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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칼뱅의 생애와 사상]
방황의 시기:오를레앙, 그리고 인문주의와의 만남(3)
인문주의자에서 종교개혁가로: 회심
기독교 영성의 중심 주제는 완고하기 짝이 없던큰 죄인들이 (대개는 극적인) 단 한 번의 회심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개념이다. 서구 기독교의 두 수원이라 할 수 있는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 둘 다 후세대가 모범으로 삼을 만한 회심을 경험했다.' 그러나 '회심'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주목할 것은 생각이나 마음에 생긴 갑작스러운 변화만이 아니다. 이 전향 뒤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사실을 신중하되 확실하게 알아차릴 줄 알아야 한다. 회심은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행위이자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이다.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바울이 겪은 일행 9:1-19)은 고집 세고 가망이 전혀 없는 인물에게 하나님의 손길이 닿은 사건이었다. 바울은,그리고 나중에 초기 기독교 사회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자각했다.자신의 말마따나 바울이 시점에는 다소 사람 사울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만)은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고집불통이었고 화해를 기대할 수없을 정도로 완고하게 기독교에 반대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일이 있고 나서 바울은 180도 바뀌었다. 규모와 강도 면에서 그의변화는 하나님의 섭리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종교개혁에 탄력이 붙으면서 바빌론 유수 이후 유대교의 가장 나쁜 점을 닮은 것이 중세 가톨릭교회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해졌다. 바울에 따르면,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야말로 유대교가 범한 가장 큰 신학적 오류가 아닌가? 한편으로는 중세 가톨릭교와 유대교 사이에,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주의와 신약성경의 기독교 사이에 일정한 유사점이 보인다.바울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중대한 이행이 일어났음을 상징한다.그런 점에서 16세기에 신중하되 단호한 태도로 종교개혁에 헌신하고자 가톨릭이라는 성장 배경과 절연한 칼뱅의 회심은 바울의 회심과 비슷하다. 1520년대나 1530년대에 원래부터 복음주의자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든 복음주의자가 되려면 과거와 단절하는 의지적인 결정을 해야 했다. 기독교가 막 움트던 시기에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겪었던 것과 아주 유사한 경험이었다. 종교개혁 이미지 메이커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들려준 명확한 회심의 경험도 흡수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도의 미신에차츰 환멸을 느꼈고, 결국 이 환멸은 인생행로를 바꾸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개혁가들이 중세 교회의 종교적 미신을 버리고 복음을 재발견하는 종교로 나아가는 영적 순례 역시 이와 유사하지 않았을까?
따라서 '회심'이라는 용어에는 기독교 역사의 중추적 사건들과규범적 유형에 대한 호소가 함축되어 있다. 칼뱅은 개인숭배를 개탄하던 사람인지라 자신의 신앙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짐작할수 있는 단서를 거의 제시하지 않는다. 칼뱅이 쓴 글 가운데 과거와 절연하기로 한 자신의 결심을 정확히 설명한 것으로 간주되는 단락은 딱 하나뿐이다. 바로 <시편 주석 commentary on the Psalms》(1557)에 쓴 서문이다. 칼뱅은 중세 교회와의 결별을 '갑작스러운 회심’으로 묘사하면서 이런 강력한 연상에 분명히 동조했다. '회심'은 단순히 사적이고 내면적인 신앙 경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회심은 조직에 대한 충성에 생긴 외면적이고 급진적이고 눈에 보이는 변화를 포괄한다. 칼뱅은 개혁가로서 자신의 소명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교황이라는 미신에 아주 열렬히 헌신했었다'라면서 그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 내신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칼뱅은 가톨릭 영성이라는 안락하고 친숙한 수렁 속을 뒹구는 데 안주하느라 그곳에서 헤쳐 나오지 못하는 '고루한 사람'이었다. 일련의 간결한 이미지를 활용해서 칼뱅은 자기가 쳐 둔 덫에 갇힌 채 거기서 나오지도 못하고 나올 생각조차 없는 사람으로 자신을 묘사한다. 칼뱅이 중세 후기의 종교 모체에서 해방되려면 외부의 개입이 필요했다. 칼뱅은 승마 이미지를 활용해서 이 단계에서 자신을 이끄신 하나님을, 말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기수에 비유한다. "마침내 하나님은 섭리라는 보이지 않는 굴레로 내가 나아갈 길의 방향을 바꾸셨다. 갑작스러운 회심을 통해 그분은 너무나도 완고했던 마음을 수년 간 유순하게 길들이셨다.'"5...
