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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 6,7-15
오늘 복음 말씀은 주님의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각자 묵상하셔도 좋을듯 하고요..^^
오늘 묵상은 교황님 말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번 사순 시기에 최선의 단식
저는 이번 사순 시기에 최고의 단식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권고합니다.
- 무례한 말을 단식하고
부드럽고 온화한 말 만을 사용하세요.
- 불평 불만을 단식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채우세요.
- 화를 단식하고
온유함과 인내로 채우세요.
- 비관주의를 단식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하세요.
- 걱정을 단식하고
하느님을 신뢰하세요.
- 한탄과 탄식을 단식하고
삶의 단순한 것들에서 기쁨을 느껴보세요.
- 스트레스를 단식하고
기도로 채우세요.
- 슬픔과 쓰린 감정을 단식하고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세요.
- 이기심을 단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지세요.
- 불경함과 보복을 단식하고
화해와 용서의 행위로 채우세요.
- 말을 단식하고
침묵과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여유를 갖추십시오.
만일
우리 모두가
이러한 단식을 실천한다면,
우리의 일상 안에
평화와 기쁨,
서로에 대한 신뢰
그리고 생명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정 루치아 수녀님)
3월11일 [제1주간 화요일]
마태오 6,7-15
기도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이유
어떤 분이 성당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데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절실해요.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당신은 꼭 들어주시는 분이시잖아요.
저는 꼭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어요.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당신은 하느님이 아니세요.
전 그런 하느님은 믿지 않을래요….”
저는 청개구리 같은 성격이 있어서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 주려 하다가도 그 사람이 그것을 ‘당연히’ 해 주어야 하는 것처럼 말하거나 맡긴 것을 달라는 듯이 청하면, 왠지 기분이 상해서 해 주려던 것이 다시 주기 싫어질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마태 6,7-15)에서 예수님은 기도할 때 이교인들처럼 말을 많이 하거나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하느님도 당신의 자비가 크게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시지, 우리가 말을 많이 하거나 노력을 많이 해서 은총을 얻어냈다고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은총의 주도권자는 하느님이시지 우리가 이래저래 한다고 해서 그분의 결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신 다음 ‘용서’에 대해 한 번 더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기도를 하고 나서 반드시 더 사랑이 증가하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개연성이나 현실성은 개나 줘버린 영화 ‘7번 방의 선물’이 예전에 있었습니다.
지능이 유치원 수준인 용구라는 아버지가 예승이라는 예쁜 딸을 키우며 일어나는 일입니다.
용구는 큰 범죄의 누명을 쓰고 사형을 선고받아 교도소 7번 방에 갇히게 됩니다.
그곳에는 그 교도소의 짱으로 통하는 조폭 밀수범 오달수와 다른 흉악범들이 있었습니다.
용구는 어린이 유괴, 강간, 살인이라는 죄목이 있었기 때문에 오달수에게 사람도 아니라며 심하게 구타당합니다.
그러나 본성이 착한 용구는 다른 조직이 오달수를 해하려 할 때 달려들어 용구를 구하고 자신이 대신 상해를 입게 됩니다.
이에 오달수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보답하려고 하는데, 용구의 청은 딸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큰소리 뻥뻥 쳐 놓은 오달수는 어쩔 수 없이, 용구 딸 예승이를 빵 박스에 넣어서 7번 방으로
밀반입합니다.
만약 이것이 들통나면 7번 방에 있는 모두가 커다란 질책을 받을 것도 분명하고 광복절 특사와 같은 것도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방에 있던 한 명, 다혈질 모범수 신봉식이 간수가 지나갈 때 이 소리를 질러 간수를 부릅니다.
같은 방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설득하고, 말하면 죽는다고 아무리 으름장을 놓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봉식은 아내가 출산을 앞두고 있고 그래서 특사로 나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간수가 문 앞에 서서 창살을 사이에 두고 둘은 마주섭니다.
그때 문 밑에는 예승이가 신봉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신봉식이 이 방에 아이가 있다고 말을 하려는 순간, 그 아이는 신봉식의 손을 잡으며 어른들은 가질 수 없는 맑고 애절한 눈빛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봅니다.
이때 간수는 자기를 왜 불렀느냐고 신봉식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신봉식은 주저하다 결국 이렇게 말하고 맙니다.
“저…. 저…. 빵 하나만 더 주세요…. 흑 흑”
교도관은 “니가 장발장이냐?” 하며 자기 모자 속에 있던 빵을 구겨서 신봉식 입에 처넣습니다.
신봉식의 마음을 돌린 것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치에 맞는 합리적인 설득이 아니었습니다.
안 들어주면 안 믿겠다는 으름장도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다만 ‘다 아시잖아요.
아빠가 절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잠시만 아빠와 함께 있게 해 주세요.’라는 내용이 담긴
순결한 어린이의 눈망울이 모범수 신봉식의 마음을 순식간에 녹인 것입니다.
기도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감정’입니다. 감정이 없는 바람은 진짜 바람처럼
흩어집니다.
고양이들이 무언가를 바라며 주인을 바라보는 눈빛을 상상해보십시오.
그 진정한 눈빛을 볼 때 주인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냥 지나가면서 야옹 한 번 하면 주인의 마음은 동요되지 않습니다.
매번 그렇게 한다면 주인은 자기를 무시하느냐며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로 사랑이 증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바라봐야 합니다.
성모송을 할 때는 성모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변화되고 그러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부모에게 10원 주며 감사하다고 하는 것보다는, 돈을 안 주더라도 손을 잡아주고 눈을 마주치며
길러줘서 감사하다는 말이 부모의 마음을 감동을 주는 데 더 좋습니다.
