되어 옅은 분홍색을 띄고,
낮에는 보석 장식들의 빛을 반사하여 천연의 빛이 스민다.
햇빛을 받아 상아색으로 밝게 빛나는 타지마할 영묘
야간조명을 받아 상아색으로 빛나는 타지마할의 모습은 환상 그 자체이다
곳곳을 아름답게 장식한 보석은
아프가니스탄의 사파이어, 중국의 수정, 티베트의 터키석 등으로
지역과 나라를 가리지 않고 최고급의 천연석만을 사용하였다.
이 들은 모두 대리석이 만들어질 때부터 함께였던 것처럼 작은 틈 하나 없이 박혀 있는데
바로 피에트라 듀라(Pietra Dura)라는 모자이크 기법이라고 한다.
이 기법은 르네상스시대 유럽의 건축물에서도 발견되는 양식인데
대리석에 문양을 판 뒤 그 홈에 보석을 끼워 넣는 형식이다.
이 때문에 5백년의 세월이 지나도 홈에서 떨어지지 않고 건재함을 과시한다.
안타까운 것은 타지마할은 원래 갖가지 금은보화 장식으로
극도로 여성적인 화려함을 자랑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 식민시대를 거치며 돔을 장식하는 금장식도 사라졌고
입구를 지탱하던 은문도 뺏기는 등 수많은 약탈을 당했다고 한다.
지금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니!
완공 당시의 타지마할을 아쉽게 상상을 해 본다.
영묘의 각 아치 위에 있는 난간과 각 모서리 위에 있는 장식 뾰족탑 및
돔을 덮은 원통형 정자는 영묘의 스카이라인에 율동감을 준다.
높은 원통형 벽(drum)으로 떠받친 양파 모양의 2중 돔이
이 건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코란을 새겨 넣은 높은 대리석 기둥은 밑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시각적으로 맨 윗 부분과 아랫 부분이 정확히 같은 너비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판의 너비와 글자를 넓히고 크게 새겨 넣었다.
백색의 대리석에 홈을 파서 유색의 대리석을 잘라 고려청자처럼 상감처리한 정교한 기법
▲ 피에트라 듀라(Pietra Dura) 모자이크 기법이라고 한다
무굴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과 그의 황후의 가묘가 8각형의 묘실에 모셔져 있다
진짜석관은 정원과 같은 높이의 기단부에 있는 납골당에 모셔져 있다
왼쪽의 큰 가묘가 뭄타즈마할 왕비의 가묘이다
왼쪽이 황후 그리고 오른쪽이 샤 자한의 가묘
흰색의 대리석 위에 정교한 이슬람 문양이 새겨져 있다
진짜 석관은 대좌 아래 지하 납골당에 모셔져 있다
영묘는 높이 7m의 대리석 대좌 위에 지어졌으며
사방이 똑같은 모습으로, 모서리는 정교하게 깎여 있고
각 면마다 높이 33m로 우뚝 솟은 거대한 아치가 있다.
▲ 인도 쇼핑 샵에서 본 피에트라 듀라 양식으로 만든 테이블.
살 수도, 가지고 올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지만, 아직까지도 눈에 밟힌다.
4. 숨겨진 감상 Point
타지마할로 입장하는 입구를 그냥 지나치지 말자!
샤 자한 왕의 애틋함을 온몸으로 통감시켜 줄 신비한 체험이 숨어 있다.
우선 타지마할로 내려서는 계단을 1.5m 정도 앞에 두고 똑바로 선다.
그리고 타지마할 건물을 응시한 채로 종종 걸음으로 다가가 보자.
신기하게도 다가가면 갈수록 타지마할이 나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샤 자한 왕의 부인을 향한 진한 그리움과 잡을 수 없는 사랑의 아련함이
이후 감상의 깊이를 더해 줄 것이다.
타지마할에 얽힌 애절한 사랑이야기
한밤중, 샤자한은 목이 타는 갈증을 느껴 눈을 떴다.
샹들리에의 촛불이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이 어슴프레 눈에 들어왔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누군가 물이 가득 찬 황금그릇을 코앞에 내밀었다.
왕비 뭄타즈 마할이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목이 말라서 잠을 깬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긴, 뭄타즈는 한시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었지.
샤자한은 왕비가 황제에 대한 걱정으로 남 몰래 눈물을 훔치는 것과
한숨 짓는 것을 그동안 여러 번 목격한 적이 있었다.
뭄타즈 마할이 두 번째의 왕비로서 아그라성에 들어온 것은 17년 전이었다.
결코 아름답지도 않았으며, 키도 작고 피부도 까만 전형적인 드라비다 여인이었다.
첫 번째 왕비나 세 번째 왕비의 미모에 비하면 너무나도 볼품없는 여인.
굳이 좋은 점을 찾자면 맑은 목소리와 넘치는 애교, 그리고 꾸밈없는 밝은 성격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지성은 어디서나 단연 돋보였다.