칼뱅이 사용하는 문법은 그의 신학과 개인적인 신앙 경험에 대해 그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 준다. 칼뱅이 서술하는 이야기에서 능동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칼뱅은 수동적이다. 하나님은 행동을 하시고, 칼뱅은 그에 따라 행동한다. 취리히의 종교개혁가 울리히 츠빙글리도 1519 년에 쓴 시에서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이 시에서 츠빙글리는 전염병으로 도시가 황폐해져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이 살지 죽을지는 하나님이 정하실 일이라고 말한다. 츠빙글리는 자신이 느꼈던 철저한 무기력을 기록한다. 그는 이제 자기 영혼의 수장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장난감이요, 토기장이의 손에 빚어질 한 덩이 진흙이요, 깨뜨려질 그릇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전능하심은 실존의 중요성에 매달렸던 츠빙글리의 사상에서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거의 치명적이었던 그의 질병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사상에 활력과 타당성을 부여했다. 섭리는 이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었고, 츠빙글리의 생존에 영향을 끼치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이었다. 회심에 관한 칼뱅의 설명은 간단하면서도 난해하다. 의미심장한 동시에 수수께끼 같다. 확실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비록 아직은 확실하지 않을지라도 꽤 분명한 위치와 역할로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칼뱅은 생각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한 이런 의식은 절대로 칼뱅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징표가 아니었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관한 칼뱅의 인식에는 이런 오만함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 이신칭의 교리의 핵심을 이루었던 루터의 통찰이 젊은 칼뱅에게도 메아리치고 있었다. 하나님은 의롭지 못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과 의기소침한 자들과 세상 사람들 눈에 어리석고 나약해 보이는 자들을 부르신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 조건은 인간의 기준에서 보면 철저한 실패의 흔적이다. 자신의 회심에 관한 설명과 바울의 회심에 관한 설명 사이에는 중요한 유사점이 있다. 이는 칼뱅이 이 두 사건의 역사적·종교적 유사점을 인식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수수께끼는 여전하다. 실제로, 칼뱅은 자신의 회심을 설명하면서 풀어낸 수수께끼만큼이나 많은 수수께끼를 만들어 낸다. 어떤 역사적 사건 또는 인물이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는 도구로 쓰였을까? 칼뱅의 소명 의식과 회심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칼뱅이 복음 사역자로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부르심을 인식한 때는 회심하기 전일까, 회심하는 도중일까, 아니면 회심한 후일까? 1557년판 서문에 담긴 극도로 압축된 설명은 이 둘이 동시에 일어났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그러나 혹시 노년에 이른 칼뱅이 오랜 기간에 걸쳐 전개되어 온 일을 아주 짧은 기간에 벌어진 일로 압축했을 가능성은 없을까? 마르틴 루터는 해당 사건이 있고 약 30년 뒤에 종교적 통찰의 위대한 순간을 회상하면서 역사를 상당 부분 압축했다. 수년에 걸쳐 서서히 얻게 된 통찰을 한순간에 찾아온 강력한 깨달음처럼 표현한다. 칼뱅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와 바울의 이론이나 패턴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기억을 압축했을 가능성은 없을까?
