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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두 번째 답변 1
합 2:1-11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5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
6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7 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8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9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0 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합 2:1-11 / [정의는 불변의 표준이다] 나는 내 경계 초소에 서 있을 작정입니다. 나는 초소 위에 올라서서 주님이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실지, 나의 탄식에 대하여 주님이 무슨 답변을 하실지 기다리기 위하여 먼 곳을 바라보고 있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결심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이같이 대답하셨다. `내가 이제 네게 보여주는 것을 여러 서판에 명백히 써서 공개하여 그것을 누구나 대번에 읽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하여라! 3) 왜냐하면, 내가 지금 네게 보여주는 계획들이 아직도 정해진 시각을 향하여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계획들은 느리지만 꾸준하고 확실하게 이루어질 그 시각을 향하여 달리고 있으니 절대로 실망을 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 성취가 느리고 지체되더라도 꾸준히 기다려라. 그 시각은 틀림없이 올 것이다. 단 하루도 넘기지 않을 것이다. 4) 이 사실을 깨달아라. ㄱ) 악한 사람들은 제멋대로 허풍을 떨다가 멸망하지만, 의로운 사람은 진실하게 나를 의지하기 때문에 살 수가 있다. (ㄱ. `그(저 갈대아 사람)의 마음은(교만으로 가득 차서) 부풀어 있고 그 속에 성실함이 없다. 그러나 의인은 자신의 진실함으로써 살 수가 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다) 5) [탄압자에게 선포된 저주] 그런데 저 갈대아의 폭행자들이, 저 강도 떼들이, 건방지게 힘만을 믿고서 으쓱대는 것들이 모든 민족들을 모아다가 자기들의 것으로 삼고 또 모든 백성들을 몰아다가 자기들에게 붙여 놓았다. 진실로 그들은 죽은 자들의 세계처럼 넓은 목구멍을 벌리고 또 주검처럼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에 절대로 만족한 상태에 도달할 수가 없다. 6) 오히려 세계 만민들이 그 탄압자들의 폭행에 대하여 비웃는 노래를 부르고 또 그들을 멸시하고 저주하는 시를 짓지 않겠느냐? [첫째 저주] 네게 정복당한 백성들은 외칠 것이다. 너희가 다른 민족의 재산을 강탈해 가져다가 쌓아 두었으니 죽음과 멸망의 저주를 받아라! 너희가 언제까지 그런 짓을 계속할 작정이냐? 너희는 세계 만민들을 너희의 채무자들처럼 취급하면서, 그들의 물건을 마음대로 집어가 버렸다. 7) 그러나 이 착취를 당한 자들이 아주 돌연히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희를 벌벌 떨게할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그때에는 너희 강도 떼들이 모조리 털리고 말 것이다. 8) 너희가 수많은 백성들을 약탈하였으니, 그때에는 그들의 남은 자들이 모두 너희를 약탈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모든 나라와 모든 도성에 들어가 흘리게 한 사람들의 피와 주민들에게 행한 폭력 통치에 대하여 보복을 받을 것이다! 9) [둘째 저주] 너희가 불의한 수단으로 재산을 늘렸으니 죽음과 멸망의 저주를 받아라! 그런 재산이 너희와 너희 후손들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너희는 독수리처럼 높은 곳에 집을 짓고, 누구도 손댈 수 없이 안전한 곳에 산다고 생각한다. 10) 그러나 너희는 수많은 민족들을 멸절시킴으로써 너희의 집안을 수치스럽게 파멸시키고 너희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궁리를 하였다. 11) 너희가 지은 집의 벽에 박힌 돌들도 소리질러 너희의 불법을 고발하고 지붕의 서까래들도 그 말이 옳다고 답변을 한다.
하나님은 하박국 선지자의 두 번째 호소(1:12-17)에 대한 답으로 바벨론에 대한 저주의 선포와 멸망의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더딜지라도 기다리라(1-4)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답변을 듣고자 간절히 기다렸습니다(1). 그 때 하나님께서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도 누구든지 읽고, 속히 달려가서 그 내용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정한 때가 되면 유다를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한 바벨론을 그의 죄악대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정한 때는 하나님의 때요 심판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유다와 바벨론에게 각각 다른 의미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원대한 섭리와 계획이 결코 지체되지 않고 속히 이루어질 것을 믿는 믿음으로 더딜지라도 기다려야 합니다(창 15:1-6; 롬 1:17; 히 10:37-39; 벧후 3:8-9). 기다림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탐욕의 죄(5-8) 바벨론은 자신들의 강성함으로 인해 교만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정직하지 못하며 무절제하고 탐욕스러웠습니다. 모든 나라와 백성을 희생제물로 삼아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기 위해 생명을 위협하고 빼앗았습니다. 결국은 메대와 바사 연합군에 의해 노략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7). 악인은 그 행한대로 보응을 받습니다(사 21:2; 33:1; 렘 1:9). 악인의 행위는 언젠가는 갚아야 할 무거운 부채인 것입니다. 교만과 탐욕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옵니다. 성경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눅 12:15),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자족하는 마음이 있어야겠습니다.
불의한 이익을 취하는 죄(9-11) 다른 민족을 침략하여 국가 경제를 유지하고 번영을 누리며 왕가를 유지했던 바벨론의 승리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신들이 멸망당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바벨론의 죄악을 생명이 없는 '돌'과 '들보'가 고발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벨사살 왕에게 나타난 벽에 씌어진 글로 문자적으로 성취가 되었습니다(단 5장).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고 착취하여 자기 만족을 취하고, 자기 능력과 권세로 성을 쌓아 자기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는 자기 중심의 성(단 4:30)은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하여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공의와 정의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잠 21:3) 견고한 성을 쌓아야겠습니다.
적용: 삶에 의문이 생길 때 그 답을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더딜지라도 기다려야 하는 당신의 삶의 문제를 오늘도 오직 믿음으로 주님께 기도합시다.
꿈은 작은 씨앗입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꿈은 지식보다 강하다고 말했습니다. 포드가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꿈꾸었을 때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지만 만들었습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겠다고 할 때도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지만 만들었습니다. 꿈은 건물의 설계도와 같습니다. 꿈이 없는 인생이 작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마음에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어야 합니다.
< 설 교 >
믿음이 있어야 기쁘시게 합니다
하박국 2:1-4, 히브리서 11:6 / 이성희 목사
서론
알렉산더 대왕이 지독한 병에 걸렸습니다. 의사들은 모두 고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못 고치면 화를 당할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의사가 자청하여 왕을 치료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의 적들로부터 왕에게 모함하는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그 의사가 적에게 매수당하여 왕을 죽이려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의사가 왕에게 약을 바치자 왕은 편지를 내 밀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의심 없이 그 약을 다 마셨습니다. 모함하는 편지를 본 의사는 떨고 있었는데 왕은 “나는 자네를 믿소”라고 하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왕은 그 의사의 치료로 얼마 후 쾌유하게 되었습니다. 왕의 의사에 대한 믿음이 없었으면 왕은 낫지 못했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안전한 것입니다. 내가 낫는 것이며, 기쁨을 누리는 것이며, 평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 오해가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율법시대이고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약시대는 은혜시대이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자세히 보시면 구약도 믿음으로 구원받는 시대입니다. 율법으로는 어떤 사람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율법의 대명사인 모세도 율법적으로는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처럼 온전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창세기 6:8-9에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야 의인이 되고 완전한 자가 됩니다. 또 창세기 15:6에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합니다. 믿으니 의로 여기셨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예수님께 산에 올라가셔서 변화하신 다음에 산에서 내려오실 때 간질병 걸린 아들의 아버지가 아홉 제자가 고치지 못한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합니다. “할 수 있거든 내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 때 아버지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용서하소서”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믿음을 보시고 아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믿나이다’ 이 한 말에 예수님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아들을 낫게 하는 기적은 믿음에서 일어납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한 발 늦게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오라버니를 애도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1:25-26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하십니다. 믿음은 영생의 조건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기쁨의 조건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기쁘시게 합니다.
히브리서 11:6 상반절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이 기쁘시게 하는 조건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모든 존재는 존재가치를 인정받으면 기쁜 법입니다. 세상의 가장 작은 미물이라도 존재가치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기쁜 일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큰 기쁨이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을 유신논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우리에게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떤 이는 자신이 본 것, 경험한 것만 믿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미국에 안 갔다 왔으면 미국이 있는 것도 못 믿을 것 아닙니까? 보이는 것만 믿는다면 고조부가 존재한 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내 존재의 원인은 보지 못해도 믿습니다. 고조부는 내 존재의 원인이니까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 존재의 원인인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을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등 하나님이 계심을 증명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신명기 4:39에는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라고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다른 신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존재하십니다.
니체는 ‘하나님은 죽었다’고 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하나님은 없다’고 했습니다. 실존철학자 샤르트르는 ‘하나님은 부재중’이라고 했습니다. 옛 소련의 우주인 라렌드는 ‘망원경으로 우주 공간을 샅샅이 살폈으나 하나님은 없다’고 했습니다. 유리 가가린을 기억하십니까?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 1호를 타고 1시간 29분 만에 지구 상공을 일주하여 인류최초의 우주비행에 성공한 우주비행사입니다. “이곳에 어떤 신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근 ‘월드 메거진’에서는 역사적 기록을 바로잡기 위해 놀라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유리 가가린은 무신론자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공군 아카데미 교수인 페트로프는 가가린이 러시아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교회의 강한 영향력으로 믿음의 뿌리를 가진 신앙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가가린의 무신론적 말은 구소련의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후르시초프에 의해 조작됐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래 전 아버지 조시 부시 대통령이 부통령 시절 크게 감동을 받았던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소련의 서기장이었던 브레즈네프가 세상을 떠나 미국의 특사로 장례식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브레즈네프의 아내가 남편의 시체에 십자가 성호를 그었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못합니다. 유물론이니 무신론이니 외치지만 인류의 본능 속에 있는 유신론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폴란드에 있는 옛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는 어느 유대인 청년이 쓴 글귀가 벽에 씌어져 있다고 합니다. “지금 밝은 빛을 볼 수 없지만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 지금 느끼지 못하지만 나는 사랑이 있음을 믿는다.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나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가장 든든한 힘입니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믿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느 무신론자가 종교인에게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대보시오. 그러면 나도 기꺼이 신을 믿겠소”라고 했습니다. 이 종교인은 “성경은 읽어보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아니요.” “그럼 불경은요?” “아니요.” “그럼 철학자나 현인의 글은요?” “아니오”. 그 때 종교인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무신론자가 아니요. 무식한 사람일뿐이오”. 무신론은 무식입니다.
하박국의 시대의 사회적 불신과 부정은 끝이 없었습니다. 믿는 자가 어려워지고, 착한 자가 손해를 보았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이 많았습니다. “왜 악인이 잘됩니까?” “왜 악한 사람을 통해 선한 사람이 박해를 받습니까?” 그 때 2:4에는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여 그 곳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는 대답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믿음으로 살게 하십니다. 믿음으로 살면 그것이 승리의 삶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그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지난 주간 서울 시내버스에 반기독교 광고가 등장했다 나흘 만에 사라졌습니다.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이라는 단체가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 없다”라는 아인슈타인의 글을 붙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무식한 것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일은 더욱 불쌍한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계심 믿으면 내가 행복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기쁘시게 합니다.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상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상주시는 이심을 믿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귀한 것도 아깝지 않게 줍니다. 미운 사람은 아무리 작은 것도 주기가 아깝습니다.
하나님은 상주시기를 기뻐하시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로마서 8:32에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은 우리에게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일입니다. 아들을 주시는데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아들을 주셨다면 다른 어떤 것도 주실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38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시되 후히 주시고, 누르고 흔들어 주시고, 넘치도록 주시고, 안겨 주십니다. 말라기 3:10에는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주시되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십니다. 마태복음 7:7에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주실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주신다는 말씀이 수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한 로랜스 형제는 “성경이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팔은 결코 짧아지지 않는 다는 점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긴 팔로 우리에게 안겨 주시고, 부어 주시고, 넘치게 주십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상급은 바로 하나님 자신뿐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고귀한 선물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 자신을 주셔서 믿으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빌립보서 3:14에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 갈 수 있는 것은 부름의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달려갑니다. 프랑수아 바리용은 “하나님의 정의에 비치는 보상 없이 회복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보상하시며 풍성을 상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얼마 전 성서신학원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졸업생이 몇 명 안 되는 졸업식입니다. 그런데 저도 이사장이 되어 참석하여 설교도 했는데 졸업생 전원에게 상을 주었습니다. 상의 이름도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의 상도 있었습니다. 우리교회 금년도 제직 간친회 때도 보니 경품에 뽑혀 상을 받게 되니 다 큰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별 것 아니지만 상을 받으면 어른이나 아이나 다 좋아합니다. 저도 올해는 제 번호를 부르지 않아 아무 것도 받지 못했는데 안 뽑히면 저도 섭섭해요.
졸업시즌을 맞았습니다. 요즘은 이색 졸업식이 많습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졸업식 광경도 있지만 사각모를 쓴 중학교 졸업식도 있고, 세족식을 한 초등학교 졸업식도 있습니다. 어느 학교는 학생이 선생님에게 상을 준 졸업식도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준 상도 아주 별난 상이 있습니다. 골룸 흉내를 잘 내 급우들을 기쁘게 한 ‘골룸상’이 있습니다. 처음보다 대인관계가 많이 좋아져서 받은 눈치코치상이 있습니다. 어른들의 세계를 일찍 경험하여 고생을 하였다고 주는 산전수전상도 있습니다. 늘 히죽이죽 잘 웃는다고 ‘히죽이상’이 있습니다. 늘 투덜대기를 좋아한다고 하여 ‘투덜이상’이 있습니다. 몸이 아파서 조퇴하고 집으로 간 날이 많은데 내년에는 건강을 기대하며 ‘집으로상’도 있습니다. 모든 상을 다 좋은 것이며 기념이 될 만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시면 일곱 교회에 주시는 상이 있습니다. 상은 이기는 자에 대한 보상입니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생명의 관을 주리라고 하십니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흰 돌에 새 이름을 새겨주시겠다고 합니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합니다. 흰옷을 입게 하겠고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0:42에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작은 선행도 잊지 않고 상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마 이런 사람에게 주는 상의 이름은 ‘냉수 한 그릇 상’일지 모릅니다. 사실은 작은 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큰상입니다.
