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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분원의 나눔입니다
+ 루가복음 5,27ㅡ32
"나를 따라라."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오를 보시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오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
공공연히 죄인이라 불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만나 주시는 예수님은 이제 마태오에게 전부가 됩니다.
자기 집의 문을 열어 큰 잔치를 베풀고, 세리들과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초대하여 친교를 나누는 식탁에 앉습니다.
세리를 불러주심에 마태오는 감격하고, 죄인들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도 이 자리가 무척 기쁘고 행복하셨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투덜댑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과 자비의 새로움을 못마땅해 합니다.
예수님은 안타까워하시며, 스스로 치유받을 일이 없고 의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당신을 만나고 따를 수 없다고 하십니다.
당신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치유받고 용서받을 필요가 있음을 아는 병든 자,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합니다.
* 기도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예수님,
당신은 영적으로 병든 인류를 치유하고 용서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제가 세리처럼 부정직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숨겨진 저의 교만을 보게 해주십시오!
서로 용서해야 하고 용서받아야 함을 배우게 해주십시오!
악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시고
돌아서서 살기를 바라시는 주님,
한결같은 사랑과 자비에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당신의 치유와 용서를 받으며
새로워지게 해주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에 더욱 열린 마음으로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3월8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루카 5,27ㄴ-32
복음이 기쁘면 회개한 것이다
페니는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심한 재정난으로 자살까지 생각한 때가 있었습니다.
급기야 미시간 주 배틀 크릭에 있는 격리 병원에 수용되었습니다.
어느 날 창문 너머로 찬송가가 들려왔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자주 불렀던 “너 근심 걱정 말아라.”는 찬송가였습니다.
그는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 “사랑하는 하느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재기에 성공하여 미국의 백화점 왕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무한한 어두운 공간에서 찬란한 태양빛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고 마음속의 무거운 짐이 옮겨져서 그 방을 나올 때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풀이 죽어서 그곳에 들어갔으나 해방되어 기쁜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시지만 그분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로 등장하고, 예수님과 식사를 함께 하는 세리와 죄인들은 회개한 사람들로 나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하시기 때문에 ‘회개’라는 것을 넘지 않으면 복음을 믿을 수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회개의 의미를 모른 채 복음을 믿으려하기 때문에 넘어지고 맙니다.
회개는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보이게 만드는 일생일대의 대전환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복음일까요?
바오로 사도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 라고 말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참으로 기쁜 소식으로 보이면 회개 한 것이고 아니면 아직 회개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자기를 죽이려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겐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주인이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나로 사는 것이 참으로 고통임을 알아 나 대신 살아줄 예수님이 필요하면 그때 회개한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자신의 힘으로는 다시 무리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필요로 했습니다.
회개 없이는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쾰른시에 열심한 신자인 프랑케 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부인의 부엌방엔 6년간 세 들어 살고 있는 서른여덟 살의 케테도 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온통비극이었습니다.
전화교환원인 남편은 가출했으며 남겨진 것은
가난에 중독된 창백한 세 자녀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케테는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케테는 한 달에 한 번씩 지저분한 여관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가난과 고생으로 부쩍 늙어있었습니다.
참다못한 케테는 남편을 향해 이렇게 소리칩니다.
“당신은 왜 이 절망적 상황에서 기도하지 않나요? 기도만이 유일한 희망인 것을 당신도 알잖아요?”
“주님은 내게서 너무 멀리 있어.”
“아니에요, 지금 우리 곁에 있어요.”
“ ... ”
이 내용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하인리히 벨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일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하느님이 눈앞에 계셔도 그것이 기쁜 소식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자신의 힘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죽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에겐 도움을 청할 주님이 항상 함께 계시고
그것이 나에게 모든 고통을 이겨낼 참 기쁜 소식이 됩니까?
그러면 회개한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8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복음: 루카 5,27-32
애야, 만만치 않은 세상 살아가느라 많이 힘들지?
복음서를 펼칠 때 마다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 한명 한명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수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대목만 소개를 해드릴까요?
세리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루카 5,27-28)
저는 여기서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에 대해서 묵상을 좀 해봤습니다.
예수님의 시선 과연 어떤 시선이었을까요?
당시 유다인들의 세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 마디로 징그러운 벌레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들은 레위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욕을 했습니다.
“저런 매국노, 로마 앞잡이, 인간 말종, 처죽일놈”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는 분위기상 말단 세리가 아니라 일정 지역을 책임지는 중간 관리자급 간부 세리였습니다.
동족으로부터 수모를 당했지만, 주머니 사정은 넉넉했습니다.
그러나 레위도 한 인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맨날 하는 일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동족들을 후려쳐서 세금을 뜯어내는 일이었습니다.
