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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창이뿐인 우리 삶으로도>
한 신학자는 ‘교회’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렇게 간결하게 정의 했습니다.
“하느님의 위로와 세상의 박해 사이를 걸어가는 순례객들.”
신앙공동체라고 해서 그 안에 늘 완벽한 평화, 충만한 기쁨만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형제적 일치와 나눔, 섬김과 봉사가 계속되지만은 않습니다. 늘 황홀한 꽃길만 계속되지 않습니다.
때로 심각한 분열의 위기 앞에 서기도 합니다. 백척간두 낭떠러지 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기도 합니다. 때로 세상의 박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미움 때문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토록 거칠고도 위험한 순례의 바다를 건너가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 한 가지는 ‘제대로 된 사랑’입니다.
장 폴이란 위대한 철학자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랑으로 충만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나머지 생애동안 냉혹한 세계를 견뎌낼 수 있다.”
참담한 현실 앞에서도,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만 제대로 형성되어 있다면, 그 상황을 기꺼이 견뎌낼 수 있을 것입니다.
쉼 없는 흔들림 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배의 영원한 선장이시고, 우리를 구원의 땅까지 잘 인도해주시리라는 확신만 있다면 평화로운 마음으로 이 세상을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평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몫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몫이란
근심, 걱정, 고뇌, 유혹, 마음의 메마름과 흔들림을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끼아라 루빅)
높고도 거친 물결에 맞서 싸워가며 길고도 고통스런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필요한 또 다른 한 가지 마음은 낙천주의입니다.
한 대학 수영부 감독이 시즌을 마감하며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쉽게도 올 한 해 동안 우리 팀은 단 한 차례도 입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물에 빠져죽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비록 오늘 우리의 현실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암담하다 할지라도, 순간순간 고통과 실패로 점철된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항해에 함께 계시며, 언젠가 반드시 안전하게 우리를 또 다른 항구에 내려주실 것을 굳게 믿는 낙천주의가 필요합니다.
도공이 버려진 진흙으로도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듯이 하느님께서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우리 인생을 통해서도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유리화 작가가 깨진 유리조각으로도 황홀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제작하듯이 하느님께서는 만신창이뿐인 우리 삶으로도 그럴듯한 작품 하나를 만들어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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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5.4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사도16,1-10 요한15,18-21
예수님은 우리의 운명이자 사랑이다
-섬기는 삶-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묵시22,13).
아침 성무일도 독서 시 마음에 와 닿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운명이자 사랑입니다.
우리는 알파이고 오메가이며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인
예수님과 하나의 운명공동체를 이루고 있기에 방황하지 않습니다.
24년 전 사제서품 식 때의 입당성가의 감동 역시 생생합니다.
-내 한 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이 땅위에서 산다하여도 이 땅위에서 산다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
예수님과의 운명적 만남은 섬김의 삶으로 드러납니다.
‘아빠스는 섬기는 사람이다.’
얼마 전 어느 선배 신부님이 누 차례 강조하신 말입니다.
아빠스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섬기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입니다.
예수님과 운명적 만남이 깊어질수록 섬김의 삶도 깊어지기 마련입니다.
하여 분도수도회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일컫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한 말을 기억하여라.”
주인이신 예수님이 섬기는 삶에 충실하셨기에
주님의 종들인 우리 역시 섬기는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운명공동체에 속한 우리들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의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바로 이게 우리의 운명이자 신원입니다.
세상에 있어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야 할 우리의 신원이자 운명입니다.
세상에 속화(俗化)되지 않고 섬김의 삶으로 세상을 성화(聖化)해야 할,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믿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운명공동체를 이룬 사람들에게 뒤따르는 시련과 어려움은
자연스런 현실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전우(戰友)로서 예수님과 운명적 사랑에 충실하며
‘사랑의 전사(戰士)’로 살다가 전사(戰死)했던 수도선배들을 보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신부님은 살아있는 성인(living saint)이십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존경하는 선배 신부님께 유머로 말한 저에게
웃으시며 유머로 답하신 신부님과의 유쾌한 장면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평생 화 한 번 안냈다는 노신부님이십니다.
“화내면 언제나 후회합니다.
화나려 하면 산에 가던 지 운동하던지 자전거 타던지 하며 풀었습니다.
제가 잊지 못할 세분을 소개합니다.
이미 돌아가신 비투스 수사님, 페트람 수사님,
그리고 지금 본원에 계신 보나벤투라 수사님입니다.
정말 성인 수사님들입니다.
비투스 수사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수도원 청소를 하셨고,
페트람 수사님은 돌아가시든 날 아침까지 은인들에게 감사편지를 쓰셨으며,
보나벤투라 수사님은 파킨스 병으로 고통 중에도 늘 명랑하게 사시며
수도원의 빛이 되고 있습니다.
어쩌다 독일 수도원으로 가실 마음도 드는 모양인데 제가 막습니다.
수사님의 존재 자체가 후배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운명적 사랑의 깊이를 깨닫게 하는 성인수사님들입니다.
요한과 바오로 사도 역시
예수님과의 운명적 사랑을 참으로 깊이 사셨던 분들입니다.