얼렉선드레 거노치는 칼뱅이 언급한 '갑작스러운 회심'을 젊은 시절의 이력에 관한 역사적 설명이 아니라 그에 관한 신학적 해설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뱅이 자신의 삶을 순간적이지만 결정적으로 인간의 영역에 개입하시는 신적 침입 현상의 실례로 취급하려 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칼뱅이 회심을 언급한 단락에는 특정 연대가 명시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암시조차 찾을 수 없다. 'subita'라는 용어는,뜻밖의 사건, 예상할 수 없는 사건,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라는 의미를 가득 함축하고 있다. 훗날 칼뱅이 말한 바에 따르면, 하나님의 행동 방식의 본질적인 측면을 모두 담고 있는 표현이다. 칼뱅은 역사적 서술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자신의 회심을 언급함으로써 기독교 세계에서 '거듭난' 위대한 인물들, 즉 하나님이 당신을 섬기게 하시려고 인생행로를 바꾸신 사람들과 자신이 같은 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칼뱅이 말한 '갑작스러운 회심'이라는 수수께끼를 밝히려면,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긴 하지만 역사적 고찰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다. 칼뱅은 인류 역사라는 지도에다 자신의 회심 경험에 관한 정보를 표기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이지만(그는 '영원의 상 아래에서'이 문제를 논하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칼뱅이 지나온 이력 가운데 어떤 일화가 감질나는 이 자전적 묘사에서 암시하는 변화의 양상과 일치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온건한 르페브르파 개혁가였던 칼뱅은 1533년 11월 니콜라 콥 사건의 여파로 파리를 떠나야만 했다. 칼뱅이 어디에 은신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실 칼뱅은 12월의 어느 시점에 파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파리의 상황은 악화 일로였고, 칼뱅은 납작 엎드려 있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1534년 초, 칼뱅은 당시 앙굴렘의 참사회 회원이자 클레의 주임 신부였던 루이 뒤 티예Louis du Tillet 의 고향 생통주에 정착했다. 루이 뒤 티예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칼뱅을 맞았다. 그가 친구에게 거처를 마련해 준 이유는 칼뱅의 신앙관에 동조해서라기보다는 좋은 글을 사랑하는 칼뱅의 인문주의 성향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비교적 그 시대와 가까운 자료에 따르면, 루이 뒤 티예 가족은 앙굴렘에 도서관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 도서관에는 수천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다." 칼뱅은 이 시기에 육체가 죽으면 영혼은 수면 상태에 들어간다고 가르치는 재세례파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영혼 수면설 논박Psychopannychia》이라는 글을 썼다(발표는 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칼뱅이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의 작품을 직접 읽으면서 상당한 지식을 쌓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곧 이 작품을 쓸 당시에 칼뱅이 훌륭한 장서를 갖춘 도서관을 이용했음을 암시한다. 훗날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1572)의 희생자 중 하나인 피에르 드 라 플라스Pierre de la Place는 1550년경 칼뱅에게 쓴 편지에 두 사람이 앙굴렘에서 쌓았던 돈독한 관계를 상기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칼뱅이 훗날 '교황 제도에 관한 미신'이라고 부른 것들과 이 시점에 이미 완전히 절연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 중차대한 시점에 칼뱅은 프랑스 교회 안에서 이미 많은 이들에게 지지를 얻고 있던 관점을 함께 공유하는 개혁 성향의 인물이었다. 플로리몽드 레몽Florimond de Raemond의 말대로, 칼뱅은 "여전히 가톨릭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었고, "가톨릭의 관습에 어긋나는 설교나 기도,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더욱이 《영혼 수면설 논박》에는 가톨릭에 반대하는 논박이 들어 있지 않다. 가톨릭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최근에 확신하게 된 청년이 쓴 작품이라는 단서조차 찾기 어렵다. "
그럼에도 누아용 참사회의 간결한 명부는 칼뱅의 경력에 분수령이 되는 사건을 보여 준다. 1534년 5월 4일, 칼뱅은 라 제진의 사제직을 사임하고, 새로운 인물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었다." 가톨릭교회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어쩌면 진정한 종교의 본질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얻은 칼뱅은 부패하고 복음적이지 않다고 인식하게 된 가톨릭교회로부터 자신이 이득을 얻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결정했는지도 모른다.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칼뱅은 물론이고 초기 전기 작가들 역시 이 사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한다. 만약 이 사건이 칼뱅과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결별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면, 이기이한 침묵에 관해서도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칼뱅이 이 시점에 가톨릭교회와 자신을 이어 주는 제도적 연결 고리를 마저 끊어내기로 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는 '회심'이 곧 일어날 것을 암시한다.
누아용의 사제직 사임에 관하여 좀 더 최근의 전기 작가들이 내놓은 유력한 해석은 3주 뒤에 일어난 사건을 오독한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 누아용 기록보관소에 보관된 5월 26일 자 공문서에 따르면, '이안 코뱅lean Cauvin'은 삼위일체 주일에 교회에서 소란을 일으킨 죄로 수감되었다." 정말로 칼뱅이 당대 교회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던 걸까? 6월 3일에 풀려난 이 사람은 이틀 뒤 다시 수감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관한 해석은 신원을 잘못 확인한데서 비롯된 듯하다. 누아용 칙령은 수감된 '코뱅'이 무디 Mudit 라는 가명으로 불렸다고 정확하게 기록했다. 다시 말해서, 무디로 불리는 이안 코뱅은 불과 몇 주 전에 이 도시의 기록에 등장했던 동명의 인물과 전혀 다른 사람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칼뱅이 1545년에 동료에게 쓴 편지에서 "한 번도 수감되지 않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칼뱅이 이런 꼴사나운 위법행위로 당국과 심각한 마찰을 일으켰다면, '누아'에서 칼뱅에게 맞서던 반대파들이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지나갔을 리 만무하다.
