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그래프(Chronograph) 외 2편
강순
밤은 그러니까 동사다
깨다 일어나다 가다 보다 앉다 서다 눕다 울다 들이
뭉치고 엉키는 자리에
꿈틀대다 치대다 우물거리다 씹다 내뱉다 걷다 삼키다 들이
해변 위 파도처럼 넘나든다
운명이 우리를 내려다보며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시간 장치 속에 들어가 있으면
밤은 죽은 듯 활개 치는 동사다
초침보다 더 빨리 어제 한 말을 후회하고
오늘 못다 한 말을 반성할 때
동사들이 쓸려오고 쓸려간다
가만히 있어도 밤이 우리를 움직인다
동사는 과거와 현재의 우리를 합한 말
숨을 내쉬면 네가 썰물처럼 쓸려가고
숨을 들이쉬면 내가 너를 해변에 심어 놓는다
우리는 밀려갔다 밀려왔다 밀었다 당겼다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지구와 달처럼
우리 인력과 원심력을 밤에 슬피 쓰고 있다
쓴다, 라는 말은 내가 가장 아끼는 동사
너의 발자국과 나의 속눈썹도 모두 쓴다, 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지
우리는 파도의 심장을 달고
시간 속에서 서로를 철썩이다가
우리를 다 쓰기도 전에
파고를 서둘러 떠나는 심해 잠수정 같아
우리를 떠나 더 깊고 캄캄한 우리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밤의 동사들 그것이 우리인 거지
기린이 오는 방식
근심이 자라는 골목 한가운데 늙은 바오바브나무 아래
애로틱하고 슬픈 목을 들어 네가 나를 쳐다본다
너는 목뼈가 일곱 개인 질문지
너는 누구냐? 내가 다가서면 너는 뭉쳐 놓은 눈물 종이
안녕? 지구는 아주 뜨겁고 추운 전쟁 중이야
여기는 출구 없는 이데아
지하 역사 의자에 우두커니
불안에 코를 들이밀어 우울을 맡는 너는
평화와 전쟁 둘 다 보여주는 미로에서 길을 잃은 너는
백 톤의 질문 천 톤의 침묵에 눌려 목을 늘이네
너는 누구냐? 탱크가 지나가고 건물이 폭격으로 무너져
질문지가 바닥 위로 뒹구는데
너를 보호하며 밟으며 사람들이 지나간다
피란민 그림자가 공터의 꽃잎들을 이끌고 사라져서
가로등은 너처럼 목을 늘여 꽃 그림자 무덤을 온 곳에 세운다
괜찮아 괜찮아, 이런 위로는 어디에서 살 수 있니?
나 대신에 목이 길어졌니?
꿈의 회로는 날마다 불안해지고
너는 멸종을 면하기 위해 에로틱해졌구나
내가 네 옷을 입어 더 슬퍼졌구나
이웃들의 그림자도 여기저기 길어졌네
그러나 아침이면
모두 기린을 벗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직장이나 학교로 돌아간다
미소가 나를 택할 때
서랍을 뒤질 때마다 서로 다른 얼굴들이 손에 잡혀 오늘은 다정한 얼굴을 뒤집어쓰기로 해 서랍에 갇힌 얼굴들은 깊은 복도를 지나 서로의 밀실을 백 개쯤 두고 있어 밀실에는 끝없는 잠이 숲속으로 쏟아져 흰 눈처럼 소복이 쌓이는 잠을 밟고 걸어가면 나는 삼백 년 동안 밀린 빚을 갚는 마녀, 검은 얼굴을 감추고 웃다 보면 점점 하얗게 되어 가 온통 하얀 숲이 내 전생일지 모른다는 생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도 된다면 며칠쯤 서랍 속에서 울음으로 양탄자를 만들래 오늘은 어제의 컴컴한 복도를 지나 다정한 얼굴이 나를 붙드네 미소가 나를 택하면 나는 죽은 사람의 머리를 내밀어 미소를 뒤집어쓰지 늑대와 악어 들을 문밖에 두고 오늘도 안녕? 오늘의 얼굴을 다시 갖다 놓을 때까지 당신도 안녕? 안녕이라는 새 언어를 배운 지 삼십 일 정도 되어 가
― 강순 시집, 『크로노그래프』 (여우난골 / 2023)
강순
본명 강수원. 제주 출생.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이십 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 『크로노그래프』 경기문화재단 우수작가 선정 기금 수혜(2019). 전국계간문예지 우수작품상(2021).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 졸업.
버거운 현실을 견디는
‘나들’에게 공간을 선물하다
강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크로노그래프』가 출간되었다. 1998년 《현대문학》으로 데뷔한 시인은 이전에 출간한 두 권의 시집(『이십 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을 통해 현실의 고통을 견뎌내는 인간의 내적 동력을 담백한 색감의 시어들로 치환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내밀한 언어와 매혹적인 사유가 결합한 감각적 화폭을 보여주는 시인”(유성호 평론가), “가난한 잠과 꿈을 부풀려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내는 연금술사”(신동옥 시인)와 같은 찬사는 현실적 고통과 시적 색감 사이의 먼 거리를 독창적인 시적 상상력으로 연결해온 시인의 시세계에 대한 적절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나들’을 자신의 비밀 속으로 초대한다. 그들은 ‘타인’과 ‘나’라는 경계선을 통해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이들이다. “한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여러 곳에 출몰하여 국경선을 확인”하는, 그래서 “수많은 감정과 정서, 사유와 인식” 사이에서 “당신으로 인해 상처받고 당신으로 인해 위로받”(《시인수첩》 2022년 가을호 「시여, ‘나들’을 구원하라」중에서)게 되는 시인의 특별한 손님들이다. 시인이 창조해낸 공간들은 그런 ‘나들’이 자신을 구속하는 현실과의 관계를 끊고 “밤의 동사들”인 자신의 언어를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시인이 창조해낸 섬세한 언어의 길을 따라 들어가며, 그동안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던 가장 순수한 형태의 ‘나’와 만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무능한 ‘나들’ 대신 나의 퍼소나들이 힘든 세상에서 선한 공적 정의(구원)를 실현해 주길 소망”하는 시인과 독자의 공통된 소망이 실현될 수 있다. 매일 반복되는 버거운 현실 속에서 삶의 동력을 찾기 힘들었을 독자들에게, 우리를 해방시키는 “착한 마녀”의 언어를 담은 강순 시인의 시집 『크로노그래프』는 특별한 위로의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 출판사 제공 시집 소개
첫댓글 옮기면서 오타가 생겨서 몇 군데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