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행궁
화성행궁은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 아래의 산기슭을 중심으로 경사지가 펼쳐지고, 시가지가 시작되는 곳의 평지에 위치해 있다. 구조는 앞쪽으로 긴 장방형 구조이다.
정문인 신풍루 양쪽으로 남군영과 북군영이 있으며 신풍루로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서리청과 비장청, 오른쪽으로는 집사청이 위치해 있다. 서리청과 비장청, 집사청을 좌우로 지나 마당을 가로지르면 좌익문이 있고, 이를 통과하면 중앙문이 나온다. 이 중앙문을 지나면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이 나타난다. 화성행궁과 따로 떨어져 있는 화령전은 정조의 어진(御眞) 즉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어진을 모신 사당을 전국 여러 곳에 뒀다. 지금은 전주 경기전과 개성 목청전, 창덕궁 선원전, 수원 화령전만이 남아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801년(순조1) 화성행궁 옆에 화령전을 짓고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모셔져 있던 어진을 옮겨와서 봉안했다. 화령전은 정전인 운한각을 중심으로 이안청, 복도각. 재실, 전사청과 향대청 등을 갖추고 내·외삼문까지 구비했다. 당대 최고급 기술자들이 참여해 약 2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완성했다. 현재 전사청 등 일부 공간은 복원했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남아있다.
‘운한각’은 정조 어진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건물로, 중앙에는 정조 어진을 모신 합자를 두고 좌우에 딸려 있는 익실에 정조가 편찬한 책과 제사에 쓰는 물품을 보관했다. 합자와 익실 바닥에는 온돌을 설치해 5일마다 불을 넣어 습기를 제거했다. 1872년(고종9)에 바닥을 마루로 개조했지만 아궁이 흔적이 남아있다.
‘이안청’은 정전을 수리하거나 변고가 생겼을 때 어진과 서책 등 기물을 옮겨 놓기 위해 만든 건물이다. 임금의 초상화를 모신 건축물에서 정전 결에 이안청을 두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정전과 이안청을 ‘복도각’으로 연결한 방식은 화령전에서만 볼 수 있다. 화령전은 조선시대 영전 건축물에서 복도각이 적용된 최초의 사례이자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유일한 사례로 문화제 가치가 높다. 순조는 1804년(순조4) 화성에 내려와서 융릉과 건릉에서 몸소 제사를 올린 뒤 화령전에서 술잔을 올리는 작헌례를 올렸다. 재위기간 동안 총 10차례 화령전에서 작헌례를 올렸던 순조를 본받아 헌종, 철종, 고종도 화성에 내려올 때마다 작헌례를 올렸다. 화령전은 정조 이후의 모든 왕들이 직접 방문해 제향을 했다는 점에서 그 위상이 높아 2019년 보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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