야구의 철인이라 불리는 칼 립켄 주니어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볼티모어 오리올즈의 선수인데 2,632게임을 쉬지 않고 연속으로 출장했습니다. 연속 출장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선 실력이 있어야 계속 출장할 수 있고, 둘째는 다치지 않고 건강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런 선수는 타율이 높은 선수나 홈런을 많이 친 선수보다 더 존경을 받습니다. 칼의 성장 원인으로 한 우물을 판 단순성에 있다고 합니다. 동네의 다른 아이들이 모든 스포츠에 만능이 되려 할 때에 칼은 야구에만 매달렸습니다. 상을 받기 위해서는 한 하나님만을 믿어야 합니다. 한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됩니다.
제이 리노라는 야간 토크쇼의 진행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한 애기에 보면 아내 셋을 거느린 남자를 다룬 드라마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에 대한 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바로 고약한 장모를 셋이나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상 같은 벌이 있습니다. 벌 같은 상도 있습니다.
결론
미국 나이아가라폭포에서 1859년 줄타기 횡단을 한 찰스 브론딘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 곡예사가 많은 구경꾼들 앞에서 한 사람을 등에 업고 건넜습니다.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그가 건널 수 있었던 열쇠는 신뢰 즉 믿음입니다. 등에 엎여 있던 사람이 브론딘을 믿지 못했다면 절대로 줄타기 곡예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믿는 까닭은 신뢰 호르몬인 ‘옥시토신’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험하는 중에 어떤 사람의 코에 신뢰 호르몬을 뿌렸더니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두 배로 증가하더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 얼굴을 닮은 사람에게 신뢰감이 크고, 자신과 전혀 안 닮은 이성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합니다.
신뢰 호르몬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겠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옥시토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기쁨을 누리려고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이사야 43:7에는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로 말미암아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하박국 2:1-3 / 피영민 목사
서 론
소선지서 12권 중 하박국서는 독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12명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아 백성들에게 일방적으로 증거하지만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이 가진 의문을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이런 면에서 하박국 선지자와 선지서가 독특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이름은 ‘어떤 문제를 품고 씨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품고 씨름했던 문제들은 그가 살던 B.C. 7세기에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지만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하나님께 질문했던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품은 의문은 어떤 부정적인 자세로 비판하려는 의문이 아닙니다. 17세기에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랑스의 데카르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사람은 무엇이든 의심을 한다는 것입니다. 휴지가 있으면 ‘이것이 진짜 휴지일까?’, ‘이것이 휴지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라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직업적인 회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이런 방법으로 모든 지식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하려했지만 이런 직업적인 의문은 신앙에 유익을 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데카르트가 근대 합리주의 철학과 자연과학의 발달에는 기여했지만 신앙의 발달에는 기여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신앙관은 소위 ‘이신론’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하박국의 질문은 데카르트처럼 직업적이고 부정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정말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서 한 것입니다. 모세, 예레미야, 욥, 하박국과 같은 정직한 구도자의 의문이 신앙성장에 큰 유익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정직한 의문에 대답해주심으로 우리가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긋나니까 질문한 것입니다.
하박국 1장에서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어찌하여 유다에 간악과 패역이 횡행하고 율법이 해이해지고 공의가 왜곡되는데도 가만히 계시느냐고 하나님의 무관심에 대해 의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바벨론 군대를 일으켜 악한 너희를 치려고 준비하고 계시다는 응답을 받으니까 하박국이 놀라서 또 질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차마 못 보시는 분이신데 어찌하여 그런 악인을 통해 더 나은 의인을 징벌하려고 하십니까? 깡패들로 자기 자식을 징벌하려고 하십니까? 이것은 제가 기대하던 응답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그러십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고 나서 그 응답을 기다립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질문해서 응답을 받으려면 하박국과 같은 세 가지 자세가 필요합니다.
Ⅰ. 하나님의 음성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Watch and Listen)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합 2:1).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기다리며 집중하고 있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문제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이 사람에게도 물어보고 저 사람에게도 물어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박국은 하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께 물어보고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하박국이 실제로 파수꾼의 일을 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파수꾼이 소식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을 기다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가있겠다는 것입니다. 조용한 곳을 찾아 잠잠히 하나님을 향해 영적인 귀를 열어놓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박국의 자세에서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모든 주위를 집중하는 것입니다(Attentiveness).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6). 예수님께서 골방만 되고 안방은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골방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기 위해 모든 주위를 집중시킬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면 조용한 곳으로 가십시오. 주위를 집중할 수 있는 곳으로 가셔서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위가 산만한 음식점이나 식당 혹은 시장 같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조용한 곳에서 잠잠히 영적인 귀를 열어놓고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뜻을 보여주시면 100% 순종하겠다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Submissiveness). 하나님께서 뜻을 보여주셔도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하겠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뜻을 보여주실 필요도 없고 보여주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제 생애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 음성을 들었을 때는 100% 순종하겠다는 마음을 가질 때였습니다. 순종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그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지키는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뜻을 알려주셔도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알려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위를 집중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순종하겠다는 자세를 가질 때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있다면 시간을 정해서 성경책을 들고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기도하는 자리로 가시기 바랍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성경 읽고 기도하기를 반복하면 일반적으로 저녁때쯤 응답이 옵니다. 하지만 저녁에도 응답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하루 더 하십시오. 하루 더 해도 응답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럼 하루 더 하십시오. 삼일 정도 하면 어지간히 큰 문제도 응답이 올 것입니다.
하박국 2장 1절 중간에 보면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내게’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내게’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뜻은 ‘내 안에서(In me)’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내게’라고 번역되었지만 사실은 ‘그가 내 안에서 어떻게 말씀하실는지 듣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안에서라는 표현은 스가랴 선지자도 10번이나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다리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귀에 알아들을 수 있도록 들려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말씀하시면 귀로 듣지 않아도 내 영혼에 강력하게 하나님의 뜻이 찍히게 됩니다. 이것이 내 안의 성령께서 내 영에게 말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성령께서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깨닫게 하심으로 말씀하실 수도 있고 내 삶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섭리의 의미를 깨닫게 함으로써 말씀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이 주신 응답을 기록하여 전파해야 합니다 (Write and Preach)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합 2:2). 하박국이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규범적인 계시를 받는 존재입니다. 규범적인 계시라는 것은 하박국 선지자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읽고 들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날은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에게도 규범적인 계시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규범적인 계시는 성경 66권으로 끝났고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듣고 그것이 규범적인 계시라고 하면 그 사람은 이단의 괴수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박국은 선지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규범적인 계시를 받아 그것을 판에 새겨 사람들이 달려가면서도 볼 수 있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박국 2장 2절의 말씀을 해석할 때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누어졌습니다.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해석하는 사람과 읽으면서도 달려갈 수 있게 하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해석이 맞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배척한다고 볼 필요가 없고 상호 보완하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신 것을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고 읽으면서도 달려갈 수 있게 하라고 해석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성도들이 배울 수 있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뜻을 알려주실 때 난해한 말로 알려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속도로 광고문을 누구도 알 수 없는 난해한 말로 기록해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를 들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이렇게 광고문을 써놓으면 도대체 왜 저런 문구를 써놓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말도 안 되는 말, 깊이 있는 것 같지만 아무 내용도 없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쉬운 말,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말, 오해할 수 없는 말로 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 성도들의 삶 자체가 불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증거하는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응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증거를 보여주셨다면 이제 우리의 삶이 불신자들에게 증거하는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고후 3:2-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받게 되면 우리의 간증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편지와 메시지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알지만 불신자들이 읽는 성경은 우리 자신입니다. 불신자들은 성도들을 보고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인생이 달라지고 좋아지는 것을 보니까 자신도 믿어야겠다고 결정한다면 제대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을 보고 교회 다니는 것을 싫어하고 자신은 결코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한다면 잘못된 메시지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가 되어 세상에 전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Ⅲ. 응답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Wait)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합 2:3). 하나님께 질문하면 답변이 옵니까? 옵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옵니까? 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바벨론과 같은 악인을 징벌할 때가 옵니까? 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들에게 상을 주실 때가 옵니까? 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때론 지체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가 있고 그때는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때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최적의 때입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현재 상황이 매우 급박해보여도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보시면 급박하지 않습니다. 영원 가운데 그 시간은 잠깐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박국 2장 3절 후반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모순된 것 같습니다. 더디다는 말과 지체된다는 말은 동의어 아닙니까? 그런데 하박국 2장 3절 후반에서는 ‘더딜지라도 지체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말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히브리어 원어로는 모순이 아닙니다. 원어적 의미는 ‘비록 더딜지라도 응답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는 의미입니다. 이중 부정으로 강력한 긍정으로 나타내는 히브리어의 어법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기다려도 상황이 좋아지지 않을 때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응답과 구원과 승리를 주시는 날이 정해져 있고 그때는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할 때 믿음의 삶은 인내를 요구하는 삶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인내하며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에서 하박국 2장을 인용한 말씀이 히브리서 10장 32~39절입니다. 현재 고난과 비방과 환난이 있을지라도 더 낫고 영구한 삶을 바라보고 인내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0:35~38). 성도에게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함으로 약속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은 하박국 2장 4절을 직접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과 상급과 구원이 지금 바로 오지는 않아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한 때에 온다는 말씀입니다.
결 론
19세기 러시아의 최고 문학은 톨스토이의 작품들입니다. 톨스토이는 참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의 글은 거듭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놀라운 작품입니다. 그의 불후의 명작은 ‘전쟁과 평화’입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프랑스 사회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혼란한 틈을 타고 일어난 인물이 나폴레옹입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장악하고 유럽 전역에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유럽만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러시아까지 지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1805년 아우스텔리츠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우스텔리츠의 전쟁은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싸운 전쟁입니다. 이때 나폴레옹이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한 번의 날카로운 공격으로 전쟁은 끝났다.” 한번 공격했더니 전쟁이 끝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안드레이가 그 당시 지휘관이었던 쿠투조프에게 질문합니다. “내일 전투에 이길까요?” 그러자 쿠투조프는 “아니. 우리가 진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령관이 전투에 진다고 하니까 젊은 장교 안드레이가 깜짝 놀라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쿠투조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번 전투에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전쟁은 반드시 최후의 전투가 있는 법이고 최후의 전투에 이기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최후의 전투에 이겨야지 진짜 이긴 것이지 한번 전투에 이긴다고 이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당시 러시아의 황제였던 알렉산더 1세가 사령관 쿠투조프에게 계속 공격하라고 명령했지만 쿠투조프는 공격하지 않고 계속 후퇴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승승장구하여 1812년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는데 쿠투조프는 계속 후퇴하면서 러시아 마을마다 불을 질러 먹을 것이 없도록 만들어놓고 사람들도 모두 대피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점령했는데 와서 보니까 폐허가 되어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결국 나폴레옹이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고 점령해도 점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겨울이 되어 추워지니까 나폴레옹의 60만 대군은 추위 속에서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쿠투조프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시간과 인내야말로 내 전쟁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인내하며 기다렸다가 추위 속에서 죽어가는 나폴레옹 군대를 모두 죽여버린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전쟁에서 패배하여 결국 엘바 섬에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다 또 한 번 기회를 얻어 1815년 유명한 워털루 전투에서 무너지고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되어 그의 인생은 끝이 납니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중간 전투에서 한두 번 이기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최후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 이기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이고 이길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사람은 결국 최후 승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쿠투조프는 러시아를 살려내고 나폴레옹은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한두 번 전투에서 패배할 수 있습니다. 술을 끊으려고 하다가도 또 먹을 수 있습니다. 담배를 끓으려고 노력하다가도 다시 필 수 있습니다. 죄와 싸우다 보면 어떤 때는 패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두 번 전투에서 졌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성경 읽기, 기도, 교회 출석, 봉사를 중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두 번 전투에서는 져도 우리는 최후 심판 때 결국 승리할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북한에서 굶어 죽는 것을 피해서 나온 탈북자들 31명을 중국 사람들이 다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중국이 기껏 탈출해서 나온 31명의 사람들을 돌려보내 죽게 만드는 것을 보며 참 대국답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찌 이런 악인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두실까요?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이기는 것 같아도 악을 행하고 사람의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올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지금은 질 수도 있습니다. 한두 번 패배할 수도 있지만 최후 승리는 우리의 것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은 기다림의 삶입니다. 믿음의 기다림은 기다릴 가치가 있는 기다림입니다. 인내로 승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하박국 2:1-3, 베드로후서 3:8-9 / 이성희 목사
서 론
어느 날 한 부인이 오페라 극장의 지배인에게 전화하였습니다. 지난밤에 극장 공연을 갔다가 비싼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부인은 자신의 좌석 번호까지 알려주었습니다. 지배인은 전화를 끊지 말고 잠시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부인이 앉았던 좌석 밑에서 부인이 찾던 브로치를 금방 찾았습니다. 지배인이 브로치를 가지고 전화기로 갔을 때 이미 전화는 끊어져 있었습니다. 지배인은 다시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그 후로 부인은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이상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 부인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고, 기도하고, 떼쓰기도 하지만 수화기를 붙들고 기다리지 못하고 금방 끊어버리는 것은 아닙니까? 어떤 분이 말하기를 하늘나라에 가면 ‘분실물센터’가 차고 넘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이 준비하셨는데 기다리지 못하고 찾아가지 않은 것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기다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하시는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오냐”(yes)라고 응답하기도 하시고, “안돼”(no)라고 응답하시기도 하시고, “기다려”(wait)라고 응답하기도 하는데 “기다려”라는 응답이 가장 많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은 수없이 “어느 때까지 니이까?”라고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에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이 걸려 응답하실 때가 많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은 성경전체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2:20에는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주님께서 ‘속히 오리라’는 말씀이 여러 번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아직도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더딘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예언, 약속, 하나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메시야의 오심도 사람의 시간으로는 더딘 것 같지만 초림하셨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재림하실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항만시설이 없었던 시절에 배들이 항구에 들어오려면 밀물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을 타고 들어왔습니다. 이것을 라틴어로 “ob porter”라고 합니다. 배가 항구에 들어오려고 밀물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영어의 ‘opportunity’(기회)라는 단어가 바로 이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배가 밀물을 기다리지 못하면 항구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인생에서도 잘 기다리지 못하면 좋은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기다림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신앙이란 기다리는 것이고, 신앙인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종달새 알에서 종달새 울음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더딘 것 같지만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건조하느라 120년을 보냈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기다리지 못한 당시 사람들은 노아를 조롱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나기 전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이 후손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기다리지 못해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이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성급함은 지금까지 세계적인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삭의 후손과 이스마엘의 후손이 끊임없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400년 전에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기다리지 못한 자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객사하였습니다. 출애급할 때 애급을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일까요? 광고를 잘 안들은 사람들이랍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더딜지라도 잘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흔히 사람들은 기다림을 지체라고 여깁니다. 기다림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의 삶의 의미는 기다림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더라도 잘 기다립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치도 틀림이 없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올해 못 다한 일들도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때가 되면 마지막은 반드시 옵니다.
