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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국산 SF영화
‘용가리’ 해외판매 39억원 기록
본래 개그맨이었던 심형래씨는 직접
제작-감독한 국산 SF영화 ‘용가리’로
‘신지식인 1호’의 영예를 안았다.
심형래씨가 제작-감독하는
한국산 SF 극영화 ‘용가리’가 한국
영화 해외 판매고 기록을 세웠다.
제51회 칸 국제영화제와 함께 열리고
있는 영화견본시장에서 ‘용가리’는 19
98년 5월 17일까지 모두 2백80만달러
(약 39억원)의 해외판매계약고를 올렸다.
‘용가리’는 공룡을 닮은 거대한
괴물 용가리가 현대 도시에 부활
하면서 시작되는 SF 극영화다.
이 같은 해외판매를 고려, 미국 배우
들을 주연으로 기용해 영어로 제작하
고 미국에서 믹싱작업하는 것을 제외
하고는 대부분 국내기술로 완성했다.
계약이 체결된 곳은 라틴아메리카 전역 1
백50만달러, 독일 70만달러, 러시아 17만
달러, 중국 5만달러, 터키 6만달러 등 8개
지역. 계약방식은 판권을 한꺼번에 넘겨
주는 일괄판매 방식이 아니라 일단 계약금
(미니멈 개런티)을 받고 현지 개봉성적에
따라 60%까지 흥행수익을 나눠 갖게 되는
러닝 로열티 방식으로 계약 체결됐다.
즉 계약금을 일단 받은 다음 현지 흥행시
수익이 발생하면 그 돈을 6대4 비율로 나
눠 갖는 방식이다. 심헝래씨는 이번 영화
제작으로 ‘신지식인 1호’라는 영예를 안았
다.
▶2012년 70~80년대 주름잡던
'디스코 여왕' 도나 서머 별세
1970~80년대를 주름잡았던 '디스코의 여왕' 도나 서머(Summer·63·사진)가 암 투병 끝에 17일(현지 시각) 미국 플로리다 주 잉글우드에 있는 자택에서 숨졌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날 애도 성명을 내고 "도나는 진정한 디스코의 여왕이었다. 음악계는 너무 일찍 또 하나의 전설을 잃었다"고 했다.
'핫 스터프' 부른 도나 서머
도나 서머는 관능적 목소리, 탁월한 리듬감으로 70~80년대 미국과 유럽을 넘어 전 세계에서 사랑받은 가수이자 작곡가였다. 그래미상도 다섯 차례 수상했다.
서머의 음악 인생은 독일에서 출발한다. 미국 보스턴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교회 성가대원으로 활동했던 그는 1969년 뉴욕으로 가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이때 우연히 뮤지컬 '헤어(Hair)' 프로덕션 관계자를 만나 독일로 건너갔고, 곧 유명 프로듀서 조르지오 모로더(Moroder)에게 발탁돼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1975년 서머는 미국으로 돌아와 노래 '러브 투 러브 유 베이비(Love to Love You Baby)'를 발표해 대중의 관심을 모았고, 1978년 '라스트 댄스(Last Dance)'로 그래미 최우수 R&B 여성 보컬상을 받았다.
당대 최고 인기 가수였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함께 부른 노래 '노 모어 티어스(No More Tears)'로는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1979년엔 '배드 걸스(Bad Girls)'와 '핫 스터프(Hot Stuff)'가 연달아 빌보드 1위를 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1983년 '쉬 웍스 하드 포 더 머니(She works hard for the money)'도 세계적 인기를 얻었다.
▶2009년 영화사 '아침' 정승혜 대표 별세
한국 영화계 최고의 카피라이터이자 재기 넘치는 칼럼니스트였던 영화사 '아침'의 정승혜(44) 대표가 2009년 5월 17일 오전 10시38분 별세했다. 정 대표는 지난 2006년부터 암으로 투병해왔으며, 한달 전부터 병세가 급격히 악화돼 치료를 받던 중이었다.
