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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첫 번째 답변
합 1:5-11
5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7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8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9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10 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이라
11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
합 1:5-11 / [갈대아 사람은 하나님의 채찍] 너희 유다의 반역자들아, 너희는 똑똑히 보고 또 쳐다보고,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 얼굴만 바라보며 기가 막히게 놀라라. 왜냐하면 내가 너희의 시대에 그토록 무서운 일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누가 이야기를 해주어도 너희가 믿지 않을 것이니, 너희가 직접 보고 겪어야 할 것이다. 6) 내가 갈대아 백성을 새로운 세력으로 키우고 있다. 그 포학하고 성급한 족속을, 점점 더 넓은 세상으로 진출하며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는 그 족속을 바로 내가 있으켜 세우고 있다. 7) 그들은 잔인하고 무서운 자들이며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행동한다.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가 없다. 8) 그 족속의 군마들은 표범들보다 더 빠르고 초원지대의 늑대들보다 더 민첩하다. 그 족속의 기마병들이 먼 곳에서 달려오는 모습은 짐승을 잡아먹으려고 내리 덮치는 독수리와 같다. 9) 그들은 모두 다 폭력을 휘두르려고 몰려온다. 열풍처럼 흥분된 얼굴로 달려들어 포로들을 모래알처럼 몰아다가 모아 놓을 것이다. 10) 그들은 만백성의 왕들을 조롱하며 고관들을 웃음거리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어떤 요새든지 하찮게 여기고 어느 성읍이든지 성벽에 흙무더기를 쌓고 넘어가서 점령해 버린다. 11) 그들은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가서, 더 먼 곳으로 쳐들어간다. 자기의 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은 죄가 이제 그들에게도 있다.
하박국의 호소에 하나님은 바벨론 사람을 일으켜 폭력을 행하러 오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답변(5-6) 하나님은 하박국 선지자의 말을 듣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앞으로 끔찍한 일이 일어날 텐데, 그들은 들어도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믿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바벨론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무너질 것이며, 그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끔찍하고 비참한 멸망이 그들의 생전에 닥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시선을 돌려 열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의 깊게 보라고 말씀하십니다(5). 그것은 지금까지 유다 백성들은 주위 나라들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자기 문제만 붙들고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사납고 호전적인 갈대아 사람들(7-10) 갈대아 사람들의 성향과 그들의 군사력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본성은 사납고 호전적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고대 근동의 온 땅을 점령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6). 한편 그들의 법 집행은 지극히 자의적이었습니다(7). 그들이 행하는 것이 곧 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강하게 내세우는 민족이었습니다(7). 바벨론 군사들은 기동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그들은 저녁에 먹이를 잡으려고 나온 늑대보다 민첩합니다.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그들의 마병은 먹잇감을 정하고 날아드는 독수리와 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흙 언덕을 쌓아서 모든 성채를 점령해 나갔으며, 점령한 열방의 왕들을 멸시하며, 귀족들을 비웃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불의에 대해 방관하거나 침묵하고 계신 것이 아니며, 바벨론을 도구로 세워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힘을 자기 신으로 삼는 자들(11) 갈대아 사람들은 자기들의 힘을 신으로 믿고 온 땅을 바람처럼 휩쓸고 지나가며 악을 행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에 가서는 하나님이 틀림없이 그들의 죄악도 심판하실 것입니다.
적용: 당신 방식대로의 응답만을 기대하지 않습니까? 상상을 초월하여 응답하실 하나님을 기대합니까?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기쁨의 존재가 된다는 사실은 행복이요, 축복입니다. 더구나 나의 주가 되신 주님으로부터 기쁨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축복입니다.
< 설 교 >
자기들의 힘을 신으로 삼는 자
합 1:5-11, 마 23:12 / 이성희 목사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어린 왕자가 자기별을 떠나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임금님의 별이었습니다. 임금님은 ‘내 가신이 왔다’며 좋아했습니다. 어린 왕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 생활이 따분해졌습니다. 어린 왕자는 임금님께 작별인사를 하러 갔습니다. 이 때 임금님은 어린 왕자를 법무장관에 임명할 테니 자기별에 더 머물러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어린 왕자는 “여기는 아무도 없는데 법무장관이 왜 필요하지요?”라고 했습니다. 그 때 임금님은 “그렇다면 너 자신을 재판하라. 남을 재판하는 것보다 자기를 재판하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다. 만약에 네가 훌륭히 자기를 재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네가 참으로 현명한 인간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자는 자신을 아는 자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자신과 화해하고 사랑할 줄 아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자신을 재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은 영원한 명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은 남의 흠을 지적하는 것이고,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고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자는 교만한 자입니다. 교만은 주변 사람을 모두 병들게 만드는 병균이라고 합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교만한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상대로 싸우기 때문입니다.
성경 잠언 16:18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합니다. 교만은 반드시 망합니다. 교만은 자기 사랑이며 자기 신격화를 의미합니다. 교만은 가장 늦게 제거되고 가장 먼저 재발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교만을 미화하거나 긍정적으로 말하는 곳은 어느 한 곳도 없습니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는 교만을 권력의 교만, 지식의 교만, 덕의 교만으로 분류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조금만 가지고 있으면 교만하기 쉽습니다. 권력도, 지식도, 덕도 남보다 조금만 더 있으면 우쭐대고 힘이 들어갑니다.
전도서 12:3에는 말합니다.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집니다. 힘 있는 자들이 쓰러집니다. 힘 있는 자들이 결국 실패합니다. 그 힘을 의지하면 패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힘을 자랑하고 의존한다고요? 그 힘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은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은 비교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문법에서 비교급과 최상급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비교급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급입니다. 절대자와 상대자의 차이입니다. 사람은 조금 나은(better) 사람, 조금 더 가진(more)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좋으신(best), 모든 것을 가지신(most)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입니다. 힘이 많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힘이신 하나님입니다.
영성가 존 클리마쿠스는 “교만한 천사에게는 귀신이 필요 없다. 그 자신이 귀신이며 곧 자기의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귀신, 자기가 원수인 어리석음을 교만한 사람은 이미 범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기를 바라며 오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첫째,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옵니다.
7절에는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라고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의 모습은 자기를 믿고 당당합니다. 고개를 바짝 세우고 다닙니다. 교만의 극치에 삽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은 자기 잘난 맛에 살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우연히 우리 교회의 사진작가인 어느 교인이 참여하는 슈퍼모델들의 자선행사에 초대받아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입구에서부터 이들이 안내하고 행사를 하는데 키가 얼마나 크고 다들 늘씬한지 평소보다 제가 작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사회자가 이홍렬씨였습니다. 또 그날 초청되어 온 사람 가운데 윤정수씨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작은 남자들만 초청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모델들의 워킹 자세가 당당합니다. 걸음에 자신감이 넘칩니다. 어깨를 쫙 펴고 앞을 보고 걷는 것이 멋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외모 채용’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위풍당당’이란 말은 아주 옛말입니다. ‘여풍당당’도 지나간 옛말입니다. 이제는 ‘얼짱당당’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합니다. 성악가나 가수들도 그렇습니다. 당당한 자신감을 가져야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당당함과 위엄이 없으면 노래가 안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런 당당함은 자기에게서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자세는 반대입니다. 고개 들고, 어깨 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무릎을 꿇었습니다. 스데반이 마지막 기도를 할 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는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세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서는 것이 아니라 엎드립니다. 성경에는 곳곳에 “엎드려 경배하고” 혹은 “엎드려 절하고”라고 합니다. 직분을 받아 안수를 받을 때에 고개를 바짝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신부가 서품할 때는 땅에 납작 엎드립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자세를 의미합니다.
모든 운동을 할 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세가 낮아야 하고, 힘을 빼야 하고,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힘이 들어있으면 안 됩니다. 야구선수가 배팅이 안 되는 날에 해설자가 말하기를 “저 선수 오늘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힘을 빼면 그 때부터 잘 맞습니다. 힘을 빼는 것이 운동입니다.
달란트 비유에는 5달란트 받은 사람이 5달란트를 남겨서 가지고 왔을 때에 주인은 종에게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큰 것으로 주겠다”고 합니다. 1데나리온은 하루의 품삯입니다.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6,000날 동안 일해서 쓰지 말고 모아야 1달란트가 됩니다. 요즘 돈으로 계산하여 하루에 5만원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1달란트는 3억 원입니다. 5달란트면 15억 원입니다. 그런데 15억 원을 가진 종이 15억 원을 더 만들어서 30억 원을 가지고 왔습니다. 여러분은 15억 원을 주면 15억 원을 남겨서 30억 원을 만들 수 있습니까?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작은 일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인간의 눈에서 볼 때는 엄청나게 큰일이지만 하나님은 작은 일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하시는 일에 비해보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힘에 비해보면 힘도 아닙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지혜는 하나님 앞에 명함도 못 내놓습니다.