하박국 2:3 상반절에는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묵시가 말하는 것은 정한 때에 마지막이 오고, 하나님의 묵시는 거짓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한 때’는 누가 정한 때입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때입니다. 때는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나의 생각이나, 나의 계획의 때에 하나님의 때를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손에 나의 때를 맡겨야 합니다.
얼마 전에 제가 ‘시간을 잡아라’라는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시간 관리에 관한 책입니다.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리더십이며 삶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내가 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야 좋은 시간 관리자가 됩니다. 시간이 내 것인 줄 알고 내가 정하면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종말’이란 히브리어로 ‘케츠’라는 말입니다. 어떤 목적이나, 행위나, 시기의 끝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묵시의 내용은 바벨론 압제의 종식을 의미합니다. 바벨론은 혹독하게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압제하였습니다. 얼마나 강성한 나라였던지 망할 것 같지 않은 강대국이었지만 페르시아에게 하루아침에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에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도 페르시아의 포로민이 되었지만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 때까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시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정한 때가 되면 마지막이 있게 하십니다.
출애급도 좀처럼 끝이 날 것 같지 않았지만 10가지 재앙을 내린 다음에 끝이 있게 하셨습니다. 사사시대에는 외적의 침입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고통당하고 있었지만 사사들을 세워 외적을 물리치고 고난의 끝이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의 힘에 의하여 포로로 끌려갔지만 고레스왕이 해방시킴으로 포로생활의 끝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로마황제의 10대 박해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당하고 순교했지만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왕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므로 박해의 끝이 있었습니다.
묵시란 현재적 의미뿐만 아니라 미래적 의미도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묵시는 시간의 최종적인 순간까지 계속될 것임을 보여주는 묵시입니다.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해방뿐만 아니라 장래에 세상 왕과 사탄의 지배가 끝이 오고, 영원한 나라가 올 것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개인의 종말과 나아가 인류의 종말은 반드시 옵니다. 오긴 오되 속히 옵니다. 일생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립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더 빨리 지나가 버립니다. 개인에게나 인류에게나 종말은 속히 다가옵니다.
2014년 한해가 신속히 지나가고 있습니다. 새해 첫 주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런 해가 몇 년 만 지나면 어린이는 청년이 되고, 청년은 중년이 되고, 중년은 노년이 되고, 노년은 세상을 떠납니다. 정말 성경의 표현대로 신속히 날아가 버리는 것이 우리의 일생입니다.
지구의 종말에 대한 관심도 많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지구의 인력이 사라진다는 팬 카페, ‘Gravity Falls Fan Cafe’가 있습니다. 지구의 종말이 온다는 사람들은 태양에 흑점이 많이 생겨서 빙하시대가 온다고도 하고, 태양이 폭발해서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도 합니다. 어떤 이는 60억년 후에 종말이 온다고 합니다. 60억 년 후는 우리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시간인데 왜 그런 연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종말연구보다 성경연구가 훨씬 필요하고 유익합니다.
인류의 종말에 대한 관심을 보면 대개 이런 내용입니다. 첫째는 ‘정말 종말이 오는가’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언제 종말이 오는가’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어떻게 종말이 오는가’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들은 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반드시 종말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속히 온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잘 준비하여 종말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32:29에는 “만일 그들이 지혜가 있어 이것을 깨달았으면 자기들의 종말을 분별하였으리라”라고 합니다. 종말을 분별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사막의 수도자들은 가난, 순결, 순종의 세 가지 서약을 하고 수도사가 되고, 매일 아침 이 세 가지 서약을 다시 반복합니다. 그리고 세 가지 은둔자의 삶은 가난과, 고난과, 분별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수도사들은 성경에서 세 가지 삶의 대표적 인물들을 모델로 삼습니다. 노아는 가난의 대명사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욥은 고난의 대명사로 고난의 신앙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니엘은 분별력의 대명사로 포로로 잡혀갔지만 지혜로운 분별력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이들의 지혜라는 것은 현재적인 관심이나, 쾌락이나, 만족이 아니라 미래적인 관심과, 자신의 종말과, 장래의 상태에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미국의 동기부여가이며 성공학의 대가라고 일컫는 나폴레옹 힐은 “과거를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은 이미 흘러간 물로 다시 물레방아를 돌리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톱밥을 다시 톱으로 켜려는 사람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과거에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이며, 개인과 인류의 종말을 알고 준비하는 자세입니다.
시편 90:12에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날을 헤아리는 지혜를 얻읍시다. 우리 날인 인류의 종말을 헤아리는 지혜를 얻읍시다. 인류의 종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종말입니다. 나의 날, 나의 종말을 알고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신학자 에른스트 케제만은 “종말론은 모든 기독교의 어머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종말론은 신학의 마지막이며, 신앙의 끝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대하여 항상 민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종말신앙으로 잘 준비하여 하루하루를 소망으로 살아가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기다리면 지체되지 않고 옵니다.
하박국 2:3 하반절에는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시간은 조금도 지체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일초도 어김이 없이 하나님은 정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십니다.
“일하기를 배우라 그리고 기다리기를 배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다림이란 일하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일만 하면 결코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일한 다음에는 기다려야 일한 대가가 나타납니다. 일하고 기다리는 사람은 반드시 성취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모임의 약속에 늦었습니다. 왜 늦었느냐고 하니까 “지하철이 밀려서 늦었다”고 변명을 하더랍니다. 지하철은 밀리지 않습니다. 가끔 사고는 나지만 시간을 제법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것이 지하철입니다. 자동차는 밀려도 지하철은 밀리지 않습니다. 사람은 늦어도 하나님은 안 늦습니다. 사람들이 늦다고 생각하는 시간이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에 가장 적절한 정하신 시간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이 더디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시간에서 하나님을 보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에서 우리를 보면 절대로 더디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3:8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은 지체함이 없이 반드시 하나님의 시간에 이루시고, 하나님의 정하신 마지막이 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에서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이제 겨우 며칠 지났을 뿐입니다.
남아프리카의 성자라고 불리며 240권의 경건서적을 저술한 앤드류 머레이는 “왜 하나님은 때때로 지체하시는가? 하나님이 지체하실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갑절의 축복을 준비하고 계시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 더디다면 더디다고 느낄 하나님 편의 이유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정신의학자인 인셀은 “기다리게 하는 것은 종속의 효과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다리게 하는 사람의 시간은 기다리는 사람의 시간보다 가치가 높다고 간주하게 합니다. 기다리게 하는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의 시간을 좌우하는 권한을 가진 우위의 입장에 있다고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는 비교할 바가 없이 절대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을 좌우할 권한을 충분히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시간에 맞춰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우리를 맞추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합니다. ‘내 시간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나를 맞춘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요즘에는 과학자들이 ‘생체리듬’대로 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생체리듬’대로 사는 것이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는 것입니다. 인간과 대부분의 포유류는 호르몬의 분비가 24시간에 맞춰져 있습니다. 수면이나, 일이나, 활동이 ‘생체시계’라 불리는 뇌의 작용에 의해 조절되게 되어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배꼽시계’라는 말을 합니다. 내 몸이 밥을 먹을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생체시계’입니다. ‘생체시계’에 의해 조절되는 ‘생체리듬’을 ‘서캐디언 리듬’(circadian rhythm)이라고 하는데 이 리듬에 맞추어 살면 건강하고 육체가 조화를 잘 이루고 피부가 좋아집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우리의 육체를 맞추면 육체가 건강해지고, 우리의 영혼을 맞추면 영혼이 건강해지고 행복해집니다.
시편 40:1에는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듣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성취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다음에 제자들과 주위 사람들이 다 무서워 도망했을 때에 아리마대 요셉은 당돌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여 자신의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지냈습니다. 성경은 그를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가 큰일을 성취합니다. 현재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는 용기를 가진 자입니다.
프랑스 속담에 “기다림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은 기다림의 시간이 많습니다. 사람을 기다리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기다리고, 심은 다음에 열매를 기다리고, 자신의 순서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다림은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편 37:7에는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라고 합니다. 참고 기다리면 형통합니다. 선한 일을 도모하고 그리고 기다려야 합니다.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불평하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에 기다리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을 주십니다.
기다림은 믿음입니다. 기다림은 가장 힘겨운 지도력입니다. 조급함이란 거룩함이나, 기도나,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입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 장애를 가진 자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잘 기다려 하나님의 응답을 꼭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고대의 결혼관습 가운데 하나는 약탈결혼이었습니다. 남성이 눈독을 들인 여성을 훔쳐다가 아내를 삼았습니다. 흔히 ‘보쌈’이라고 하는 풍습이었습니다. 2세기 북유럽 게르만인의 고트족 남자들이 주로 약탈결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결혼의 용어나 형식은 옛 결혼 관습에서 유래된 것이 많이 있습니다. ‘허니문’(Honey Moon), ‘밀월’이란 말의 유래는 대개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북유럽에서 오래전 신혼부부에게 꿀을 먹이는 풍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둘째는 약탈결혼시대에 신랑이 신부를 감추어 놓고 신부 측 사람들이 그녀를 찾다 못해 지쳐서 단념하고 물러갈 때까지 기다리는 기간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당시 풍습에는 잘 기다려야 신부를 차지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수컷은 늘 피곤합니다. 암컷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싸웁니까? 열심히 싸워서 이겼다고 하더라도 암컷이 받아줄 때까지 기다려야 겨우 얻는 것이 수컷의 운명입니다. 기다림은 인생에 있어서도 중요한 삶의 지혜입니다.
로마서 8:25에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것을 기다린다면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인내와 기다림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증명서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고 기다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자세입니다.
2014년이 벌써 저물어가고 2015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생소한 길을 우리 모두가 함께 가게 될 것입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을 바라면서 열심히 달려봅시다. 내년은 올해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과 기대감을 가지고 참음으로 기다립시다. 우리 하나님은 그 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실 것입니다. 잘 참고 기다려 주님 때문에 승리하는 우리의 여정, 우리의 믿음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라
하박국 2장 1-4절 / 이한규 목사
< 위기극복에 필요한 말씀 >
<하박국> 1장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해 계속 불평 섞인 질문을 했다. 그리고 자신이 파수하는 곳 성루에 서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자신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고 했다(1절). 그때 하나님이 주신 위기 극복을 위한 3가지 말씀이 무엇인가?
1. 묵시를 기록하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주셨다. 하박국에게도 묵시를 기록하고 판에 명백히 새겨서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하셨다(2절). 말씀을 기록해 판에 새기게 한 것은 말씀의 변질을 막아 거짓 예언에 백성들이 미혹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말씀이 중요하다는 암시다. 또한 달려가면서도 읽게 하라는 것은 늘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대로 살라는 뜻이다.
이해되지 않는 고난과 시련으로 믿음에 회의가 생길 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말씀이다. 주일성수와 매일의 말씀 묵상을 통해 말씀을 가까이하는 삶을 체질화시키라. 인생은 항해와 같아서 항해 중에 폭풍도 만나고 암초도 만난다. 그 항해를 성공시키려면 자세한 항해도가 필요하다. 성경은 인생 항해도와 같다. 그 항해도를 앞세우면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 외에는 파선 염려가 없다. 성경에는 성공과 축복의 원리가 다 들어 있다.
어느 날 한 미국인이 회사를 설립했다. 그 회사가 재정적인 큰 위기를 겪게 되어 회생 가능성이 없었다. 그때 친구를 통해 예수님을 믿었다. 그래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서 굳게 결심했다. “믿을 바에야 확실히 믿자. 분명히 성경에는 축복 원리가 있을 것이다.” 그때부터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부요케 하시는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발견한 부요의 법칙이 ‘씨를 뿌리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눈물의 기도와 땀의 씨를 뿌리며 성경에 나오는 재정과 관련된 말씀을 작은 카드에 적고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며 말씀대로 재정운영을 했다.
재정이 어려워도 변함없이 헌금하자 그때마다 비서가 말했다. “사장님! 이러면 더 빨리 망합니다.” 그래도 헌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돈이 급할 때는 피가 말랐다. 그래도 변함없이 헌신하자 하나님이 신기하게 재정적인 위기를 넘기게 해주셨고 회사도 크게 번성시켜 주셨다. 그 후 세계 곳곳을 다니며 말씀대로 살면 축복받는 사실을 전파했다.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모습만 보여도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실 것이다.
2. 때를 기다리라
모든 역사에는 다 때가 있다. 그 때를 기다리라(3절). 눈앞에 현실만 보고 하박국처럼 “어찌하여?”라고 질문하지 말라. 조금 더 기다리면 불의한 사람은 무너지고 의로운 사람은 일어선다. 일이 뜻대로 안 되면 마음속에 수시로 하박국의 질문이 생기면서 꿈과 비전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때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내 앞에 최상의 때가 준비되고 있음을 믿고 기다리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거둘 날이 반드시 온다.
때를 기다리고 인내하라. 기다림도 쉽지 않고 사명을 따라 바르게 사는 것도 쉽지 않기에 그때 샛길과 지름길로 들어서라는 유혹이 있고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면 성취는 빨라질 수 있고 외형은 화려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샛길과 지름길을 찾지만 그런 유혹을 잘 이겨내고 자기 사명을 따라 제 코스로 가라. 그 길이 현재는 눈물의 길이라도 미래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길이 된다.
필자가 성경을 연속해서 강해할 때 어떤 본문은 깊이 묵상하고 기도해도 감동이 생기지 않고 말씀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본문은 지루하고 어떤 본문은 복음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성경 말씀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말씀 편식이 없어야 함을 알면서도 감동이 안 되는 본문은 강해를 생략하고 지나가고 싶다. 그러나 덜 흥미롭고 설교 준비가 어려운 본문도 빠짐없이 강해했기에 각권 성경강해의 가치를 높일 수 있었다.
바른 길을 따라 꾸준히 가려면 화려함을 희생하고 기다림의 세월도 각오해야 한다. 그래도 그 길을 따라 가면 오늘의 승리는 없어도 내일의 승리는 주어진다. 급한 마음으로 너무 서두르지 말라. 왜 기도가 중요한가? 기도하면 넉넉하게 기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고 묵묵히 기도하며 기다리라. 큰일을 이루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잘 기다리는 것이 잘 나아가는 것이다. 상품 인생은 빨리 다량으로 만들어지지만 명품 인생은 바른 방법과 절차에 따라 땀과 기도와 정성과 인내를 들일 때 만들어진다.
