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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8년에 만들어져 현재는 우타르 프라데시 주(州) 아그라 교외
아그라 성(城)에서 동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Cecilia - Love of a Silent Moon
타지마할 -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인도 무굴제국의 대표적 이슬람 건축
1983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인도의 대표적 이슬람 건축이다.
타지마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 중의 하나이다. 엄청난 건축비용이 들었지만,
이 하얀 대리석의 웅장한 사원은 한 여인을 향한 한 남자의 간절한 기념비가 되었다.
타지마할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뽑는 이유는
아름다운 외관에 애틋한 배경 설화가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외모에 이끌려 만났는데 알고 보니 마음마저 착한 격!
무굴 제국의 5대 황제였던 샤 자한(Shah Jahan)이 가장 사랑했던 세 번째 부인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은 15번째 아이를 낳다 죽고 말았다.
39세의 젊고 아름다운 나이였기 때문에
왕은 며칠 만에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로 큰 슬픔에 빠졌다.
뭄타즈 마할은 정략결혼이나 부모의 소개가 아닌,
연애로 맞이한 부인이었기 때문에
유독 그녀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다고 한다.
뭄타즈 마할
뭄타즈 마할, 본명: 아르주만드 바누로, 샤 자한의 아내이다.
그녀는 누르 자한의 오빠 아불하산 아사프 칸의 딸이다.
뭄타즈 마할이라는 경칭은 샤 자한이 무굴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후에 수여 받은 것이다.
출생: 1593년 4월 27일, 인도 아그라
사망 정보: 1631년 6월 17일, 인도 Burhanpur
묘지: 인도 아그라 타지 마할
자녀: 아우랑제브, 자하나라 베굼, 다라 시코흐, 로샤나라 베굼, 더보기
배우자: 샤 자한 (1612년–1631년)
부모: 아불 하산 아사프 칸, Plondregi Begum
손주: 바하두르 샤 1세, 무하마드 아잠 샤, Zeb-un-Nissa,
상심한 왕은 부인만큼 아름다운 건축물을 그녀와 연애할 동안
자주 만났던 곳에 지어 평생 추모하기로 결심한다.
1631년부터 이탈리아, 이란, 프랑스, 터키 등
세계 각국의 기술자와 건축가 2만 명을 동원하였다.
야무나 강을 뒤로 눈부신 백색의 대리석으로 본관을 짓고
건물 외관을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을 하였다.
타지마할(Tajmahal)이란 '마할의 왕관’이라는 뜻을 가지며,
무굴제국 황제 샤 자한(Shah Jahan)은 17년 동안 14명의 아이를 낳고
15명째 아이를 낳다가 1629년 사망한 그의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
(Mumtaz Mahal)을 위하여 1631년부터 짓기 시작해서 1653년에 완공을 보았다.
사원은 좌우 대칭의 총 대리석으로 높이 5.5m, 종횡 94m의 기단상의 중앙에는
높이 58m의 사당, 四遇에는 높이 42m의 첨탑이 세워져 있다.
1631년부터 18년 동안 국고를 탕진해 가며 완성하였고,
온갖 재보(財寶)와 미술/공예품을 한데 모아놓았다.
타지마할 (힌디어: ताज महल, 우르두어: تاج محل) 은 인도 아그라에 위치한 건축물이다.
1631년에서 1643년 사이에 무굴 제국 황제인 샤 자한이 아내인 아르주만드 바누 베감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이 영묘는 뭄타즈 마할('선택받은 궁전'이라는 뜻)이라고도 하는데, 이 이름이 전와되어 타지 마할이라고 한다.
아르주만드 바누 베감은 1612년에 황제와 결혼한 뒤 서로 떨어져 살 수 없는 반려자로 지냈으나
1631년 부란푸르라는 도시에서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타지 마할은 인도, 페르시아, 중앙 아시아 등지에서 온 건축가들의 공동 설계에 따라
1631년에 착공하여 22년만인 1653년에야 완공된 이 건물의 정면 마당에는
수로가 있는 정형적인 무굴(Moghul) 양식의 정원을 두고, 좌우로는 회교사원과 회당을 둔 구조로 되어 있다.