사람들의 당당함이 자기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나 진정한 당당함은 나의 힘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우리 자신의 당당함은 얼마 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당당함은 쉽게 사라집니다. 공회 앞에서 선 베드로와 요한을 보세요. 얼마나 당당합니까. 세상의 힘에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과 전도자들이 그랬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이 당당했습니다. 우리들도 지금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에 있지만 굴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 당당함이 있습니다.
최근 SBS 방송이 ‘신의 길, 인간의 길’이란 4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송하여 기독교가 상당한 반발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이 아니라는 데서 이 작품은 시작이 됩니다. 방송국 측은 방송을 취소하라는 말도 듣지 않습니다. 4부작에 대한 반론을 방송해주겠다던 원래의 약속도 파기했습니다. 방송국측은 종교 간의 화해를 모색했다는 말로 변명했습니다. 그런데 종교 간의 화해를 하는데 예수님이 신이 아니라는 논리가 왜 필요합니까? 어제 날짜의 ‘기독공보’의 사설을 제가 썼습니다. 저는 맨 먼저 SBS가 타종교의 기본 절대 진리에 대해서도 4부작을 만들 용기와 자신이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왜 기독교만이 공격의 대상이 되는지 아십니까? 원래 진리는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선거 때도 보면 2등과 3등은 공동으로 1등을 공격합니다. 언론중재위원회가 개인의 인격이나 재산의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는 중재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신으로 믿는 세계인구 3분의 1에 대한 인격과 자존감의 말살이며 엄청난 재산의 손해를 입혔음으로 중재해야 한다고 봅니다. 기독교가 사회운동에 대한 방향이나 정책은 진보와 보수가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이 신이라는 사실에 대하여는 진보와 보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기총은 이렇게 열심히 SBS에 맞서는데 왜 NCC는 가만히 있습니까? 진보적인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신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리고 천주교도 이에 대하여는 같은 소리를 내야 한다고 봅니다. 나아가서 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방법으로 차제에 기독 언론에 투자하여 더 좋은 방송을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른 종교의 기본진리에 대하여 이런 방송을 만들었으면 문제가 컸을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 3, 4부를 공격적으로 편성하여 방송한다고 합니다. 그 당당함과 오만함은 어디서 나온 것이며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인간적인 당당함은 진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 있습니다.
자기들에게서 나온 당당함을 역사적으로 보면 얼마 가지 못합니다. 세상 권력의 무상함을 잘 알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아합이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나 다리오가 절대 권력을 휘둘렀지만 마지막이 비참했습니다.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말살하려 했지만 자신이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히틀러는 세계 정복을 꿈꾸고 유대인을 학살했지만 자신이 자살로 생을 마쳤습니다. 얼마 전에는 독일의 밀랍 인형 박물관이 문을 열자마자 히틀러 인형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권력이고 세상적 당당함입니다.
“로마인의 이야기”라는 책에 복음이 로마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의 열정입니다. 둘째는 부활신앙입니다. 셋째는 도덕적 순결성입니다. 넷째는 순교를 감당할 복음의 당당함입니다. 복음 외에 우리가 당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당당하게 합니다. 세상적인 자신이 주는 당당함이 아니라 복음이 주는 당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밥 브리너는 “거만함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기에게서 나오는 당당함 때문에 거만함의 함정에 빠집니다. 이것을 복음으로 배격해야 합니다.
둘째,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습니다.
11절에는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세상의 사람들은 자기 힘을 의지하고 삽니다. 자기들의 힘이 무엇입니까? 물질의 힘입니다. 지식의 힘입니다. 육체의 힘입니다. 미모의 힘입니다. 이것들이 그들의 신입니다.
오래전 이토 히로부미가 독일에 가서 비스마르크를 만났습니다. 독일 육군의 사열을 받으면서 비스마르크가 이토에게 “우리 독일 군대는 하나님 외에 두려워하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이토는 일본군이 더 용맹하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우리 일본군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비스마르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강한 것인 줄 압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진짜 강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답니다. 힘이 있는 나라들은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군사력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공격한 미국이나 테러로 미국을 공격한 탈레반, 둘 다 하나님과 알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9:23에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흔히 하는 말대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것을 자랑하는 것은 포크레인 앞에서 삽질하는 격입니다.
하늘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옛날의 권력을 보세요. 다 찾아볼 수 없습니다. 3공화국 때에 청와대에 권총을 차고 들어간 사령관도 하루아침에 권좌에서 물러났습니다. 6공 황태자도 요즘은 돈 때문에 소송이나 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정부 실세라고 하던 이도 요즘에는 초라하게 살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모습, 세상의 권력에 의존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면 웃으실 것입니다. 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힘입니다. 자기의 지식, 자기의 꾀, 자기의 힘, 자기의 판단을 의지하고 산 결과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에덴에서 쫓겨나는 것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이사야 40:24에는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라고 합니다.
열대 아메리카 산 짖는 원숭이는 정글에서 가장 소리가 큰 동물이지만 가장 힘이 센 것은 아닙니다. 겁이 많을수록 소리가 큽니다. 옛날의 어느 괴변 철학자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음이 없고, 죽은 이후에는 죽음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럴듯한 말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소리를 높이는 사람은 사실은 가장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두렵지 않은 자는 아예 그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찌어다.”(습1:7)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합2:20)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시37:7)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사41:1) 성경은 반복해서 잠잠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소리칠 자격조차도 없습니다.
마크 애터베리가 쓴 ‘삼손 신드롬’이란 책에는 “삼손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의 충동을 통제할 만큼 강인하지 못했다. 강한 남자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혼자 강한 사람은 실패합니다. 혼자 성공하려면 실패합니다. 삼손은 혼자서 싸울 때는 멋지게 해치웠으나 거대한 조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힘을 과신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실패의 원인입니다. 마틴 루터는 사면초가의 어려움 가운데서 찬송합니다.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이 찬송은 자기 고백적 찬송입니다. 이 찬송이 우리의 찬송도 되기를 바랍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순례자’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물리적인 힘 외에 우리 곁에는 근본적으로 영적인 두 개의 힘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천사와 악마입니다. 천사는 언제나 우리를 보호해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악마 역시 일종의 천사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유롭고 반역적인 힘입니다. 자신의 힘을 신으로 삼는 자는 자신도 모르게 악마의 앞잡이 됩니다. 항상 선한 생각, 선한 힘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힘을 신으로 삼겠다는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아예 물리쳐야 합니다. 이런 유혹을 물리치는 힘을 가진 자가 진정한 강한 자입니다. 시편 147:17에는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의 추위를 감당하리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힘과 위대하심을 인정해야 진정한 강자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인정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자는 겸손한 자입니다. 참된 겸손은 참된 지혜입니다.
결 론
중국 현대 작가인 쟈핑와의 ‘친구’라는 책을 얼마 전에 읽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이 책에 보면 “말 주변이 뛰어난 사람은 하늘이 그 재주를 무디게 하고, 안하무인인 사람은 귀신이 그를 훼방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울이 귀신이 들렸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귀신이 들렸습니다. 교만하고 자신의 힘을 믿고 사는 사람의 인생의 끝은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믿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당당함과 위엄을 과시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은 자기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자신을 알고, 자신을 고백하고, 자신의 힘을 부인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힘이 함께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의 길과 우리의 길은 방향이 다릅니다. 세상의 사람들의 삶은 역주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나는 벌레 같다고, 힘이 없다고 인정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고, 하나님 때문에 당당하고 위엄 있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일하시는 하나님
합 1:5-11
▧ 말씀 강해
정확하게 언제쯤인지는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마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쯤인 것 같습니다. 제가 부산에서 살았는데, 부산진역 근처에 육교가 하나 있는데, 그 육교 아래를 버스를 타고 지나다니면 항상 눈에 들어오는 글이 하나 있었습니다. 육교 난간의 간판에 크게 써 놓은 글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은 “정직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듭시다”라는 일종의 공익 광고와 같은 글귀였습니다.
