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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의 두 번째 호소
합 1:12-17
12 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14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15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16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17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합 1:12-17 / [갈대아 사람들의 잔인한 탄압] 여호와여, 주님은 영원히 살아 계신 나의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거룩한 주님이시오니 우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여, 유다 백성을 심판하려고 주께서 갈대아 족속을 세우셨습니다. 오 나의 바위시여, 유다 백성을 징계하려고 주께서 저 족속을 불러오셨습니다. 13) 주의 두 눈은 진실로 너무나 깨끗해서 악한 일을 구경만 하지 못하시며, 사람들이 고문과 학살을 당할 때에 그저 보고만 계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주님은 저 민족의 반역자들을 방관만 하시며, 악인들이 자기들보다 훨씬 더 의롭고 선한 사람들을 삼켜 버릴 때에, 왜 주님은 가만히 계십니까? 14) 어찌하여 주님은 저 갈대아 사람들이 몰려와서 우리 민족을 바닷속의 물고기 떼처럼 취급하고 또 지도자도 없는 벌레들과 같이 다루는 것을 허용하십니까? 15) 저 갈대아 사람들은 낚시를 들고 우리 민족을 물고기처럼 잡아 올리며 우리를 모두 그물에 몰아넣고 끌어갑니다. 그들은 어부처럼 우리 민족이 모조리 걸려들 물목에 어망을 쳐놓아 물고기를 잡아 모으듯이 하고, 그것이 좋아서 날뛰고 있습니다. 16) 그럴 때마다 저들은 그물에다 고사를 지내고 어망에다 분향을 합니다. 그런 것들 덕분에 그들이 풍성한 전리품을 얻고, 점점 더 잘먹고 잘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17) 이런 식으로 그들이 끊임없이 그물을 쳐서 뭇 백성을 잡아다가 무자비하게 학살하여야 옳겠습니까?
예언자는 죄악을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파괴시키는데도 바라보고만 계신지 묻습니다. 악인이 낚시와 그물과 어망으로 잡듯이 계속 민족들을 죽이는 것이 옳으냐는 것입니다.
왜 악한 도구를 사용하십니까?(12-13) 하박국은 심한 괴로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주님의 영원성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하고, 그의 약속은 반석과 같이 견고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는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대로 그들이 영원히 멸망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12).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갈대아인의 죄악을 참으시며 거룩하신 목적을 위해 더 악한 도구를 사용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항의했습니다(13). 오늘날도 악인이 의인보다 형통하는 현실을 보며 하나님께 반문할 때가 있습니다.
고기와 벌레같이 된 주의 백성(14-15) 유대 백성은 고기와 벌레처럼 보호자가 없이 낚시와 그물과 초망에 잡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처럼 되어도 좋습니까?"라고 하박국은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죄의 결과입니다.
갈대아인들의 교만(16-17) 그들은 소득과 식물을 풍성케 해 준 정복의 도구를 향하여 제사와 분향을 했습니다(16). 수확을 거둔 그물을 떨고 다시 열국을 살육하러 나가는 그들의 교만을 보며 그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옳으냐고 하박국은 묻습니다. 이 질문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교만을 더 부추기시는 것이 아니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17). 그러나 우상을 섬기며 자고한 자의 결국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적용: 하박국처럼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 항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선하시며 온전하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입니까? 어쩌면 남들처럼 돈도 더 많이 벌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 지위나 명예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 가운데는 내일 죽더라도 한 시간만이라도 건강하게 살았으면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갖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루고 싶은 것들도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토록 많은 것을 성취하고 싶지만 만족스럽게 이루지 못하고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 설 교 >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십니까
합 1:12-17, 벧후 3:9 / 이성희 목사
1605년의 시대 풍자 소설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는 거짓의 기사가 돈키호테에게 이렇게 거짓말을 합니다. “네 진짜 모습을 보아라. 네가 고매한 기사가 아니라 인간의 멍청한 허수아비임을 알아라”. 세상에서 거짓의 기사는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의 기사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거짓의 기사는 진실한 자에게 오히려 거짓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거짓 기사의 특성이며 습관입니다.
거짓의 역사는 창세기의 역사입니다. 에덴의 평화가 파괴된 것은 거짓말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뱀이 와서 하와를 꼬여 먹으라고 합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죽으리라고 했지만 뱀은 죽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뱀이 거짓말로 사람을 유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는다고 했지만 뱀은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뱀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거짓된 자의 특징입니다.
요한일서 1:10에는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5:10에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라고 합니다. 거짓된 자들은 지금도 우리 하나님, 예수님, 성경, 교회 그리고 성도를 거짓이라고 적반하장으로 말합니다.
