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신부 "영원을 그리워하는 인간은 참 희한한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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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21.07.15 05:00
백성호 기자
“인간은 영원을 그리워하는 참 희한한 동물이다.”
8일 경기도 용인에서 ‘성서신학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정양모(86) 신부를 만났다. 정 신부는 프랑스에서 3년, 독일에서 7년간 공부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 영어는 물론이고 예수가 썼던 아람어와 히브리어, 그리스어와 라틴어에도 능통하다. 광주 가톨릭대와 서강대, 성공회대 교수를 역임한 정 신부에게 ‘인간과 종교’를 물었다.
한 마디로 종교란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왜 종교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나.
“모든 동물은 먹거리에 탐닉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간은 다르다. 의식주 해결로 만족하지 않는다. 인간은 의식주를 넘어서는 초월의 세계를 찾는다. 그게 인간이라는 동물의 특성이다.”
인간은 왜 의식주가 채워져도 만족하지 못하나.
“인간이 이 지상에 출현한 연대를 두고 여러 학설이 있다. 대략 40만 년 전에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흑인이 출현했다는 게 공통적 학설이다. 그게 우리의 원조다. 소위 ‘호모 사피엔스’라는 학명이 붙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비교적 늦게 등장한 동물인데, 이상하게 의식주로 만족하지 않고 초월자 또는 초월성을 찾는다. 거기서 종교가 발생했다고 본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했다.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건가.
“그렇다. 사람은 원래 유한한 존재다. 시간이 지나면 소멸하는 존재다. 그래서 배 부르고 등 따신 것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자신의 유한성을 넘어서고자 한다. 인간은 초월자나 초월성을 찾는 동물이다. 그런 동물은 지구상에서 인간뿐이다.”
초월자와 초월성은 서로 다른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모두 중동에서 태동했다. 중동 사막에서 생겨난 종교는 예외없이 유일신의 계시를 받는 계시 종교다. 반면 아시아의 평원에서 생겨난 종교는 초월성을 찾는다. 불교와 도교, 유교 등이 그렇다. 평원 종교는 인생에 대한 이치와 법칙을 찾아나서는 이법(理法) 종교다.”
자연 환경에 따라, 풍토에 따라 종교의 성격이 달라지나.
“자세히 살펴보니 그렇더라. 사막의 풍토와 평야의 풍토는 지리적 풍토다. 그런데 지리적 풍토가 종교의 성격을 결정하더라.”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달라. 사막의 풍토와 계시 종교는 어떤 관계가 있나.
“사막은 메마른 곳이다. 사람이 살기가 참 어려운 곳이다. 스스로 인생을 감당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곳이다. 그러니까 초월자를 찾게 된다. 그 초월자는 유일신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유일신에게 가는 길도 한 길뿐이다.”
왜 한 길뿐인가.
“사막이라는 풍토를 보라. 광활한 땅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오아시스뿐이다. 물이 솟아나는 오아시스 하나뿐이다. 그러니까 하느님 한 분뿐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겠나. 생명을 주시는 분이니까. 오아시스처럼 말이다. 사막에서 오아시스와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길이 뭔지 아나.”
무슨 길인가.
“그게 대상(隊商)의 길이다. 낙타에 짐을 싣고 다니는 상인의 길이다. 이게 오아시스에서 오아시스로 연결돼 있다. 황량한 사막에서 이 길을 벗어나면 어찌 되겠나. 죽음뿐이다. 그래서 길은 하나다. 오아시스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생명의 길은 오직 하나다.”
정양모 신부는 “중동의 대상로를 따라가다가 오아시스가 나오면 살고, 오아시스가 안 나오면 죽는다. 길은 하나뿐이다. 그러니까 초월자도 한 분, 초월자에게 인도하는 구세주도 한 분, 예언자도 한 분이다”며 “사막에서 태어난 대표적 종교가 유대교다. 그 아들뻘 되는 그리스도교, 손자뻘 되는 이슬람교도 모두 사막의 종교다. 거기서 살짝 벗어난 페르시아 제국에서 기원전 800년 경에 태어난 종교가 조로아스터교다. 이 역시 유일신 계시 종교다. 페르시아도 넓게 보면 중동이다. 그러니 유일신 계시 종교는 중동 사막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시아의 평원에서 태동한 종교는 왜 초월자가 아닌 초월성을 찾나.
“평야에서는 사람이 사막처럼 위기를 느끼지 않는다. 무엇보다 먹거리가 풍부하다. 사람이 살기에도 딱 좋은 곳이다. 그런 곳에서는 초월자인 유일신을 찾아 나서지 않고, 초월성의 진리를 찾아 나서더라. 나는 지리적 풍토가 종교적 풍토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럼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
“그렇다. 예수님은 유일신 사상을 타고났고, 유일신 신앙 안에서 자랐다. 당시 유대 사회가 그랬다. 예수님은 조상 대대로 믿어오던 하느님 신앙을 계승하되, 율법주의적인 하느님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율법주의적인 하느님은 어떤 걸 말하나.
“유대교의 율법이 613가지다. 일상생활을 통제하는 율법이다. 그중에 절반은 ‘~하지 마라’는 금령이다. 나머지 절반은 ‘~하라’는 명령이다. 율법주의적 하느님이 유대인에게 계명을 주셨다. 그러니까 아주 법적인 하느님이다. 그래서 어렵다. 613가지 계율 체계를 배우는 것도 어렵고, 일상생활에서 613가지 율법을 다 지키는 것도 어렵다.”