저는 그 광고를 보면서도 그 당시에는 그 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냥 착하게 살자, 정직하게 살자는 정도의 의미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 그 글의 의미가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가되고, 왜 그런 글을 육교 위에 크게 써 놓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글을 보며 지나다니도록 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정직하면 잘 살수 없는 세상입니다. 제가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여러분들도 대부분 마음속으로 저의 이런 생각에 동의를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정직만 가지고 살기에는 적당하지 못한 사회라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당연히 잘 살아야 합니다. 거짓과 위선의 사람은 당연히 못살아야 합니다. 이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당연한 사실이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육교 위에다가 “정직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고 크게 써 놓지만, 그 글을 보며 지나가는 사람은 “정직하면 손해본다”라고 읽습니다.
몇 주 전에 T.V에서 부도난 대 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행적을 추적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대 기업이 부도가 나자 노동자들이 실직을 하고, 임금을 못받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하청업체들도 연쇄 부도가 나서 망해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부도난 대 기업의 최고 경영자는 요즘도 일년에 8-9개월씩 해외 여행을 다닙니다. 수십억씩 카드를 쓰고 다니기도 합니다. 초호화 저택에서 아직도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자는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망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화가 나지 않습니까? 회사를 위해 피땀을 흘리며 일한 노동자는 실직하고 생활고에 시달리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부도를 낸 기업주는 책임도 지지 않고,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단면입니다.
어떤 사람이 시장에서 장사를 합니다. 그런데 중국산을 국산이라고 속여 팔고 있습니다.100원에 팔면 되는 것을 속여서 200원에 팔기도 합니다. 가짜를 진짜라고 속여 팔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가게는 날마다 번창하고 있습니다. 한번도 단속에 걸리지도 않고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원산지를 표시하여 물건을 팔고, 폭리를 취하지 않고 정직하게 장사를 하고, 세금까지 꼬박꼬박 내면 머지않아 가게 문을 닫아야 될지도 모릅니다.
조금은 극단적인 이야기이지만, 이 세상에서 정직한 사람이 잘산다는 것은 어쩌면 꿈과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고민이 이것입니다. 왜 이 세상에 악한 사람들은 잘먹고 잘사는데, 정직한 사람들은 항상 손해만 보게 되는 것인가, 왜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이 마음대로 설치는 이런 세상을 가만히 버려두시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가, 이것이 하박국이 가졌던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1장 1-4절에서 율법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공의가 실종되었고, 악인이 의인을 꼼짝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런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지금 무얼하고 계십니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박국의 눈에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시며, 가만히 계시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하박국의 이런 질문은 하박국만이 가지는 의문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이 사는 사회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고민이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이 잘 살 수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고민입니다. 부도덕한 기업의 경영자는 호화 생활을 하지만, 노동자들은 실직과 생활고에 시달립니다. 속이는 저울과 공평하지 못한 추를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은 날마다 번성한데, 정직한 기업 윤리를 가지고 사업하는 회사들은 하루아침에 문을 닫게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뜻하지 않는 환란과 시험이 다가옵니다. 안에서 밖에서 흔들어 정신이 없게 만듭니다.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놀고 싶은 것 다 놀며 재미있게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무얼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의 질문을 들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박국처럼 하나님을 향해 “ 하나님, 이런 불공평한 세상을 왜 그냥 버려 두십니까? 왜 악인이 잘살고, 정직한 사람이 못사는 사회가 되었는데, 하나님은 가만히 보고만 계십니까?” 이렇게 질문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니까, 율법이 정상적인 기능을 상실하고, 공의가 변질되고, 악인이 의인을 억누르는 이런 사회가 된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무얼하고 계십니까? 이렇게 하박국이 하나님께 질문을 하였는데, 그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분문을 단 한 문장으로 간략하게 표현한다면, “나는 일한다”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이 왜 하나님은 가만히 계십니까라고 질문을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나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일하고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한 순간도 쉬었던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5절입니다.
(합1: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믿지 못할 놀라운 일을 이미 준비해 두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보면 깜짝 놀라게 되고, 들어도 아무도 믿지 못할 그런 일을 이미 준비해 두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어떤 경우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박국도 당시의 유대 사회가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런 타락한 사회를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보고만 계시지, 아무런 일도 안하신다고 불평하였습니다. 우리도 지금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이 정직한 사람은 잘 살 수 없고, 신앙으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려운 세상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으시고 계신다고 불평합니다.
까뮈라는 아주 유명한 철학자이며 소설가인 사람이 있습니다. 노벨 문학상도 받았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소설 중에 “페스트”라는 아주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페스트의 내용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페스트에 걸려 아주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옆에 신부와 의사와 불신자가 어린 아이의 고통스런 죽음을 지켜 보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결국에는 죽게되자 신부가 말을 합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불신자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어린 아이를 고통 속에 죽도록 버려두시는 하나님이라면 나는 평생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하박국의 불평이 바로 이 불신자의 불평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가 믿지 못할 놀라운 일을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과 뜻을 가지고 놀라운 일들을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박국을 위해 준비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6절입니다.
(합 1: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합 1:9-10)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열왕을 멸시하며 방백을 치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라
좀 쉽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일은 갈대아 사람들입니다. 갈대아 사람들이란 바벨론을 말합니다. 즉, 바벨론 군대가 유대를 침략하여 견고한 성을 허물고, 왕을 멸시하며, 백성들을 모래같이 포로로 잡아가는 무서운 전쟁을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것입니다.
갈대아 즉 바벨론 군대가 얼마나 무서운 군대이며, 얼마나 잔인한 사람들인지 오늘 분문에서 아주 자세히 말씀해 줍니다. 하박국은 바벨론 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창자가 흔들이고 뼈가 썩는 것 같았다고 하박국 3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오.
(합1:7-8)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 그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 기병은 원방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기병이라 마치 식물을 움키려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바벨론 군대는 표범같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이리 떼와 같이 피에 굶주린 자들입니다. 먹이를 채어가는 독수리처럼 빠른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유대를 헤집고 다니며 강포를 행할 것이고, 사람들을 사로잡아 갈 것입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빼앗아 자기 것처럼 가지고 갈 것이며, 다른 사람이 지어 놓은 집을 자기 집이라 빼앗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바벨론 군대의 행진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유대가 하나님을 버리고 율법을 버리고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만들자, 하나님께서는 멀리 있는 이방 민족 바벨론을 들어서 유대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들어도 믿지 못할 일을 하겠다고 5절에서 말씀하셨는데, 그 믿지 못할 일이 바벨론 군대를 동원하여 악으로 가득 찬 유대 사회를 심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유대 사회가 얼마나 악한 사회였는지 2절에서 4절까지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유대 사회에 가득 찬 악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경건하게 사는 의인들을 핍박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습니다. 공의를 덮어두고 사는 것을 보통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의 모든 악한 행위들을 보지 않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아무리 악을 행하여도 손해가 없고 오히려 더 잘살게 되니까 점점 악에 빠져들고 악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하나님의 심판을 눈앞에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자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그동안 형통하였던 악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순식간에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표범 같은 바벨론 군대가 유대 사회를 덮쳤습니다. 저녁 이리 같은 군대가 유대 성읍 곳곳에 들어갔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유대의 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려 조롱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을 멸시하며 악을 행하던 모든 방백들은 웃음거리가 되어 버립니다. 자신들을 영원히 지켜줄 것 같았던 든든한 성벽이 여리고 무너지듯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죄를 먹고 마시며,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의인을 핍박하던 모든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짐승처럼 끌려가 버렸습니다.
(합1:9-10)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합1:10) 열왕을 멸시하며 방백을 치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라
시편 1편에 보면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으며,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면서도 잘 살았던 사람들, 의인을 핍박하면서도 형통하였던 사람들, 공의를 덮어두고도 성공하였던 모든 사람들이, 바벨론의 군대 앞에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사는 사회는 정직하면 손해를 보는 일이 더 많은 사회입니다. 적당히 속이기도 하고, 거짓말도 해야 수단 좋은 사람이란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악인의 형통은 결코 부러워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잘사는 것이나, 의인을 핍박하여 성공하는 것이나, 공의를 무시하고 형통하는 것을 부러워하거나, 따라 해서는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방법으로 심판하시며, 우리들이 믿지 못할 방법으로 악을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시대 때에 온 세상에 악이 가득 차고, 율법이 무시되고, 공의가 사라지고, 의인들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도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믿지 못할 방법으로 일하고 계셨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해도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악인의 성공을 탐내지 마십시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보는 손해를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공의를 행하다가 조롱받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도 일하시며, 우리를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심판하시는 방법
합 1:5-11 / 윤석준 목사
오늘 말씀, 곧 5절부터의 말씀은 이 하박국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대답하시는 장면입니다. 주변의 넘쳐나는 행악자들 때문에 고통당하면서 하박국이 하나님께 던진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인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깊이 묵상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놀람!