3. 믿음으로 살라
하나님이 바벨론을 통해 잠시 하나님의 백성을 징계하는 것에 대해 회의를 품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진짜 사는 길이 열린다(4절). 교만한 악인이 거짓으로 승리하는 것 같은 상황도 하나님이 잠시 허락하신 상황이다. 그때 의인은 원통해하거나 속상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굳게 믿는다. 그러면 사는 길도 열리고 건강도 얻는다. 환경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이어도 믿음을 잃지 말고 찬란한 꿈과 비전을 포기하지 말고 땀을 흘리라. 그러면 하나님이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사람도 주신다.
역사에 요행이나 우연은 없다. 꿈과 열정이 없으면 성공도 없다. 바울이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것은 젊을 때는 학문에 미쳤고 변화된 후에는 예수님에게 미쳤기 때문이다. 그처럼 미쳐야 무엇이라도 된다. 사업에 미쳐야 사업에 성공하고 정치에 미쳐야 정치에 성공한다. 살면서 낙심과 권태가 생기고 의욕이 상실되는 것은 다 미치지 못해서 생겨나는 마음의 질병이다. 목표에 미쳐야 목표에 미친다(도달한다). 문제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문제를 건설적이고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담대한 태도와 지혜를 가지라.
골리앗의 거대한 덩치를 보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우리는 다 죽었다.”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다윗은 골리앗의 거대한 덩치 때문에 자신의 물매가 빗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날카로운 철검이 아닌 막대기와 물매만 가지고 골리앗 앞에 섰다. 그 모습을 보고 골리앗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막대기를 들고 나와서 자신을 개로 본다고 분노했지만 결국 골리앗은 다윗 앞에 쓰러졌다.
골리앗과 같은 큰 문제가 앞에 있어도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함께 하면 내가 현재 가진 것으로도 얼마든지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스스로 무너지지 않으면 어떤 것도 나를 무너뜨릴 수 없다고 믿고 나아가라. 하나님은 나를 도우실 때 환난을 면제시키는 것으로 돕기보다는 대개 환난은 그대로 두고 환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심으로 도우신다. 내게는 지금 그런 힘이 있다. 그 힘을 사장시키지 말라.
< 위기를 기회로 만들라 >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은 어렵다. 개인적이 어려움도 있고 사회적인 상처도 있고 전쟁의 위협도 있고 특히 나라 경제가 어려워서 많은 사람이 낙심한 상태다. 그러나 다른 나라 경제는 더 심각하다. 코로나 사태로 생산과 소비가 위축되고 앞으로는 부동산 버블도 꺼지면서 집값이 크게 하락할 것 같다. 지금은 지구촌 전체가 IMF 위기에 진입한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이미 IMF를 경험하고 극복했던 한국은 이번 위기도 잘 극복할 것이다.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여러 선진국과 자국 돈을 서로 교환하는 통화스와프를 많이 체결해서 경제적 안전장치를 IMF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만들었다. 특히 경제는 심리적 요인이 크다. 서로 믿고 돈이 돌게 해야 경제가 살아난다. 소비가 죽으면 경제는 다 죽는다. 적절한 소비도 필요하다. 만 원이 10명을 거쳐 돌면 십만 원의 가치를 창출하지만 한 명이 꼭 쥐고 있으면 만 원의 가치도 창출하지 못하고 사장된 상태로 있게 된다. 결국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지갑을 꼭 닫으면 다 망하기에 때로는 담대하게 지갑을 열라.
특히 부자들이 지갑을 열고 적절히 누리며 살 때 그것을 나쁘게만 보지 말고 그들의 소비가 내게도 도움이 된다고 여기라. 경제가 어려울 때 사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소비에 앞장서야 하는 것은 부자의 책무다. 그때 조금 여유가 있으면 한 번 더 외식하고 한 번 더 동네 가게도 들리고 택시도 타면서 어려운 경제에 보탬을 주어야 한다. 유학이나 해외여행도 죄악시하지 말라. 우리나라의 전체 땅덩어리가 미국의 한 주보다도 적기에 적절한 해외여행도 해야 우물 안 개구리의 신세를 벗어날 수 있다.
한 몽골 선교사의 말에 따르면 몽골 사람은 한때 세계를 제패한 경험이 있기에 자부심이 매우 강해서 어떤 민족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러시아 사람, 미국 사람, 유럽사람, 중국 사람을 다 우습게 여긴다. 그런데 몽골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한국 사람이다. 몽골과 우리 사이에는 묘한 형제의식이 있다. 전 세계에서 한민족과 가장 혈통적으로 가깝고 얼굴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코로나 사태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너무 낙심하지 말라. 이번 위기도 얼마든지 잘 극복할 수 있다. 특히 이번 위기는 우리의 민족적 교만을 치유하고 우리 자신을 더 성숙시키고 한국 교회가 새롭게 될 수 있는 기회다.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나와 우리 자신을 더 준비시키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앞세워 나아가면 우리 민족은 세계를 누구보다 잘 섬기고 이끄는 민족으로 우뚝 설 것이다.
경제도 심리적인 요인에 의해 크게 좌우되지만 인생의 성패도 심리적인 요인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나쁘다고 계속 말하면 정말 나빠지지만 좋다고 계속 말하면 정말 좋아진다. 이제 이렇게 말하라. “아직도 희망이 있습니다. 이제 조금 기다리면 나아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 최상의 때가 찾아올 것입니다.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심은 대로 거둡니다.” 그처럼 늘 믿음의 고백을 앞세워 담대하게 나아가 약속된 미래를 현실로 만들라.
오직 믿음으로
합 2:1-4 / 윤삼중 목사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재림의 때를 노아와 롯의 때로 비유하셨는데 이 두 시대의 공통점은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가운데서도 아브라함과 노아와 같이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잘못 이해하면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다 될 것인데 내가 무엇을 한단 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숙명론으로 빠져들어가서 자포자기하는 오류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이런 숙명론적 믿음이 아니라 나의 현실상황을 뛰어 넘어 도전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히11:1) 이 말씀을 분석해 보면 믿음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요, 불가능한 상황을 도전하여 가능하게 만드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면 네 친척 고향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것은 도전적인 믿음입니다. 그리고 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받치라는 말씀에 가감없이 순종하는 것은 죽은 아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게 할 것을 굳게 믿는 자세에서 순종합니다. 노아의 믿음을 살펴보면 세상 사람들이 전부 홍수 심판을 믿지 아니하는 상황인데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120년 동안 방주를 짓는 일에 도전합니다. 그리고 노아는 주변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결국에 방주를 완성하여 홍수심판에서 구원받는 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히11:7)
중세시대에 한때에 교회가 엄청나게 부패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건축헌금을 모으기 위하여 면죄부를 발행하는 등 하나님만이 사죄할 권세를 가진 것을 돈을 내면 면죄부를 발행하는 등 아주 부패한 시대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유명한 교회의 설교자인 텐젤이란 사람은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연보 궤 속에 돈이 뗑그렁하고 들어갈 때 우리는 영생을 취합니다. 말도 안되는 부패가 성행했습니다. 또한 성도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고행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성 베드로 성당의 빌라도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며 계단에 오를 때마다 계단에 입 맞추는 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부패된 교회가 이렇게 물질과 고행,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진리를 부패시켰습니다. 또한 교황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더 높은 위치를 두고 교황과 사제는 엄청난 사치를 하고 있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 때에 당시 신부였던 루터는 당시의 교회의 부패를 믿음으로 뒤집어 버리고 참으로 진리 가운데로 가자고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수많은 비난과 조롱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믿음으로 잘못된 카톨릭과 싸워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개신교가 생겨난 것입니다. 마틴 루터의 정신은 고결했습니다. 그가 주장한 것은 1)오직 성경으로 (절대권위는 인간인 교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다고 했습니다) 2)오직 은혜로 (인간이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선행이나 자질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고 했습니다.) 3)오직 믿음으로 (사람이 구원 받는 조건은 무슨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연보를 많이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힘입어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했습니다) 마틴루터도 성 베드로 성당의 빌라도 계단을 무릎 꿇고 올라가는 고행을 하면서 중간에서 집어 치우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이 놀라운 진리를 외쳤습니다. 이 진리가 개인과 교회와 세상을 바꾸게 만들었고, 진리의 빛이 온 세상에 비췸으로 어두움이 물러가고 새로운 세상이 오게 만들었습니다.
하박국서는 하나님은 과연 의로우신가?'라는 문제를 놓고, 마치 씨름하듯 하나님께 매달려 고뇌하는 선지자의 신앙 갈등이 선명하게 드러난 책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믿음으로 강력하게 향변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왜 실현되지 않는 것입니까? 이에 대해 하나님은 유다의 죄악을 벌하기 위해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라고 답변하십니다. 이같은 답변에 하박국은 더욱 당혹스러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두번째 질문을 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유다보다 더 악한 나라를 시켜 유다를 징벌하려 하십니까?' 이에 대해 하나님은 유다가 자신들의 죄 때문에 징계를 당하는 것처럼 바벨론도 결국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답변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을 것을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보면 하박국의 믿음은 끊임없이 현실상황에 도전하며, 하나님께 향변합니다. 그런 배경속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의 내용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이라는 단어를 주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자질이나 행위에 따라 구원에 영향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구원의 진리를 하박국 선지자는 분명하게 선포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가? 또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 해답의 비밀을 성경속에서 찾아내야 합니다.
1.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두 번째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예언할 때의 역사적 상황과 배경이 어떠했습니까? 하박국 선지자가 예언 활동을 하던 시기는 남 유다가 마지막 때입니다. BC. 612년에 니느웨 멸망당하고, 앗수르는 메대와 바벨론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유다는 앗수르의 속박에서 벗어난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요시아 왕의 부흥이 좌절되고 이집트의 속박을 당하게 됩니다. 이집트의 느고 는 요시아의 아들을 왕에서 폐하고 그의 동생을 왕으로 세워 엄청난 조공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BC.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빌론이 이집트를 격파하자 유다는 이집트의 지배에서 이제는 바벨론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다 백성들은 똑같은 강대국인데도 이집트의 지배는 쉽게 받아들이면서도 바벨론의 지배에는 완강하게 저항합니다. 그때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신흥 강국 바벨론은 여호와께서 세우셨기에 그에 복종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렇게 하면 바벨론의 속국이기는 하지만 제한된 자유는 누리고 생존은 보장된다는 예언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적인 권고는 유다 지도부와 백성들에 의해 배척됩니다. 유다는 여러 차례 바벨론에 저항하여 봉기하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망해서 유다의 왕과 고관대작들이 전부가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예레미야와는 달리 하박국 선지자는 바빌론이 유다를 징계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극렬하게 저항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던진 질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1:13)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불의한 자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징벌하시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이런 질문은 오늘날 우리가 고민하고 갈등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 악한 왕 여호야김에 의해 다스려지던 유다 사회는 극도로 타락하고 부패했습니다. 정의는 땅에 떨어지고, 불법과 우상숭배가 온 사회를 지배하였습니다. 악인은 번영하고, 의인은 고통받았습니다. 이같은 부조리한 상황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첫번째 질문을 던졌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유다의 죄악을 벌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두고 보십니까?' 이에 대해 하나님은 유다의 죄악을 벌하기 위해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이같은 답변에 하박국은 더욱 당혹스러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두번째 질문을 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유다보다 더 악한 나라를 시켜 유다를 징벌하려 하십니까?' 이에 대해 하나님은 유다가 자신들의 죄 때문에 징계를 당하는 것처럼 바벨론도 결국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답변하셨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두번째 질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두 번에 걸쳐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 하박국은 하나님의 품성과 계획과 권능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품성은 온전하고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하며 하나님의 권능은 무한하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현실 상황이 아무리 부조리하게 보여도 하나님은 여전히 온 세상의 통치자이시며 역사의 주재자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신앙의 궁극적 대상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합니다. 하박국은 오직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로 말미암아 악인은 끝내 심판을 당하고 의인은 끝내 구원에 이른다는 큰 진리를 발견하고 세세토록 그리스도인의 푯대가 되어줄 신앙고백을 합니다. 하박국은 더 나아가 그러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될 때 '비록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오직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2. 하박국 선지자는 성루에 서서 자신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실지는 기다리며 바라보았습니다.