지금도 거짓은 마귀의 전유물입니다. 마귀는 절대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선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말할 수 없습니다. 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항상 속일 수는 없다”. 그런데 마귀는 모든 사람을 항상 속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항상 열심히 속이지만 끝내 이기지 못하고 진실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토마스 제퍼슨은 “정직은 지혜의 책 제1장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혀의 거짓말은 결국 마음의 거짓말로 발전하게 되고 언젠가는 좋은 성품까지 타락시켜 버리는 거라네”. 거짓은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일이고 남을 파멸에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파멸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번연의 ‘천로역정’에는 인간의 죄 짐을 두려움, 거짓말, 수다, 위선, 허영 등으로 묘사합니다. 거짓말 하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을 거짓말하게 만듭니다. 거짓말을 한마디 하면 지탄을 받고, 거짓말을 한 권하면 작가가 되고, 거짓말을 한 페이지 하면 당선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거짓말은 죄 지은 사람들의 일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존 프란트는 우리는 하루에 40번 거짓말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귀의 밥이 된 사람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합니다. 예레미야 9:8에는 “그들의 혀는 죽이는 화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으로는 해를 꾸미는도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거짓이 가득 찬 세상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를 하나님은 방관하고 계십니다. 왜 방관하십니까? 언제까지 방관하십니까?
첫째,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방관하시며 잠잠하십니다.
13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를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나님은 악과 패역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방관하시며 잠잠하고 계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모르셔서 방관하시고 잠잠하십니까? 아시면서도 일시적으로 방관하시고 눈을 감아주시고 아무 말도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 전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방관하시고 잠잠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은 전지, 전능, 전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잠잠하지 못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격이 승화된 사람은 못 본 척하고, 잠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이 덜 된 사람은 못 참습니다. 한마디 해야 하고 무엇을 들었다 하면 금방 뛰어가서 입방아를 찧습니다. “할 말은 아니지만” 하면서 말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할 말이 아닌 것은 하지 말아야지 “할 말은 아니지만”이라고 한 말은 거의 모두 감정이 섞인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말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본 것이나 들은 것을 못 참고 얘기해야 하고, 입이 근진근질해서 못 견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른들은 젊은이들의 삶을 때로는 못 본 척해야 합니다. 젊은 부부들의 삶이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부모가 간섭하면 오히려 안 좋은 것들이 더 많아집니다. 그냥 눈감아 주는 것이 좋은 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갈릴리 바다에 나가셨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작은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않으십니까?”하고 소리치며 예수님을 깨웁니다. 고통의 극한까지 주님은 방관하고 잠잠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절대 제자들이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망하게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국내외가 혼란합니다. 우리 주변의 과제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 많은 것들이 얼마나 거짓으로 가르치고, 호도하고, 사회를 혼란하게 하고 있습니까? 공영방송이 거짓을 방송하여 물의를 일으킵니다. 이것은 사회에 대한, 국민에 대한 죄악입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그릇되게 가르쳐 학생들이 분개하여 촛불을 들게 만듭니다. 최근에는 광우병 괴담, 믿기지 않는 금강산 관광객 피살, 독도괴담, 촛불시위 여대생 사망 괴담까지 나와 여름을 서늘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거짓들이 난무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국기가 위협을 받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거짓을 방관하십니까? 왜 악을 보고도 잠잠하십니까?
하나님의 침묵이 때로는 답답하고, 억울하고, 걱정이 될 때도 있습니다. 엔도 슈샤쿠의 ‘침묵’이란 소설은 일본에 포르투갈의 천주교 선교사인 신부 로드리고가 박해를 이기지 못하여 배교하는 내용입니다. 배교자 로드리고 신부는 절규하듯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주여, 당신이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는데...”라고 대답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방관하시는 듯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말씀 하셔야 하는데 잠잠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서셔야 하는데 침묵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방관하시고 잠잠하시는 그 자체가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중국말에 ‘자우’(慈雨)라는 말이 있습니다. 때맞춰 내리는 비를 의미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자비로운 비입니다. 하나님은 때맞춰 주시려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내리시는 은혜를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내리십니다. 하나님은 그 좋은 비를 의인에게만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만 내리시지 않습니다.
