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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0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마태오 25,31-46
지옥이 없다는 헛된 희망을 주는 이들에게
심판의 기준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짐승의 사랑의 수준이 있고, 인간, 그리고 성인들의 사랑의 수준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지옥의 모든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 자신도 구제받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을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이와 달리 엄격한 심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지만,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에게 해준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해 드린 것이며,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하느님께 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사랑은 내가 먼저 구원받아 그 사랑의 기쁨과 능력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다른 이를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라고 말씀하십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크루지는 매우 탐욕스럽고 냉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무관심했고, 오히려 가난한 이웃과 직원들을 경멸했습니다.
어느 성탄 전날 밤 과거, 현재, 미래의 유령들을 만난 후에야 그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합니다.
그 이전까지 그는 절대 다른 이를 돕거나 구원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먼저 내면의 구원을 받은 이후에야 비로소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도움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아기를 사랑한다고 아기가 되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의 눈높이에서 아이를 끌어올립니다.
그러나 만약 아기가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물 속으로 빠져들고 그 물속에는 괴물들이 산다고
가정해봅시다.
죽을 것이 뻔한데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게 사랑일까요?
부모는 또 자녀를 낳을 수 있습니다.
아기를 사랑하는 게 함께 죽는 것이라고 믿고 뛰어들어 죽으면 그 부모를 통해 새로 태어날 자녀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는 생명을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생명에 대한 경시일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랑은 낚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깊이에 있는 물고기들은 낚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어두운 심해로 들어가서 눈을 잃은 물고기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 물고기를 낚겠다고 그 압력 높은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은 오히려 생명에 대한 경시입니다.
반면,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히틀러는 어릴 적부터 가진 열등감과 분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점차 증오와 야망으로 자신을
채웠습니다.
작은 악들이 쌓여 마침내 그는 유대인을 향한 끔찍한 학살과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고 가는 최악의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결국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고, 최후의 순간에도 회개하지 않은 채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또 다른 예로, 『반지의 제왕』의 골룸은 우연히 절대 반지를 얻은 이후부터 탐욕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 전체를 그 반지에 투자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반지를 얻으려는 집착만이 남아 삶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저에게 돈을 꾸고 갚지 못해 몇 년간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을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저에게 다가오기 어려워집니다.
가리옷 유다처럼 더는 희망을 할 수 없는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다른 죄는 용서받아도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비행기의 비상 상황에서 산소마스크를 먼저 착용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먼저 안전하고 구원받은 상태에 있어야만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방관들이 화재 현장에서 반드시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한 후에야 사람들을 구조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옥이 존재하고 심판이 존재합니다. 사랑으로 심판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모기나 기생충은 사랑을 배울 수 없는 수준입니다.
희망이 없는 것에 희망을 거는 것은 나의 생명을 경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생명 자체이십니다.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경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생명은 받아서 주는 것이라 그 받은 사랑을 함부로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하느님이 계셔야 사랑이라고 말하며 하느님 생명까지 경시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심판이 없는 게 사랑이 없는 것이지, 사랑이 있다면 심판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서도 일부러 죄를 짓는다면,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바칠 수 있는
제물이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심판, 그리고 적대자들을 삼켜 버릴 맹렬한 불에 대한 무서운 예상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히브 10,26-27)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0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25,31-46
웃픈 현실 앞에서...
사순시기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회개(悔改)입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지난 시절 지은 죄나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음’입니다.
송구스럽고 부끄러워 가슴도 치고,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가슴을 치는 행위도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죄나 악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느님께로 삶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것도 회개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또 다른 측면의 회개가 있습니다.
회개라는 표현 안에는 ‘안다’ ‘인식한다’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려서, 삶에 여유가 없어서, 진지한 숙고와 성찰의 시간을 갖지 못해서 미처 몰랐던 무엇인가를 새롭게 알게 되는 것 역시 회개입니다.
칼라너 신부님의 표현에 따르면 회개란 우리가 지니고있는 지극히 협소한 인식 지평을 더 넓게 확장시키는 일입니다.
