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곡사
태화산 마곡사가 위치한 곳의 물과 산의 형세는 태극형이라고 하여 『택리지』 『정감록』 등에서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의 하나로 꼽고 있다.
태화산에서 물길이 성보 박물관 앞에서 남서쪽으로 꺾이고 극락교에서 다시 북동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며 활모양으로 휜다.
그리고 일주문 부근에서 남쪽으로 바꿔 마곡천으로 빠진다. 반원을 두 번 그리는 영락없는 태극형이다.
마곡사 대웅전 현판은 최고의 명필이다.
상하좌우의 획과 점,
삐침 꺾임 파임 등이 힘 있고 당당하다.
필획의 연결과 조합, 字間이 한눈에 보아도 빈틈없이 일정하다.
숙련된 목수가 짜낸 창살과 같이 획과 획 사이가 疏密한 형상미가 빼어나다.
海東書聖으로 불리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서예가 김생(711~791)의 글씨로 전해지는 신품이다.
일부 전문가는 대웅보전 글씨의 연대를 아무리 높여 잡아도 조선 중기로 본다.
김생의 친필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 진위 논란은 문화재 위원회가 김생의 글씨로 확정해 수그러들었다.
퇴계 이황은 김생의 글씨를 ‘次韻惇敍風穴臺金生窟二絶’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蒼籒種王古莫陳
吾東千載挻生身
怪奇筆法留巖瀑
咄咄應無歎逼人
창주종왕과 같은 옛 예인을 논하지 말라
우리의 해동에도 천 년 전에 빼어난 사람 있었네.
기괴한 필법이 폭포수 바위에 남아 있으니
아 뒤따를 사람 없음이 한스럽구나.
창주종왕(蒼籒種王)은 창힐, 사주, 종요, 왕희지를 말한다.
창힐은 고문을 사주는 주문을 종요와 왕희지는 해서 행서 초서에 능했던 명필이다.
김생은 『삼국사기』에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나이 팔십이 넘도록 붓을 놓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시대 문인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그의 글씨를 ‘神品第一’이라고 평했다.
대광보전 편액은 필세가 부드럽고 힘이 넘치면서 유려하고 부드럽다.
표암 강세황(1713~1971)이 노희한 서법을 구사한 妙品이다.
표암은 등에 있는 하얀 반점이 표범의 무늬와 비슷해 장난삼아 지었다고 한다.
표암은 전서와 예서에 탁월했는데 대광보전은 행서로 썼다.
바로 위에 있는 대웅보전이 해서인 것과 조화를 도모한 것과 같다.
행서로 쓴 법당 현판은 아주 드물다.
표암이 76세 쓴 만년 작품이다.
대광보전 현판은 運筆을 느리게 하여 부드러움을 취하고 빠르게 돌려 강건함을 도모했다.
음악적인 리듬을 붓에 녹여 대광보전을 순서대로 천천히 출발해 빠르게 내달리다가 멈춘 듯 지체하며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급하게 나아간 뒤 긴 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붓을 거뒸다.
표암은 정조 51년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임종에 앞서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은 여덟 자의 간단한 시 한 수를 남겼다.
푸른 소나무는 늙지 않고 학과 사슴이 일제히 운다.
푸른 소나무와 학, 사슴과 같은 청고했던 그의 인생을 표현한 명문이다.
尋劒堂 편액은 영・정조대의 청백리 松下 曺允亨(1725~1799)의 친작이다.
필획이 매우 강하고 힘이 넘치는 해서이다.
결구가 짜임새가 있고 꼿꼿하다.
선방에서 지혜의 칼날을 곧추세우고 어리석음을 끊기 위해 정진하는 선승의 자세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형상이다.
서권기기 번뜩이는 편액이다.
靈山殿은 세조의 어필이다.
현판 상단에 ‘세조대왕어필’이란 款識가 있다.
세조가 마곡사에 머물고 있던 매월당 김시습을 찾아왔다가 썼다고 한다.
세조가 행차했을 때 매월당이 미리 종적을 감춰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다만 세조는 태화산 매봉에 올라 마곡사를 萬歲不亡之地의 명당 터로 지목하고 영산전 편액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