타지마할의 뒤편으로는 야무나(Yamuna)강이 흐르고 있는데,
높은 축대로 쌓여진 야무나 강 쪽의 뒷면을 제외한 타지 마할의 삼면은 모두 높은 담이 둘러져 있다.
매일 2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1643년경에 영묘가 완공되었고,
1649년경에는 모스크 성벽·통로 등 부속건물이 완공되었다.
타지 마할 전체가 완공되기까지는 22년의 세월과 4,000만 루피의 비용이 들었다.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에 타지 마할로 들어서기 위한 1차 관문이 있고
이 1차 관문을 통과하면 널찍한 마당이 나오는데 타지 마할은 이 마당을 건너 또다른 문을 통과해야 볼수 있다.
타지마할로 통하는 최종 관문으로 세워진 붉은 사암으로 된 문에는 아랍어로 코란(Kolan)의 경구들이 새겨져 있다.
하루에도 여러번 각기 다른 느낌의 타지마할에 많은 사람들이 넋을 잃을 정도다.
타지마할은 무굴 건축에서 가장 빼어난 예로 여겨지며 힌두와 이슬람 건축물을 배합하였다.
타지마할은 그 영감의 낭만성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일반적으로 이 흰색 대리석 돔이 가장 잘 알려진 부분이나 타지마할의 전체는 이보다 더 크다.
높은 원통형 벽(drum)으로 떠받친 양파 모양의 2중 돔이
이 건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인도 아그라 교외의 야무나 강(줌나 강) 남쪽 연안에 있는 타지마할 영묘(마우솔레움).
북쪽에 야무나 강이 흐르고...좌, 우에 모스크와 그 밖으로 성벽이 있다.
타지마할 영묘 앞 정원 한 가운데에는 긴 수로가 만들어져 있다.
영묘의 동서 양쪽에는 완전 대칭을 이루는 2개의 건물이 붙어 있는데,
서쪽(오른쪽)에 있는 것은 모스크이며
동쪽(왼쪽)의 것은 미학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세운 이른바 '자와브'이다.
서쪽에 위치한 건물은 이슬람교의 예배당인 모스크로 사용하였으나
동쪽 건물은 아무런 기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건물을 동쪽에 세운 이유는 단 하나,
묘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어디에서든지 완벽한 대칭적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런 완벽함 속에 옥에 티를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서쪽의 모스크 건물:
타지마할 본 건물에 들어가려면 덧신을 신거나 혹은 맨발이어야 한다.
동쪽의 자와브
수로가 있는 정원은 무굴제국의 전형적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당시 무굴제국의 대칭 건축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타지마할은
출입구부터 본관인 묘궁까지 모두 중앙의 연못을 중심으로
아치와 입면이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크게는 흰 대리석으로 만든 본관 묘궁과 동과 서 양쪽의 붉은 사암 건물이
양립하도록 서 있어 색감과 배치 모두에서 안정적이고 웅장한 조화를 자아낸다.
타지 마할은
인도, 페르시아, 중앙 아시아 등지에서 온 건축가들의
공동 설계에 따라 1631년경에 착공되었다.
오스만투르크제국 최고의 모스크 전문 건축가 우스타드 라호리가 초빙되었고,
아지메르 지방에서 최고급의 흰 대리석들이 재단되어 속속 아그라로 도착되었다.
인도 전역에서 내노라하는 조각가들이 불려졌고,
이탈리아와 터키, 심지어 남미산 유색 대리석과 오닉스가 수입되었으며,
루비와 사파이어, 그리고 옥이 중국과 아라비아 등지에서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매일 2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1643년경에 영묘가 완공되었고,
1649년경에는 모스크·성벽·통로 등 부속건물이 완공되었다.
타지 마할 전체가 완공되기까지는 22년의 세월과 4,000만 루피의 비용이 들었다.
22년간의 긴 공사 끝에 78m의 높이에 달하는 신비로운 팔각 건물이 완성되었다.
이후 다시는 이런 건물을 만들 수 없도록 기술자들의 손가락을 잘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왕은 이 건물을 보자 부인의 이름인 '타지마할!'을 나지막이 외쳤고,
이로써 왕비의 이름이 건물의 이름이 되었다.
타지마할은 인도, 페르시아, 중앙 아시아 등지에서 온 건축가들의 공동 설계에 따라
1632년경에 착공되었고 1643년경에 영묘가 완공되었고 1649년경에 부속건물이 완공되었다.