알렉산더의 일화에 유명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알렉산더가 유대의 어느 마을을 침공하였습니다. 동네에 들어갔을 때 마침 동네 랍비가 재판을 하고 있었는데 이상한 재판이었습니다. 밭을 매매하였는데 매매 후에 땅 속에서 보물 상자가 발견된 것입니다. 그런데 밭을 판 사람도 산 사람도 서로 이 보물 상자를 가질 수 없다고 합니다. 판 사람은 이미 밭을 팔았으니 밭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판 것이나 다름없으니 내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산 사람은 밭을 산 것이지 보물 상자를 산 것이 아니니 가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난감한 랍비는 한참동안 생각하더니 두 사람에게 묻습니다. “당신에게 아들이 있습니까?” “예”, “당신에게 딸이 있습니까?” “예”, “그러면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딸을 결혼시키세요. 그리고 그 보물 상자를 결혼한 그 가정에 주세요.” 대왕은 랍비에게 어리석은 재판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랍비는 “대왕께서는 어떻게 재판하시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대왕은 “나는 둘 다 죽이고 보물을 내가 갖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랍비는 “당신의 나라에도 해가 뜹니까?”하고 대왕에게 물었습니다. “물론이지 해가 뜨고말고.”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데 대왕의 나라에도 소나 양이 있습니까?” “물론 있지.” 이 때 랍비는 “이제 알았습니다. 대왕의 나라에 해가 뜨는 것은 소나 양을 위해서입니다.” 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45에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불의한 일을 저질러도 해를 비추십니다. 길이 참으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방관이나 잠잠하심은 인간 편의 느낌입니다. 인간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방관, 잠잠함도 하나님의 부지런히 일하심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둘째, 악인은 일시적으로 풍부하고 풍성합니다.
16절에는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악인은 일시적으로 풍부하고 풍성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잘 됩니다. 이것이 지상 세계의 이치입니다.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어촌에 가보면 미신이 심합니다. 하나님 보다 귀신을 섬기고 미신을 의존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보다 일시적으로 잘 되고 풍부하고 풍성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잘되고 풍성한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첨단 기술단지를 오픈하면서 먼저 돼지머리 놓고 고사 지내고 절을 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또 이런 사람들이 잘 되고 돈도 많이 벌고 건강한 것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악인은 대체로 오래 삽니다. 말도 함부로 막 하고 남에게 예사로 상처를 줍니다. 그러면서 “나는 뒤는 없다”고 합니다. 남에게 상처를 다 주고 뒤가 없으면 뭐합니까? 악한 자들은 화풀이합니다. 속에 있는 것을 다 털어놓습니다. 자기는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그래서 더 건강하고 오래 삽니다.
악한 자들의 사는 모습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재물도 많고, 명예도 얻고, 지위도 높습니다. 세상에서 악한 자들이 의로운 자보다 많고, 높고, 빠릅니다. 그러나 이것만을 가지고 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매를 맞지 않았다고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방관하시고, 잠잠하시기 때문에 살아남아 있는 것입니다.
오스 기니스의 ‘고통 앞에 서다’라는 책이 최근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악의 도전을 대면하다’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번역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잔혹한 만행을 저지르는 현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착한 사람들이 불행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에서 하박국의 질문은 지금도 끝없이 계속됩니다. 죄인 된 인간의 사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위선자’(hypocrite)는 바리새인이라는 말의 어원을 가진 말입니다. 옛날 로마 극장의 배우들은 모두 남성이었습니다. 극중에서 여자 역이 필요하거나 어떤 특별한 역이 필요할 때는 남자 배우들이 마스크를 썼습니다. 이 말은 가면을 쓴다는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위선자’라는 말은 연극에서 어떤 역을 맡아 일시적으로 가면을 쓴 사람을 의미합니다. 위선자는 일시적으로 자신을 감추는 자입니다. 일시적으로 풍부하고 일시적으로 잘 되는 자를 의미합니다.
제가 아는 어느 집사님은 오래 전에 아주 높은 분의 비서였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높은 분에게 주는 봉투가 많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봉투가 얼마나 많은지 중간에서 적당히 떼먹어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중간에 가로챈 돈을 모아 후에 대구에서 버스를 몇 대 사서 운수업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사업이 잘 되었는지 이러다가 금방 재벌 되는 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당시만 하더라도 보험이라는 게 없던 때라 차 한대가 인사사고를 내서 돈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는데 차례로 사고가 나서 돈이 줄줄 새어나갔습니다. 사업은 망하고 후에 예수를 믿고 다른 사업으로 재기하였습니다. 그 분의 말이 처음에는 바람 만난 배처럼 잘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부정한 돈은 다 새어나가게 마련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정한 돈으로 하는 일도 일시적으로는 잘 됩니다. 하나님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일이 일시적으로는 잘 됩니다. 일시적 풍요는 세상이 주는 풍요입니다.
