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에도 ‘평생 현역’으로 사는 법[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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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늦은 아침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스팸인 줄 알고 그냥 지나치려는데 또다시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확인해 보니 김모 이사님이었다.
제일 먼저 명함 이미지가 눈에 들어왔다. 흰 바탕 중간에 OO호텔이라고 쓰여 있기에 나에게 숙소를 추천하시려나 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화면을 닫으려는데 명함 아래 김 이사님의 글이 보였다. ‘다음 주부터 출근합니다.’ 깜짝 놀랐다. 이사님은 늘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전하셨다. 알게 된 지 3년, 그사이 들려온 근황들은 언제나 기대 이상이었다.
김 이사님은 약 15년 전 은행에서 희망퇴직을 했다. 외환위기의 거센 풍파 속에서 살아남았고, 회사를 떠날 때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 그의 자부심이었다. 내년이면 칠순을 맞이하지만 여전히 바쁘게 지내고 계셨다. 퇴직 직후 사회적 기업 창립 멤버를 시작으로 요양보호사 자격증 취득을 거쳐 이제는 숙박업소 매니저까지 그야말로 변화무쌍했다.
김 이사님의 메시지를 읽는데 깊은 한숨이 나왔다.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소파에 누워 소셜미디어를 보는 게 요사이 내 일상의 전부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몸도 마음도 다 편했다. 한때나마 업무에 열정을 불살랐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끓어오르는 물속에서 서서히 삶을 잃어가는 개구리처럼 나 역시 미지근한 안락 속에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김 이사님의 연락은 나를 깊은 고민에 빠지게 했다. 퇴직 후에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은 무엇이 다를까. 내가 만났던 몇 사람들을 통해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는 ‘자기 관리’다. 내 경우 퇴직 후 건전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더 이상 출근할 곳이 없다 보니 짧은 영상만 보고 있거나 술자리를 찾아다니는 등 일시적인 즐거움을 좇게 됐다. 한번 시작하니 끊을 수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게을러지고 무기력해졌다. 이런 나와는 달리 활동적인 퇴직자들은 자신이 나태해지는 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미루지 않고 실천했다. 내가 가끔 가는 도서관에서 만난 이모 부장님이 전형적인 사례다. 우연한 때에 자신을 퇴직자라고 소개한 부장님은 항상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했다. 열혈 수험생의 의지도 그만은 못할 듯했다.
둘째는 ‘용기’다. 나는 퇴직하고 나서 무언가를 시작하려 할 때면 두려움이 앞섰다. 그간 몸담았던 분야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몇 번 고배를 마시자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실망스러운 결과가 내 능력 부족 때문인 것 같아 위축되기 일쑤였다. 어차피 해도 안 될 거라는 생각에 급기야는 포기를 일삼게 됐다. 하지만 행동하는 퇴직자들은 정반대였다. 실패는 그들에게 장애물이 아니라 도리어 방향을 확인하는 나침반이었다. 건설회사를 정년퇴직한 뒤 파워 블로거로 성공한 박모 부장님이 그 예다. 퇴직 후 재취업에서 숱하게 좌절을 맛봤던 그가 3년 만에 기업들부터 협업 제안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굳센 용기가 있었다.
세 번째는 ‘호기심’이다. 퇴직을 하고 나니 자연스레 새로운 기술을 접할 기회가 줄어들었고 사회의 흐름에도 둔감해졌다. 내 지식과 경험은 구식이 돼가는데, 갈고 닦을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다. 이 나이에 학원 찾아다니는 것도 민망하고 온라인 강좌를 통해 배우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왕성한 퇴직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세상을 궁금해했으며 이를 알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시간을 할애해서 모르는 영역을 학습하거나 디지털 기술을 연마하는 등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마케팅 업무를 했던 후배가 퇴직 후 빅데이터를 전공한 뒤 교수로 거듭난 케이스가 대표적이다.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을 배움으로 연결하고 이를 다시 가르침으로 꽃피운 후배가 존경스러웠다.
많은 퇴직자들이 ‘평생 현역’을 꿈꾼다. 그러나 대부분은 생각에 그칠 뿐이다. 가장 큰 이유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지나온 날들에 대한 애정과 안락함이 자기 자신을 옭아맨다. 만약 쉼 없이 활동하고 싶다면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상에 맞춰 자기를 계속해서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일들이 컴퓨터를 통해 이뤄지는데 자판을 치는 것도 능숙하지 못한 퇴직자를 고용할 회사는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퇴직 후에도 살아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익숙함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와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제든 기회는 온다. 회사 생활이 끝났다고 내 인생도 끝나는 것은 아니다. 새 움이 돋아나는 봄, 모든 퇴직자들이 자신만의 새로운 챕터를 힘차게 열어 가시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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