8년간이나 유폐되어 죽기까지 뭄타지마할을 그리워 했을 샤자한이 머물렀던
바로 그 아그라성의 창틀을 통해 아련히 바라다보이는 타지마할
22년간 타지마할의 완공을 누구보다도 애타게 기다렸을 샤 자한 왕은
평생을 두고 단 한 번도 타지마할에 들어가지 않았다.
죽은 부인 생각에 너무도 침통해서일까?
슬프게도 샤 자한 왕은
자신의 친아들 아우랑제브(Aurangzeb)가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황제로 등극하는 난을 일으켜 생의 마지막 8년을 유폐된 채 보낸다.
무굴 제국은 16세기초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인도를 통치했던 이슬람 왕조이다
사자한 왕이 갇혀 있던 아그라 요새의(Agra Port) 무삼만 버즈(Musamman Burj) 탑에 서면
저 멀리 타지마할이 아련히 보인다. 혹자는 샤 자한 왕의 유폐 이유가
타지마할 옆에 또 하나의 검은 대리석 궁을 지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미 타지마할을 지으며 국력을 탕진한 상태에서
계속 과거의 향수에만 집착하는 아버지를 아들이 제지한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한 시대를 통치했던 사자한 왕의 로맨스는 비참한 말년으로 끝난다.
다행히도 그의 시신은 타지마할에 부인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건물 안은 화려한 외관과 달리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는데,
타지마할 왕비만을 위한 기념비적 무덤이기 때문에
다른 용도의 방이 없기 때문이다.
영묘는 높이 7m의 대리석 대좌 위에 지어졌으며
사방이 똑같은 모습으로, 모서리는 정교하게 깎여 있고
각 면마다 높이 33m로 우뚝 솟은 거대한 아치가 있다.
이 탑이 사방에서 중심의 묘궁을 받치는 느낌 때문에
타지마할이 더욱 웅장하고 권위적으로 보이는 것인데,
멀리서 자세히 보면 이 미나레트가 피사의 사탑처럼 바깥쪽으로 조금씩 휘어져 있다.
당시 자연재해가 잦았던 시대상을 반영하여 지진으로 높은 미나레트 탑이 무너져도
중심의 묘궁은 피해를 입지 않도록 일부러 밖으로 기울어지도록 제작한 것이다.
대칭에 대한 집착으로 커다란 조형물도 거침없이 짓는 한편,
인간에게 불가항력적인 자연에 대해서는
슬기롭게 대처하는 그들의 모습에 감탄사가 나온다.
본관의 주위에 높이 솟아있는 네 개의 미나르(첨탑)는
타지마할의 완성미를 더해줄 뿐 아니라,
본관을 중심으로 5도씩 바깥으로 벌어지게 함으로써 전면에서 똑바로 보았을 때
탑이 원근법에 의해 안쪽으로 구부러지지 않고 반듯하게 보일 수 있게 하였으며,
만에 하나, 지진이 발생하였을 경우 안쪽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한
믿어지지 않는 설계와 시공기술에는 그저 혀를 찰 뿐이다.
영묘의 각 아치 위에 있는 난간과 각 모서리 위에 있는 장식 뾰족탑 및
돔을 덮은 원통형 정자는 영묘의 스카이라인에 율동감을 준다.
대좌의 각 모서리에는 3층 미나레트가 서 있는데,
대좌와의 대리석 접합부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영묘의 대리석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물론 규모나 역사에 있어서는 이집트 피라미드와 같은 유적지가 우수하겠지만
미학적인 면에 있어서는 타지마할을 따라올 건축물이 없다.
이 때문에 타지마할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로 칭한다.
흰 대리석은 밤에는 달빛이 반사되어 옅은 분홍색을 띄고,
낮에는 보석 장식들의 빛을 반사하여 천연의 빛이 스민다.
곳곳을 아름답게 장식한 보석은
아프가니스탄의 사파이어, 중국의 수정, 티베트의 터키석 등으로
지역과 나라를 가리지 않고 최고급의 천연석만을 사용하였다.