설교가 스펄젼 목사님의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이아가라폭포 위쪽 강에서 유람하던 배에 구멍이 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배에서 얼른 뛰어내려 강 옆에 심겨져 있는 작은 나무 가지를 잡았습니다. 그 때 강 위에 통나무 하나가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가지보다 더 큰 통나무를 잡았습니다. 얼마 후에 이 사람은 나이아가라폭포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일시적 평안, 일시적 형통, 일시적 풍부를 추구하며 뿌리가 없는 것을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세상이 주는 일시적 풍요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로 가이사에게 고소하여 로마로 갑니다. 바울의 호송을 책임지고 있던 백부장은 시돈에서 배를 타고 미항이란 곳을 거쳐 뵈닉스에서 겨울을 나기를 원했습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 항해를 시작하자 바다가 그들의 항해를 도와주었습니다. 사도행전 27:13에는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유라굴로라는 태풍이 불어 사람들의 목숨만 겨우 부지하고 배와 화물은 모두 바다에 다 버리고 멜리데라는 작은 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이 때로는 시작이 얼마나 미끄러지듯 순조로운지 모릅니다. 이것에 많은 사람들은 속습니다. 악한 자들의 하는 일은 이렇게 일시적인 형통과 풍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성경 잠언 24:19에는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악인이 일시적으로 잘 되는 것은 부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일본과 한국은 멀리도 가까이도 못하는 나라입니다. 일본이 최근 다시 독도 문제로 우리의 비위를 건드리는 것을 봐도 실망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일본을 믿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외래종교가 들어가 성공한 적이 없는 나라입니다. 일본은 800만 신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우리나라는 외국에서 기독교가 들어와 가장 성공한 나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슬람이 우리나라를 포교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한국을 통하여 세계 이슬람화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미국과 가장 가까워 미국을 이슬람화하는 공략의 중간 거점으로 가장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요즘 이슬람이 엄청난 물량공세로 포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미신이 성하고 귀신이 많은 일본이 왜 잘 살고 풍요합니까? 우리의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물에 제사하고 투망에 분향하는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잘 될 것이라고 이미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없이 잘 사는 것보다 예수 믿고 못사는 것이 낫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예수 믿고 잘 사는 것이 제일입니다.
결 론
진리라는 히브리말은 ‘아메트’ 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24자의 첫 자와 가운데 자와 마지막 자가 모여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진리는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이 같아야 합니다. 반면에 거짓이란 말은 ‘샤카르’ 인데 마지막 자들이 모여 만들어졌습니다. 언제나 진리는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짓은 언제나 끝입니다. 일시적인 풍요나 일시적인 정직이 아니라 처음이나 중간이나 마지막이 동일한 풍요와 정직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진리에 사는 사람은 처음이나 중간이나 마지막이나 동일한 복을 받습니다.
요한삼서 3절에는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고 합니다. 부자가 되고, 건강하게 살고,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이런 자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종교적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가장 철저하고 신명나게 악을 저지른다”고 하였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악을 자행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악랄한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교리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죽이고 파괴하고 미워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적은 로마인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인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주의자입니다. 율법주의자입니다. 종교인이라고 하는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가장 큰 적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섣불리 아는 사람들입니다.
진리와 가장 가까운 것이 거짓 진리입니다. 거짓 진리가 참 진리인 기독교를 훼손하고 폄훼하고 비난합니다. 이런 세상에 거짓이 난무하지만 하나님은 방관하시고 잠잠하십니다. 그러나 결코 진리는 패하지 않습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라는 찬송처럼 변치 않는 십자가의 진리로 이 시대를 승리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하박국 1:12-17 / 김광선 목사
오늘 설교 제목을 한번 같이 따라서 하겠습니다.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망해가는 조국 유다를 바라보면서 절규하고 있는 선지자 하박국의 외침입니다.
하박국은 기원전 660년경 모순과 비극의 시대를 살아가던 선지자였습니다.
우리나라 강원도 크기 밖에 안 되는 이스라엘은 이미 남북으로 갈라진 지 60년가량이 흘렀고, 북 이스라엘이 BC 721년 근동지역의 패권을 차지한 바벨론의 침략으로 망했습니다.
이제 그 멸망의 기운이 서서히 조국 남유다에 가까이 왔음을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하박국 시대 남 유다의 왕은 여호야김이었습니다.
앗수르제국이 무너지고 그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열강들의 전쟁이 있었는데 BC 609년 이집트와 바벨론간이 벌어진 갈그미스전투였습니다.
이 전쟁은 무승부로 끝나게 되고 이집트의 바로느고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호야김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고 조공을 바치게 합니다.
4년 뒤 BC 605년에 다시 이집트와 바벨론과의 전쟁이 있었는데 이 전쟁에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이겼습니다.
느브갓네살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 이집트 성향인 여호야김을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가려다가 살려 주면서 앞으로 바벨론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여호야김은 이집트를 섬겨야할지 신흥제국 바벨론을 섬겨야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오랫동안 중동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었던 이집트와 신흥제국 바벨론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해야 했고, 국내적으로는 나라가 어수선해지자 관리들의 부패가 극에 달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망했고, 지금 망해가고 있는 조국 남유다를 보면서 격동의 시대, 비극의 시대를 살아가던 하박국의 외친 “우리는 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라”는 이 한 마디는 마치 우리 시대를 향한 외침같이 들립니다.
