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리 길에 피어난 화엄의 꽃, ‘108일, 증오를 자비로 승화시킨 3,700km 평화순례’
한 걸음마다 번뇌를 내려놓고, 한 마음마다 평화를 세우다.
2025년 10월 26일,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Dallas, Texas)에서 시작된 스님들의 ‘평화기원 걷기(Walk For Peace)’ 발걸음이 지난 2월 10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Washington D.C.에 이르렀습니다. 3,700킬로미터(2,300마일), 108일에 걸친 이 여정은 단순한 대륙횡단이 아니었습니다. 미국 현대사의 상처가 깊이 각인된 땅에서 출발해 세계 정치의 중심부로 향한 이 길은, ‘증오의 기억을 자비의 서원’으로 바꾸는 수행의 궤적軌迹이었습니다.
댈러스는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이 암살된 도시입니다. 그 총성이 울린 이후 미국 사회는 깊은 분열과 불신의 시대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정치적 갈등 ‧ 인종 문제 ‧ 이념 대립이 겹겹이 쌓이며 ‘미국의 꿈’은 상처 입은 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한 역사적 상흔傷痕을 간직한 도시에서 평화를 염원하는 발걸음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상처가 깊은 자리에서야말로 치유의 서원이 더욱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증오의 기억이 남아 있는 곳에서 자비의 길을 걷는 것, 그것이야말로 수행의 시작일 것입니다.
▲ 버지니아 주지사, ‘평화순례의 날Walk For Peace Day’ 선포
출발 100일째인 2월 2일, 순례단은 버지니아Virginia주 리치먼드Richmond에 도착했습니다. 버지니아는 미국 역사에서 빛과 그늘이 교차하는 상징적인 땅입니다. 버지니아 주는 한때 흑인 노예제가 제도화되었던 지역이었고, 리치먼드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Confederacy)의 수도였습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못했던 시대의 상처와, 형제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분열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버지니아는 변화와 화해의 길을 걸어온 땅이기도 합니다. 1990년 미국 최초의 흑인 주지사 더글러스 와일더Douglas Wilder를 배출했고, 2025년에는 첫 여성 주지사 애비게일 스팬버거Abigail Spanberger가 당선되었습니다. 과거의 억압과 분열을 딛고 다양성과 공존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스팬버거 주지사가 순례단이 도착한 날을 ‘평화순례의 날Walk For Peace Day’로 선포한 일은, 과거의 상처를 기억하되 그 기억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느껴집니다. 상처의 역사 위에 평화의 수행을 얹는 일, 그것이 바로 이번 순례가 지닌 깊은 의미일 것입니다.
증오를 녹여낸 자비의 포옹
▲ 영하의 추운 날씨 휠체어를 타고 나와 스님에게 꽃을 올린 노인에게 염주 걸어줌
눈보라와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길가에는 많은 시민이 나와 스님들을 맞이했습니다. 어린아이부터 휠체어를 탄 노인까지, 사람들은 미소로 인사를 건네고 꽃을 공양하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그 마음을 움직인 것은 거창한 주장이나 종교적 선전이 아니었습니다. 순례단은 오직 평화를 염원하며 묵묵히 걸었을 뿐입니다. ‘불교 포교’라는 이름을 앞세우기보다, 고요한 수행의 모습으로 다가갔습니다. 그 순수한 진심이 종교와 인종, 문화의 경계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이 진정성은 고난의 순간에 더욱 또렷해졌습니다. 순례 도중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스님이 휠체어에 앉아 자신을 친 운전사를 따뜻하게 안아준 장면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원한은 원한으로써 풀리지 않고, 오직 원한을 내려놓을 때 사라진다”는 《법구경》의 가르침이 한 장면 속에 응축되어 있었습니다. 그 포옹은 유창한 말로 이루어진 법문보다 깊은 ‘무언無言의 설법’이었습니다. 증오가 증오를 낳는 악순환을 끊는 길은 오직 자비뿐임을, 한 스님의 몸으로 보여준 수행이었습니다.