예전에 ‘시크릿’이란 책이 유행하였습니다.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바라도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구체적으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집을 갖고 싶다면 구체적으로 그 집을 상상하고 바라봅니다.
그러면 기쁨의 감정이 생깁니다.
이 감정이 결국 바라는 것을 이뤄준다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약속을 주실 때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라”라고 시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별을 바라보며 어떤 감정을 가졌을까요? 그 감정이 결국 이스라엘의 성조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기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감정인데, 그 감정은 바라봄에서 옴을 잊지 맙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1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마태오 6,7-15
주님의 기도와 함께 좋으신 주님의 손길에 우리 인생 전체를 온전히 맡깁시다!
예수님 시대 당시 이스라엘에 인접했던 근동 지방 이민족들이 바치던 기도는 엄청나게 요란스럽고 장황했습니다.
복잡하고 떠들썩했습니다.
수십, 수백 가지의 신들의 이름을 줄줄이 외치며 그들을 ‘기도의 현장’으로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집요하게 그들에게 떼를 쓰기 시작합니다. 몇 시간이고 반복해서 신들을 압박하고 졸라대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는 신들이 귀찮아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청을 들어준다는 억지스런 기도 방법이었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이고 어처구니없는 이방인들의 기도 스타일이 은연중에 유다 백성들 사이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접한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황당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협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시험해보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조롱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이 땅에 육화하신 하느님의 분신인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복잡한 것을 싫어하십니다.
아주 단순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복잡하고 수많은 율법 조항들을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란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예수님의 단순성은 기도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오 복음 6장 7~8절)
우리가 잘 되기만을 간절히 염원하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 우리가 매일 지고 가고 있는 고통과 십자가를 환희 들여다보고 계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좋은 길, 결국 구원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시고자 애를 쓰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이 계시는데 줄줄이 잡신의 이름을 불러낼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하느님이 계시는 데 수백 가지 걱정에 시달릴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좋으신 주님의 손길에 우리 인생 전체를 온전히 맡기는 일, 그분 사랑과 자비의 손길에 우리 삶 전체를 봉헌하는 일이야말로 참된 기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가장 기쁘게 받으실 기도는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만드셔서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기도입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바치게 되는 주님의 기도를 올리는 순간마다,
우리의 삶, 우리의 의지, 우리의 사랑을 그분께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1주간 화요일 강론>
(2025. 3. 11. 화)(마태 6,7-15)
<이미 용서받았으니 용서하라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7-15).”
1)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특별히 ‘용서’를 강조하시는데, 그것은 ‘주님의 기도’에 들어 있는 다른 기도들도 중요하지만, 인간들에게는 ‘서로 용서하는 일’이 우선 먼저 필요하다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를 강조하신 것에 초점을 맞추면, ‘주님의 기도’를 ‘용서와 화해를 위한 기도’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성찬의 전례 때에, 영성체를 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그 다음에 ‘평화의 인사’를 합니다.
그 순서는, 먼저 서로 용서하고 화해를 해야만 영성체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는, 또는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영성체를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심각하게 미워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과 서로 원수가 되어 있는 상황이라면, 바로 그런 상황에서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빈말’이 되고, 거짓 기도가 됩니다.
또 ‘평화의 인사’도 거짓 인사가 되어버립니다.
그런 상태에서 영성체를 한다면, 성체모독죄를 짓게 됩니다.>
2)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라는 말씀을 ‘용서’에 적용하면, 우리가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아버지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용서하셨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우리가 형제를 용서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를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 18장에 있는,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라는 말씀(마태 18,33)의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고,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으니, 우리도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3)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미’ 용서하셨다는 것을
실감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용서의 은총’을 주신 일과, 그 은총을 받아서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을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용서의 은총’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고, 즉 아버지께서 이미 주신 ‘용서의 은총’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일이고, 반대로 형제를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일은, 이미 주신 ‘용서의 은총’을 받기를 거부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함으로써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이미 주신 ‘용서의 은총’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로 해석되고,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만일에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이미 주신 은총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로 해석됩니다.
또 ‘주님의 기도’에 들어 있는 “저희 잘못을(죄를)
용서하시고” 라는 기도는, 용서해 달라고 조르는 기도가 아니라, 이미 주신 ‘용서의 은총’을 잘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하는 기도가 됩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용서하오니)” 라는 말이 무척 중요하게 됩니다.
이 기도는 형제를(이웃을) 용서하겠다고 다짐하는 기도이고, 동시에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또는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용서를 하고 싶어도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을 때, 그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도’입니다.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
4)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라는 말씀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신다.” 라는 뜻인데, 이 말씀에 대해서 “그러면 우리가 굳이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라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기도는, 안 주시는 하느님께 달라고 떼쓰는 일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잘 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일입니다.
심각한 가뭄 때에 온 세상에 고마운 단비가 내린다면, 큰 그릇을 준비한 사람은 많은 물을 얻게 될 것이고, 작은 그릇만 준비한 사람은 적은 물만 얻게 될 것입니다.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고. 온 세상에 햇빛이 비칠 때, 해를 향해 서 있는 사람은 그 햇빛을 온 몸으로 받겠지만, 해를 등지고 돌아서 있는 사람은 자기 그림자만 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 햇빛과 같고, 우리가 기도를 바치는 것은 해를 향해 서는 것과 같습니다.
그 간단한 일도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서 아무것도 안 주신다고 불평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