하박국 시대의 현실상황이 어떠했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의인들은 고난을 받는데 악인들은 성공하고 형통하다는 모순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의인은 그래도 하나님을 믿어보고자 애를 썼던 소수의 선민들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는커녕 고난이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적인 가치관에 충실해진 자들은 오히려 성공과 형통을 맛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섬기던 바알이나 아세라는 단순히 종교적인 우상숭배의 의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우상숭배가 성공과 형통을 위한 답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자기 계발서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러한 악인들이 잘 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하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하박국 선지자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것까지는 좋은데 하필이면 앗수르를 멸망시키는 바벨론을 통해서 남 왕국 유다마저 심판하시리라는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로써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민이 악행을 저질렀다고 해서 더 악한 자들을 통해서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바벨론에 대하여 어떤 놀라운 말씀을 주십니까? 4절에 보면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함으로 멸망하게 될 것이니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을 직역하면 “보라 너희 마음이 교만한 까닭에 그의 영혼은 그의 속에서 곧지 못하니라”입니다. 이것은 바로 뒤에서 묘사되고 있는 말과는 정반대의 성품을 지닌 갈대아인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들은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자기 자신만 중시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곧지 못한 자는 평온하게 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자는 항상 파멸의 씨를 안고 다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바벨론으로 대표되는 불신앙의 길이 두 가지 특징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교만한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인정하치 않고 무시하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치 않고 자신의 고집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나 인간들 앞에서 신실치 못한 것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자는 성실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정한 때가 되면 그들의 악한 마음과 행위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사 그 죄를 진멸하십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후반절은 전반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교만하고 삐뚤어진 사람들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은 멸망케 될 것이나 의로운 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인하여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악인과 의인을 다루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한 악인들의 심판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의인이 되는 길은 오직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과거나 현재에도 오직 믿음있는 자만을 구원해 주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함을 얻는 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기준이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국력이 강한 것을 성공과 형통으로 삼는 세상 나라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합3장17~18절을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성공과 형통의 기준으로 삼는 가치관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사는 것이 세상과 구별된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박국에서 얻을 수 있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세상의 가치관에 도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세상의 흐름에 저항해야 합니다. ‘오직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이 세상 사람의 기준에서 벗어나 하나님으로 충만하고, 그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형통이며,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하박국 선지자에게 정한 때가 오면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정한 때가 언제입니까? 3절에 보면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나님이 정할 때가 되면 반드시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느낌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때가 차면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대한 확신과 소망과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는 것입니다. 그 정한 때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놀라운 사실이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4절에 보면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산다’는 말은 ‘구원’을 말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말씀은 하박국서 전체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장차 신약 시대에 꽃피우게 될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인간의 상식이나 경험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한 메시지입니다. 바벨론은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며, 탐욕과 포악으로 수많은 범죄를 행하지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다고 대답해줍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섭리와 공의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의심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더불어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교만한 자-자신의 군사력을 자기의 신으로 삼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자들이 강력하게 일어나지만 결국에는 믿음을 가진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이며, 구원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깨달은 “믿음으로 말미암아”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은 어떻게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신뢰에 따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실상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이러한 자의 믿음이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지적 동의를 기초로 그 믿음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무엇으로 산다고 했습니까? 돈? 명예? 아파트? 의술? 아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일관되게 요구하는 진리이며, 기독교가 추구해야 할 삶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사는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지만 세상 방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는가? 믿음으로 살았는가?에 따라 그 인생의 가치가 정해집니다. 악인과 의인의 차이를 세상의 것 잘되고 세상에서 부를 누리고 세상에서 뭔가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의인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반적인 은혜를 베풀어 이 땅의 것을 잘 누려도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느니라” 이 믿음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저 영의 세계를 바라보고 높은 믿음으로 올라가서 살다 보면 오히려 악인이 부럽지 않고 불쌍히 여겨집니다. 비록 가난하고 고난속에 살지만 우리가 정말로 복된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어떻게 적용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세웁니까? 롬1장 17절을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과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말씀이 바로 본문의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는 믿음”을 뜻합니다. 그러면 '오직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나의 믿음이 아니라 그의 믿음입니다. 즉 “그의 믿음” 이라는 말은 연약한 인간의 생각이나 신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바벨론을 심판하사 진멸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마지막 날에 구원해 주실 것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의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를 의미하는데 그의 말씀에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신약성경의 로마서에 사도 바울이 인용함으로 말미암아 아주 유명해진 말씀입니다. 바울은 어떤 율법적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여김을 받고, 구원을 얻었다는 의미로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원망에서 감사함으로, 저주에서 행복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섬기며 사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관, 인생관이 믿음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
하박국 2:1-3 / 곽선희 목사
내 두 손에 많은 것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손에 맡긴 그것은, 하나님 손에 맡긴 그것은 아직,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어떤 갈림길에 있으십니까. 수술실에 들어간 아기의 모습을 그리면서 기도하는 어머니의 기다림, 사랑하는 아버지가 수술실에 들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그 수술기간 동안을 기다리는 그 기다림, 무너진 빌딩의 잔해 속에서 내 아들이 살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그 기다림, 결혼 신청을 해놓고 그 승낙여부를 기다리는 기다림. 이 모든 기다림 속에는 아픔이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참기가 어렵습니다. 예전에 한 장로교 교인이 다른 능력들은 많이 가지고 있는데, 이 참을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조금만 부닥쳐도 욱하고 성질을 내는, 그런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도 잃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많은 것을 주셨는데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인내하는 힘을,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을 지금 당장 저에게 주옵소서.” 우리에게 기다리는 능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잘 기다렸던 선지자였습니다. 하박국이라는 뜻은 '잘 껴안는다, 씨름한다'라는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 라는 뜻입니다. 하박국이 예언활동하던 시대는 많은 패역무도한 열왕들이 있었습니다. 그 왕들에게 소리를 내어도 정의가 정의로 통하지 않는 그런 불의함을 보고 하나님께 성루에 올라가서 우뚝 서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이런 일들을 그냥 묵도하십니까?” 이런 질문과 이런 기다림을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이 말씀을 16년 전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병원에서 원목으로 일할 때 이 말씀을 처음 대했습니다. 새벽 세시에 beeper에 삐삐 소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중환자실의 수간호사가 급한 목소리로 “목사님, 저의 중환자실에 아기가 있는데 지금 죽어갑니다. 세례를 베풀어주십시오.” 그 전화소리를 듣고 그리고 옷을 급하게 차려입고 그리고 안개 낀 금문교를 지나서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병원에 들어섰습니다. 중환자실을 열고 들어갔더니 깜짝 놀랐습니다. 그곳에는 아기는 보이지 않고 이 아이에 Hookup된 연결된 여러 가지 선들, 기계“삐-삐-삐-”소리와 함께 마치 기계인간처럼 링겔도 못 맞혀서 머리에다 I.V.를 놓았더라구요. 그 상황에 들어가서 상당히 저도 긴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밥그릇에 물을 가지고 가서 그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만다, 네게 세례를 베푸노라.” 그 때, 그 아이의 3개월 된, 이 아이는 죽도록 태어났습니다. 죽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열아홉살, 어머니는 열여섯살, 그리고 주변에 젊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습니다. 유전자가 잘못되어서 죽기 위해 태어난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 때, 그 아이의 눈이 떠졌습니다. 그 눈이 떠지면서 저에게 마치‘감사합니다’그런 이야기를 하듯이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 때 그 순간, 거룩한 힘이 그 병실을, 그 때는 기계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느낌과 감정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잠을 자고 아침에 출근했습니다. 그리고 가자마자 수간호사에게 물어봤습니다. ‘아만다’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냐고. "그 아이는 세례를 베풀고 얼마 안 있어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전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답답했습니다. 답답한 상태에서 그 병원의 맨 꼭대기 솔라륨에 가서, 마치 하박국이 성루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항변했듯이 저는 거기에 가서 하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 왜 이 세상에 이런 일이 있어야 됩니까? 악의에 가득 찬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세력이 많고 장수하는데 왜 이렇게 죄라고는 지어볼 기회도 하나도 없었던 이 아이를 하나님, 어렵게 이렇게 나게 하시고 어렵게 데리고 가십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때 이 말씀을 접하였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 세대를 묵도하십니까? 야훼여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주시렵니까" 하박국은 이 항변을 하면서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봅니다. 여러분의 기다림은 어떤 기다림입니까?
기다림은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기다림은 오기로 기다리는 기다림입니다. 지금까지 기다려 왔기 때문에 손해보기 싫어서 계속 오기로 기다리는 기다림. 두 번째 기다리는 기다림은 포기하는 자세의 기다림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앞으로 내 인생 그 꼴 되겠지, 이렇게 이렇게 그럭저럭 살겠지, 라는 포기하는 기다림. 세 번째 기다림은 분명한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그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성취함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당당한, 늠름한 기다림입니다. 누구를 기다려보셨습니까? 어떤 뜻을 살펴보시고 기다림에 있으십니까? 분명한 기다림 속에, 늠름한 기다림 속에 하나님은 대답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3절에 보시면 내가 본 일은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 끝 날은 반드시 찾아온다 쉬 오지 않더라도 기다려라.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이 있으십니다. 이 음성을 듣고 3장 17절에 보시면 하박국은 이러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의 기다림 속에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였고, 그 감격으로 인하여 그 기다림을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까? 인생의 교차점에서 어떤 길을 가야할 지 방황하고 계십니까? 억울한 일을 당해서 하나님께 항변하는 그런 기다림 속에 여러분들 계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무슨 수학 공식 풀 듯이 아주 어려운 것으로 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6차선, 아니 8차선의 큰 길입니다. 우리가 잠깐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다른 길로 갔다손 치더라도 그 실수와 그 갈등과 고민을 통해서 하나님은 더 크신 하나님의 디자인을 향해서 여러분들을 만드십니다.
한 3년 전에 중국의 북경에 목사님들 한 여든 두분을 인솔하고 졸업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으레 패키지 여행이 그렇듯이 가이드가 쇼핑센타에 저희를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에서 관심있게 저희 눈에 띈 것은 자그마한 체구의 한 여인이 중국 실크 카페트를 꿰매고 있는 그런 장면이었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날실과 씨실을 엮으면서 계속 엮더라고요. 그런데 보면은 그림이 나옵니다. 그 때는 잘 모르는데, 그 때 한 실과 한 실을 엮으면 모르는데 조금 짜다 보면은 그림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하나 유심히 봤더니 그 여인 옆에 이런 A4 용지의 디자인이 있었습니다. 전체 그림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지금 도저히 이해 못하는 그런 기다림이 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향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창세전부터 그리신 하나님의 디자인이 여러분께 있습니다. 그 디자인을 따라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만드시고 이끄시고 진행시키십니다.
어떤 청년이 저에게 다가와서 "목사님, 하나님은 좀" 죄송합니다 그 분 표현에 의하면 "쫀쫀하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표현을 하더라고요. "왜 그럽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자기가 기도하면은 좀 시원하게 제 인생 끝까지 한 번 쭉, 십년 계획 이십년 계획 이렇게 발표해 주시면 괜찮은데 꼭 기도하면 그것만 말씀해주시고 그것도 안 해주실 때도 있고 그리고 그 상태에 가서 다시 그 길로 가면은 그 때 다른 길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이 좀 시원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질문을 하더라고요.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희망의 신학’이라는 책에서 분활 성취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활해서 성취하신다. 즉, 우리가 자고 있고, 기다리는 그 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이미 그의 뜻을 여러분을 통해서 성취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잠자는 그 기간에도, 우리가 기다리는 그 기간에도, 하나님은 약속을 향해서 성취를 향해서 여러분들을 이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궁, 즉, 통. 궁이 극에 달하면 통하는 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끝까지 갈 수 있는 힘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끝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은 그 통, 종국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지금의 기다림, 기뻐함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지금의 기다림, 감사함으로 기다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얼마 전 프랑스와 저희 나라가 축구경기를 했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열광을 했습니다. 그러나 패했습니다. 3 : 2라는 점수로 패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국민 어느 하나도 그 패배를 진정한 패배로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좌절과 그 패배는 희망입니다. 우리 국민에게 월드컵의 용기와 그리고 분위기를 더 돋구는 그런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한 희망과 용기와 약속에 대한 성취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의 기다림을 미래를 향해서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F. B. 마이어’라는 성서학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그런 책에서 이런 예화를 들고 있습니다. 이 마이어 라는 분이 한 날에는 선장하고 같이 예인선에 탔었습니다. 이 예인선은 커다란 원양어선을 좁은 항구로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예인선이 잘못 인도하면 그 큰 원양어선은 부두에 부딪히고 해서 나중에는 못 들어가거나 큰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큰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이 선장이 아주 노련하게 뒤에 있는 원양어선을 안개 낀 밤에 좁은 항구로 인도를 합니다. 이 마이어 학자는 이 분에게 물어봅니다. “선장님, 어떻게 해서 이렇게 어렵고 좁은 길을 저 큰 배를 인도하십니까?” 이 선장은 마이어 선생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저기 불 세 개가 보이죠? 저 세 개가 일열로 정열이 되면, 아 내가 올바른 각도로 들어가고 있구나 해서 들어갑니다. 만일, 그 각도가 틀리면 다시 돌아갔다가 각도를 맞춰서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 세가지 빛이 있습니다. 첫 번째 빛 하나, 그것은 내 내면의 확신입니다. 기도를 하고 이런 기다림 속에서 내가 이 길을 가야할지 가지 말아야할지, 그런 방황 속에서 기도한 다음에 여러분 안에 평화가 있어야 됩니다. '아, 내가 지금 제 길로 가고 있구나’그런 내적인 확신이 있을 때 첫 번째 빛 하나가 여러분, 하나님의 뜻의 항구에 들어가는 그 길에 비춰집니다. 영화 속에 불의 전차라는 Chariots of Fire 라는 아마 예전 영화일 것입니다. 그 영화에 보면 에릭이라는 주인공입니다. 달리기 선수인데 유명 대학에 재학하면서 이 누이가 물어봅니다. 달리기 연습을 쭉 하고 있는데 옆에서 에릭의 누이 제니가 물어봅니다. “오빠, 오빠는 왜 그렇게 뛰어? 다른 일 할 것도 참 많은 텐데 왜 그렇게 열심히 뛰어?”그랬더니 에릭이 이렇게 말합니다. “I feel God's joy in my heart; 나는 내가 뛸 때 말이지, 하나님의 기쁨을 내 안에 느껴.” 여러분, 어떤 일을 하실 때 하나님의 기쁨을 느끼십니까? 누구를 만날 때 하나님의 기쁨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여러분 뼈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그런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영혼을 흔드는 그런 기쁨이 있습니까? 그 일이 그 길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불빛이 비춰집니다. 두 번째는 외적인 확인입니다. 첫 번째가 내면적인 확인입니다만은, 어떤 여중학생이 이렇게 한 전도사님에게 한번 핀잔을 받고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전도사님이 이렇게 야단을 쳤습니다. “얘야, 너 왜 이렇게 배꼽티를 입고 나오니? 주일날만큼은 그것을 입지 않고 나왔으면 좋겠다”이랬더니. 이 여학생이 전도사님에게 이렇게 항변을 합니다. "전도사님, 성경에도 그렇게 나와 있잖아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여중생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많은 분들이 이와 같이 내 생각만 가지고 하나님 뜻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두 번째 빛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외적인 확인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동료로부터 신앙공동체로부터 내가 듣고 싶은 소리뿐만이 아니라 내가 들어야 할만한 소리, 들어야 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장을 열어 놓을 때 두 번째 하나님의 뜻의 항구에 들어가는 두 번째 빛이 비쳐지게 됩니다.
세 번째 빛입니다. 빛 세 번째는 자연적인 흐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은 삐걱삐걱대지 않습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거기 계시다면은 자연적으로 순리대로 이어져갑니다. 내 뜻이 사각형이라면 하나님의 뜻인 원형에다 내 사각형에다가 원형을 맞추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그 순리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도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만 가끔가다 문을 닫을 때가 있습니다. 그 닫는 그 자체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닫으시면서 하나님은 다른 문을 열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순리대로 순리대로 진행되는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의 항구에 들어가는 세 번째 빛이 비쳐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내면의 확신, 외적인 확인, 순리대로 돌아가는 그 세가지 빛이 비쳐질 때 여러분 삶 속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됩니다. 내 두 손에, 내 두 손에 많은 것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손에 맡긴 그것은, 하나님 손에 맡긴 그것은 아직도,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 기도
여러 가지 선택 앞에 섰을 때 막연한 상황 속에서도 분명히 말씀하시고 뜻을 보이시는 주 여호와 하나님. 저희들의 삶 속에 개별적으로 오시어 우리 인생에 주님의 향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그 뜻에 따라 합당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께 물어보는 기도
합 2:1-3 / 박기완 목사
오늘은 '하나님께 물어보는 기도'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선물 가운데 가장 귀한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처럼 신기하고 기도처럼 신비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고 기도를 한단 말입니까?... 더구나 우리가 무엇을 아뢰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와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수없이 말씀하셨고, 그렇게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응답의 약속까지 수없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한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축복의 약속들도 기도라는 방법을 통해서 얻을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는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용사가 되셔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무한한 축복과 은혜를 받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기도란 무엇인가?