하나님의 전체 대답에서 우리가 처음 맞닥뜨려야 할 내용은 5절의 말씀입니다. 제일 첫 구절이기도 하거니와, 5절 말씀은 이 대답 전체의 서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놀랄 것이다! 놀라고 또 놀랄 것이다!”
5절 말씀을 가급적 직역을 하면, “보고 또 주목하라!”(명령형입니다), 그리고 “놀라고 또 놀라라!”(역시 명령형입니다)라는 말이 나오고, 그 뒤에 “왜냐하면 너희의 날들 중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후에, “너희가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이 말을 쭉 붙여 해석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먼저 “보고 놀라라!”라고 명령을 하시면서, 그 이유가 하나님께서 한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고, 그 일은 너무 놀라운 일이기 때문에 “너희가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5절이 이 대답의 서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을 읽으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실 것이어서 이렇게 “보고 놀라라!”하시면서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는지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하박국의 질문, 즉 “왜 하나님은 강포한 자를 그대로 두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굉장히 충격적인 답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옆에서 “이렇게 이렇게 한대!”라고 일러 주어도, 전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일을 행하시겠다! 하박국은 지금 왜 하나님이 강포한 자를 내버려 두시냐고 물었는데, 그에 대한 대답으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벌이시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열국
그런데 이 놀라운 일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5절 안에서 힌트가 있습니다. “열국을 보고”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열국”이라는 말은, 번역을 이렇게 해 놓기는 했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기가 아주 어려운 말입니다. 여기서 열국이 누구일까요? 이스라엘은 누구를 보고 놀란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은 그냥 뜬금없이 온 민족들을 보면서 놀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열국”에 대한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보면 이 하박국 1장 5절을 그대로 옮겨 놓은 곳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1절 말씀인데요, 여기에 보면 이 하박국 말씀을 이렇게 옮겨 놓았습니다.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찌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사도행전에서는 이 “열국”을 “멸시하는 사람들”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오늘 5절의 “열국”을 “멸시하는 사람들”로 읽으시면 됩니다. 즉 악한 자들, 곧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고, “멸시하는 자들”, “비난하는 자들”을 보고 이스라엘은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저 ‘열국’을 본다기보다, 뚜렷한 어떤 자들입니다. 이들의 정체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대답
자 그러면 이 두 가지 사실을 놓고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인지를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의 질문, 즉 강포한 자들을 보면서 왜 하나님은 참으시냐고 물었던 하박국의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1)너희가 굉장히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2)이 굉장히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은 그들이 “멸시하는 자들”을 쳐다볼 때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멸시하는 자들을 통해서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데, 이스라엘은 그 멸시하는 자들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멸시하는 자들”이 누구일까요? 이 사실이 드디어 6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이 됩니다.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이 듣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안의, 교회 안의 강포한 자들을 처치하시기 위하여 멸시하는 자들, 즉 사납고 성급한 백성인 갈대아 사람들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치실 것입니다. 7절부터 나오는 내용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갈대아 사람들을 통하여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박살을 내실 것인지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는 구절들입니다. 즉 하나님이 말씀하신 깜짝 놀랄 대답은 이것입니다. “너희 중에 강포한 자가 있느냐? 그리고 왜 그들을 보고서도 가만히 있느냐고 물었느냐? 내가 대답하겠다. 내가 이제 곧 갈대아인들을 들어서 그 강포한 자들을 모두 박살낼 것이니라. 너희는 이 사실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심판하시는 방법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고 계시는 이 대답 안에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심판하시는 방법”이라는 주제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강포로 가득 차 있는 교회를 어떻게 심판하시는가? 우리가 지난 주일에 이 말씀의 배경이 이스라엘이니까 교회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교회 안에 강포가 가득 차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그것이 이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강포로 가득 차 있는 교회를 갈대아 사람을 통해서 심판하십니다.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교회를 갈대아 사람을 가지고 심판하신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스리실 때 근본적으로 가지고 계신 통치의 원리가 무엇인지......그것을 살피는 것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이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이 어떤 것이라고 판단을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갈대아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를 징치하신다는 것은 어떤 방식이라고 생각들을 하셨습니까? 함께 이 내용들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1. 강포(9절)
먼저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쉬운 말씀으로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9절 말씀은 몰아쳐 올 갈대아인들이 “다 강포를 행하러 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을 덮칠 갈대아인들은 다른 말로 하자면 “강포를 행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에서 무언가 깨닫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강포!” 익숙한 말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하박국의 질문에서도 그 키워드가 ‘강포’라고 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왜 듣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그에 대한 대답으로 보내시겠다고 한 이들이 다름 아닌 “강포한 자들”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강포한 자들을, 강포한 자들로 징치하시는 것입니다. 이 9절 말씀을 중요하게 보아야 합니다.
2. 권위가 자기에게 있다고 믿는 자들(7절)
그리고 7절 말씀을 보면, 이 사람들은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는다고 생각한다.”라고 합니다. “위령”(히. 셰에트)이라는 말은 현대에는 잘 쓰지 않지만, “위엄”, “존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말은 원래 ‘들어올린다’라는 말에서 유래했으니까, 높이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아주 높이 들어 올리는 것, 혹은 자기가 높이 들어 올림을 받는 것. 그래서 이것을 위엄이나 존엄이라고 번역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심판”(히. 미쉬파트)은 우리가 잘 아는 단어입니다. “재판”이나 “판결”, 혹은 “공의”나 “정의” 등에 아주 자주 쓰이는 단어입니다.
7절 말씀에 의하면 이 갈대아인들의 특징은 판결의 잣대, 재판의 잣대, 공의의 잣대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고, ‘위엄’과 ‘존엄’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이 단어들 역시 우리에게 뚜렷이 무언가를 깨닫게 해 주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1) 성경에서 ‘미쉬파트’는 항상 그 판결의 기준이 하나님입니다. 성경에서 ‘재판하는 일’은 여호와께 달린 것이고, 성경에서 ‘정의’나 ‘공의’는 그 기준이 항상 하나님의 법인 율법입니다. 그런데 갈대아인들은 그것이 ‘자기’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2) 마찬가지로 ‘위엄’이나 ‘존엄’이라는 것, 즉 ‘자기를 들어올리는 것’은 의당 하나님께 해당되어야 할 일이며, 사람은 스스로 존귀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떻다는 것입니까? 갈대아인들은 자기들 스스로를 들어올려서, 자기 스스로를 높다 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9절에서 ‘강포’가 이스라엘이 가졌던 것을 갈대아인들이 갖고 있어서, 이스라엘의 강포에 대한 대가가 갈대아의 강포인 것으로 나타난 것처럼, 7절에서도 역시 하나님은 갈대아인들의 특성에서 하나님의 백성 자신들을 돌아보게 만드십니다. 재판의 판결도 항상 여호와 하나님께 있어야 하고, 존엄도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을 멸시했고, 이제 그 하나님이 보내시는 갈대아인들로부터 ‘똑같은 것을’ 받는 것입니다.
3. 자기 소유 아닌 것을 점령하는 자들(6절)
그리고 6절도 봅시다. 6절에는 이 갈대아인들이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자다.”라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계명 강해에서도 들은 바가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분복에 만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차적으로 이 교훈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여덟 번째 계명을 지키기 위한 것이지만, 사실 구약성경에서 아주 자주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범죄상과 관련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오늘 봉독했던 아모스 같은 곳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모스에서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에 대해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중요한 것으로 “은을 받고 의인을 파는 것”,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파는 것”(암2:6),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는 것”(7절), “하나님의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워, 벌금으로 포도주를 마시는 것”(8절) 등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상 중 아주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내 것이 아닌 것을 내가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분복에 만족하지 않고 남의 것을 넘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6절에서 이 갈대아인들이 어떤 자로 표현되었습니까? “자기 소유 아닌 것을 점령하는 자들이다!” 정확하게 이 가르침에 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 “자기 소유 아닌 것을 점령한다는 것”은 명백하게 율법을 위반함입니다.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도적질의 본질이 “내 것 아닌 것에 대해 내가 탐심을 갖는 것”, “내 것 아닌 것에 대해 내가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6절의 말씀 역시 이 갈대아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반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고, 그들의 행동은 역시 이스라엘로 하여금 ‘율법’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이 과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말입니다.