이 들은 모두 대리석이 만들어질 때부터 함께였던 것처럼 작은 틈 하나 없이 박혀 있는데
바로 피에트라 듀라(Pietra Dura)라는 모자이크 기법이라고 한다.
이 기법은 르네상스시대 유럽의 건축물에서도 발견되는 양식인데
대리석에 문양을 판 뒤 그 홈에 보석을 끼워 넣는 형식이다.
이 때문에 5백년의 세월이 지나도 홈에서 떨어지지 않고 건재함을 과시한다.
또한 지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기반 전량을 아프리카 나무로 사용하였다.
실제로 무굴제국 제3대 황제 악바르 대왕이 머무른 시크리 성이 무너질 때,
타지마할은 건재하였다고 한다. 22년간 매일 2만여 명의 인부들이 동원되다 보니,
공사현장에는 이들로 구성된 타자간지라는 이름의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큰 규모의 공사는 세계에서도 드문 경우인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공사 규모와
이에 투자된 천문학적인 비용과 인력 때문에 불가사의의 건축물로 꼽는 것이다.
코란을 새겨 넣은 높은 대리석 기둥은 밑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시각적으로 맨 윗 부분과 아랫 부분이 정확히 같은 너비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판의 너비와 글자를 넓히고 크게 새겨 넣었다.
백색의 대리석에 홈을 파서 유색의 대리석을 잘라 고려청자처럼 상감처리한 정교한 기법
▲ 피에트라 듀라(Pietra Dura) 모자이크 기법이라고 한다
왼쪽이 황후 그리고 오른쪽이 샤 자한의 가묘
흰색의 대리석 위에 정교한 이슬람 문양이 새겨져 있다
진짜 석관은 대좌 아래 지하 납골당에 모셔져 있다
안타까운 것은 타지마할은 원래 갖가지 금은보화 장식으로
극도로 여성적인 화려함을 자랑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 식민시대를 거치며 돔을 장식하는 금장식도 사라졌고
입구를 지탱하던 은문도 뺏기는 등 수많은 약탈을 당했다고 한다.
지금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니!
완공 당시의 타지마할을 아쉽게 상상을 해 본다.
타지마할에 얽힌 애절한 사랑이야기
한밤중, 샤자한은 목이 타는 갈증을 느껴 눈을 떴다.
샹들리에의 촛불이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이 어슴프레 눈에 들어왔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누군가 물이 가득 찬 황금그릇을 코앞에 내밀었다.
왕비 뭄타즈 마할이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목이 말라서 잠을 깬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긴, 뭄타즈는 한시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었지.
샤자한은 왕비가 황제에 대한 걱정으로 남 몰래 눈물을 훔치는 것과
한숨 짓는 것을 그동안 여러 번 목격한 적이 있었다.
뭄타즈 마할이 두 번째의 왕비로서 아그라성에 들어온 것은 17년 전이었다.
결코 아름답지도 않았으며, 키도 작고 피부도 까만 전형적인 드라비다 여인이었다.
첫 번째 왕비나 세 번째 왕비의 미모에 비하면 너무나도 볼품없는 여인.
굳이 좋은 점을 찾자면 맑은 목소리와 넘치는 애교, 그리고 꾸밈없는 밝은 성격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지성은 어디서나 단연 돋보였다.
입궐 후에도 다른 왕비처럼 거드름을 피우거나 사치스럽지도 않았다.
왕비의 품위를 잃지도 않으면서도 늘 밝게 웃으며
매사를 솔선 수범함으로서 대신들과 궁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샤자한의 마음을 읽는데도 탁월해서,
언제나 황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마술처럼 알아 맞추고는
그를 대신해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는,
언제나 황제만을 생각하고 사랑하며 사는 그런 여인이었다.
어느덧, 샤자한은 뭄타즈 마할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디를 가나 무슨 일이 있거나 언제나 뭄타즈를 동반했다.
그녀는 심지어 황제가 전쟁터에 나갈 때도 두말 없이 따라 나섰다.
사랑이란 외모의 아름다움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뭄타즈마할의 헌신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두 왕비의 따가운 눈초리와 질투를 감수하며
뭄타즈만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샤자한은 자신의 마음을 읽고 따르는 착한 그녀를 혼신을 다해 아끼고 사랑했다.
다른 왕비들처럼 남을 비방하거나 험담하는 일도 없었다.