1) 영적인 호흡
먼저, 기도를 가리켜서 흔히 '영적인 호흡' 이라고 말합니다.
호흡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기도는 영적인 호흡과 같아서...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힘입기 위해서... 성도는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2) 하나님과의 대화
또한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면서 정말 그렇게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기도하실 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흔히 하고 있는 기도는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말하고 끝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음성은 전혀 듣지 않습니다.
나의 필요한 부분들, 말하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 실컷 요구하고, 요청하고, 말하고 나서.... 하나님의 대답이나 음성에는 아랑곳 없이 자기 할 이야기만 끝나면 그냥 끝내 버립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그걸 해결해 달라고 실컷 말하고 나서 끝내버립니다.
몸이 아프면 그걸 낫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다음에... 그리고 눈물을 닦고는 끝내 버립니다. 그리고는 기도를 다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마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사실을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할 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기 혼자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말하는 기도를 합니다. 자기가 다 결정해 놓고 하나님께 그것을 해 달라고 통보하거나 떼를 쓰는 식의 기도가 대부분입니다.
자녀들이 어린아이 적에는 엄마나 아빠에게 무얼 달라고 요구하는게 많습니다.
무얼 달라고, 무얼 사달라고, 무얼 먹여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들어주지 않으면 때를 씁니다. 그래도 안되면 울어버립니다. 엄마 아빠의 말은 전혀 듣지 않습니다.
물론 들을 수 있는 귀가 발달이 되지 않았죠. 말도 제대로 못해서 우는 게... 그게 뭘 달라는 것이고, 우는게 뭐가 불편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조금 더 이 아이가 성장하면 엄마 아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들을 줄 압니다.
"그거 보다는 이게 더 낫지 않겠니?" "그건 네가 좀더 크면 사줄게...." 하고 엄마 아빠가 말하면.. 엄마 아빠의 말씀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
자기 말만 하는 기도는 어린 아이적 기도입니다.
좀더 성숙한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잘 안들립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조용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자꾸만 기도하면서 경건의 훈련을 쌓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점점 들리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좀더 성숙한 기도... 한 차원 높은 기도의 단계로 올라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구약시대처럼 직접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음성으로 들려주시지는 않습니다.
물론 음성으로 들려지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마음속에 깨달음으로 오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가장 정확하고, 잘 듣게 되는 경우는 말씀을 통해서 듣게 됩니다.
가장 쉽고 확실한 것은 성경 말씀을 읽거나 묵상할 때 듣게 되고, 설교 말씀을 듣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은... 바로 기도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바쁘게 돌아다닐 때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 집중할 때 말씀해 주십니다.
다니엘서 9:21-24절 말씀을 보면,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황폐하게 되고 조국이 망하게 된 것은 백성들의 죄로 인한 것임을 고백하며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중보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응답해 주신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11:5-9절에 보면, 베드로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거기에는 부정한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걸 먹으라고 말씀합니다. 부정한 것을 어찌 먹을 수 있으냐고 할 때,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게 한 것을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그 뜻이 무엇인가 보았더니 바로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2:17-21절에서도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네가 복음을 전해도 예루살렘 성의 사람들이 듣지 않을 터이니... 너는 그 성에서 속히 나가라고 말씀해 주시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2. 하나님께 물어보는 기도
기도는 내 요구를 땡깡 부리듯이... 무엇을 관철시키려고 하는게 아닙니다. 좀더 정확한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차원인 것입니다.
기도를 하게 되면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고, 하나님이 나에게 바라시는 뜻을 깨닫게 되고, 기도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내가 무엇을 말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차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45:11절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 그랬습니다.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고 했습니다. 물으라는 말씀은 주님이 대답해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주님이 대답해 주시는 것을 기대하며...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5:22-2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22)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 말씀을 보면 리브가는 하나님께 물어 보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리브가가 임신을 하여 쌍둥이를 갖았는데, 이 아이들이 배 속에서 서로 싸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그러셨습니다.
리브가는 하나님께 물어보는 기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 제 뱃속에서 아이들이 마구 싸웁니다. 이러다가 큰일 나겠습니다. 좀 조용히 지내게 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물어본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이렇습니까? 얘들이 왜 싸우나요? 하나님 가르쳐 주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이삭의 입장에서는 에서가 장자이니까... 장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이어가니까 장자인 에서를 더 사랑한 것입니다. 이게 일반적인 전통이고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리브가는 하나님의 계획을 들었기 때문에 야곱을 더 사랑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삭이 안수기도하며 축복기도를 할 때... 이삭을 속여서 야곱이 복을 받도록 했습니다.
만약 들켜서 저주를 받게 되면 내가 다 받을 터이니 너는 염려하지 말고 안수기도를 받으라고 할 정도로 리브가는 담대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어머니의 말대로 얼굴과 손에 양의 털을 붙여서 변장을 해 가지고 안수기도를 받았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태중에서부터 하나님께 여쭈어봤더니... 하나님께서 동생이 더 강한 민족이 되고 형은 동생을 섬기리라고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좀더 리브가가 신앙이 성숙했더라면 하나님의 뜻을 이미 알았으므로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렸어야 했습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에서를 속여서 장자의 명분을 가로챈 것이나, 이삭을 속여서 축복을 가로챈 것은 모두 인간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인간의 방법을 찾아서 했더니 에서와 야곱은 서로 원수 지간이 되지 않았습니까?...
야곱은 형 에서의 칼날을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가야 했고... 그 때로부터 험악한 인생의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으로 더 좋게 역사하십니다. 그걸 믿고 끝까지 신뢰해야 합니다.
좌우간 이삭의 기도는 그냥 아뢰는 기도하는 기도였고, 리브가의 기도는 물어보는 기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였습니다.
여호수아 9:14-16절 말씀을 보면,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기브온 사람과 평화조약을 맺으므로 낭패를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하면 실패합니다. 낭패를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기도하실 때... 이왕이면 하나님께 물어보는 기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조용하게 경청하는 시간을 갖아야 합니다.
겨우 5분이나 10분 정도 기도하고 "시간이 없으니 말씀하시려면 빨리 해 주세요!" 그런 식으로 기도한다면 주님의 음성을 결코 들을 수 없습니다.
적어도 30분, 1시간 이상 기도해야 합니다.
바빠서 안절부절 못하는 그런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번거로움이 잠잠해 진 후에... 고요한 시간이 되어야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왕상19:11-12).
이런 기도는 부단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꾸준히 기도생활을 해야만 가능합니다. 새벽기도를 꾸준히 나오셔서 기도하게 되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사무엘상 23:4절 말씀에 보면, 다윗은 전쟁에 나갈 때 마다 하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자세한 전략까지 가르쳐 주셨고, 그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했던 것입니다.
3. 물어보는 기도의 방법
그렇다면, 물어보는 기도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1) 잠잠히 기다리며
시편 62:5절 말씀에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그랬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그랬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물어보는 기도의 첫 번째 방법은 잠잠히 기다리며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따라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실 때 가지 잠잠히 기다리며 듣는 것입니다.
기다리면서 아무런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 이렇게 할까요? 이런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그러면서 더 자세히 여쭈어 보는 겁니다.
2) 주기도문을 적용하며
두 번째 방법은, 주기도문을 적용하면서 물어보는 방법입니다.
이 경우는 작년에 설교한 내용이기 때문에 작년도 설교를 인터넷에서 살펴 보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주기도문을 하면서 물어보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랬으면, "하나님, 어떻게 하면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 제가 이 장사를 하면서.... 이 사업을 하면서... 혹은 이 회사를, 이 직장을 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물어보는 겁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을까요?"
"하나님, 제가 이렇게 이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까요?" 그러면서 물어보는 겁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주기도문을 외워 나갑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고 기도하죠. 그런 후에... "어떻게 해야만 주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까요?..."
"제가 이 직분을 어떻게 감당해야만 주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까요?"
"제가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겁니까? 하고 물어보는 겁니다.
"주의 뜻이 이루어 지이다" 그랬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까요?"
"또 주님이 지금 내게 원하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보는 겁니다.
이렇게 주기도문을 적용하면서 기도하게 되면 자세한 기도를 하게 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될 것입니다.
3) 방언으로 기도하며
세 번째는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방언 기도를 할 수 있는 분들은 이해가 되겠습니다만, 무엇을 질문해 놓고 기다리면서... 가만히 침묵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릴 때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겁니다.
"하나님,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가요?" 질문을 해 놓고... 방언을 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내 혼은 몰라도... 영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물어보는 기도, 주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를 하려면...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갖아야 합니다.
창세기 18:17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그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기로 작정하셨는데...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관계가 아니죠. 매우 친밀한 관계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서 주님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과 늘 교통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식사기도만 하는 분이 있어요. 어떤 분은 일주일 내내 기도하지 않다가 주일날 교회에 와서 잠깐 기도하는 게 전부인 분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말고, 저기... 다른 교회 사람들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할 때는 반드시 성전에 가서... 거기서 기도를 했습니다. 나라가 망해서 포로로 잡혀 이방나라에서 살 때에는...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도 수시로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갖으시기 바랍니다.
공식적인 예배만 잘 지켜도 기도생활을 잘 할 수 있어요. 예배시간에 정확히 맞추려고 하지 마시고 일찍 나오셔서 기도하시다가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훨씬 더 풍성한 영적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물어보는 기도,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기도를 잘못하게 되면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보지 않고 기도에만 치우치면 그렇게 됩니다.
말씀과 기도는 마치 기차 레일과 같이 함께 가야 합니다. 어느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게 되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기도를 잘못하게 되면 외골수에 빠질 위험이 있고 교만하게 될 위험이 있고, 잘못 들을 수도 있습니다.
잘못 듣게 되는 경우는 이미 자기의 마음에 정해져 있는 경우입니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이 너무 간절하고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이 강해서... 자기의 마음으로는 이미 정해놓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물어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미 자기의 마음에는 정해져 있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게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되고 그렇게 결정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의해서 우리는 잘못 들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욕심으로 가득차 있어서 이미 내 속으로는 정해놓고 기도하므로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갖고 싶고, 하고 싶어서 내 안에 그것으로 가득차 있다면 차라리 이루게 해 달라고 떼를 쓰는 기도가 더 낫지... 그게 하나님의 뜻인지 물어보는 기도는 내 마음으로는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부단한 기도훈련을 통해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늘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풍요로운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일하면 사람이 일하는 것이지만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기도를 하시되 다양한 기도의 방법을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작년에 여러 가지 기도의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기도의 다섯 가지 방법이라든지, 주기도문 적용기도, 중보기도, 전도를 위한 기도, 환자를 위한 기도, 묵상기도, 방언기도 등등... 많은 기도의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여기에 한가지 더 덧붙여서 물어보는 기도, 듣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일하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기도하고 하나님이 대신 일하시는 것이 쉽겠습니까?....
여러분은 기도하고, 하나님이 대신 일하시면 더 좋겠죠?....
사람이 사역하는 동안에는 사람이 사역하는 거지만, 사람이 기도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장사를 하더라도, 사업을 하더라도... 직장을 다니고 회사를 다녀도... 여러분은 기도하시고 하나님께서 대신 일해 주시고, 주님이 대신 사업을 이끌어주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4. 바쁘면 바쁠수록 더 해야 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선지자 하박국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어느 날 하박국은 성루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는 기도를 하되 하나님께 물어보는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랬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정황은 매우 혼란스럽고 나라가 어려운 그런 시기였습니다.
최대 강국인 바벨론이 앗시리아를 정복하고 나서 중동지역의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처럼 큰 나라들의 틈 바구니에 끼어서 약소국인 유다는 이제 비극적인 최후를 목전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조국의 위태로운 상황을 가슴에 부여안고... 성루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 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하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달려가면서도 읽게 하라!"는 말씀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천천히 걸어가면서 책을 읽을 수는 있어도 달리면서 읽는 것은 어렵습니다.
전철을 타고 가면서 책을 읽으면 몰라도.. 어떻게 달려가면서 책을 읽는단 말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하박국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하여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당시의 시대적인 정황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만큼 안정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적군에게 쫓기어 도망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달려가야 됩니다.
그래서 달려가는... 아주 위급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의 생활이 안정되지 못한 처지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달려가면서도 읽게 하라는 것은... 평안히 앉아서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 없더라도 바쁜 일과 속에서도.... 문자 그대로 달려가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때로... 바쁘고 복잡한 환경을 훌쩍 떠나서... 깊은 산 속이라도 가서... 세상과의 관계를 멀리하고.... 기도하며 성경 말씀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환경을 만들기가 퍽 어렵습니다. 너무 바쁜 세상입니다. 얼마나 바쁜지 몰라요... 우리는 늘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려가면서도 읽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바쁘지만... 그래서 피곤하고 힘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일에 힘쓰라는 말입니다.
요즘 시대에는 사실 얼마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습니까?...
녹음된 설교 말씀을 헤드폰으로 들으면서 일해도 되고...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말씀을 들으면서 일해도 되고... 방법은 찾으면 많습니다.
그래서 5월 달에는 새벽 기도시간을 이용해서 성경 통독시간을 갖으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 많이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달려가면서도 읽어야 돼요.
바쁘면 바쁠수록 더 기도해야 되고, 바쁘면 바쁠수록 더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서... 힘을 얻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믿음의 권속들은... 말씀의 사람이 되고,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기도를 하시되 하나님께 물어보는 기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를 통하여... 주님의 뜻을 좇아 순종하며 하나님 기뻐하시는 승리로운 삶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라!
합 2:1-4 / 전순기 목사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확장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꼭 실천해야 할 다섯 가지 핵심적인 영적 원리가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직 말씀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성령으로! 오직 기도로!” 이 다섯 가지 원리를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지난주에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라!”는 제목으로 첫 번째 원리를 말씀드렸습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할 때에 하나님 나라가 내 마음에 임하게 됩니다.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는 일은 하나님이 은혜 주셔야만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은혜를 사모하는 태도와 자세를 갖추는 일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십니다.