결국 회개란?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회개란 무엇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하느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이 회개의 첫걸음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앎이 더 깊어지고 더 충만해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정말이지 중요한 노력이 하느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시는 주님,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 나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귀히 여기시는 주님, 내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시는 주님, 나의 고통을 보고 계시는 주님, 나의 작은 신음소리 조차 귀기울이시는 주님!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았으면 다음 작업이 있습니다. 이런 하느님 앞에 나는 과연 어떤 존재입니까?
흙이요 먼지요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죄와 한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지닌 존재입니다.
왜? 우리 각자 내면에는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하느님을 잘 알게 되면, 나란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나란 존재는 그 어떤 다른 곳이 아닌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 그것이 지상 과제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회개의 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또 다른 측면의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좋은 마음에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대접하고, 목 마른 사람에게 시원한 음료 한 잔 건넸는데, 그것을 받아 먹고 마신 사람들이 예수님이시랍니다.
우리는 습관처런 병자 방문을 가고 교도소 면회를 갔는데. 거기서 고생하고 있는 분들이 또 다른 예수님이시랍니다.
회개와 관련해서 요즘 시국 돌아가는 것을 묵상해보니, 정말이지 큰 회개가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너무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데, 편안하게 숙면을 취하고 김치찌개를 맛나게 드시고 있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입니다.
그는 죄중에서도 가장 큰 죄, 자신을 모르는 죄 속에 있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도 그런 죄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본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서민들이 최악의 생활고와 지속적인 스트레스로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또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직무상 어쩔 수 없이 참담한 사태에 휘말려 옥고를 치르고 가슴을 찢고 있는데, 무슨 세계 챔피언 먹은 것도 아닌데, 만면에 미소를 짓고 주먹을 불끈 쥐고, 정말이지 참담하고 웃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와 그 가족, 주변에 죽치고 있는 하이에나 무리의 회개와 새 삶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슬픈 저녁 시간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1주간 월요일 강론>
(2025. 3. 10. 월)(마태 25,31-46)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41-46).”
1) 이 말씀의 핵심 주제는 ‘사랑 실천’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고서 ‘작은 이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관한 가르침으로만 생각하다가는, ‘불우이웃 돕기’만 잘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가르침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할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6).”
그런데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온 삶으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온 삶으로’ 실행해야 할 ‘아버지의 뜻’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 실천’입니다.
어떤 율법학자가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고(루카 10,25-28), 그 율법학자가 다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0,29-37).
2) 신앙인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사랑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해야 하고, ‘나보다 작은 이들’도 사랑해야 하고, 내가 잘 아는 사람도, 잘 모르는 사람도,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도 먼 곳에 있는 사람들도 사랑해야 하고, 정치적인 신념이 다른 사람들도, 식구들도, 친척들도
사랑해야 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도 사랑해야 합니다.
단 한 사람도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정치적인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비방하면서 적대시하는 자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래도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또 다른 종교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를 사탄의 종교라고 비난하는 자들은?
그래도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3) ‘하느님 사랑’을 ‘신앙’으로, ‘이웃 사랑’을 ‘생활’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어 있는 생활이 신앙생활입니다.
만일에 신앙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쭉정이’이고, 쭉정이 같은 신앙은 신앙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마태 3,12).
반대로 사랑은 있는데 신앙이 없다면?
자신의 자유 의지로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한 사람이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될 기회가 없었던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4) ‘사랑 실천’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18).”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는, “사랑한다는 말만
하지 말고”이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만이 진짜 사랑이다.”입니다.
5)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의 44절에 있는,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는, 뜻으로는 “주님, 주님께서 언제”입니다.
주님께서 언제 ‘작은 이’가 되셨느냐고 묻는 말이고, 그렇게 되셨다는 것을 자기들이 알았다면 곧바로 가서 도와드렸을 텐데, 몰라서 못했다고 변명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답변은, “그런 처지에 있는 이들이 곧 나다.”입니다.
사실 ‘작은 이들’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6-27).”
‘작은 이들’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이고, ‘나’입니다.
한 몸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누가 누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