1989년 영화사 '신씨네'에 입사하며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1991년 영화사 '씨네월드'로 옮겨 '달마야 놀자', '황산벌' 등에 이어 1000만 관객을 끌어모은 '왕의 남자'를 제작했다. 2005년 '아침'을 설립해 독립한 그는 '도마뱀', '라디오 스타', '님은 먼 곳에' 등을 제작했으며 신작 '비명'을 제작 중이었다. 정 대표는 뛰어난 영화 카피라이터였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매트릭스 2), '그들은 민중의 곰팡이'(투캅스) 등 800여편 영화의 이름난 카피를 만들었고'카툰극장' 등 여러 저서를 남겼다. 2006년엔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을 받았다.
▶2009년 스리랑카, 타밀 반군 최고지도자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 시신 발견
▶2009년 백범 선생 수행했던
선우진 옹 별세
백범 김구 선생을 광복 직전부터 숨질 때까지 4년여간 비서로서 보좌한 선우진(鮮于鎭·88) 옹이 2009년 5월 17일 12시 별세했다.
1921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선우 옹은 1944년 한국광복군을 훈련시키는 중국 황포군관학교 제10분교에서 3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1945년 2월 충칭(重慶)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 백범 선생의 비서가 됐다. 1945년 11월 임정 요인들이 환국할 때 함께 고국에 돌아와 1949년 6월 26일 백범 선생이 육군 소위 안두희 총탄에 서거할 때까지 가까이에서 수행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으며 그가 백범 선생 및 아들 김신씨와 함께 찍은 사진은 특히 유명하다.
선우 옹은 2005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때를 회고하며 "백범 선생은 평양행을 저지하는 청년들에게 '반쪽 국토를 너희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고 호통을 치며 북행(北行)을 결행하셨다"며 "김일성·김두봉과 회견하고 미군과 소련군 철퇴, 내전(內戰) 불가, 통일정부 수립회담 개최 등을 합의했지만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선우 옹은 또 "백범 선생과 이승만 박사가 사이가 안 좋았다는 말은 잘못이다. 백범 선생은 '국부(國父) 김구 선생'이라 소개받으면 '국부가 둘일 수 있나, 우리나라에 국부는 이 박사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다"며 "백범 선생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일생을 가난하게 살면서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이라고 회고했다.
선우 옹은 지난 1월 병상에서 회고록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푸른역사)을 펴냈다. 그는 회고록에서 "백범 선생 비서로서 선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고 썼다.
고인은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신채영(78) 여사와 아들 엽·환씨, 딸 미선·미라·미령씨 등 2남 3녀가 있다
▶2007년 아동문학가 권정생씨 별세
동화 ‘강아지똥’, ‘몽실언니’를 쓴 아동문학가 권정생(70)씨가 2007년 5월 17일 오후 2시17분 대구 가톨릭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1937년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앓은 전신 결핵으로 평생 고통을 겪으면서도 기독교적 사랑과 희생에 기반을 둔 아름다운 동화들을 발표, 어린이는 물론 성인들로부터도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똥’을 발표하며 동화작가의 길에 들어섰으며,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됐다.
▶2004년 이라크 과도통치위의장
이제딘 살림 피살
▶2004년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
현대비자금 수령 혐의로 징역 20년 구형
▶2002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전처
성혜림 사망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전처 성혜림씨가 2002년 5월 17일 저녁 모스크바 중앙의료원 응급실로 긴급 후송된 뒤 사망했다. 성씨의 사망원인은 지병인 심장병과 신경성 질환이었다.