오늘은 “오직 믿음!”의 원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지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계속하고 믿음으로 마쳐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믿음이 성경이 말씀하는 그 믿음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화)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딱 한 번 복권을 산 적이 있습니다. 장가를 가야 하겠는데, 워낙 가난한 부모님들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고, 제가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 때 너무도 절실하게 돈이 필요했었습니다. 그 당시 저의 믿음은 단세포적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이든지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했고, “믿고 구하면 주신다.”고 했으니까, 당첨되게 해 주실 줄로 믿고 기도했는데, 당첨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실소를 금치 못할 일입니다. 그때 제가 가진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참 다양한 양상의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종류의 믿음이 다 구원받는 믿음은 아니며, 또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믿음은 아니라고 경고합니다. 거짓된 믿음, 헛된 믿음도 있다는 말입니다(약2:26;마7:22-23).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고후13:5).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 자신의 믿음이 성경적인 믿음인지를 점검하고 확증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먼저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간결하게 정의를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에 대해 말하는 많은 성구들이 있는 데, 제가 보기에는 그 중에서 바울 사도가 사도행전 27장 25절에서 고백한 말씀이 믿음에 대한 가장 좋은 정의라고 생각이 됩니다. 뭐라고 고백했는가 하면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줄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말씀대로 이루실 능력이 있는 분임을 믿고 그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고 절망하는 상황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소망 중에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적인 믿음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순종합니다. 동시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약속하신 영육간의 축복을 풍성히 내려주십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고 날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원 받는 믿음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믿음의 첫 단계는 구원받는 믿음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에베소 2장 8절에 말씀한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이 믿음이 어떻게 주어집니까?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은 어떤 계기로 해서 교회에 나오게 되거나, 아니면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을 만나서 복음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이 깨달아지고 믿어집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믿을 때에 모든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영육간의 복을 부어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다가 죽으면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복락을 누리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고 따르는 믿음! 이것이 바로 구원받는 믿음이며,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는 믿음의 첫 단계에 해당되는 믿음입니다. 이 구원받는 믿음은 믿음의 여러 가지 단계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첫 계단을 밟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계단으로 올라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혹시라도 여기 계신 성도들 중에 이 구원받는 믿음이 자신에게 있는지 없는지가 분명치 않고,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이 계시다면, 미루지 말고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마음에 영접하시고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구원받는 믿음을 얻은 사람들은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성숙된 믿음 가운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화)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처음 만들어 날렸을 때, 그 비행기는 공중에서 불과 12초를 머물다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첫걸음, 그 첫걸음이 계속 전진하여 지금 우리가 타고 다니는 안전한 비행기를 만들게 해 준 것입니다. 에디슨이 처음 전구를 발명했을 때에는 그 밝기가 촛불보다 못했고, 수명도 극히 짧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첫 발자국을 떼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밝고 수명도 긴 전구들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연약하고 불완전하지만, 자꾸 믿음을 활용하면 믿음이 점점 자라납니다. 믿음의 근육이 늘어나고, 믿음의 키가 크고, 믿음의 눈이 밝아지고, 귀가 밝아집니다. 믿음의 그릇도 커집니다. 처음에는 자기 하나도 추스르기 힘겹지만, 점점 믿음이 자라나면 이제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믿음의 어른이 됩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
믿음이 자라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영육간에 필요한 모든 은혜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그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무엇을 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히11:6).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자기 백성들에게 상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 자기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상주고 싶고, 좋은 것을 주고 싶으신데, 그냥 주면 감사한 줄 모르고, 귀한 줄 모르기 때문에, 숨겨 놓으시고 믿음으로 찾으라고 하십니다. 찾기만 하면 찾을 수 있고, 찾는 만큼 찾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결코 빈손으로 돌아가는 자는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말에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찾아서 적용해야 합니다.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또는 집에서 개인적으로 Q.T.를 하면서 경배와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배와 찬송을 기쁘게 받아주시고, 경배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해 두신 영육간의 은혜와 축복을 내려주시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아올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의 예배를 받으시려고 이미 이곳에 와 계시고, 나의 찬송과 기도와 간구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예배하는 나에게 “오늘은 무슨 말씀으로 복을 주시려나? 오늘은 무슨 깨달음을 주시려나?”기대하는 믿음으로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반드시 하나님 만나 뵙고 은혜 받고 가야 하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오라는 겁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만나주십니다. 새로운 깨달음을 주시고, 새로운 기쁨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소망을 주십니다. 그럴 때에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하러 나오신 여러분들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다시 또 한 번 강조합니다. 예배의 능력을 경험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또 하나의 의미는 언제 어디서나 내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아버지께 얻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겠다는 많은 약속들을 성경에 기록해 두셨습니다. 그 약속들을 믿고 주장하며 기도할 때에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며 풍성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는데,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께 나가기만 하면, 반드시 좋은 것으로 상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여러분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때는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게 주십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우리는 어리석어서 겨우 이 땅의 것, 현세적인 것만을 구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이 땅에서 필요한 것만을 채워주시는 게 아니고, 구하지 않았던 하나님 나라의 신령한 축복까지 주십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나가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찾는 일에 좀 더 열심을 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전심을 드리고, 기도하는 일에, 찬송하는 일에, 교회를 섬기는 일에, 봉사하는 일에, 전도하는 일에 좀 더 마음과 몸을 드려야 합니다.
바쁘고 힘든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전도하면, 내가 어떤 형편에서 그렇게 하는지를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여삐 받으시고 반드시 더 큰 상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꼭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구하되, 하나님께서 해 주셔야 할 일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해야 할 일까지 대신 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까지 하나님께 맡기는 건 믿음이 아니라, 게으름입니다. 하나님은 헬리콥터 맘이 아닙니다.
예컨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건강을 달라고 간구했다면,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섭생을 잘해야 합니다. 일과 휴식의 조화를 찾아야 합니다. 건강에 해로운 일은 피해야 합니다. 규칙적으로 운동해야 합니다.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서 건강을 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믿음의 자세와 태도입니다. 이런 믿음은 응답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가장 좋은 믿음의 자세는 하나님의 은혜가 100% 필요함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구하는 동시에, 모든 일이 100% 내게 달린 것처럼 최선을 다하여 내가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역경을 헤쳐 나가는 믿음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이 순탄치 못하고 역풍이 부는 곤경에 처했을 때에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제일 높은 차원의 믿음이며, 가장 성숙한 믿음의 차원이 될 것입니다.
편안한 환경 가운데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살아오면서 경험해 보았듯이, 우리의 삶의 현실이 잔잔한 호수에 유람선 타고 관광이나 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의 삶에는 예기치 않았던 풍랑이 자주 휘몰아쳐 옵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건만, 삶의 현실에는 여전히 궁핍이 있고, 질병이 찾아오기도 하고, 배우자나 자녀가 속을 썩이기도 하고, 직장생활 속에서 이런저런 갈등과 분쟁에 휘말려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복을 받고 만사형통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간다면 좋겠는데, 실제 삶의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악한 자들이 더 형통합니다. 양심을 지키고 선하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믿음의 사람들이 더 어려움을 당하고 곤란을 겪는 것이 믿음의 현실입니다.
오늘 하박국 선지자가 고민하는 현실도 그런 상황입니다. 하박국이 살던 시대는 유다의 국운이 기울어 곧 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유다의 왕들은 부패하고 타락하여 백성들을 지도할 지도력을 상실했습니다. 유다사회는 극도로 부패하여 권력 있는 자들이 힘을 남용하여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압제하고 착취했습니다. 불쌍한 민초들은 하루하루 살기가 벅찼습니다. 그런 현실을 바라보는 하박국 선지자는 속에서 불이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이렇게 율법의 말씀을 버리고 악을 행하는 데도 하나님은 도대체 뭘 하고 계시느냐? 왜 공의가 시행되지 않는 거냐?”고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조금 있으면 하나님께서 공의를 시행하실 것인데, 바벨론 군대를 보내서 유다의 죄를 징계하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자 또 하박국은 하나님께 항의하며 따집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유다 백성들이 죄가 많기로, 어떻게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나라가 침공을 해 와서 거룩한 땅을 짓밟게 한단 말입니까? 아무렴 유다 백성이 바벨론 군대보다 악하겠습니까? 이건 말이 안됩니다. 하나님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는 식으로 항의하며 기도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택하여 읽은 말씀입니다. 4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바벨론 군대가 유다 나라를 징계하는 데에 쓰임을 받기는 하지만, 그 후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 바벨론 군대도 멸망하게 된다. 그리고 유다 나라는 다시 회복이 된다. 그래서 물이 바다를 덮음처럼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는 날이 온다.”고 하시며, 앞으로 될 일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살라는 겁니다.
그러자 하박국은 하나님을 찬송하며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그게 바로 3장 17절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고백합니다.
처음에는 불합리한 현실,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가지고 나갔던 하박국 선지자가 기도 중에 하나님을 만나 뵙고,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앞으로 되어질 일을 깨닫게 되자, 비록 “없고, 없고, 없고, 없는” 현실일지라도 구원의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고백하며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 여호와가 힘이 되어 주시니, 자신은 어려운 현실을 넘어서서 영적으로 높고 깊은 세계로 나가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슴이 자기 목숨을 노리는 맹수들을 피하여 높은 산등성이에 올라가 유유자적하는 것처럼,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의 발이 사슴의 발처럼 되어, 높은 곳에 다니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령한 은혜의 세계! 높고 깊고 오묘한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 믿음은 역경 속에서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빛은 어둠이 있으므로 더욱 진가를 발휘합니다. 예화) 찬송가 431장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를 아실 겁니다. 이 찬송을 작사한 분은 벤자민 슈몰크(Benjamin Schmolck)라는 루터교 목사님입니다. 당시는 30년 동안의 긴 전쟁으로 인하여 독일은 다 폐허가 되고 흑사병까지 돌아서 독일 인구가 1600만에서 600만으로 줄어드는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전쟁으로 득세한 가톨릭의 세력은 더욱 더 개신교를 탄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1704년 어느 날 슈몰크 목사가 부인과 함께 먼 곳에 있는 병든 교인을 심방하게 됩니다. 심방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불이 나서 교회도 사택도 불타버리고 아들딸이 서로 끌어안은 채 불에 타 죽어 있었습니다. 그 엄청난 사건 앞에서 그는 몸부림치며 아이를 붙들고 울다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립니다.
그 기도에서 이 찬송가 가사가 나온 것입니다.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항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가끔 지나온 세월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돌아보면 주님과 함께 했던 많은 일들 속에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의 손길이 보입니다. 그런데 삶의 환경이 평안하고 순탄했을 때보다, 풍랑이 거세게 일고, 모든 상황이 나를 거슬러 힘들게 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더 크게 나를 감싸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없고, 없고, 없는” 궁핍 중에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겠다고 고백하는 하박국 선지자의 믿음, 두 자녀를 한꺼번에 잃어버리고도 낙심하지 않고 눈물로 찬송하며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고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남긴 슈몰크 목사님의 믿음과 같은 믿음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또 확장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는 믿음부터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 받는 믿음을 얻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를 예배하고 그에게 기도함으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믿음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마라톤 풀코스의 그 먼거리도 한걸음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믿음의 마라톤도 한 걸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자동차 실험에서 자동차는 1시간에 2마일을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동차는 당시 마차보다 훨씬 느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마차를 타고 가던 마부들이 차라리 내 마차를 타라고 하며 자동차를 비웃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출발했던 그 불완전한 자동차의 첫걸음이 있었기에 오늘날 같은 자동차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첫걸음도 너무나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말이 있듯이, 우리의 믿음이 비록 처음엔 이모저모 부족할지라도, 받은 은혜를 따라, 말씀대로, 믿음으로 살겠노라고 결단하고 시작하는 그 믿음의 첫걸음이 마침내는 영광스러운 천국에 도착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여 자주 넘어질지라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성숙케 하실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믿음을 성숙케 하셔서 역경 속에서도 환경이나 사람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여전히 살아계셔서 온 세상만사를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 어제까지 나를 구원하셨고, 지금도 함께 하시며 곤경을 이겨나가게 하시며, 앞으로 완전한 구원을 베푸실 하나님!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찬송하며 즐거워하는 온전한 믿음에로 나아가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성숙한 믿음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부단히 말씀과 씨름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깨달은 대로 순종하며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믿음은 쑥쑥 자라게 될 것이며, 우리 마음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더욱 풍성하게 열매를 맺게 될 것이며, 점점 그 범위를 넓혀가게 될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살리라
합 2:1-4 / 곽선희 목사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유대인들은 그들의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 행사에는 꼭 아니마밈의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이 노래의 제목인 아니마밈이라고 하는 것은 '나는 믿는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 노래는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작사 작곡된 그리고 불리워진 노래입니다. 인간 역사의 가장 험악했던 사건, 600만명의 유대인을 무참히 죽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 속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고생을 하던 유대사람들이 거기에서 작사 작곡해서 계속 많은 유대인들이 부르며 위로를 받았던 그 노래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아가 나를 돕기 위하여 반드시 나를 찾아 오리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 간단한 가사를 계속 반복해서 부르는 그런 찬송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 자신의 동료들이 그대로 끌려서 가스실로 나가는 것을 봅니다. 죽음을 향해서 끌려가는 그 모습을 볼 때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들은 이 찬송 뒤에 한 절을 더 넣어서 불렀다고 합니다. 추가된 가사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메시아는 너무 늦게 오신다.' 그러나 한 외과의사는 절대로 그 마지막 가사를 부르지 않았답니다. 그는 확실히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늘 단정히 행하고 죽음을 앞둔 시간이지만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해가면서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하고 끝까지 버티고 견디고 믿음으로 섰습니다. 마침내 그는 죽지 아니하고 수용소 문을 나오게 됩니다. 나오면서 그는 마지막 절을 고쳐 불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너무 서둘러서 믿음을 포기할 때가 많다.'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그래서 믿음을 포기하는 자가 많다'라고 불렀답니다.