현재 우리의 남북문제는 지금 전쟁 상황으로 달리고 있는 것 같고, 정치권과 국민들은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져 기차 레일처럼 평행선을 그리며 쉼 없이 싸우고 있고, 법과 질서는 실종이 되고, 이익집단들의 황포는 도를 더해가고, 사회전반에 걸친 도덕적 타락은 갈 때까지 간 것 같은 느낌마저 들고 있습니다.
이대로 더 가다간 망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습니다.
이런 격동과 모순의 시대 속에 우리도 선지자 하박국처럼 “우리는 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망에 이를 수 없습니다”고 외칠 수 있는 이유를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I. 하박국의 두 가지 항변
1. 왜 악인들이 잘 되고, 의인들이 고통을 당합니까?
부조리한 세상이 어쩌면 이렇게 잘 굴러가고 있는지 하박국은 회의를 느끼고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면 악인들이 망하고 의인들이 잘돼야 하는데 세상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악인들이 더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악인들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기에 이 세상에서 잘 삽니까?
3절에,‘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간악’ ‘패역’ ‘겁탈’ ‘강포’ ‘변론’ ‘분쟁’은 당시 시대를 대변하는 단어들입니다.
관리들의 집단적 부패, 계층 간의 반목, 공법의 실종, 상습적인 폭력이 사회전반의 문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정직하고 근면하고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의인의 삶은 무능하고 융통성 없는 모습으로 비쳐지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신다면 당신이 만든 세상이 이렇게까지 무질서하고 타락하도록 내 버려두실 수 있느냐는 항변입니다.
우리도 뉴스 보기가 무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그래도 세상은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박국의 눈에는 모순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2. 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포악한 바벨론에 침략 당하도록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나의 백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구약시대 장구한 세월 동안 하나님은 그 많은 나라들과 민족들 가운데 오직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나타나시고 함께 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긴 적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가장 협오하시는 우상을 섬기는 악한 바벨론은 저리 강한 나라가 되어 당신의 백성들을 침략하도록 허용하시는 것인지 하박국이 보는 역사적 문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항변해 주는 것 같습니다.
왜 하나님을 가장 열열이 섬기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은 이렇게 힘이 없습니까?
이 조그만 나라가 남북으로 갈린지 반세기가 넘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남한 땅에는 아시아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교회들이 있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는 의인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북의 저 악한 김정일이 저렇게 날 뛰고 있는데 하나님은 계속 방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 밑에서 고통당하는 우리 동포들의 신음 소리에 하나님께서 귀를 막고 계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바벨론처럼 우리 주변에 얼마나 악한 강대국들이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없다’는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중국이 망하지 않고 지금 세계의 리더로 나설 정도로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하늘을 향해 대적하는 공산주의 국가가 이렇게 잘 될 수 있는지요?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일본 같은 나라가 망해야 되는데 오히려 더 잘 되고 있습니다.
경제 대국, 군사대국이 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이 두 가지 시대적 모순의 문제, ‘악인이 잘 되고 의인이 고통을 받는 세상’ ‘조국 유다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포악하고 잔인한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해야 하는 역사적 현실’ 그래서 하박국은 절망에 빠지고 맙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히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3:16)
조국 유다가 결국 망하고 만다는 하나님의 계시 앞에 하박국은 절망의 늪에 빠져 초주검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망하게 되는구나!
우리는 결국 죽게 되는구나!
하지만 하박국은 그런 절망의 한 가운데서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라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합3:17-19)고 했습니다.
“비록 바벨론에 의해 조국이 망한다 할지라도, 나의 삶의 존재와 기반이 다 무너져 내린다 할지라도 나는 기뻐할 수 있다! 하나님 한 분만 내게 계신다면 나는 노래할 수 있다!”고 하박국은 외친 것입니다.
절망의 현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현실은 그대로 있고, 역사는 하나님의 예언대로 진행이 되 가고 있는데 어떻게 절망을 넘어,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망에 이를 수 없습니다”고 힘 있게 외치면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반전이 생겼습니까?
시대적 모순을 안고 하나님께 기도한 하박국은 하나님께로 응답을 받습니다.
하박국 2장 4절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정확한 원문의 번역은 “오직 의인은 그 믿음, 곧 하나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나의 신념’ ‘나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믿음으로 살리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믿음’만 있으면 시대의 모순과 절망을 이기고 ‘우리는 망할 수 없습니다고 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이 절망 속에서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하나님의 믿음’이란 어떤 믿음입니까?
1. 구원의 하나님
12절에,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여호와’란 이름은 출애굽기 6장 2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다”고 했습니다.
애굽의 노예 살이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구원의 하나님’으로 모세에게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집트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 앗수르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 시대의 모든 모순과 바벨론 제국으로부터도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환난의 날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환난을 당할 때마다 야곱은 ‘구원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창35:3)이라고 구원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믿음이 하박국을 절망 중에서도 희망의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신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 축원합니다.