성혜림씨는 경남 창녕군 대지면 석리 출신으로 어린시절을 서울에서 보냈다. 성씨는 명륜동이 집이어서 서울사대부국을 다녔으며 월북무렵 서울사대부중 학생이었다. 부친 성유경씨를 따라 1948년 월북했다. 부친 성씨는 창녕 만석꾼 집안의 아들로 일본 법정대를 나왔다. 해방전후 서울 혜화동에 살았으며 남로당 자금책으로 활동했다. 부친 성씨는 1948년 대규모 좌익검거선풍이 불자 부인 김원주씨와 세딸을 데리고 월북했다.
성혜림은 남한에서 유복하게 살다 부모 따라 월북한 후 북한 최고 여배우가 되었다. 전 남편과 별거하는 그녀에게 집요하게 구혼한 김정일과 동거해 김정남을 낳았고 김정일의 후처들에 밀려 모스크바로 나와 살다 서방세계로 탈출했었다.
▶2001년 사진작가 이경모 별세
▶1997년 김현철씨 구속
김현철씨 비리 의혹을 수사중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1997년 5월 17일 현철씨가 고교동문 등 기업인 2명으로부터 이권청탁과 관련 46차례에 걸쳐 총 32억2천만원을 받은 사실을 밝혀내고 특가법상 알선수재 및 특경가법상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했다.
이번 사건은 한보사건 수사가 진행중일 때 의혹이 불거졌으나 구체적인 근거가 없어 수사할 수 없었다. 그러다 지난 1997년 3월 10일 박경식 G남성클리닉 원장에 의해 `현철씨의 YTN사장 인사개입 의혹` 녹음테이프가 공개되자 검찰은 진상조사 차원의 수사를 시작했다.
검찰에 따르면 현철씨는 1995년 4월 김덕영 두양그룹 회장으로부터 "신한종금 경영권 분쟁과 관련 장인인 양정모 전 국제그룹회장과의 소송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3억원을 받는 등 21차례에 걸쳐 15억원을 받은 혐의를 받았다. 또 이성호 전 대호건설 부사장으로부터 "서초 케이블TV 사업자로 선정되도록 공보처 공무원에게 영향력을 행사해달라"는 부탁 등과 함께 26차례에 걸쳐 17억2천만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현철씨는 이밖에도 1994년 6월 김기섭 당시 안기부 운영차장을 통해 조동만 한솔그룹 부회장이 제공한 5천만원을 받는 등 31차례에 걸쳐 15억5천만원의 활동비를 받았으며 1995년 6월에는 곽인환 대동주택회장으로부터 10억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현철씨에 대해 알선 수재액 32억2천만원과 증여세 포탈액 13억5천만원을 전액 추징키로 했으며 증여세 포탈액의 2∼5배가 벌금으로 부과됐다.
▶1995년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국제언론인협회(IPI)본부 부회장에 피선
▶1994년 한국-아르헨티나,
투자보장협정 체결
▶1994년 PLO 자치협정 서명
▶1990년 교통부,
수도권 신공항입지를 영종도로 확정
▶1983년 레바논·이스라엘 철군협정 조인
▶1983년 서울 형사지법
가정파괴범에 사형선고
▶1980년 전국에 비상계엄 확대(전현직
국가원수 비방금지, 정치활동금지,
대학휴교 등 계엄포고 10호 발표)
▶1980년 계엄사, 김대중 등 7명을 사회
혼란 및 학생,노조소요 조종혐의로 연행
▶1979년 전아프리카 회의 아프리카의
난민이 200만명이라고 발표
▶1973년 북한 세계보건기구
(WHO)에 가입
▶1973년 미국 상원 외교위
대통령의 해외 파병권 제한 법안 가결
▶1973년 미국 상원 워터게이트 사건
청문회 개시
워터게이트 사건 청문회 모습.
