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가 만드는 신문”이라는 이름의 온라인 신문이 있다. 검색창에 그 이름을 쳐 넣으면 그 신문사 홈페이지에 갈 수 있으니, 시간 있는 친구들은 거기에 가서 회원 가입도 좀 해 주고 기사도 좀 읽어 봐 주기를 바란다. 나는 벌써 가입했고 홈페이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이번에 우리 아이가 그 신문사에 취직을 하였거든. 작년 가을 경산회 산행에 따라갔던 조진주 말이야. 바로 그 산행 후기에 썼지만, 그 때쯤부터 우리 아이는 ‘민형이 아저씨’ 아니 ‘신민형 선생님’한테 가서 기자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민형이가 관여하는 ‘평화아카데미’라는 학원에서 말이지. 겨우내 훈련을 받고 이 봄에 졸업을 하였는데, 졸업과 더불어 덜커덕 취직까지 한 것이다. 내일, 모레가 첫 출근 날이야.
“야, 가르쳐 주기만 하면 뭐하냐? 취직까지 시켜줘야지.” ― 작년 가을에 나는 이렇게 농담을 하고 주위 사람들과 더불어 크게 웃었는데, 그 말이 민형이한테만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웬수를 어떻게 갚지? 갚기 힘들 것 같다. 민형이는, 자기가 우리 부녀에게 베푼 웬수가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얼마만한 것인지를 정확히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웬수는 물론 아이를 반년 동안이나 가르쳐 주고 취직까지 시켜 준 웬수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가 반년 동안 학원에 다니며 공부를 한 데에는, 그리고 취직까지 한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들어 있다.
우리 부녀도,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기 전까지는, 친한 사이였다. 아니, 우리 부녀에게는 제법 유별난 것이 있었다. 나는 아이를 호주머니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다녔다. 겨울에 외출할 때면 나는 아이를 내 파카 속에 집어넣곤 하였는데, 파카 속에 든 아이는, 어미 뱃가죽 속에 든 캥거루 새끼처럼 머리만 빼꼼히 내놓은 채 편안해하고 행복해하였다. 나는 아이를 그렇게 호주머니 속에 넣어가지고는 어디건 데리고 다녔다. 심지어는 중학교 교사로서 학생들을 인솔하여 봄 소풍, 가을 소풍을 갈 때에도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선배 교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였을지,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움에 식은 땀이 날 정도이다. 생각해 봐. 20대의 새파란 남선생이 일회용 기저귀를 넣은 기저귀 가방을 둘러맨 채 아이를 안고 안양 유원지니, 인천 자유 공원이니 하는 소풍지를 누비고 다닌 거야.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어느 날 아이는 내가 만져주는 것에 대하여 싫은 기색을 보인 적이 있다. 중학교에 올라가고,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이런 저런 문제들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가장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공부 문제를 제외한다면, 귀가 시간 문제였다. 뼈대 있는 집안에서는 딸 아이의 귀가 시간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더 뼈대 있는 집안에서는 더 엄격하게 통제하더구만. 그래서 나도 우리 집안을 뼈대 있는 집안으로 만들기 위하여, 아니 ‘더’ 뼈대 있는 집안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렇게 선언을 하였다. “우리 집 통금시간은 일몰이 기준이다. 어두워지기 전에는 무조건 들어와야 한다는 말이다.” 어때? 간명하면서도 엄격한 교시지? 약간 지키기 어려워 보이지만, 그 정도는 되어야 아버지의 위엄이 선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서쪽 하늘에 석양이 걸릴 때가 되면 긴장을 하면서 아이를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물론 일몰 기준의 통행금지는 시행되기 어려운 것이다. ‘더’ 뼈대있는 일부 집안을 빼 놓고는 말이야. 아이는 7시가 되어도 안 들어오고, 8시가 되어도 안 들어온다. 나는, 역시 통금 시간을 좀 늦추어 주어야 하겠지 하고 생각을 한다. 9시가 되어도 안 들어온다. 화가 나다가, 10시가 지나면서 더럭 겁이 나기 시작하다. 그렇게 11시가 지나고 12시 가까이가 되어서야 아이는 현관문을 밀고 들어온다. 참, 내, 에, 또,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이가 사춘기를 지낸 후, 그러니까 재수를 하여 대학에 들어간 후 부녀 관계는 차츰 차츰 회복이 되어갔지만, 부녀 간의 귀가 시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한 쪽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무참하게 패배하는 일이 계속 일어나는 경우에도 전쟁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면 말이야.
사춘기라는 것은, 무엇인가 했더니, 아빠의 호주머니에서 튀어 나오는 시기다. 자기의 두 다리로 서서 자기 주장을 하기 시작하는 때인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책임과 평가가 수반된다. 사춘기라는 것은, 자기 다리로 서서 자기 주장을 하면서 그에 대하여 책임지고 평가받기 시작하는 때인 것이다. 나는 언젠가 아이에게, 아빠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니가 좋은 사람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말한 적이 있다. 어른이 된 이상, 아무리 아빠와 친해지고 싶어도 아빠의 호주머니 속으로 돌아올 수는 없는 일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평가하고 책임을 묻지 않는 것 같다. 언젠가 밤 늦은 시간에 아이가 울면서 집을 나선 적이 있는데, 애 엄마는 미친 여자처럼 맨발로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가 아이를 붙들었다. 그러나 아빠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나는 아이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잘 하지 않고서는 아빠와 친해질 수 없다.