누아용 이후에 어디에서 지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콜라동은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법정에서 일정 기간을 보내고, 이어서 파리와 오를레앙에서 지냈다고 넌지시 언급한다. 콜라동에 따르면, 칼뱅은 파리에 있는 동안 미카엘 세르베투스 Mich - Michael Servetus를 만나려고 시도했다. 세르베투스는 칼뱅의 제네바 체류 시기를 설명할 때 중요하게 다룰 인물이다. 당시 칼뱅은 파리 시내를 마음대로 나다닐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생 앙투안 거리에 있는 안전한 장소에서 만나기로 사전에 협의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세르베투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약 20년 뒤 제네바에서 다시 만났다.
그해 늦가을에 일어난 벽보 사건으로 프랑스 복음주의자들의 상황은 더 어려워졌다. 뇌샤텔에서 개혁 성향의 소책자 집필자로 유명한 앙투안 마르쿠르가 자신의 경력을 빛나게 해 줄 승리를 거머쥐었다. 10월 18일 일요일 아침 일찍, 프랑스 전역에 눈에 띄는 장소마다 가톨릭교회를 맹렬히 비난하는 익명의 벽보가 나붙었다"파리와 일부 지방 도시에 사는 충성스러운 가톨릭교도들은 "끔찍하고 참을 수 없는 교황권의 남용을 성토하는 타블로이드 크기의 포스터에 모욕감을 느꼈다. 독설에 찬 네 문단을 읽으려고 멈춰 선 사람들 중 기성 교회에 대한 은근한 위협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갑자기 복음주의가 프랑스 사회에 불안을 조장하고 현 상황을 위험에 빠뜨리는 '반역의 종교'로 인식되었다. 당시까지는 정치권에서 가톨릭의 정통 신앙을 수호하려는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가톨릭의 정통 신앙을 수호하는 일이 정치와 사회의 안정을 지키는 일과 직결된 것처럼 보였다. 새로운 동맹 세력을 발견한 셈이었다. 자연스럽게 새로운 동맹 관계가 형성되었다. 갑자기 파리에서 복음주의자가 되는 것은 결단코 현명한 결정이 아닌 게 되었다. 바로 이 사실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복음주의자가 되는 것은 위험인물, 나아가 반역자가 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벽보를 읽고 격분한 사람들 중 한 명은 프랑수아 1세였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 앙부아즈 성에서 잠에서 깬 프랑수아 1세는 침실 밖으로 나왔다가 문제의 벽보를 발견했다. 보안에 구멍이 뚫린 문제 못지않게 벽보에서 거론하는 종교적인 내용에 모욕감을 느낀 프랑수아 1세는 복음주의에 동조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인물들을 모조리 기소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가 도착하기도 전에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칼뱅의 회고에서는 이런 근본적인 사건들과 그의 종교적 방향 전환에 관해 독특한 양상이 포착된다. 전에는 종교에 대한 '합의상의'이해에 머물렀다면 이제 '헌신적인' 이해로 옮겨 간 것이다" 일련의 사건들은 칼뱅에게 발달 중인 자신의 종교에 관한 시각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 시각들은 상아탑 안에서 착상되고 숙고된 사상이 아니었다. 그 시각들은 도시와 나라의 안정을 위협하고, 칼뱅을 '주의할 인물'로 규정하는 사상이었다. 칼뱅의 존재는 그의 종교적 신념과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그의 사상에 의해 결정되었다. 칼뱅 본인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렇게 인식했다. 삶과 사상, 인물과사상의 통합이 이 방황의 시기에 시작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기간에 칼뱅의 정체성과 신학과 행동 사이에 동맹이 구축되었다.