평화의 파동, 서로를 향해 열리다
순례의 마지막 여정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조지워싱턴대학교George Washington University(GWU) 스미스 센터Smith Center에 모인 대학생과 시민들은 스님들과 함께 고요히 눈을 감고 평화를 기원하는 명상에 들었습니다. 구호 대신 침묵이, 주장 대신 마음챙김이 자리를 채웠습니다. 자극적인 언어가 난무하는 시대에, 고요한 침묵은 오히려 더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서 열린 종교 간 대화
워싱턴 국립 대성당Washington National Cathedral에서 열린 종교 간 대화(interfaith dialogue)에서도 서로 다른 신앙을 지닌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마리앤 에드가 버드Mariann Edgar Budde 주교와 란돌프 마샬 홀레리스Randolph Marshall Hollerith 신부는 만 리 길을 걸어온 스님들을 귀한 손님으로 맞이했습니다. 각자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평화라는 이름 아래 마음을 모으는 모습은, 의상 대사의 <법성게>에 나오는 “잉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의 도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서로 섞이지 않으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화엄의 세계가 그 자리에서 조용히 드러났습니다.
연방 의회에서도 상원의원 앤디 김Andy Kim과 리사 블런트 로체스터Lisa Blunt Rochester, 하킴 제프리스Hakeem Jeffries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 낸시 펠로시Nancy Pelosi 전 하원의장을 비롯한 여러 의원들이 순례단을 맞이하며 경의를 표했습니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는 공간에서도, 묵묵히 걸어온 수행자의 발걸음 앞에서는 잠시 마음이 낮아집니다. 링컨 기념관Lincoln Memorial 앞에 모인 수많은 인파는 108일의 걸음이 만들어낸 평화의 파동이 결코 작지 않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일중일체一中一切) 한국 불자들의 화두
이 거대한 평화의 물결은 ‘지혜를 행하는 이’라는 뜻의 빤냐까라Pannakara 스님의 한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누군가는 평화를 염원하며 걸어야 한다”는 일념一念이 열아홉 스님의 발걸음이 되었고, 그 발걸음은 대륙을 건너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닿았습니다. 하나의 원력이 수많은 인연을 일으킨 것입니다. 의상 조사가 설한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일체 속에 하나가 있다”는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의 도리가 이 순례의 여정 속에서 생생히 드러났습니다.
이제 이 평화의 서원은 우리 한국 불자들의 화두가 됩니다. 3,700킬로미터를 걸은 스님들의 모습은 특별한 영웅담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수행을 일깨우는 거울입니다.
첫째,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서는 포용입니다. 이념과 세대, 지역과 형편의 ‘서로 다름’을 내려놓고 이웃을 부처님 대하듯 바라보는 일입니다. 경전에서 설한 화안시和顔施, 언사시言辭施, 심시心施, 안시眼施 등 ‘무재칠시無財七施’를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평화를 전하는 수행자가 됩니다.
둘째, 평화는 곧 수행이라는 자각입니다. 평화는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매일 아침 “오늘 하루 마음을 평화롭게 쓰겠다”는 한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셋째, 증오를 자비로 바꾸는 용기입니다. 나를 힘들게 한 인연을 미워하기보다 이해하려는 마음을 낼 때,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합니다.
평화는 멈추지 않는 발걸음에서부터
이번 순례에는 요란한 구호도, 거창한 현수막도 없었습니다. 그저 묵묵히 걷고, 미소로 인사하며, 평화를 기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조용한 발걸음은 많은 이들의 마음에 깊은 파동을 남겼습니다. 상처의 역사 위에 자비의 걸음을 얹을 때, 분열의 땅도 화해의 땅으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일보즉만리一步卽萬里, 일념즉세계一念卽世界. 한 걸음이 곧 만 리요, 한 마음이 곧 온 세상입니다.
노자老子 《도덕경》에서도 “천리지행시어족하千里之行始於足下. 천리 길도 발밑에서 시작된다”고 하였습니다. 댈러스Dallas에서 워싱턴Washington, D.C.까지 이어진 이 기도는 이제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자비의 한 걸음을 내딛을 때, 만 리 길에 피어난 화엄의 꽃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삶 속에서 다시 피어나 세상에 향기를 전하게 될 것입니다.
(서울 奉恩寺에서 나오는 월간 《판전板殿》 3월호에 싣는 글입니다.)
첫댓글 첫째,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서는 포용입니다. 이념과 세대, 지역과 형편의 ‘서로 다름’을 내려놓고 이웃을 부처님 대하듯 바라보는 일입니다. 경전에서 설한 화안시和顔施, 언사시言辭施, 심시心施, 안시眼施 등 ‘무재칠시無財七施’를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평화를 전하는 수행자가 됩니다.
둘째, 평화는 곧 수행이라는 자각입니다. 평화는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매일 아침 “오늘 하루 마음을 평화롭게 쓰겠다”는 한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셋째, 증오를 자비로 바꾸는 용기입니다. 나를 힘들게 한 인연을 미워하기보다 이해하려는 마음을 낼 때,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