맨날 동족들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다보니, 삶의 피폐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갈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속마음을 환히 꿰뚫어보시는 예수님께서 레위를 바라보시고 그의 갈등하는 마음을 읽으신 것입니다.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다른 사람과는 백팔십도 달랐습니다.
그 시선은 측은지심의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 부드러운 시선, 안타까운 시선, 짠한 시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선을 레위에게 보내면서 그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때로 대화는 말로만이 아니라 시선으로도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시선으로 레위에게 이런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애야, 그동안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았느냐?
내가 네 마음 다 알고 있다. 네가 지금까지 겪어온 수모와 비참을 다 보고 있다.
길을 걷다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이란다.
지난 세월은 이제 뒤로 하고 나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자.”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는 평생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예수님의 그런 따뜻한 시선에 큰 위로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갑자기 레위의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걷잡을 수 없는 회심과 감사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을 것입니다.
오늘도 갖은 고통과 상처 속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도 똑같습니다.
“애야, 만만치 않은 세상 살아가느라 많이 힘들지?
속이 많이 상하지? 내가 네 고통, 네 눈물 다 보고 있고 알고 있다.
힘들 때 내가 바로 옆에 있음을 잊지 말거라. 내밀고 있는 내 손을 잡거라. 일어서거라.”
회심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레위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결정적인 말씀 한 말씀을 또 던지십니다.
“나를 따라라!” 레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어섭니다.
목숨과도 같은 장부도, 수금한 돈도 다 내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의 그 따뜻한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이 철옹성 같았던 레위의 마음을 무너져 내리게 하고 녹아내리게 한 것입니다.
그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통쾌한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오늘 우리 죄인들에게 너무나 은혜로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이런 예수님의 모습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시선으로 오늘 우리들 한명 한명을 바라보십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분께서는 우리는 예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이제 내 나이가 70이고, 80인데, 예뻐할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죄란 죄는 다 짓고 살아왔는데, 이런 나를 예수님께서 예뻐하실 리가 없어! 라고 절대 말하시면 안됩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늙었다, 추하다, 하며 외면하지만, 하느님 눈에는 언제나 우리가 사랑스럽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하느님은 나를 예뻐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를 애지중지하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강론>
(2025. 3. 8. 토)(루카 5,27ㄴ-32)
<“너는 건강하냐?” 라고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밖에 나가셨다가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27-32)”
1) ‘레위’는 ‘마태오 사도’입니다.
“나를 따라라.”는 “나의 제자가 되어라.”입니다.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제자가 되었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말로 해석됩니다.
이 말을, 글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부르심이 있었고, 부르심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곧바로 모든 것을 버려둔 채 따라나섰다는 것을 나타낸 말로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그랬다면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지는 못했을 텐데, 아마도 마태오 사도는 그 전부터 예수님을 믿고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고,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았을 때
곧바로 응답했고, 응답한 뒤에 잔치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2) 여기서 ‘큰 잔치’는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 또 자기를 제자로 불러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기 위해서 베푼 잔치로 생각됩니다.
그 잔치에 동료 세리들이 참석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마태오 사도의 가족들, 친구들, 친지들도 참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잔치이기도 했으니까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참석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라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말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보니 당신들도 죄인들이다.” 라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당시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면 부정하게 되고, 같은 죄인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전염병자와 접촉하면 전염병에 걸린다는 생각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방인들이나 세리들과 전혀 접촉을 하지 않았을까?
만일에 실제로 그랬다면, 사회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되는데, 사실 실제 상황에서는, 친구로 사귀거나 어울리지는 않았더라도, 그들도 이방인들이나 세리들과 접촉했습니다.
3)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병자를 고쳐 주려면 그 병자와 접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죄인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면 죄인과 만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전염병 환자라도, 그 환자를 치료하려면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그렇게 비난하고 있는 너희는 건강하냐? 너희도 ‘병자들’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라는
말씀에(루카 6,41.42ㄴ) 연결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자신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것은 교만죄를 짓는 일이고, 다른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죄인 취급하고,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비난하는 것은, 심판관이신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 모독죄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라는 말과 “너는 죄인이다.” 라는 말은, 둘 다 죄를 짓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세리들보다 더 큰 죄인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세리들은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위선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4)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난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또 이 말씀에는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위선자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스스로 회개하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들도 죄인이라는 것을, 또는 병들었음을 부정하는 죄인들(병자들)이었고, 자기들이 위선자라는 것을 부정하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마태 21,31-32).
먼저 회개하는 사람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회개를 끝까지 거부하면 그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병자라는 것을 부정하고, 치료받기를 거부하는 병자는, 아무리 뛰어난 명의라도 고치지 못하는 것처럼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위선자들은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사순 시기는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위선들을 찾아내고, 반성하고,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