입궐 후에도 다른 왕비처럼 거드름을 피우거나 사치스럽지도 않았다.
왕비의 품위를 잃지도 않으면서도 늘 밝게 웃으며
매사를 솔선 수범함으로서 대신들과 궁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샤자한의 마음을 읽는데도 탁월해서,
언제나 황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마술처럼 알아 맞추고는
그를 대신해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는,
언제나 황제만을 생각하고 사랑하며 사는 그런 여인이었다.
어느덧, 샤자한은 뭄타즈 마할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디를 가나 무슨 일이 있거나 언제나 뭄타즈를 동반했다.
그녀는 심지어 황제가 전쟁터에 나갈 때도 두말 없이 따라 나섰다.
사랑이란 외모의 아름다움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뭄타즈마할의 헌신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두 왕비의 따가운 눈초리와 질투를 감수하며
뭄타즈만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샤자한은 자신의 마음을 읽고 따르는 착한 그녀를 혼신을 다해 아끼고 사랑했다.
다른 왕비들처럼 남을 비방하거나 험담하는 일도 없었다.
뭄타즈는 또한 샤자한에게 결혼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17년 동안
무려 14명의 자식을 낳아 주지 않았는가!
하나부터 열까지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아내,
그 이름 뭄타즈 마할이었다.
그런 왕비가 또다시 임신한 채 만삭의 배를 끌어안고 끝내 몸져누운 것이다.
이전과 달리 점점 야위어져 가기만 하는 아내의 모습은 샤자한의 마음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창백한 달빛이 아그라 성의 테라스에 걸친 어느 날 밤, 결국 뭄타즈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곁에 앉아있는 샤자한을 올려다보며 마지막 미소를 지었다.
그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왕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의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노라고.
뭄타즈는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 줄 것을 황제에게 부탁하였고,
그는 죽어 가는 왕비의 손을 잡으며 굳게 약속했다.
1631년 6월 7일의 일이다.
뭄타즈는 15번째의 아이를 낳다가 39세의 젊은 나이로 마침내 황제의 곁을 떠나게 되었고,
황제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여 장례를 치르는 기간동안 흰 상복을 입고 왕비의 죽음을 애도했다.
샤자한은 뭄타즈 마할 사후 곧바로 그녀와의 약속을 실행에 옮겼다.
이로서 아그라의 야무나 강 남쪽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역사적인 착공에 들어가게 된다.
그 이름은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왕관모습의 궁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오스만투르크제국 최고의 모스크 전문 건축가 우스타드 라호리가 초빙되었고,
아지메르 지방에서 최고급의 흰 대리석들이 재단되어 속속 아그라로 도착되었다.
인도 전역에서 내노라하는 조각가들이 불려졌고,
이탈리아와 터키, 심지어 남미산 유색 대리석과 오닉스가 수입되었으며,
루비와 사파이어, 그리고 옥이 중국과 아라비아 등지에서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2만 명의 노예들과 1000마리의 코끼리들이 동원되어 건축가의 지시를 받아
무려 22년간의 대 공사 끝에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무굴제국의 영광과 샤자한의 명예에 걸맞는 아름다운 자태로 창조되었다.
놀랄 정도의 섬세한 조각과 백색의 대리석에 홈을 파서 유색의 대리석을 잘라 상감 처리한
정교한 기술은 더 이상의 다른 건축물과의 비교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코란을 새겨 넣은 높은 대리석 기둥은 밑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시각적으로 맨 윗 부분과 아랫 부분이 정확히 같은 너비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판의 너비와 글자를 넓히고 크게 새겨 넣은 그 세심함은
감탄사만으로는 부족하다.
본관의 주위에 높이 솟아있는 네 개의 미나르(첨탑)는 타지마할의 완성미를 더해줄 뿐 아니라,
본관을 중심으로 5도씩 바깥으로 벌어지게 함으로써 전면에서 똑바로 보았을 때
탑이 원근법에 의해 안쪽으로 구부러지지 않고 반듯하게 보일 수 있게 하였으며,
만에 하나, 지진이 발생하였을 경우 안쪽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한
믿어지지 않는 설계와 시공기술에는 그저 혀를 찰 뿐이다.
붉은 사암으로 된 정문은
중앙운하에 한가로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본관의 맞은편에 열려있으며,
건축의 균형과 세련미를 위해 본관의 한쪽 옆에 모스크를 만들고는
그 반대쪽에는 모스크와 외형이 똑 같은 건물을 세운 그 치밀함이여.
가히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타지마할이 건설되면서 죽은 후 2년 동안 그 앞뜰에 임시로 묻혔던 뭄타즈마할은
바닥 공사가 끝나면서 바로 타지마할의 지하에 옮겨졌다.
타지마할이 완성되는 날,
샤자한은 성대한 행사를 갖고 뭄타즈마할의 영혼을 다시 위로했다.
죽은지 23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생전의 왕비를 사랑하는 샤자한의 눈에
뭄타즈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 살아있었다.