4. 거짓 아브라함!(9절)
그러고 나서 9절을 보면, 사실은 이 갈대아인들이 “거짓 아브라함”이라는 점이 나타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들은 “강포”를 행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강포를 행하면서 하는 일을 9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같이 많이 할 것이요.”
“사람이 모래같이 많아지는 것”을 구약성경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에 해당합니다(창22:17; 32:12).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길 “네 후손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아지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모래같이 많아지는 것”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아닙니다. 모래같이 많아지는 것은 ‘포로로 잡혀가는 사람들’입니다. 즉 갈대아인들은 모래같이 많아지는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해 주시듯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서 많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강포를 행하는 것을 통해서 모래같이 많아집니다. 강포를 행해서 사람들을 사로잡는 일을 통해서 모래같이 많아집니다.
이것은 전혀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자주 사탄이 하나님을 대항할 때, ‘그리스도를 반하는’, ‘안티-그리스도’, 즉 ‘적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탄이 하나님을 대항한다면 그리스도와는 전혀 관계없는 모습일 것 같은데, 성경에 의하면 사탄은 자주 그리스도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즉 그리스도와 아무 관계없는 모습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말씀에서도 그렇습니다. 갈대아인들은 모래같이 사람을 많이 쓸어 모음으로써 마치 아브라함을 연상시킬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이들은 갈대아 인들이 전혀 하나님의 편에 서 있지도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유사한 모습으로 ‘많아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 아브라함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실은 “거짓 아브라함”인 것입니다.
정리
여러분, 제가 방금 말씀드린 내용들을 정리를 한 번 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강포가 가득한 교회 속에서 왜 하나님은 침묵하십니까?”라고 질문하는 하박국을 향하여, “갈대아인들이 몰아칠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는데, 하나님의 이 대답은 단순히 이스라엘에 “곤경이 닥칠 것이다.”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방금 어떤 어떤 요소들을 살펴보았습니까?
- 9절의 “강포”는 이스라엘의 강포를 연상시킵니다.
- 7절의 “심판”과 “위엄” 역시 하나님께 있어야 할 것을 갈대아인들이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사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박국의 시대에 하나님께 대하여 잘못하고 있던 일들이었습니다.
- 6절의 “자기 소유 아닌 곳에 거하려는 것” 역시,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법에서 멀리 떠났을 때,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 그리고 9절은 이 갈대아인들이 “마치 아브라함처럼” 그들에게 닥쳐옴을 보여줍니다.
이 내용들이 보여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갈대아인들을 통해서‘어떤 방식으로’ 심판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밀물처럼 밀려들어오는 갈대아인들의 얼굴에서 이스라엘 자신의 얼굴, 교회의 얼굴을 봅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데, 그 심판자의 얼굴에 ‘내 얼굴’을 붙여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에 대해 책망하시는데, 그 책망 때문에 ‘마치 거울을 보듯이’, ‘내 스스로를 볼 수 있게’ 합니다.
교회는 강포 때문에 어떤 심판을 받습니까? 신자는 강포 때문에 어떤 심판을 받습니까?
우리는 ‘자기 얼굴’을 맞닥뜨립니다. 심판으로 나를 핍박하는 어떤 불신자, 나를 힘들게 만드는 환경에 빠뜨리는 매정한 내 이웃, 나를 몇 날 며칠 동안을 잠 못 이루고 고민하게 만드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우리는 그 속에서 다름 아닌 ‘내 죄악’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의 방식을 인지하십시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시지 않는 때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악의 문제는 언제나 ‘그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돌이키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단지 제 3자의 입장에 서 있는 객관적인 죄를 지적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다른 이의 죄악을 보더라도, 다른 이의 얼굴 속에서, 다른 이가 가진 탐욕스런 표정과 일그러진 인상들 속에서 ‘나’를 보게 만드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갈대아인들에게서 유대인 자신들의 죄악을 보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향하여 죄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행위들 속에서 나를 보게 만들고 계십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가슴 속에 깊숙이 새겨져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죄의 문제! 그리고 이것은 1계명의 문제! 우상숭배! (11절)
그래서 여러분! 11절의 말씀은 이 전체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문장입니다. 함께 한 번 읽어봅시다.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자라. 이에 바람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득죄하리라.”
여러분 이 11절에서 두 가지 요소를 보셔야 합니다. 첫째는 이들의 특성이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자”라는 것이고, 둘째는 이들이 “득죄하리라”라고 묘사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첫째,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다.”라는 말은, 이 갈대아인들의 이런 패역한 습성들이 “종교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정치적인 이들이 결코 종교적 이유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정치판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정당 간에 암투가 있을 때, 혹은 어떤 정책을 가지고 싸우거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모략을 행할 때, 거기에 ‘종교적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움직이고, 자기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행동합니다. 이 행동들 속에 가끔 ‘개인적으로는’ 종교적 사유가 거기 들어있을지는 몰라도, 거시적으로 볼 때 아무도 그것을 ‘종교적 이유로’ 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갈대아인들 역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 역시 전혀 ‘종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정치적인 이유로 주변 나라들을 정복할 것입니다. 이들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문제이지 종교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나라들이 서로 싸우고, 서로를 정복하고, 알력을 행하는 것은 종교가 거기 약간 개입될 수는 있다 한들, 그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따라서 갈대아가 여기 쳐들어오는 것은 정치적이지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것을 종교적으로 이해하셨습니다! 그렇죠? 하나님은 이 갈대아인들이 이스라엘을 침범하고, 또 악을 행하고, 여러 가지 불의를 저지르는 것들을 ‘모조리’ 종교적으로 이해하셨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핀 대로, 이들은 ‘자기들은 설령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것을 모두,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행동, 이스라엘이 지금 보이고 있는 강포, 아브라함을 흉내내는 거짓 아브라함으로 이해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하나님은 11절에서 갈대아인들의 이 모든 침략과 정복의 행위들을 ‘무엇’이라고 정의를 하셨습니까? 그것을 “신을 섬기는 일”이라고 정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갈대아인들이 ‘자기의 정략을 위해서 일하는 자’라고 하지 않으시고! “자기의 힘을 신으로 삼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모두 ‘종교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종교적이다
여러분! 이 사실을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 “교회는 국가 안에 포함되어 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불신자들의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닙니다! 교회가 국가 안에 포함된 것이 아닙니다. 국가가 교회 안에 포함된 것입니다! 이해하십니까? 어떤 신학자는(폴 틸리히) “국가란 교회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국가도 만드셨고, 교회도 만드셨지만,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다스리시지만 국가도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회에 갇히신 분이 아니라, 영역적으로 국가도 뛰어넘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왕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절대 국가 안에 포함된 것이 아닙니다. 국가조차도 하나님의 법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갈대아인들이 ‘정치적으로’ 악을 행할지라도, 그것은 항상 ‘하나님을 향한 악’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모든 악이 1계명을 범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계명의 어김은 궁극적으로는 1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수렴됩니다. 살인을 하는 것, 간음을 하는 것, 이런 계명들을 어기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인 것이고, 결국 더 나아간다면 내가 국가의 법을 어기는 범죄를 저지를지라도, 이것은 사실은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갈대아인들은 사실 자기들 생각으로는 단지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그들은 1계명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11절입니다. 갈대아인의 침략, 그들의 만행, 그들의 행악을 모조리 한 마디로 무엇으로 표현을 했습니까? “신을 섬기는 문제!”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힘을 신으로 삼았다!” 무슨 뜻인가요? 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1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를 보십시오. 11절에서 둘째는 무어라고 했습니까? “득죄하리라!”
이 역시 제가 방금 말씀드린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이상한 것입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신자가 하나님께 대하여 생각할 대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갈대아인들, 이방인이며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들이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치고 있는 행위에 대하여 “이들은 지금 죄를 짓고 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둘째 역시 첫째를 잘 이해하신 분이라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불신자라 할지라도, 악을 행할 때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역, 죄의 영역을 떠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다 끝에도 거하시고, 하늘 가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신30:4; 시139:9).
따라서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서 계속 같은 것을 묻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우리는 갈대아인의 행동을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말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원래 하나님의 법을 어깁니다. 그들은 이렇게 이스라엘이나 다른 열국들을 악하게 치는 것이 아닐지라도 그들의 모든 행동들이 죄요 악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굳이 ‘종교적’ 측면에서 하박국서가 설명을 하고 있습니까?