지난 가을 이래 아이가 학원 다니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 아이가 제법 잘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는 새벽 같이 일어나 제 손으로 도시락을 싸 가지고는 찬 바람을 헤치며 지하철역으로 달려가곤 하였다. (아빠에게 제공되어 온 비밀 정보에 의하면, 지각하는 날이 종종 있었지만, 졸업장을 받는 데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아이는 자기가 배우는 일에서 재미를 느끼는 듯 보였고, 점차 자신감까지 가지게 되는 듯 보였다. 이제 직장까지 얻었으니, 이 아이는 더 잘하게 되지 않겠는가? 더 좋은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결국, 민형이 덕분에 부녀가 더 친해졌다는 이야기 아냐? ― 여기까지 읽은 어느 친구가 이렇게 질문하면서,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될 것을, 주저리 주저리 뭘 그렇게 길게 썼느냐고 핀잔을 준다면 할 말이 없다. 그 친구 말이 맞기 때문이다. 신민형 선생님 덕분에 우리 부녀가 더 친해졌다. 그런데, 또 어느 친구가, 딸냄이 취직 하나 시킨 것을 가지고 뭘 그렇게 야단스럽게 떠들어대냐고 핀잔을 준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대꾸할 말이 없지 않다. 취직을 한 당사자를 비롯하여, 취직을 시켜 준 선생님, 그것을 지켜 본 학부모 등 관련자 모두가 대단히 기뻐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그 아버지의 기쁨이 특히 큰데, 그 아버지는 이런 계통의 직종에 대하여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는 글을 쓰고 만드는 직종을 아주 좋아한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자기가 하는 일도 넓게 보면 그런 직종에 속한다고 생각하여, 신문 기자 등 글을 쓰고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 모두를 동업자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어릴 때 우리 아이는 글을 곧잘 썼다. 글짓기나 백일장으로 상도 많이 타왔다. 한 동안은 아예 글쓰기 선수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육이오 기념 글짓기 대회니, 국군의 날 기념 글짓기 대회니 하는 것들이 개최될 때면, 이 아이가 도맡아 작품을 써내곤 하였던 것이다. 교육개발원에서 사고(思考) 교육에 관한 책자를 만들 때 이 아이가 쓴 글을 실은 적도 있다. 그 글에는 “치통을 느낄 때 아픈 것은 누구인가? 이가 아픈 것인가, 내가 아픈 것인가?” 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신문 기자가 된 것은 이 아이가 어렸을 때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번 겨울을 나면서 이 아이는 이런 면, 저런 면 여러 면에서 원래의 자리로 완전히 돌아온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원래의 자리로 그대로 돌아 올 수는 없는 법이지만 말이다.
내가 또 주책을 부린 것 같다. 역시 딸냄이 취직 하나 시킨 것을 가지고 너무 야단스럽게 떠들어댄 것이지?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이 글을 써서 까페에 올리는 것은, 영서중학교 교사 시절 기저귀 가방을 둘러맨 채 아이를 안고 소풍 길에 나서는 것과 똑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디 용서해 주게나. 하도 기쁘고, 하도 고마워서 그 마음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네. 하도 귀엽고, 하도 자랑스러워서 어디건 데리고 다니지 않을 수 없었듯이 말이야.
첫댓글 야!.그런 일이 있었구나. 오늘도 1시간쯤 전에 영태와 통화했었는데, 이 글을 먼저 읽고 전화를 했으면 축하도 좀 해주었을텐데, 아이고. 아무튼 신민형 동문, 조진주 영태 딸내미를 취직시켜 주어 고마우이. 영태한테 내가 술좀 사라 그래야 되겠구먼ㅋㅋ
조진주기자 글 찾아보려다 못된 사이트 링크에 걸려 고생만 신나게했구먼~~ㅋㅋ 백진주기자 글은 봤는데 조진주기자는 무슨 글을 쓴겨?
축하드립니다.자식 일이 가장 큰 일이 돼버린 우리 나이죠?
축하한다~ 진주 본 지가 언제든가? ㅎㅎㅎ 부디 아빠보다 나은 딸이 되리라 믿는다. __()__
다들 감사. 아직 출근도 안했는 무슨 글을 썼겠어. ㅋㅋ 습작 밖에 없어. 습작 비디오 작품도 있는데 -- 안면도의 자원 봉사자를 찍은 -- 우리 아이는 거기에서 나레이션을 담당했어.
민형이에게 제대로 배웠다니 기대가 되네요. 우리에게 정말로 절망만을 가져다 주는 대부분의 요즘 기자들과는 달리 정론직필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민형-영태-그리고 딸 진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광경이구나. 청출어람의 본보기를 기대한다.
영태,딸을 사랑하는 부정이 구구절절이 묻어나는 내용,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찡 하게 느끼네,
아빠의 사랑이 진주의 마음깊이 새겨져 있을거야~ 축하한다!!
축하 축하 사랑스런 진주가 아빠 뿐 아니라 모든 독자에게도 사랑 받을 수 있는 훌륭한 기자가 되기를~~
영태! 운악산에 같이 간 그 여식인감? 다부지던데. 잘 할 것이야! 그 때 경산회에서 등산화 사 주기로 한 것은 어케되었는감? (그 날 누가 신발값 준 것 같기도 하고. 나가 왜 이렇냐?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에이---)
신발값(10만원) 받았음. 신발은 안 사고 엉뚱한 데 쓴 것 같음. 아빠가 사줘야 할 판국. ㅠㅠ 다들 감사.
영태야 축하한다 ! 진주 운악산에 데리고 와서 극기 훈련 시키더니 취직 까지 끝냈구나 ...ㅎㅎ
신선생님 쑥스럽네.아빠 닮아 생각깊고 감수성 풍부한 진주가 건조한 보도기사 쓰느라 애먹을 걸세. 그 과정 겪으면 아빠가 원하는 글잘쓰는 기자,유능한 기자가 될 걸세. 그러면 더 친한 부녀가 되어 귀저기들고 다닌 것처럼 노트북과 카메라 대신 들고 쫓아다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