구체적으로 금하는 율법은 어떤 식인가.
“음식을 먹을 때도 정결한 음식과 불결한 음식이 있다. 가려서 먹어야 한다. 요리를 할 때도 정결한 조리법과 불결한 조리법이 있다. 지켜야 한다. 정결법과 안식일법, 이게 가장 복잡하다. 유대교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무렵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다. 안식일에는 노동이 금지돼 있다. 그런데 화장실 두루마기 휴지에 절단용 점선이 있지 않나. 안식일에는 그걸 뜯는 일도 노동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금지돼 있다.”
그럼 어떻게 하나.
“하루 전날 미리 점선을 따라서 뜯어놓아야 한다. 유대인 주부들이 안식일 앞두고 하는 중에서 장만 해놓은 음식을 온장고에 넣
어두는 일과 화장실 휴지를 뜯어서 차곡차곡 쌓아놓는 일이다. 안식일에는 산책할 때도 주의해야 한다.”
어떤 주의를 해야 하나.
“안식일에는 산책을 할 때도 2000걸음까지만 괜찮다. 그걸 넘어서면 노동이 된다. 그럼 산책하는 거리는 어떤가. 880m까지는 괜찮고, 그걸 넘어서면 죄가 된다. 이런 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613가지 율법을 모두 다 지키겠다고 작심한 사람이 바리새인(바리사이)이다.”
예수 당시에는 바리새인의 숫자가 많았나.
“예수님 당시에 약 6000명이었다. 바리새인은 각 동네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니 예수님이 전도할 때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이 바리새인이었다. 예수님과 가장 많이 충돌한 사람도 바리새인이었다.”
예수는 왜 바리새인과 왜 충돌했나.
“예수님은 유일신 신앙은 받아들였다. 그런데 율법적인 하느님, 그런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하느님을 이해하는 게 싫었다. 예수님이 이해한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이었다. 그래서 유대의 613가지 율법을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가르침으로 전부 환원을 시켰다.”
아시아 평원 종교에서 대표적인 게 불교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왜 초월자가 아닌 초월성을 찾았나.
“인도에는 수많은 신이 있다. 인도 인구인 12억보다 신의 숫자가 더 많다는 말도 있다. 인도의 신전에 가보면 안다. 신전 안에도, 신전 밖에도 온통 신상(神像)이다. 그 신전 안에 신이 얼마나 있는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다. 그러니까 인도는 신들의 세계다. 또 인도에 가보면 온갖 구루와 도사가 우글우글하다. 아예 벌거벗고 다니는 이들도 있고, 아랫도리만 가리고 다니는 이들도 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신들의 횡포, 도인들의 횡포에 진절머리가 나신 분이 아니었을까.”
진절머리가 났다는 게 무슨 뜻인가.
“신들 다 물렀거라, 도인들 다 물렀거라. 이제는 나 스스로 진리를 찾겠노라. 부처님은 그렇게 선언을 하신 거다. 그렇게 초월자보다 초월성을 찾으신 거다. 부처님이 찾은 진리를 한마디로 하면 법(法)이고, 네 마디로 하면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다.”
사막에 살든, 평원에 살든 인간은 종교를 필요로 한다. 왜 그런가.
“그게 생각하는 동물의 특성이다. 배부르고 등 따신데 만족하지 않는다.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생의 의미가 뭔가. 그걸 찾는다. 그게 인간이다. 그래서 유구한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가 없는 시대와 장소는 없다. 유물론과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소련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며 없애지 않았나. 결국 어찌 됐나. 유물론 공산주의는 사라지고,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은 참 희한한 동물이다.”
왜 인간이 희한한 동물인가.
“인간은 그리워하는 존재다. 시간을 넘어서서 영원하고, 공간을 넘어서서 편재하고, 일체의 한계를 넘어서서 무한한 세계를 그리워한다. 그래서 인간은 참 희한한 동물이다.”
사막에서는 초월자를 찾고, 평원에서는 초월성을 찾는다고 했다. 초월자와 초월성, 둘 사이에 공통분모가 있나.
“다석 유영모 선생은 종교학과 성서학, 신학을 한 시간도 안 배운 분이다. 그 양반은 스승이 없었다. 참고서도 없었다. 그래서 하느님을 표현하고자 혼자서 애를 썼다. 하느님을 부를 때 그리스도교식 신칭만 쓴 게 아니다. 불교식 신칭도 썼다. 그래서 과감하게 ‘공(空)’을 빌어와서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왜 없이 계신 하느님인가.
“하느님을 없다라고도 할 수 없고, 있다라고도 할 수 없으니까. 현상적으로는 안 계시지만, 마음속으로는 하느님이 계시니까. 하느님은 초월자이시다. 절대 초월이면 우리가 하느님과 인연을 맺는 게 불가능하다. 그런데 절대 초월자가 우리 마음 속에 내재해 계신다. 다석 선생은 이 둘을 아울러서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고 표현했다. 절대 초월자이면서 우리 가까이 계신 분이니까. 여기서는 초월자와 초월성이 양분돼 있는 게 아니라, 하나로 통일돼 있다.”
첫댓글 우~와~! 대단한 글이군요!
사막지대에서 생겨난 종교와 평야지대에서 생겨난 종교의 성격이 초월자와 스스로에서 초월성을 찾는다는 설명이신데...
쉽게 이해가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사두사두사두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