이들의 죄악을 보여주는 이유는, 이 죄악이 바로 ‘이스라엘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갈대아인이 ‘불신자로서 자기 맘대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다’라고 하지 않고, 갈대아인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있는 득죄한 자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혹여나 이 갈대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불신자이고 우리는 신자들이니 그들의 행동과 우리의 행동은 전혀 달라”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악행 역시 하나님 앞에서의 죄라는 것을 말함으로써, 성경은 이스라엘에게 핑계치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악을 보면서 자기들의 악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정 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에 침범해 오는 갈대아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엇을 처음 생각하셨습니까? 그리고 이제 설교를 다 듣고 나서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혹시 우리는 내 삶에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보면서, 그것이 ‘모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생각지 않으면서 살지는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범신론이어서 모든 곳에서 신을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불신자는 세상 속에서 계시를 볼 수 없지만, 신자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만나는 모든 일들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눈을 크게 뜨십시오. 하나님은 내 앞에 있는 작은 어린 아이의 말 하나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내가 어제 저녁 무심코 지나쳤던 길가의 한 부랑자를 통해서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죄악을 발견하는 데 실패하고 하나님을 무심코 지나쳤으며, 이제 그 심판을 갈대아인들을 통해서 받습니다. 그들이 과연 이 심판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갈대아 사람
합 1:5-1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박국을 통해서 말씀 하시기를 믿지 못할 말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을 해봐도 안 믿는다는 뜻 이예요. 그 당시에 사람들이 믿지 못할 것을 이야기한 그 내용이나 오늘날 사람들이 주님의 강림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을 안 믿는 것이나 사실은 같은 취지입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안 믿죠. 이걸 믿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내가 착해지느냐에 관심이 있지, 착하고 안착하고 관계없이 갑자기 들이닥친다 할 때 우리는 감당이 되지 않는 겁니다.
어제 저녁인가 오늘 아침인가 제가 어머니를 집에 모시면서 큰 것을 느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정말 저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경험을 해서 ‘아! 복음이 저런 식으로 이해되는구나.’ 하고 감동을 받았는데 어머니가 세수하시면서 우셨어요. 우신 이유가 ‘세수 똑바로 해라.’ 해서 우셨습니다. 아! 바로 저거다. 뭐든지 하나님께서 ‘똑바로 하라.’ 하면 우리는 울게 돼 있구나. 그러면 사람들이 평소에 충격을 안 받는 것은 설교자가 제대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사람들의 입장을 옹호하기 때문에 그들이 충격을 안 받은 거예요. 그들이 믿을만한 것만 골라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식으로 살아간 겁니다. 무엇이 옳은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왜 내가 평소에 했던 것하고 다른 이야기를 지시하느냐, 그거 때문에 서러워서 우신 겁니다.
진짜 주님께서 우리를 정말 관리한다면 우리는 앙탈쟁이, 맨날 내가 생각했던 내 인생을 왜 하나님께서는 자꾸만 그걸 가로막고 못하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난 그 재미로 사는데.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 주님하고 늘 동행한다는 것은 늘 울고불고 하면서 동행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주님 입장이 이런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것 같으면 우리가 하는 식대로 그냥 방치하면 돼요. ‘그래, 대충해라. 대충. 그래, 대충해서 살아.’ 이렇게 하면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엄청나게 천국에 살게 하십니다. 그러면 천국에 살려면 지상에서 사는 것 가지고는 그런 식으로 세수하면 안 되거든요. 그런 식으로 옷 입으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바꿔야 돼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 하는 말이 ‘나 너하고 못 하겠다. 우리 집에 갈련다.’
사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늘 상 내뱉는 거예요. ‘주님 나 천국 안 갈렵니다. 이 땅에서 내가 살던 대로 살 게 내버려둬요. 나는 하나님 때문에 못 살겠어요. 정말. 나 천국 안 갈래. 나는 그냥 살던 대로 그냥 살 테니까 내버려달라.’는 거예요.
여기 오늘 본문에 핵심이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유다나라에 바벨론 나라가 쳐들어오는데 그 쳐들어오는 정보가 바벨론 나라의 군 사령관 최고 전략회의에서 있던 그 이야기가 뒤늦게 하나님께 정보가 새어나간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바벨론 최고 지도자들을 모아서 그 일을 시킨 거예요. ‘쳐라’ ‘누구요?’ ‘유대나라 쳐라.’ ‘하나님 믿지 않습니까?’ ‘하나님 믿는 나라니까 쳐라.’ ‘왜?’ ‘그들은 지금 천국 안 가려고 한다.’ 천국을 가야 되는데 그들은 지금 안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들은 바벨론을 부러워하고 왜 그렇게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지금 미국 간 안철수가 박 근혜씨를 얼마나 부러워하겠습니까? 안철수는 인간이 바뀌어야 돼요. 오늘 아침에 이야기했지만 부러뜨려서 천국 가는 게 대통령되는 것보다 나은 거예요. 거지 나사로도 고생했다 하지만 천국 가면 땡 잡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하박국 선지자의 시대는 여기서 좀 어려운데, 선지자가 등장했다는 말은 왕이 더 이상 그 나라는 믿을 게 못 된다는 뜻입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낼 때는 지진을 일으켜서 그 지진 사이에 육지가 갈라지고 땅이 갈라지고 갈라진 틈 사이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터져 나오게 돼 있어요. 그러면 땅만 좋았던 사람들이 물매질 하고 돌을 던져서 죽이려 합니다. 그럴 때 그 선지자는 올라왔다가 상처만 받고 다시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집니다. 불 수레 타고 사라지든 엘리사처럼 죽어서 사라집니다. 고걸 제가 아침에 상처받은 자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으려면 상처받은 자가 상처받은 현장에 주께서 몰아넣어서 그래서 네가 던진 돌에 누가 상처받았나를 만나게 해서 그 만난 그분에 의해서 구원받게 돼 있어요. 우리는 번듯하게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3세, 모든 게 행복한 거, 우리는 자꾸 이 땅에서 한번 소문내고 살만큼 제대로 살아보자, 기 안 죽고 한번 살아보자, 이런 데 정신이 팔려있으니까 인간들은 믿음이 없지만 하나님 자기한테는 믿음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거부한다고 해서 방치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대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뜨거운 물을 바가지에 받지 마시고 세숫대야에 받아서 하시고, 이는 손가락으로 닦지 마시고 칫솔로 닦으시기 바랍니다. 이거는 울든 불든 관계없이 이건 반드시 해야 돼요. 다 바꿔야 돼요. 전부 다. 천국 보내는 것은 하나님 자존심 문제기 때문에. 우리 자존심이 아니고 하나님 자존심을 위해서 우리 자존심을 박살을 내버려요. ‘니는 자존심 챙기지 마.’
강제성입니다. 이 강제성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미리 선지자가 해줘도 그들은 안 믿습니다. 안 믿으니까 주님께서 ‘안 믿는 이야기를 내가 할게.’ 나중에 일되거든 ‘우리가 믿음으로 했습니다. 믿습니다.’ 이런 소리 하지 마라. 우리 잘 믿어서 이런 일이 성사됐다고 하지 마라, 처음부터 너희는 안 믿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라 하는 것도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울어야 될지, 우리가 천국 가기 위해서 얼마나 울어야 될지, 우리도 감히 안 잡혀요. 어떤 사태가 벌어져서 울어야 될지, 주께서 친히 손으로 다루실 때 구원될 자는 그렇게 환난을 통해서 인내를 만들고, 인내를 통해서 연단을 만들어서 그래서 소망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럼 아무나 해주나? 아무나 안 해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강제로 손대서 건져주시는 사람과 아니면 다른 아무나의 차이점은 뭐냐, 차이점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유다 나라를 건지기 위해서 바벨론 나라를 쳐들어오게 해서 유다나라를 멸망시킬 때 그럴 때 자기 백성을 뭐냐, 신학적 용어를 쓰시면 육신이라고 표시하는 겁니다.
자,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육신적인 바벨론을 통해서 공격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너도 저쪽과 다름없이 같은 육신이다. 그렇게 보게 하십니다. 그 다음에 육신이 공격받을 때 저 육신적인 바벨론이 사실은 우리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공격케 했다고 눈치 채면 그건 영의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일단은 전부 육신적인 사람 이예요. 아직까지 누가 영인지 육신인지 분간이 안 됩니다. 그런데 육신적인 사태를 일으킬 때 그걸 보고 깜짝 놀라는 사람 같으면 평소에 육적인 것에 되게 희망을 갖고 살았다는 것이 티가 다 나게 돼 있어요.