2. 전능하신 하나님
12절에,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반석’이란 말은 하나님의 능력과 전능하심을 말합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시며 있는 것을 없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간악’ ‘패역’ ‘겁탈’ ‘강포’ ‘변론’ ‘분쟁’으로 가득한 세상일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다 점령한 강력한 바벨론일지라도 하나님은 하루아침에 ‘메데 와 파사’ 제국을 들어 바벨론을 멸망시킨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바벨론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박국에게는 절망을 이길 힘이 생겼습니다.
우리를 지금 절망케 하고 있는 실체가 무엇입니까?
사람입니까?
물질입니까?
직장이나 사업입니까?
주변 나라들입니까?
모든 절망을 날려 버릴 수 있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르시기를 축원합니다.
3. 거룩하신 하나님
12절에서 다시 말하기를,“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라고 하였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그 앞에 어떤 불의나 모순도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악인들이 잘 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속성은 ‘악’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박국도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합1:13)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남 유다 가운데 설치고 있는 ‘간악’ ‘패역’ ‘겁탈’ ‘강포’ ‘분쟁’과 ‘변론’을 오랫동안보고 계실 수 없습니다.
벌하시고 마는 것입니다.
전쟁으로, 기근으로, 전염병으로 벌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있는 ‘악’을 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악한 바벨론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고 괴롭히는 것을 보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악한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박국은 이해할 수 없었던 역사 세계의 모순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1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거룩이신 것처럼 성도의 존재 방식도 ‘거룩’이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수준처럼 거룩하라는 말이 아니라 거룩을 의식적으로 의지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적어도 성도의 티가 나야겠습니다.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삶의 모습 속에서 ‘거룩’이 풍겨 나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영원하신 하나님
12절에,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이란,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다는 의미에서 쓰여집니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 안에 존재합니다.
시간 속에 사는 인생들은 너무도 가변적인 삶을 삽니다.
시간 속에 사는 나라들은 흥했다가 망하는 가변적인 나라들입니다.
시간 안에 사는 인생은 끊임없는 모순과 비극에 시달리면서 삽니다.
심지어 역사상 최고의 영화를 누린 솔로몬 왕 마저도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2:23)고 했습니다.
어차피 시간 속에 사는 인생은 다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을 초월해 있는 ‘영원’을 사모하게 하셨습니다.
전도서 3장 11절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의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이 땅에 모순과 비극이 영원토록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하박국은 망하는 조국을 보면서도 하늘의 소망으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모순과 비극이 없는 영원한 나라를 주시기에 하박국은 이 땅의 고통과 비극을 넘어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기뻐하고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힘이 듭니까?
어렵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고 하셨습니다.
5. 공의의 하나님
12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 두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이란 뜻은 ‘그분답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의인들에게 상급을 주시고 악인을 심판하시는 것은 그분답게 행동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공의로우시면서 동시에 불의한 자를 의롭다 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속성이 모순되는 것 아닙니까?
십자가가 그 해답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을 심판합니다.
하지만 회개하는 죄인을 의롭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답게 행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ET처럼 이상한 교인들이 많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단 한 가지 속성만 붙들고 삽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사랑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계속해서 은혜 주시고 축복 주시리라는 굳센 믿음을 가지고 삽니다.
이런 교인들은 ‘양심에 화인’을 받은 멸망하는 자들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실컷 좋은 말씀 듣고 은혜 받고 교회 밖을 나가서는 전혀 믿음으로 살지 않고 세상 사람보다 더 ‘간악’ ‘패역’ ‘겁탈’ ‘강포’ ‘분쟁’과 ‘변론’을 일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행하십니다.
불의를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상상을 초월할 만큼 한없는 사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했습니다.
6. 신실하신 하나님
12절에, “나의 하나님”이라는 하박국의 사상은 곧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계약 관계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은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린 적이 있습니까?
구약 4,000년, 신약 2000년이 지나는 동안 아직도 이스라엘은 건재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인류학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라 잃고 2000년 동안 그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다가 다시 나라를 회복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인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 2-3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6,000년 동안 이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 오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죄 때문에 바벨론 군대에게 침략을 당해 망할 수는 있어도 영원히 망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사 43:1)
신실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박국은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이 잠시 징계를 받을 수 있겠지만,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시30:5 )는 말씀을 기억하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미래의 영광스러운 복에 대한 우리의 모든 소망은 하나님의 신실성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완전한 확신을 가질 때에만 평안 가운데 살 수 있고, 미래의 삶을 확신을 갖고 고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험받는 자, 염려하는 자,두려워하는 자,실망하는 자들이 모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신실하시다는 지식 속에서 새로운 희망과 힘찬 활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약속하신 말씀에 대해 항상 신실하실 것입니다.