칼뱅은 1534년 10월의 사건을 고려할 때 프랑스를 떠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니콜라 콥은 이미 스위스 바젤에서 은신처를 찾았고, 그때부터 바젤은 복음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이자 학문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바젤까지 이동하는 데는 아마도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칼뱅은 친구인 루이 뒤 티예와 동행했다. 여행 경비는 루이 뒤 티예가 두말하지 않고 부담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1535년 1월 바젤에 도착했을 것이다. 칼뱅은 이제 안전했다. 그런데 다음에는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망명 기간에 그는 무엇을 했을까?
칼뱅은 마르티누스 루키아누스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망명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Lucianus는 라틴어 이름인 'Caluinus'의 철자 순서를 바꾼 것이다). 스트라스부르와 마찬가지로 바젤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도시였다. 그런데 칼뱅은 독일어를 거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바젤에서의 사회적 · 문학적 교류는 라틴어나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한때 인문주의 학습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바젤대학교는 사실상 사멸상태였다. 칼뱅이 쉽게 교류할 수 있는 학자들의 공동체가 없었다. 이 시기에 칼뱅이 알고 지냈거나 연락하고 지냈을 것으로 짐작되는 사람들 중에는 엘리 쿠로(Elie Couraud), 피에르 카롤리(Pierre Caroli), 클로드 드 페레(Claude de Feray),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피에르 투생(Pierre Toussaint), 피에르 비레(Pierre Viret)가 있다." 한때 세계 문학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였던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는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5년을 보내고 그해 5월에 바젤로 돌아왔으나 병이 들어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칼뱅과 에라스뮈스가 교류한 흔적은 전혀 없다. 에라스뮈스는 1536년 6월에 사망했다.
언어 문제 때문에 바젤에서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칼뱅은 스위스 북부에 위치한 이 도시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칼뱅의 망명지였던 바젤은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주시할 수 있는 망루가 되었다. 칼뱅은 제네바라는 도시에서 벌어진 극적인 사건들에 관한 소식을 접했다. 종교개혁가 피에르비레가 독에 중독되었다는 소식, 복음주의자들이 공개 토론에서 가톨릭 논객을 손쉽게 꺾었다는 소식, 8월 10일에 200인회에서 가톨릭 미사를 폐지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칼뱅은 프랑스에서 일어난비참한 사건들에 관한 소식도 바젤에서 접했다. 1535년 2월 16일자신의 친구인 에티엔 드 라 포르주Etienne de la Forge가 산 채로 화형당했다는 소식도 그중 하나였다. 프랑스 '복음주의자들'은 독일의프로테스탄트 복음주의자들과는 비교할 가치도 없는, 선동적이고반체제적인 재세례파로 묘사되었다. 칼뱅은 바젤에서 그런 상황을 지켜보아야 했다. 당시에 그런 비난은 대단히 민감한 것이었다.독일 프로테스탄트 지배층은 과격한 사회 세력인 재세례파가 얼마나 위험한지 농민전쟁(1525)을 통해 뼈저리게 절감한 바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1533-1535), 레이덴의 얀 Jan van Leyden의 지휘 아래재세례파가 뮌스터시를 장악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이런 인상은 더견고해졌다. 재세례파가 뮌스터시에서 시도한 신神政정치는 포위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강제로 끝이 났다. 독일 군주들이 재세례파를 처형하면서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여겼던 것처럼,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국민 중에서 종교개혁가를 가장한 선동 분자들을 처형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는 꽤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파리 주교의 형이자 프랑수아 1세의 외교 대사인 기욤 뒤 벨레 Jean du Bellay의 조언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한 것이었다. 칼뱅은 기욤 뒤 벨레의 제안에 격분했다. 칼뱅 본인이 재세례파에 반대하는 논문을 쓴 적이 있기에 특히 더 화가 났다. 칼뱅은 프랑스 복음주의자들이 종교적인 동기보다는 정치적인 동기로 움직이고 있다고 의심하는 시각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것이 내가 <기독교 강요》를 출간한 이유였다." 시간이 흐르고 칼뱅은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미숙하나 문학적으로는 뛰어난 자신의 지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자 칼뱅다운 행동이었다. 칼뱅은 펜을 들고 책을 썼다.