그리고 아주 어려운 말인데요. 육신적인 일을 해야만 하는 바벨론, 갈대아 사람들의 모든 행동은 이건 사실은 아주 좀 이상해요. 정상이 아닌 것 같아요. 미친 것 같아. 미친 듯이 덤벼드는 것은 분명히 저 배후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금 작용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육신마저도 영의 하나님이 다룬다는 걸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그 모든 일이 우리를 구원하는 영적인 계획 속에 필연적인 하나의 코스처럼 경과로서 반드시 거기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 영에 속한 사람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덤터기로 부여받은 사람, 이게 영의 사람 이예요. 예수님께서 홀로 이루신 것이 그 다음에 영의 사람이니까 성령이 오게 돼 있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이 행한 육이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요새도 그렇지만 한 때 유행했던 게 있어요. 웟치만 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웟치만 니라는 사람이 ‘영의 속한 사람‘이라고 책이 수십 권이 나와 있었어요. 열두 광주리에 담긴…, 뭐 어쩌고 저쩌고 해서 교회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 책을 보면서 이게 복음이라고 아주 좋아 했습니다. 육과 혼과 영,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그들이 영에 속한 사람 백날 부르짖어도 육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일방적으로 넣어준다고 생각 안 하고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서 자기가 저쪽에서 예수님의 삶을 살아야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이 돼 버렸어요.
왜 육신이냐 하면 성령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언약을 다 이루시고 성령이 올 때는 다 이루신 것에 우리한테 허락을 받지 않습니다. ‘얘야, 니 속에 들어갈까 말까, 니가 허락하면 니 속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안 그러면 내가 안 들어갈게.’ 이런 게 아니고 옛날 법은 우리 코앞에 있어서 이걸 지키라고 하지만, 새 언약은 허락 없이 그냥 마구 들어와 버려요. 마구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점령군의 점령을 당한 게 돼요.
바로 오늘 이야기하는 갈대아 군대에 의해서 유다나라가 점령당한 것을 염두에 두시면 실감나실 겁니다. ‘얘, 나는 갈대아 바벨론 나라인데 너희들 나라 쳐들어갈까? 말까? 원하면 쳐들어가고, 싫으면 내가 돌아갈게.’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갈대아 군사를 다루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미쳤어요, 미쳤어. 그걸 고상한 말로 무목적적인 목적이라 이야기하는데 목적도 없는데 그냥 들어 닥치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 쉬운 예로 도박입니다. 지금 도박을 하잖아요. ‘어이 콜.’ 포커 하는데 보니까 나오데요. ‘섰다, 고, 스톱’ 이러고 하는데. 저는 왜 아직까지 고스톱을 못 배웠을까요? 은근히 경건스러움을 자랑하는 건 아닌가, 배워도 안 배웠어요. 할 때 처음에는 10원내기, 노인들 하는 이때는 우리 이거 해서 빵 사먹자, 떡 사먹자 하는데 점점 커져서 큰돈이 되게 되면 1000만원, 007 하는 것처럼 2만 불, 이렇게 되면 이건 미쳤어요. 이건 아무 목적 없는 목적 이예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도박을 하는 것이 아니고 도박이 나를 도박케 하고 있는 거예요. 처음에는 술을 한잔 두잔 자기가 술을 먹을까 말까 선택한답니다. 나중에 술이 좀 더 들어가게 되면 이젠 내가 술을 먹는 게 아니라 술이 나를 거기다 집어넣는다는 거예요. 술을 안 먹어봤으니 모르겠습니다마는 먹어 본 여러분들은 아시겠죠. 그래서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이 말이죠. 우리가 성령을 조절하는 게 아니고 성령에 취해버려라. 술이야 컨디션으로 해소가 되지만 성령은 컨디션 먹어서 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다는 걸 오해한 겁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필요할 때 부르면 쪼르르 달려오세요.’ 라는 게 함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게 바로 육신적 이예요. 그러면 영적은 뭐냐, 모르죠. 육신적이니까 영적인 것을 알 리가 없죠. 영적이란 경험한 적도 없죠. 하나님께서 언급하십니다. ‘니 육신만 아니까 영적인 것은 모르지?‘ 선지자를 통해서 미리 알려줍니다. 선지자 입장이 바로 영에 접지된 건데,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뭐냐, 갈대아 사람을 통해서 그걸 보여줍니다.
다시 네 번째 이야기합니다마는 갈대아 사람 거의 미쳤어요. 거기 미친 내용들이 나옵니다. 얼마나 미쳤는지 6절에 봅시다. 니가 놀랄 것이다. 정상이 아니죠. “보라 사납고 성급한 백성” 벌써 미쳤죠. 제 정신이 아닙니다. 성급함을 갖고 있는데 그들이 뭐하느냐, “자기 소유 아닌 것을 점령한다.” 자기 것이 아닌데 그걸 왜 뺐는데 바빠요? 자기 것이 아닌데.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애써서 노동한 것은 자기 소유권이 된다. 존로크의 경제원리 첫 번째 나오거든요. ‘동네에 감나무가 있었는데 감나무 있다는 것은 공동의 소유다. 하지만 그 감나무 밑에서 선착순해서 입 벌리고 있는데 감이 떨어져서 입 속에 들어갔으면 그 사람 입 속에 있는 감은 그 사람 소유권으로 인정해 주자.‘ 하는 것이 모든 법의 정신 이예요.
여러분, 법이란 딴 게 아니고 소유권, 상법이 제일 모든 문명의 첫 번째 법이 상법입니다. 물건을 매매하는 법, 이게 최초의 법이예요. 이게 인간이 얼마나 경제적인 동물인가 아시겠죠. 그 사람이 애쓰고 얻은 것은 막상 그 사람의 소유가 돼서 다른 사람이 빼앗지 못하도록 국가가 나서서 그걸 정확하게 정해줘야 국가의 질서가 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옛날이 사람들도 알고 있었어요. 사람들의 질서라 하는 것은 딴 질서가 아니고,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꺼, 여기서 여기까지는 네 꺼, 그거 구분해 주면 자동적으로 평화롭게 질서가 잡힌다는 그게 함무라비 법입니다. 옛날 최초의 법전이고 그 전에도 법이 있었지만. 소유 법이예요.
그런데 여기서는 미쳤어요. 갈대아는. 원래 깡패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고 술 취한 사람도 미쳤고, 전주에 있는 백화점 폭파시킨다. 전주 폭파시킨다고 한 백화점이 자기 것이 아니잖아요. 자기 것도 아닌데 폭파 시킨다. 네 것인가 그게? 자기 것이 아니잖아요.
이 말의 의미는 뭐냐 하면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항상 어떤 의미를 줄 때는 그냥 의미를 주는 게 아니고 이게 누구 소유냐, 소유개념을 통해서 그 다음에 의미를 자기한테 장착시키게 돼 있어요. 여기도 목사님 계시지만 ‘교인 몇 명입니까?’ 이렇게 묻는 것. 모든 교인들이 목사를 만나면 궁금해서 이걸 물어요. ‘교인 몇 명입니까?’ 얼마나 교인들, 아우라를 지배하고 있습니까? 그런 뜻이거든요. ‘교인 몇 명입니까?’