성도가 비록 극한 어려움에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결코 그들에게서 자신의 인자하심을 옮기시지도, 신실하심이 끊기는 것을 용납하시지도 아니하실 것을 알 때 평안과 확신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의인은 오직 하나님의 믿음으로 삽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시대의 모순과 국가의 비극을 ‘하나님의 믿음’으로 해결했습니다.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망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절망 중에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죄 때문에 망할 수 없고, 바벨론의 침략 때문에 망할 수 없다고 외쳤습니다.
우리도 우리 시대의 모순과 국가적 비극을 보고 있습니다.
곧 망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하박국처럼 외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한 이 시대의 영적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망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 때문에, 우리의 죄악 때문에, 우리의 무능 때문에 우리는 망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망할 수 없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고 하박국처럼 오늘의 모순과 절망 속에서도 바벨론같은 강대국들의 위협 속에서도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박국, 하나님께 항의하다.
하박국 1:12-2:4 / 이상웅 목사
금년이 625 한국전쟁 70주년이었으니 70대 이하의 세대는 감사하게도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입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몸으로 느낀 세대는 절대 전쟁만은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죽고, 다치고, 생이별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추악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가졌다는 유대인들조차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경험한 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며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쟁의 비참함과 전쟁에서 패하여 나라를 잃은 서러움은 그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로서는 감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무법천지인 유다의 폭력을 하나님께 고발했습니다. 애굽의 뒷배를 믿고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왜 내버려 두시냐, 언제까지 저런 꼴을 눈 뜨고 보아야 하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입을 여셨습니다. 그 대답은 자기 멋대로 날뛰고 무자비하게 폭력을 자행하는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징벌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를 징벌하는데 바벨론을 끌어들이신 것입니다. 이미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가고, 우상숭배하는 자들과 혼혈이 된 것을 본 하박국으로서는 하나님의 대답이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앗수르까지도 멸망시킨 포악자 바벨론이 유다를 쳐들어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부녀자들은 겁탈을 당하고, 재산은 빼앗기고, 바벨론의 종으로 끌려갈 것입니다. 유다의 미래는 처참하고 암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을 어찌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는 것입니까? 하박국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자신도 납득이 되지 않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백성들에게 전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선지자 하박국은 백성들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께 달려갔습니다.
1. 냉정과 흥분 사이
하박국은 12절 말씀으로 하나님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계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전능하심, 영원하심, 거룩하심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는 자는 결코 망할 수 없다는 것이 하박국의 믿음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이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다를 심판하기 위해 바벨론을 세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제 믿음은 뭐가 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박국은 점점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13절입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유다가 범죄하였다지만 바벨론 같겠습니까? 어떻게 더 악한 자가 그보다 의로운 자를 삼키게 내버려두신단 말입니까? 차마 악을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이것은 못 본 척 하십니까?
흥분한 하박국은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14절입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십니까? 당신의 백성이 물고기와 벌레 취급을 받아도 괜찮은 것입니까? 17절입니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만족함이 없이 끝 모르게 날뛰는 포식자에게 계속 당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하박국은 질문의 형식을 취했지만 이것은 항변이고, 항거입니다.
하박국은 자신이 알고 믿고 있는 하나님과 앞으로 유다가 부딪히게 될 현실이 도무지 조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몰아세웠습니다. ‘하나님! 실망했습니다. 그렇다면 내 믿음은 뭐가 되는 것입니까?’ 이런 하박국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십니까? ‘어찌 감히 하나님께 저렇게 거칠게 항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엄하도다’ 이런 생각이 드십니까? 신앙은 기존의 대답을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고 있는 바와 그렇지 못한 현실 사이에서 조화되지 않을 때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사람들은 ‘일단 믿어봐!’라고 말하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말입니다. 하박국처럼 하나님께 왜 이러냐며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선지자 요나도 항의했습니다. 요나 4:9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회개했다는 이유로 너무도 쉽게 그 악한 니느웨 백성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께 대드는 요나를 하나님은 “너 반항하는거야”하며 찍어 누르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12만명이나 되는 니느웨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요나처럼, 하박국처럼 항의하는 자가 없었다면 개신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 이루어진 ‘개신교’라는 말은 ‘프로테스탄트’입니다. 프로테스탄트는 ‘항의하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잠잠하지 않고 계속 이의를 제기하는 불평 불만자’라는 좋지 않은 의도로 카톨릭 측에서 붙인 명칭이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가 이 명칭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그저 주어진 답을 받아들이라는 압박을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지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 같은 수많은 현실을 경험합니다. 이 둘 사이를 좁히고, 조화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 외치고, 항의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 아니라 신앙을 위해 불가피한 것입니다.