칼뱅은 1535년 8월 23일에 원고를 탈고했다. 일정을 맞추지 못해서 그해 가을에 열리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출품하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칼뱅이 <기독교 강요》 초판을 쓸 때 자신들이 믿는 신앙에 대한 이해가 굳건해지기를 염원하는 프랑스 복음주의자들을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물론 초창기에 이 책을 구상할 때에는 그러한 의도가 깔려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저술 작업에 들어갔을 때 칼뱅이 어떤 독자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사실, '서문 역할을 하는 편지(헌사)'에 담긴 외교상의 관례와 미묘한 표현을 모두 무시하고 보면, 칼뱅이 책의 형태를 갖춘 최종 원고의 독자로 특별히 염두에 둔 이들은 프랑스 복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칼뱅이 이 책을 쓴 주요 목적은 독일 재세례파의 사례에 견주어 프랑스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박해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프랑스 복음주의자들을 '재세례파이며 선동적인 자들'로 묘사하는 진술이 프랑스 법정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독일에서도 이 표현이 널리 퍼져 나가면서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에 자존심이 상하고 격분한 칼뱅은 프랑스 복음주의자들을 '재세례파이며 선동적인 자들'로 묘사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강경하게 맞섰다. 칼뱅은 이 책이 "구원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제반 사항과 경건의 개요를 거의 망라하였다"라고 설명한다. 칼뱅은 또한 개혁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의 견해가 정통임을 입증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인 목적(프랑수아 1세에게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 반대하는 독일 군주들의 지지가 필요했다)으로 프랑스 복음주의자들을 이단이나 과격론자로 묘사하는 자들의 주장이 신빙성 없음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책은 칼뱅이 원했던 결과와 꼭 다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의도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관해서는 7장과 8장에서 자세히 살펴볼 생각이다. 지금은 종교 저술가 겸 사상가로서 칼뱅이 상당한 명성을 얻은 데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족하다.
《기독교 강요》교정쇄를 수정한 뒤, 칼뱅은 이탈리아 페라라를 향해 길을 나섰다. 아마도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사촌이자 당시 페라라의 공작부인 Duchess of Ferrara 으로 불리던 루크레치아 데 메디치 Lucrezia de Medici의 복음주의적 식견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벽보 사건의 여파로 많은 프랑스 복음주의자들이 공작부인의 저택을 안전한 피난처로 여겼다. 시인 클레망 마로Clément Marot도 그중 하나였다. 마로는 자넷이라는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그는 성 금요일 (4월 14일)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이 사건은 페라라에 있는 공작부인의 저택에서 반복음주의 정서가 퍼지는 계기가 되었고, 그 때문에 이곳에 피신해 있던 수많은 복음주의자의 처지가 난처해졌다.
성 금요일이 되자 십자가를 숭상하는 전통 의식을 위해 집안의식솔들과 자넷을 포함한(아마 칼뱅도 포함하여) 군식구들이 모두 모였다. 예식이 절정에 다다랐을 무렵 자넷이 예배실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의 행동은 당연히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무례하기짝이 없는 돌출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자, 자넷은 자신이 복음주의에 동조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페라라의 공작부인이 자넷과 같은성향을 지닌 수많은 인물을 숨겨주고 있다는 사실을 집안의 다른식구들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입장이 아주 난처해졌다고 생각한칼뱅은 바젤로 돌아갔다. (콜라동에 따르면 바젤에 가기 전에 프랑스에들렀다" 쿠시 칙령(1535년 7월 16일)에 따라 종교적 망명자들도 고국프랑스에 돌아올 수 있었다. 자신의 신념을 버렸노라고 6개월 안에공식 선언하는 조건이었다. 칼뱅은 이를 이용해 프랑스로 향했다.남아 있는 가족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1536년 6월 2일에작성한 위임장이 지금도 남아 있다. 위임장에 따르면, '법률가이자파리 주민인 장 칼뱅'은 동생 앙투안에게 누아용에 있는 집안의 사무를 처리할 권한을 주었다." 7월 15일, 칼뱅은 위험한 프랑스 영토를 통과하여 스트라스부르로 향했다.
불행히도 스트라스부르로 직행하는 길은 몹시 위태로웠다.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 사이에 벌어진 전쟁 때문에 군대가 이동 중이었기 때문이다. 칼뱅은 남쪽으로 우회하는 길을 택해야 했다. 날이저물자 잠을 자기 위해 한 도시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 도시가 바로 제네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