그리고 일반 사람 만나면 ‘한 달 수입 얼마입니까?’ ‘집사님 장사하죠? 한 달 수입이 어떻게 됩니까?’ 직장 생활하는 사람 같으면 ‘연봉이 어떻게 됩니까?’ 존재라는 것은 나중 문제고 먼저 내가 존재됨이라는 것은 내가 이정도 가졌으니까 그게 굳혀지게 되면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내가 여기 있어도 은행에 잔고 통장에 돈 없고 가진 게 없으면 그건 없는 거예요. 그 인간 자체는 없는 거예요. 신용도 없을뿐더러 아무 것도 그냥 있으나마나 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소유와 소유의 만남이라서 ‘니 나 만나서 얼마 내놓을 건데?’ 니 나 만나고 얼마 준 건데?‘ 항상 모든 만남이라 하는 것은 상거래입니다. 계모임, 동창회 모임, 교회 모임, 전부 다 거래예요. 이 교회 와서 얼마나 얻을 수 있고 얼마나 잃을 수 있느냐, 항상 그 생각하거든요. 그게 바로 육신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여러분, 고맙게 생각하세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할 때는 육신으로 출발점을 해서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만드는 겁니다. 아! 참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요. 여러분들이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없는데서 있게 했거든요. 이 말을 여러분들은 쉽게 잘 믿어요. 내가 보기에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아무것도 없는 데서는 있음이 안 나와요. 우리의 상식은 항상 뭐든지 있어요. 있는 것을 어떻게 주물러서 모아놓고 새롭게 짜잔 나오지, 아무것도 없는데서 있는 것은 마술사들이 하는 짓이지, 원래 없는 것이거든요. 있을 수 없는 거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뭐로 봤느냐 하면 인간을 천국 보내기 위해서 인간을 없는 존재로 만들어요. 없는 존재란 말은 내 꺼라는 게 없게 만들어요. 그런데 그 당시 바벨론 갈대아한테 추격 받는 유다나라는 이웃나라, 주변나라가 부러워서 ‘너는 얼마나 있는데?’ ‘나는 이만큼 있다.’ 있음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라고 자처한 겁니다. 이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이건 위반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지경을 보고 그냥 방치할 수가 없어서 ‘너희들이 법을 못 지키면 나라도 법을 지킬게.‘라고 나서서 그냥 무지막지한 갈대아인을 가지고 육신을 통해서 쳐들어오니까 그들은 하늘나라의 원칙에 맞는데 그게 너무 서러워서 우는 겁니다. ’이러지 마시라고. 이러면 우리 집에서 못 산다고.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냥 우는 거예요. 우시면서 뭐라 하느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하면서 ’여보,……‘ 이야기를 하죠. ’이게 다 생각해서 하는 겁니다.‘라고 해도 그런데 그 말이 안 들어오죠. ’내가 하는 식대로 그냥 가만히 놔둬라. 내가 필요할 때 아쉬울 때 부를 때 도와주고 근원적으로 나한테 간섭하지 마라.‘ 이게 육신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냥 방치하면 마귀 종 되는 것을 아니까 그렇게 되면 내 백성 만들기에 차질이 일어나잖아요. 주님께서 그걸 방치하지 않죠. 우리보다 더 독한 육신적인 것이 와서 쳐들어가게 해서 점령당하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뭐냐, 자기 것도 아닌데 남의 것도 겁 없이 그냥 쳐들어가는 무지막지한 그것도 성질이 얼마나 급한지 ’좋게 이야기합시다.‘ 할 수 없어요. 그냥 휙 지나가버려요.
그 다음에 7절에 봅시다.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상당히 의미 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모든 법이라는 것은 자기가 알아서 세운다는 그런 뜻입니다. ‘당신 왜 이런 짓을 합니까?’ 하면 ‘내가 내 돈 가지고 내가 쓰는데 니가 왜?’ 내 돈 가지고 내가 쓰는, 소유가 있다는 것은 그 소유를 수용할 수 있는 법도 내가 제정할 권한이 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렇죠? 내 소유 내 맘대로 쓰는데 니가 왜, 이 말 아닙니까?
법이라 하는 것은 정의로움이거든요. 정의롭다는 것은 승자만이 그걸 언급할 권한이 있습니다. 패자는 정의를 논할 입장이 못 됩니다. 반드시 강자가, 승리자가 승리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법을 만들어요. 약자는 그 앞에서 정의를 논할 입장이 못 됩니다. 어느 인간이 이 땅에서 없는 인간, 소유가 없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에요. 오직 가진 자만 인간입니다.
싸이라는 가수가 그렇게 조회 수가 12억이 넘는데 사실 육신이거든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부러워합니까? 브라질 축제에도 참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부러움이 되고 국가의 영광이 되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아들로,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아들이지만 천국의 아들은 아닙니다. 왜 영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요한복음 4장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그럼 어떻게 낳는가? 육에서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다. 거듭나라는 말은 육의 것을 폐기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육은 육을 폐기 못 해요. 그러니까 영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을 육신이라고 까발리면서 그걸 알아서 주께서 폐기처분해 주는데 그게 눈물 나는 거죠. 육으로 살던 그 모든 것이 부정당해야 되니까 어찌 눈물 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육이 뭡니까? 물으면 성질 급하고 소유로 살고, 그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이게 법이다. 왜, 이렇게 법들을 내세우는. 이 모델을 하나님께서는 유대나라와 비 언약적인 갈대아 이 바벨론 나라를 마주치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걸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강자가 너희들이 그렇게 부러워한 저들이 육신이라면 너희도 육신적으로 살면 너희는 결국은 패배자였었어. 분명히 해.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지만 육신적으로는 패배자일 수밖에 없어.
그 다음에 8절 봅시다. 완전히 미쳤어요. “그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 기병은 원방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기병이라 마치 식물을 움키려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화투를 치거나 도박을 할 때 컴퓨터 게임할 때 그냥 조금씩 ‘100원 짜리 합시다.’ 하다가 사람이 저쪽에서 ‘아, 지겹다. 고만 한방에 전부 다 쓸어 넣기 하자.’ 이러면 이쪽에서 뭡니까? 그걸 듣는 사람은 거의 100의 80은 ‘에이, 됐다. 그래, 한방이다. 오냐,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남자다. 사나이다.’ 해서 판돈을 죽~ 밀어서 한방에 끝장내자. 이렇게 나오게 돼 있어요.
육신이라 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자기가 관리 못하고 마귀가 지배하기 때문에 마귀가 기어이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한방으로 보내버리는 그런 식으로 몰아넣는데 우리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항할 수 없어요. 그래서 보통 부도 맞고 하는 경우가 많은 경우가 연대보증 섰다든지, 사실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한방에 뭔가 큰 목돈 벌려고 집어넣다가 부동산 날리고 뭐 날리고 신세 날리고 다 날리고 그냥 불쌍한 사람 돼서 그렇게 되죠. 그런데 그런 것을 했으면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되지 않습니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정신 차린다는 게 없어요. 또 다시 그런 일을 또 다시 해요.
빨리 오는 기병이라 마치 식물을 움키려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이 그들이 오죠. 그들이 올 때 사람들이 처음에는 무섭다 해요. 그 다음에 두 번째 반응이 뭐냐, ‘부럽다. 우리도 언젠가 저런 막강한 무기 써서 정신없이 탈취하면 얼마나 신나겠는가.’ 10절을 봅시다. 육신의 특징이 또 나옵니다. “열왕을 멸시하며 방백을 치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라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자라” 그러니까 육신의 확실한 증거가 “그들은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자라‘ 돼 있잖아요. 이걸 제가 육신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이게 보편적인 인류의 모든 생활의 표준입니다. 힘없이는 사람도 아니니까.
애들 공부시키는 것도 힘 키우려고 시키는 거잖아요. 전부 다 힘 키우려고 과외 시키고 다 하잖아요. 그러니 힘으로 사는 거예요. 왜, 힘이 그게 자기 신이예요. 그러니까 말씀을 맺고자 하는데 이렇게 될 때 결국 ‘목사님이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취지가 뭡니까?’라고 물으시면 하나밖에 없어요. 뭐냐 하면 ‘주의 강림을 기다리자.’ 이겁니다. ‘주의 강림을 기다리자.’ 어차피 세상은 육이고 우리는 그걸 좋아하기 마련이고, 왜 아담의 죄에서 태어났으니까 좋아하기 마련이니까 우리가 살 것은 주께서 알아서 완전히 이 세상을 폭파하는 그날, 누가복음 21장 34절 봤죠? 그날을 사모하는 거예요. 그 사모하는 능력이 육에서 벌써 나옵니다. 로마서 13장 12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그 이유가 11절에 보면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사도바울이 영의 사람입니다. 영의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이쪽은 육의 세상은 우리가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미련두지 말자는 거예요. 그리고 천국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거기에 더 마음을 가까이 두고 살자는 이야깁니다. 그 이야기예요. 어차피 우리가 우리 육신의 일 해결 안 되니까 버릇이 더럽게 들어서 남한테 기죽으면 우리는 기분 나빠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울게 만들 때 사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고마운지 알아야 됩니다. ‘제대로 하세요.’ 할 때 고마운지 알아야 돼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니까 주께서 우리를 이렇게 간섭합니다. 정말 소유로 인간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약속으로 믿음으로 된다는 것이 참 좋긴 좋지만 우리가 돈이 되지 않고 우리한테 수입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 앞에서 울고 반항하고 짜증냅니다. 하나님 앞으로 이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육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육신을 육신이라고 드러내는 그것이 영의 사람인 것을 우리는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