2. 파수하는 곳에 서다
하박국이 하나님을 몰아세우고, 흥분하여 격렬히 항의를 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흥분했던 하박국이 어디에 있습니까? 2:1입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파수하는 곳, 성루에 서 있었습니다. 그곳은 파수꾼의 자리입니다. 파수꾼은 한 순간을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적의 공격이나 다른 곳에서 오는 전갈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이를 알려야 하는 것이 파수꾼의 역할입니다. 하박국은 파수꾼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조화되지 않는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고통하며 항의하는 것은 기다림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기다림이 없는 항의는 진정한 항의가 아니라 단순한 푸념이나 원망, 넋두리에 불과합니다. 순간적으로 위안은 될지 모르지만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항의한 것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의 답을 기다렸습니다. 고발장을 접수했으면 처리과정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조급합니다. 빨리 처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다림이 조금만 길어지면 초조해지고 지칩니다. 심지어는 의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다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의탁했다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반드시 그 기다림은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항의하는 것이 신앙생활 중 불가피한 일이라면 기다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왜 즉각 답을 하지 않으시고 기다리게 하실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는 아이에게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어릴 때는 몰라서 ‘왜?’라고 부모에게 묻지만, 청소년기에는 ‘왜, 나는 안 되는데?’라고 합니다. 부모는 하는데 왜 나는 못하게 하냐는 항의입니다. 그때마다 부모로서 대답을 해줍니까? 아이의 눈높이에서 설명할 길이 없어서 답을 못해주기도 하고, 답을 하는 것이 서로 감정만 상할 수 있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해서 답을 안하기도 합니다. 부모의 대답을 이해할 만큼 성장하기를 기다리기도 하고, 때가 되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기도 하지 않습니까? 자녀 입장에서는 답답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자녀를 외면한 것은 아닙니다. 늘 자녀의 성장을 함께 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질문에 즉답을 하지 않는다면 이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즉각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신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거나 외면한 것은 아닙니다. 답답해하며, 고통스러워하며 그 과정을 지나는 것을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이 몇 날을 파수하는 성루에 서서 서성거렸는지 모릅니다. 얼마를 기다렸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2;2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하나님의 대답을 묵시라고 했습니다. 묵시란 영어로는 vision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보여지거나 들려지는 말씀입니다. 너는 선지자이고, 파수꾼이니 나의 대답을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명백히 새겨라, 전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명백히 새겨서 전해야 할 하나님의 대답은 3-4절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구절은 당시 하박국의 상황에서 주신 대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를 초월해서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대답을 당대에는 어떤 의미였고, 신약시대의 우리 성도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정한 때, 그 종말의 때가 속히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 종말이란 누구의 종말이겠습니까? 하박국 당대에는 유다를 멸망시킬 바벨론의 종말입니다. 바벨론의 종말은 곧 유다의 포로생활의 종말, 즉 유다의 회복입니다. 유다가 망할 것이지만 완전히 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흥하는 것 같지만 바벨론이 완전히 망할 때가 곧 이를 것이란 대답입니다. 사업이 실패해서 접었지만 다시 일으키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절대 절망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신약의 성도에게는 어떤 의미입니까? 바벨론은 악의 세력 전체를 대표하는 말입니다. 악에 대한 종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악이 득세하고 흥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는, 기다리고 있으면 지체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에서 첫 번째 살펴본 것은 그 종말의 때에 대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바벨론의 종말을 위하여 유다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있으면 바벨론의 종말이 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에게 군사력을 키워서 바벨론과 싸워 이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고 있다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어떻게 바벨론의 종말이 이루어졌습니까? 하나님이 페르샤의 고레스를 통해서 바벨론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바벨론의 종말은 너희가 할 일이 아니라 내가 할 일이니 너희는 기다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입니까? 이 구절을 히브리서에서 인용을 했습니다. 히브리서 10:37-38입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반드시 응하리라는 말을 “오실 이가 오시리니”로 번역한 것입니다. 악의 세력을 멸하기 위하여 오실 이가 오신다는 말입니다. 오실 이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의 악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죄의 문제를 해결하겠습니까?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부조리와 갈등, 사회악이 개혁과 제도의 개편으로 해결이 됩니까? 노력을 해야겠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부동산의 문제가 몇 번의 대책으로, 세금으로 해결될까요? 좋은 정책을 수립해야겠지만 인간의 죄된 욕망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두더지 잡기 식으로 계속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실 이가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오셔서 악의 세력을 결박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셔서 악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기까지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낙망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는 성도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박국에게 하신 대답의 세 번째 요소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망하게 되면 바벨론의 약탈과 압제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의 신을 숭배할 것을 강요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때를 믿음으로 기다리며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 믿음으로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구원하시리라는 믿음으로 현재의 어려움을 견디며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무슨 의미를 갖습니까? 이 구절을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인용을 했습니다. 로마서 1:17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살리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11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항의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정한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이었고, 그를 통해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시 오게 하심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기다린다면 하나님의 성취를 보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끝까지 승리하는 성도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