뭄타즈는 또한 샤자한에게 결혼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17년 동안
무려 14명의 자식을 낳아 주지 않았는가!
하나부터 열까지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아내,
그 이름 뭄타즈 마할이었다.
그런 왕비가 또다시 임신한 채 만삭의 배를 끌어안고 끝내 몸져누운 것이다.
이전과 달리 점점 야위어져 가기만 하는 아내의 모습은 샤자한의 마음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창백한 달빛이 아그라 성의 테라스에 걸친 어느 날 밤, 결국 뭄타즈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곁에 앉아있는 샤자한을 올려다보며 마지막 미소를 지었다.
그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왕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의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노라고.
뭄타즈는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 줄 것을 황제에게 부탁하였고,
그는 죽어 가는 왕비의 손을 잡으며 굳게 약속했다.
1631년 6월 7일의 일이다.
뭄타즈는 15번째의 아이를 낳다가 39세의 젊은 나이로 마침내 황제의 곁을 떠나게 되었고,
황제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여 장례를 치르는 기간동안 흰 상복을 입고 왕비의 죽음을 애도했다.
샤자한은 뭄타즈 마할 사후 곧바로 그녀와의 약속을 실행에 옮겼다.
이로서 아그라의 야무나 강 남쪽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역사적인 착공에 들어가게 된다.
그 이름은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왕관모습의 궁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오스만투르크제국 최고의 모스크 전문 건축가 우스타드 라호리가 초빙되었고,
아지메르 지방에서 최고급의 흰 대리석들이 재단되어 속속 아그라로 도착되었다.
인도 전역에서 내노라하는 조각가들이 불려졌고,
이탈리아와 터키, 심지어 남미산 유색 대리석과 오닉스가 수입되었으며,
루비와 사파이어, 그리고 옥이 중국과 아라비아 등지에서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2만 명의 노예들과 1000마리의 코끼리들이 동원되어 건축가의 지시를 받아
무려 22년간의 대 공사 끝에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무굴제국의 영광과 샤자한의 명예에 걸맞는 아름다운 자태로 창조되었다.
놀랄 정도의 섬세한 조각과 백색의 대리석에 홈을 파서 유색의 대리석을 잘라 상감 처리한
정교한 기술은 더 이상의 다른 건축물과의 비교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코란을 새겨 넣은 높은 대리석 기둥은 밑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시각적으로 맨 윗 부분과 아랫 부분이 정확히 같은 너비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판의 너비와 글자를 넓히고 크게 새겨 넣은 그 세심함은
감탄사만으로는 부족하다.
본관의 주위에 높이 솟아있는 네 개의 미나르(첨탑)는 타지마할의 완성미를 더해줄 뿐 아니라,
본관을 중심으로 5도씩 바깥으로 벌어지게 함으로써 전면에서 똑바로 보았을 때
탑이 원근법에 의해 안쪽으로 구부러지지 않고 반듯하게 보일 수 있게 하였으며,
만에 하나, 지진이 발생하였을 경우 안쪽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한
믿어지지 않는 설계와 시공기술에는 그저 혀를 찰 뿐이다.
붉은 사암으로 된 정문은
중앙운하에 한가로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본관의 맞은편에 열려있으며,
건축의 균형과 세련미를 위해 본관의 한쪽 옆에 모스크를 만들고는
그 반대쪽에는 모스크와 외형이 똑 같은 건물을 세운 그 치밀함이여.
가히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타지마할이 건설되면서 죽은 후 2년 동안 그 앞뜰에 임시로 묻혔던 뭄타즈마할은
바닥 공사가 끝나면서 바로 타지마할의 지하에 옮겨졌다.
타지마할이 완성되는 날,
샤자한은 성대한 행사를 갖고 뭄타즈마할의 영혼을 다시 위로했다.
죽은지 23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생전의 왕비를 사랑하는 샤자한의 눈에
뭄타즈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 살아있었다.
샤자한은 타지마할이 완성된 후 오히려 더 괴로워했다.
타지마할을 볼 때마다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리움은 다시 고통으로 다가왔다.
황제는 타지마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시 쉬는 게 좋겠다는 대신들의 조언을 받아,
조부인 악바르 대제 시절의 한때 수도였던 파테푸르 시크리로 6개월간의 휴가를 떠난다.