샤자한은 타지마할이 완성된 후 오히려 더 괴로워했다.
타지마할을 볼 때마다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리움은 다시 고통으로 다가왔다.
황제는 타지마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시 쉬는 게 좋겠다는 대신들의 조언을 받아,
조부인 악바르 대제 시절의 한때 수도였던 파테푸르 시크리로 6개월간의 휴가를 떠난다.
샤자한이 대리석을 좋아하는 것은 거의 병적이다시피 했으므로,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는 파테푸르 시크리 성내에 자리하고 있었던 성자 시크리의
초라한 무덤을 대규모의 대리석으로 증축하고 공간을 확장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1년에 한번씩은 이곳을 순례하도록 하였다.
그는 뭄타즈마할이 없는 아그라에 머물기보다는 외부에 출타하는 일이 많아졌고,
이윽고 조부 후마윤의 수도였던 델리에 샤자하나바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독실한 이슬람교도인 샤자한은 장차 이슬람세계의 끝까지 그 명성을 떨칠 도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붉은 사암의 거대한 성, 이른바 '랄킬라'를 짓기 시작했다.
성안에는 인도에서 가장 큰 모스크를 짓도록 명령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자마마스지드이다.
샤자한이 제국을 통치하던 30년간, 제국의 확장에 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타지마할의 건설로 국고가 결국에는 바닥을 드러내게 됨으로서 그의 업적이 빛을 잃게 되었다.
말년에는 중병에 들어 국사를 돌보기가 힘들어 지게 되었고,
왕비 뭄타즈마할에 대한 그리움으로 야무나 강 북쪽 타지마할의 반대쪽에,
이번에는 검정대리석으로 타지마할과 같은 거대한 자신의 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제의 임종과 국고의 탕진을 염려한 네 아들이
서로 황제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합을 벌이게 되었고,
그 중 군인기질이 가장 풍부한 야심가 아우랑제브가 장남과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재빨리 아그라를 차지함으로서 실질적 권력을 쥐게 된다.
그는 아버지 샤자한을 아그라 성채의 작은 방에 감금하고는
아버지가 진행시키던 샤자한의 묘의 건축을 중지시켰다.
무려 8년이라는 기간을 이곳에 갇혀 살던 샤자한은 75세의 나이로
멀리 야무나강 너머의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쓸쓸히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사후 그의 묘는 타지마할 지하의 뭄타즈마할의 관 옆에 안치되었다.
뭄타즈마할에 대한 샤자한의 사랑은 그야말로 시공을 초월한,
타지마할 만큼이나 불가사의한 사랑, 바로 그것이었다.
하루에도 네 번씩 색깔을 바꾼다는 타지마할의 자태는
고요한 달빛에 비칠 때면 보라빛을 띤 상아색으로 바뀌고,
그 고운 모습은 마치 샤자한과 뭄타즈마할의 달콤한 속삭임처럼 다가온다.
아그라 성채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면,
멀리 떨어진 타지마할을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게 된다.
8년 동안 이곳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샤자한의 애절한 마음은 어떠했을까.
사랑을 논하려면 아그라를 먼저 가 보라. 사랑과 애달픔이 곳곳에 스며있는 곳.
아그라는 그런 곳이다.
첫댓글 아! 청솔님
인도의 ㅇ유적지
섬세한 조각들 그리고 환상적이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타지마할을
내가 직접 가 본것보다 더 상세하고 세밀한 영상과
그 건축물에 대한 애절한 사랑이야기는 저를 이글에 녹아들게 하십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행복합니다.
네 오랜 기간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글과 사진 들입니다
요즘도 좋은 사진이 있으면 추가하지요
오늘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올릴 생각을 했습니다
즐감하셨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따뜻한 댓글로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이구야 한시간 이상을 꼼짝않고 사진과 글들에 열심히 빠져들어 심취했습니다.
사실 현장에 다녀오긴 했었지만 타지마할 전체중 백분의 일도 못 보고 모르고 그냥 지나친것 같네요.
시간도 단체여행이다 보니 오래 머물 수도 없었고 사람들도 많아 한 곳에만 집중할 수도 없었던 그 때 그상황이었지요 .
줄을서서 순서기다리다 겨우 인증샷 한장씩 찍고 부리나케 집합장소로 회귀. 열악한 패키지 관광이었답니다.
오히려 오늘 건물의 웅장함 아름다움 정교함 다양함 등등 계속 감탄 놀라면서 구경한번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팩키지 관광이 그렇습니다
저도 가끔씩 여행을 가 보지만 대충 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호젓하게 자료를 모아서 보면
훨씬 더 많은 걸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추가로 41장의 사진을 덧붙였습니다 ^^*
컴사랑님 다녀오신 사진 보고
그래서 한번 와서 보시라고 한 것입니다
열심히 보셨다니 감사하고 흐뭇합니다
늘 건강 잘 챙기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