1973년 5월 17일, 대통령 R.M.닉슨의 재선을 획책하는 비밀공작반이 워싱턴 워터게이트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된 사건에 대한 청문회가 개최됐다. 증인으로 출석한 닉슨의 선거 운동 담당자의 증언을 시작으로 닉슨정권의 선거방해, 정치헌금의 부정, 수뢰, 탈세 등이 점차로 드러남에 따라, 결국 이듬해에 닉슨은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당초 닉슨은 도청사건과 백악관과의 관계를 부인했으나 진상이 규명됨에 따라 대통령보좌관 등의 관계 사실이 밝혀졌고, 대통령 자신도 무마공작에 나섰던 사실이 폭로되어 국민사이에 불신 여론이 높아졌던 것이다. 임기 도중 대통령이 사임한 것은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으며, 미국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사건이기도 했다. 의회와 최고재판소가 그 직책을 완수함으로써 권력분립의 중요성과 함께 민주주의의 전통이 수호되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두고 있다.
▶1969년 이수근 사형확정
▶ 1968년청록파 시인 조지훈 사망
시인 조지훈이 1968년 5월 17일 타계했다. 48세였다. 본명이 동탁인 시인은 1946년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시집 `청록집`을 낸 것을 계기로 청록파 시인으로 불렸다. 그는 시인이면서 국학자요, 논객이었고 지사였다. 일제의 압제와 6.25전쟁 그리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서슬퍼런 독재정치 하에서도 민족과 시대의 아픔에 기꺼이 동참했던 거목이었다. 그러면서도 친구와 제자들이 그를 `선비`로 표현할 정도로 멋과 풍류, 기품이 서려 있었고 번뜩이는 재능과 폭넓은 교양, 추상같은 기개가 넘쳐 흘렀다.
그의 선비정신은 어려서부터 체화된 것이다. 의병장을 지내다 한일병합때 자결한 증조부, 6·25때 북한군이 마을을 점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부, 해방후 국회의원을 지내다 납북된 아버지 조헌영. 그는 가계에 면면히 흐르는 올곧은 선비정신을 몸으로 체득했다.
시인은 혜화전문을 졸업하고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에 `고풍의상` `승무` 등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한 민족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기대를 모았고, 광복후에는 민족정서와 전통에 대한 향수를 노래했다. 그가 민족의 역사와 사회현실로 뛰어든 것은 6ㆍ25를 거치면서부터였다.
일제말기 오대산에서의 은둔, 광복후 좌우익의 대립속에서 민족문학진영의 선봉으로 나선 것, 6ㆍ25 전쟁의 종군작가,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저항. 그는 양심의 소리에 따라 불의에 항거한 민족의 대표적 지성이었다. 그는 1947년부터 고려대에 재직하면서 민족문화연구소를 창설, 한국학연구에 정열을 바쳐 `한국민족운동사` `한국문화사서설` `멋의 연구`등을 저술한 탁월한 국학자이기도 했다.
▶1966년 소련 7월 1일부터
집단농장의 현물노임제
▶1964년 라오스 친공군 월맹군과 합세.
자르평원 완전장악
▶1961년 군사혁명위 국회해산,
정당활동정지, 국무위원 출두 명령
▶1955년 미국 해중 원폭실험 성공
▶1954년 미국 대법원, 공립학교에서의
인종차별은 위헌이라고 판시
1954년 5월 17일 미 대법원이 브라운과 캔사스주(州) 교육위원회간의 인종차별에 의한 학교분리 소송에 대한 판결을 내려 미국 공립학교의 인종분리를 금지시켰다. 미 대법원은 "분리된 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고 전원합의로 선언하고, 1896년 대법원에서 내려진 `분리된 평등` 원칙은 이제 공립학교에서 사용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흑인 선생님이 흑,백인종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많은 남부지역 사람들은 공립학교를 폐지시키겠다고 맹세한 조지아와 남캐롤라이나 두 주(州)의 지도자들과 함께 새로운 판결에 대해 분노했다.