샤자한이 대리석을 좋아하는 것은 거의 병적이다시피 했으므로,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는 파테푸르 시크리 성내에 자리하고 있었던 성자 시크리의
초라한 무덤을 대규모의 대리석으로 증축하고 공간을 확장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1년에 한번씩은 이곳을 순례하도록 하였다.
그는 뭄타즈마할이 없는 아그라에 머물기보다는 외부에 출타하는 일이 많아졌고,
이윽고 조부 후마윤의 수도였던 델리에 샤자하나바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독실한 이슬람교도인 샤자한은 장차 이슬람세계의 끝까지 그 명성을 떨칠 도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붉은 사암의 거대한 성, 이른바 '랄킬라'를 짓기 시작했다.
성안에는 인도에서 가장 큰 모스크를 짓도록 명령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자마마스지드이다.
샤자한이 제국을 통치하던 30년간, 제국의 확장에 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타지마할의 건설로 국고가 결국에는 바닥을 드러내게 됨으로서 그의 업적이 빛을 잃게 되었다.
말년에는 중병에 들어 국사를 돌보기가 힘들어 지게 되었고,
왕비 뭄타즈마할에 대한 그리움으로 야무나 강 북쪽 타지마할의 반대쪽에,
이번에는 검정대리석으로 타지마할과 같은 거대한 자신의 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제의 임종과 국고의 탕진을 염려한 네 아들이
서로 황제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합을 벌이게 되었고,
그 중 군인기질이 가장 풍부한 야심가 아우랑제브가 장남과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재빨리 아그라를 차지함으로서 실질적 권력을 쥐게 된다.
그는 아버지 샤자한을 아그라 성채의 작은 방에 감금하고는
아버지가 진행시키던 샤자한의 묘의 건축을 중지시켰다.
무려 8년이라는 기간을 이곳에 갇혀 살던 샤자한은 75세의 나이로
멀리 야무나강 너머의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쓸쓸히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사후 그의 묘는 타지마할 지하의 뭄타즈마할의 관 옆에 안치되었다.
뭄타즈마할에 대한 샤자한의 사랑은 그야말로 시공을 초월한,
타지마할 만큼이나 불가사의한 사랑, 바로 그것이었다.
하루에도 네 번씩 색깔을 바꾼다는 타지마할의 자태는
고요한 달빛에 비칠 때면 보라빛을 띤 상아색으로 바뀌고,
그 고운 모습은 마치 샤자한과 뭄타즈마할의 달콤한 속삭임처럼 다가온다.
아그라 성채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면,
멀리 떨어진 타지마할을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게 된다.
8년 동안 이곳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샤자한의 애절한 마음은 어떠했을까.
사랑을 논하려면 아그라를 먼저 가 보라. 사랑과 애달픔이 곳곳에 스며있는 곳.
아그라는 그런 곳이다.
첫댓글 ㅎ 아니 금슬이 얼마나 좋았으면 40도 안된나이에 아이를 15명이나 임신을 했을까요?
애 낳는 기계도 아니고 나 원 참 ㅉㅉㅉ 그리고 무덤하나 적당히 품위맞게 정성들여 해 주면 좋았을것 같은데(내생각)
저렇게나 거창하게 수십년에 걸쳐 결국 영묘일뿐인데.
어쨋거나 결국은 세계적으로 제일 아름다운 건축물로 자랑이며 외화수입도 국위선양도 큰 성과를 보고 있긴 하네요 .
선견지명이 뛰어난 샤자한황제의 안목에 큰 박수 보냅니다. 대대손손 영원히-----------
그러게나 말입니다
뭄타즈 마할이 그리 미인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왕의 총애를 독차지했다고 합니다
둘이 맞는 궁합이 있는 듯합니다
22년이나 걸려서 완성한 영묘지요
게다가 검은색 대리석으로
자신의 영묘까지 지으려 했다니
아우랑제브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겠지요
아우랑제브는 뭄타즈마할의 소생이라고 합니다
샤자한을 8년동안 아그라성에 유폐시켰지요
그래도 사후에는 뭄타즈마할과 합장했다네요
어쨌든 후손들이 타지마할로 먹고사니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