여러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것입니까? 물질로 삽니까? 물질 주도적으로 사는 그 수준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건만 떡으로 사는 것처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돈이 좀 있으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하고 어쩌다가 돈이 좀 작아지고 가난하고 어려워지면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슬퍼합니다. 그의 마음과 생각 철학까지도 완전히 물질의 소유에 의해서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고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물질주도적으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지식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배우고 깨닫고 공부하고 그것을 큰 기쁨으로 알고 그리고 무엇을 좀 더 알았을 때 그는 천하를 얻은 것처럼 기뻐할 뿐 아니라 지식적으로 자기만 못한 사람을 멸시하는 취미로 삽니다. "저것도 모르고, 무식한 것" 뭐 이래가면서. 유식해 보았자 별 것도 아니건만 그렇게 그 지식, 그것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기분으로 삽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feel로 삽니다. 감정이 가는대로 삽니다. 언젠가 한 번 차를 타고 가면서 라디오 드라마를 들어보았더니 어떤 점이 잘못되어 가지고 실연이 된 것 같은데 두 사람이 포장마차에 들어가면서 하는 소리가 "오늘 아예 끝을 내자" 그럽니다. 어쩌자는 것입니까? 기분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이런 기분파, 이것을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낭만파인간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고집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기로 사는 것입니다. 죽을만한 일이 있어도 억울해서 못죽습니다. 오기로, '내가 두고보자, 내가 반드시 이길 거다' 그런 집념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복수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이 죽을 때 자신도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무엇으로 사는 것입니까? 우리 믿는 사람은 눈으로 보이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로 사는 것도 아니고 지식을 의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현실 상황을 훌쩍 넘어서서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이제는 말씀드립니다. 우리 소망교회가 세워진 동기에 소위 behind story가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 사실은 막연했습니다. 어떤 직장이나 일터가 보장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돌아올 때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그저 비행장에 내릴 때부터 시작해서 누구든지 맨 처음 오라, 하는 곳이 있거든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리로 가서 제 일평생을 살 것입니다. 그렇게 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5개월 지내는 동안에 아무 소식도 없었습니다. 아, 이거 큰일 났더라고요. 먹고 사는게 어려웠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제 친구들이 만나자고 해서 차 한 잔 마시고는 금일봉을 주더라구요. 그래서 그것을 얻어가지고 살면서 제가 받을 때 한마디 했습니다. "내가 거지냐?" "내 친구가 하는 말이 거지가 따로 있냐? 얻어 먹으면 거지지 뭐 그렇게 말이 많아" 그러더라구요. 그러던 중에 어느날 한경직 목사님께서 어떻게 알고 오라고 해서 갔더니 "어찌 소식 없이 그렇게 불쑥 나타났나?" 그래서 "제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간다 온다 하겠습니까" 했더니 "그 사람 참 믿음이 좋으네" 그러더니 며칠 있다가 다시오라고. 그 다음에 갔더니 세가지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러이러한 세가지가 있는데 어느 쪽으로 가겠나? 그래서 저는 대답을 이렇게 했습니다. "제가 어짜피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고 왔는데요 나보다 나를 목사님께서 더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선택권을 목사님께 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이 선택해 주는 것을 기도의 응답으로 받겠습니다. 말씀하세요" 했더니 어느 대학의 학장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신학대학교에서 교수일을 했고 그리고 목회 생활을 했습니다. 대학 행정이라는 것은 전혀 모릅니다. 그런데 4년동안만 가서 하라고 그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학장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일에는 놉니다. 이 교회 저 교회 방문을 하게 되는 중에 여기서 몇 사람이 모여서 수요일 저녁에 기도회를 한다고 해서 제가 압구정이 북에 있는지 동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밤에 차를 타고 이리로 같이 왔습니다. 이것이 소망교회를 세우는 일이 되었고 저는 그 학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3년 반동안 이 학교 일과 교회일을 겸직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위해 전념하면서 오늘의 교회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작은 일이던 큰 일이던 믿음의 사람은 믿음으로 합니다.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정권을 그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산다. 그 믿음으로. 이 믿음은 내 욕망이 아니고 내 소원이 아니고 내 신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유대나라와 이스라엘이 다 타락했습니다. 종교, 정치, 문화 할 것 없이 전부가 타락을 하고 죄악으로 가득 찼기에 선지자의 신령한 눈으로 볼 때에는 기가막힙니다. 이 멸망할 수밖에 없고 멸망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박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성문에 올라가서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어찌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망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정해놓으신 것입니까?" 그렇게 울부짖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기다려라. 정한 때가 있나니,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무서운 심판이 있다. 있을 것이다.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심판을 넘어서 구원의 역사가 있고 밝은 아침이 있고 메시아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말씀하시고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그 믿음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미래지향적입니다. 현실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상황을 넘어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직 밝은 미래를 저 높은 곳을 지향합니다. 그 소망 속에 믿음이 있습니다. 또한 그 믿음을 가지고 현실을 봅니다. 미래를 향하여 가는 오늘의 process도 그 깊은 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압니다. 매 속에 사랑이 있습니다. 진노 속에 긍휼이 있습니다. 혼미함 속에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이 이루어져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보고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저 앞에 있는 약속을 지향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신 약속을 믿고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는 믿음, 이것은 소중한 성령으로 말미암은 선물입니다. 데이빗 리빙스턴이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분이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많은 고생을 합니다. 선교 역사에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리빙스턴이 이렇게 무려 16년 동안을 모진 고생을 하고 잠시 고향을 방문했습니다. 그를 맞으러 나왔던 고향사람들은 리빙스턴을 보고 모두가 목을 놓고 울었습니다. 너무너무 초라해졌습니다. 스물일곱번이다 열병을 앓아서 죽을 뻔 했기 때문에 뼈만 남았습니다. 앙상하게 뼈가 드러난 그의 허약해진 몸을 보면서 모두가 울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자에게 물려서 오른쪽 팔 하나는 간신히 붙어있을 뿐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 모두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그를 위로했습니다. 글래스코우 대학에 가서 젊은이들에게 강연을 했을 때에 대학생들이 물어보았습니다. 선교사님, 그 어려운 고통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습니까? 그 아프리카 오지에서, 외롭고 무서운 곳에서 어떻게 그 많은 시련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까? 그는 담담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끝날가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 말씀을 딱 부여잡고 그 말씀을 믿고 살고 힘들얻고 용기를 얻어서 오늘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그 믿음이, 그 믿음이올시다. 그 믿음으로 오늘을 삽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은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헬라 원문이나 히브리어를 놓고 문법적으로 보면 여러분, 문법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두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 하는 말씀이 되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는 말이 됩니다. '믿음으로'라고 하는 에크테우스 에크피스토스라고 하는 말을, 이 부사구를 주어에 붙이느냐 동사에 붙이느냐에 따라서 뜻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 그것은 교리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이것은 윤리입니다. 기독교 교리와 윤리가 통합된 대단히 중요한 딱 한마디의 복음입니다. 자,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는 기다립니다. 믿기 때문에 기다립니다. 아무 불평없이 기다립니다. 원망이 없습니다. 믿으니까. 반드시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으니까 여유도 있고 평안함도 있습니다.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러나 믿습니다. 믿음으로 알고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평안합니다.
특별히 성경은 말합니다. 정한 때가 있나니,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초조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얘들이 무엇을 달라고 하고 그럴 때도 그냥 선뜻 내줄 수가 없습니다. 줄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기다려라. 기다려야 합니다. 그 때에 가서야 그의 소원을 들어줄 수가 있는 것이지 아무때나 달란다고 아무거나 줄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언제이든 때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요. 믿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기다린다고 하는 믿음,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경륜을 간절히 믿고 온유 겸손하게 기다립니다.
또 하나는 먼저 가 본 미래에 사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이 시점에 있지만 먼저 가봅니다. 내가 지금 젊지만 늙은 상태를 생각해봅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지만 저 길을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그는 편지마다 그날에, 그날에, 그리스도의 날에를 계속 강조합니다. 그 날이 반드시 있을 일이요. 그 날을 생각하며 거기서부터 오늘을 생각합니다. 먼저 가 보고 그 미래에 의해서 오늘을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못듣는 말을 듣습니다. 다른 사람이 못보는 것을 봅니다. 믿음으로 봅니다.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죽을 지경으로 매를 맞고도 정신을 차리면서 찬송을 불렸습니다. 그 신비한 기쁨은 누구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만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만의 지식이 있습니다. 그만의 기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들으며 삽니다. 들려집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또한 이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현실 사건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습니다. 버려진 사건이 없습니다. 내가 실수했던 성공했던 잘했던 못했던 누구를 만났던 모든 사건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을 위해서 있는 일입니다. 다음을 위해서 있는 일입니다. 에스더가 유명한 말을 하지 않습니까?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하는 말입니다. 네가 왕후가 된 것이 바로 이때를 위함인지 어떻게 알겠느냐? 여러분, 순간순간이 다 소중한 의미를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체험하게 되고 약속이 분할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증하면서 살아갑니다.
아메리카 인디언 추장 하나가. 어느날 한가한 시간에 손자 손녀를 앞에 쭉 놓고 이야기를 하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보니까 어린아이들의 마음 속에도 고민과 갈등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고민하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늑대 두 마리가 있단다. 그런데 늑대 한 마리는 아주 악한 늑대로서 화를 잘내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거만하고 거짓말하고 교만하고 아주 못된 그런 늑대 한 마리가 있고, 또 한 마리의 늑대는 기뻐하고 평안하고 사랑하고 소망을 주고 인내하고 아주 온유 겸손한 그런 복스러운 늑대 두 마리가 있단다. 이 두 마리가 항상 싸운다." 항상 싸운다고 했더니 아이들이 가만히 있다가 "그래요 내 마음에도 늑대 두 마리가 있어요" 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한 아이가 묻기를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마음 속에도 늑대가 있나요?" "그럼, 두 마리가 있지" 한 아이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그런데 어느 늑대가 이겼나요? 두 마리가 싸워서 누가 이겼나요?"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겼지."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늑대에게 먹이를 주십니까?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못된 것에다가 관심을 두고 거기에 먹이를 주고 있습니까? 내가 먹이를 주는 대로 그 늑대가 이긴다고 아주 지혜로운 대답을 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잊지 말아야합니다. 의심은 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의심은 죄가 아닌 줄 압니다. 의심이 마음 속에 좀 지나가는 것인데 무슨 죄가 되겠나까 해서 죄인줄 몰라서 회개도 안합니다. 의심이 쌓이고 쌓여서 모든 악의 근본이 됩니다. 에덴 동산에서 지은 죄가 바로 의심이라고 하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의심은 원죄의 속성입니다. Original Sin, 원죄의 속성이 의심입니다. 의심 불신이 씨가 되어서 모든 죄를 유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믿음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진노를 믿고 그리고, 보십시오. 저 앞에 있는 구원을 믿고 약속을 믿고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아는 것이 있습니까? 아는대로 진실하십니다. 모르는 것이 있습니까? 믿고 따라가십시오. 보이는 것이 있습니까? 거기에 충성을 다하십시오. 보이지 않는 것이거든 믿고 순종하십시오. 의인은 오직 그 믿음으로 살리라.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이만큼의 믿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때로 휘청휘청할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일어나 믿음의 생활을 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기도하는 것은 이제는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게 하옵소서. 오직 믿음의 사람이 되고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느끼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주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꿈을 포기하지 말라
하박국 2장 2-3 / 이한규 목사
< 꿈을 분명하게 가지라 >
급박한 상황에서도 기억될 정도로 꿈이 분명해야 한다(2절). 하나님은 개인이나 공동체에 복을 주실 때 먼저 꿈을 주시고 꿈을 따라 기도하게 하시고 마침내 꿈을 이뤄 주기를 기뻐하신다. 찬란하고 분명한 꿈이 없이 우연히 위대한 일을 성취한 사람은 없다. 인생을 보람 있게 살려면 며칠 후에 없어질 꿈이 아니라 오래도록 간직되는 영롱한 꿈을 꾸라. 꿈의 작은 씨앗은 권세나 능력보다 강하다. 포드가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꿈꿨을 때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지만 결국 만들었다.
어느 날 미국에 온 한 이민자가 하나님의 일꾼을 배출하는 교육의 꿈을 가졌다. 그리고 기부금 700파운드와 자기 책 200권을 기증하고 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정작 학교가 발전하는 모습은 보지 못하고 1년 후에 죽었지만 그의 꿈은 죽지 않았다. 그 학교가 지금은 세계 최고의 명문대학이 된 존 하버드가 세운 하버드 대학이다.
꿈은 건물의 설계도와 같다. 꿈이 있어야 작품 인생이 될 수 있다. 물론 누구나 꿈은 가지고 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꿈이 희미해지는 것이다. 수시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꿈을 새롭게 하라. 꿈은 징그러운 쥐를 월트 디즈니의 귀여운 미키 마우스로 만드는 힘이 있다. 월트 디즈니는 미키 마우스로 디즈니랜드를 건설했다. 그 후 디즈니랜드는 수많은 어린이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꿈은 전염된다.
복된 삶을 살려면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꿈을 가지라. 거룩한 꿈을 가진 것은 성령 충만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노인도 꿈이 있으면 청년과 같고 청년도 꿈이 없으면 노인과 같다. 꿈이 있어야 절망 중에서 희망을 잡고 현재 속에서 미래를 잡을 수 있다. 꿈은 마음에 열정을 일으키는 미래의 그림이고 영혼을 풍성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주신 미래의 소원이다. 거룩하고 찬란한 꿈이 있어야 삶은 가치 있게 된다.
< 꿈을 포기하지 말라 >
꿈을 품고 나아갈 때는 꿈을 좌절시키는 환경이 늘 있다. 또한 꿈의 성취가 생각 이상으로 지연되기도 한다. 그래도 꿈을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이 주신 꿈은 반드시 이뤄지지만 하나님의 때에 이뤄진다(3절). 가끔 보면 꿈을 가로막는 사람을 만난다. 나쁘게 보면 부정주의자이지만 좋게 보면 신중한 사람이다. 신중한 사람의 말을 들으면 실패의 가능성이 낮아지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그 신중함이 내일의 발걸음을 약화시킨다. 너무 신중해서 추락이 없도록 자기 날개를 잘라버리면 언제 어떻게 날겠는가?
신중한 사람은 남을 움직이기 힘들다. 남에게 감화력을 미치지 못하면 내일의 주인공이 되기 힘들다. 꿈이 있어야 남을 움직이는 감화력도 나오고 내일도 소유할 수 있다. 하나님도 꿈과 비전을 가지고 모험하는 사람 편이 되어 주신다. 하나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내일의 찬란한 꿈을 향해 도전하라. 어려워도 꿈을 포기하지 말라. 돈이 없어도 실망하지 말라. 꿈이 있는 것은 돈이 있는 것보다 낫다.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 앞으로 맺힐 열매도 포기되지 않는다.
왜 요새 자살사이트가 성행하는가? 꿈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풍요에 길들여진 채 꿈까지 포기하니까 작은 어려움도 참지 못한다. 그러나 환경이 어려워도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누군가가 하나님 앞에 나오고 삶의 용기를 얻으면서 자연히 영향력도 커진다.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은 실패를 모르는 환상이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실패 속에서 얻어지는 삶의 소중한 보화다.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삶의 목적과 꿈을 이룬 사람이 많다.
가치 있게 사는 꿈과 비전을 가지라. 어려움 중에도 꿈과 비전을 포기하지 말라. 꿈이 있으면 어떤 환경도 충분히 극복하고 새롭게 일어설 수 있다. 환경이 어렵다고 불평하며 꿈을 포기하고 좌절하면 후퇴만 있을 뿐이다. 힘든 일이 있어도 늘 따뜻한 시선으로 내 삶을 바라보고 결코 꿈을 포기하지 말라. 믿음으로 산다는 찬란한 꿈과 환상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삶이 힘들어도 따뜻한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고 꿈을 잃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