이 결정은 앨러배마, 아칸소, 델라웨어, 플로리다, 미시시피, 미주리, 북캐롤라이나, 오클라호마, 조지아, 켄터기, 루이지애나, 버지니아, 콜롬비아 등에서 분리되어 학교를 다니고 있는 8백5십만의 백인아동들과 2백5십만의 흑인아동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금세기들어 미국 흑인차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 획기적인 결정에 대해 대법원장 얼 워렌은 "공공 교육의 분야에서 인종차별 원칙을 폐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1951년 용문산전투서
중공군 1개군단 점멸
▶1947년 브라질 공산당 불법화
▶1939년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
독일의 상호불가침조약안을 거부
▶1938년 미국 빈슨 해군확장안 수립
▶1930년 영국 유태인에 팔레스타인으로의
이민 제한령
▶1902년 마산포 일본 전관조계협정서 조인
▶1900년 시인 홍사용 출생 - `백조` 동인
▶1899년 서대문-청량리간 전차개통식
'쇠당나귀' 등장 … 서대문-청량리 간 전차 개통
[1899년, 서울] 석가탄신일을 맞아 많은 시민이 동대문 성루와 근처 성벽에 빽빽이 올라 전차 개통식을 구경했다. 지난달 하순으로 예정됐던 것이 기계 고장으로 연기된 것. 전차는 일본 교토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라고 한다. 고종이 홍릉에 행차하는 것을 보고 미국인 콜브란이 거금 10만 원에 이르는 행차 경비를 절감하고, 최신 문명의 이기인 전차를 일반 시민의 교통기관으로 이용한다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 이라고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고종은 산업 진흥 정책의 일환으로 한성전기회사(사장 한성판윤 이채연)를 설립하고, 지난해 7월 7일 공사를 시작해 이번에 그 결실을 맺게 됐다.
개통식 행사가 끝나자 황제의 어용 귀빈차를 비롯해 화려하게 장식한 꽃전차 8대에 고관대작, 외국 사신과 관원들, 민간 유력자들이 나눠 타고 동대문에서 출발해 서대문으로 달렸다. 그런데 구경꾼들이 얼마나 신기해하는지 너도나도 가까이서 보려고 몰려드는 바람에 전차는 가다가 멈추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러나 전차 개통을 둘러싸고 민심이 뒤숭숭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몇 달 전 동대문 밖에서 전선줄을 끊어 훔쳐간 범인 5명이 체포돼 재판 한 번 받지 못한 채 참수형에 처해졌고, 근래 가뭄으로 수십 일간 비가 오지 않자 사람들 사이에 전차가 구름을 빨아먹어서 날이 가문다. 는 꽤 그럴싸한 소문마저 나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신문명이 출발부터 삐거덕거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 1749년 종두법 발견한 에드워드 제너 출생
▶ 1551년 신사임당 사망
신사임당은 한국의 대표적인 어머니상으로 뛰어난 예술가이자 현모양처로 유명하다. 훌륭한 작품을 많이 완성해냈으며 이이와 같은 뛰어난 인재를 키운 어머니이기도 하다. 1504년 강원도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강릉 외가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와 외조부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당시는 여자들이 그다지 학문을 배우지 않았지만 신사임당은 현명한 어머니와 외조부의 가르침 속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충분히 발휘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외조부에게 문자를 배웠는데 기억이 빨라서 한학의 기본 서적을 금새 정통했고 한시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바느질과 부엌일도 배웠는데 빠르게 익히는 모양이 평판이 자자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림이 재능이 있는 것을 발견한 외조부는 안견의 그림을 사다주었고 신사임당은 그대로 따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사임당은 예술가로써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훌륭한 어머니로써의 역할도 존경받을 만하다.
사임당이 지향한 최고의 여성상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이었다. 그녀를 본받는다는 뜻으로 사임당이란 당호를 지었는데 이는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것이기도 하다. 신사임당의 작품으로는 `자리도` `산수도` `초충도` `노안도` `연로도 ` `요안조압도`와 6폭 초서병풍 등이 있다.
▶ 1510년 화가 보티첼리 사망
출처 네이버지식뱍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