사도행전의 사도 바오로의 삶이 얼마나 파란만장한지요.
믿지 않는 이들의 눈에는 참 팔자 사나운 삶일 것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에는 ‘만약’은 없습니다.
부질없는 상상이 ‘만약…했더라면,…’입니다.
‘만약 바오로가 아시아로 선교활동을 했더라면’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인간주도로 결정된 온갖 방향을 차단하고
유럽으로 가는 길만을 남겨 놓았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게 모르게 성령은
최선, 최상의 방법으로 우리를 지금 이 자리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니 부질없는 상상은 치워버리고, 지금부터 섬기는 삶에 충실함으로
예수님과의 운명적 만남의 사랑을 깊이 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 말씀을 모심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운명이자 사랑임을 새롭게 깨닫는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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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사도 16,1-10
복음 요한 15,18-21
언젠가 어떤 신부님과 함께 휴대전화 충전기를 구입하기 위해 매장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충전기를 도저히 구입할 수가 없었지요. 워낙 이 휴대전화가 오래된 것이라서 이제 이 모델에 맞는 충전기를 찾기는 힘들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하긴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이 휴대전화는 거의 석기 시대 유물이라고 할 만큼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이 기회에 전화를 바꾸라는 권유를 했습니다. 그때 이 신부님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더군요.
“뭐 하러 그래? 특별히 필요한 것도 없는데…….”
생각해보니 정말로 맞는 말입니다. 그냥 전화만 하는 신부님에게 최신형 스마트폰은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기계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기에 스마트폰의 모든 기능들을 쓸 리가 없으며, 결국 이 스마트폰을 구입하면 낭비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신부님의 이러한 단호함(?)을 보면서,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솔직히 필요 없는 것들을 포함해서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구입하고 있는 제 자신이었습니다. 인터넷이나 텔레비전 쇼핑몰을 통해서 유혹하는 물건에 대한 광고를 보면,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사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우리를 믿게 만듭니다. 그런데 여기에 넘어가면 어떻습니까? 계획 없이 구입한 물건일수록 후회만을 남길 뿐입니다.
물건을 구입하는 단호함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유혹에 대한 단호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려는 그 모든 유혹에 대한 단호함을 가져야만 후회를 남기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자기편이 아니라고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편이 되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꾸 세상의 편에만 서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편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때 과연 주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편에 서려는 모든 유혹에 대한 단호함입니다. 그리고 이 단호함이 있을 때, 아주 작은 것을 통해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단지 사랑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 안에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의 편에서 벗어나 주님의 편에 서는 우리가 되는 단호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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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5주간 토요일>(2013. 5. 4. 토)(요한 15,18-21)
<미움, 박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 15,18)."
이 말씀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너희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것이 싫다면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으면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 살겠다면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의회 의원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19-20)."
라고 말하는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어떻든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괴로운 일인데,
실제로 미움과 박해를 받을 때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위안이 될까?
사도들은 자기들이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사도 5,41)."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라는 말은,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음으로써
자기들이 예수님의 사도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음을
(사도라는 것을 인정받았음을) 기뻐했다는 뜻입니다.
미움과 박해가 두려워서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부인했던 태도와는
완전히 백팔십도 다른 태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예수님 때문에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기뻐하다.' 라는 말을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좋아하다.' 라는 말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움 받고 박해 받는 것을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말하는 '기쁨'은 신앙인의 영적인 기쁨입니다.)
그런데 미움과 박해를 받기는커녕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신앙인들에게는 위험한 일이 됩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요한 15,19)."
이 구절에서 말하는 '사랑'은 좋은 뜻의 사랑이 아니라,
같은 편에 대한 친근함이나 '동류의식'을 뜻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떤 신자에게
'신자라고 하면서도 우리랑 다른 점이 별로 없네.' 라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그 신자의 신앙생활이 위험 수준에 있다는 경계경보가 울린 것입니다.
신앙인은 '역시 믿는 사람들은 확실히 달라.'
라는 말을 듣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미움과 박해를 받더라도...)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마태 10,16),
그 '이리 떼'는 박해자들이면서 동시에 복음 선포의 대상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양들'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리 떼'로 변신하거나,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키거나...
양들이 이리 떼로 변신해서 같은 이리가 된다면?
그렇게 되면 몸은 살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이리 떼에게 먹히게 됩니다.
몸은 살아도 영혼이 죽는다면, 그것은 사실상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몽땅 세속화되면 그날로 교회는 죽은 교회가 됩니다.)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키면, 그것은 이리 떼를 구원해서 살리는 일이기 때문에
양들도 살고 이리 떼도 살게 됩니다.
('순교'는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사는 일입니다.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승의 목숨을 잃는 일이 생겨도, 영원한 생명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미워해서
신앙인들까지 미워하는 것과는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안 좋은 모습들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까지 싫어하고 미워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천주교와 개신교를 모두 포함시켜서 하는 말입니다.)
조선시대 박해 때에 조선의 관리들은
국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자들을 박해하기는 해도
존경하거나 호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에 그리스도교가 욕을 먹거나 비판을 받는 경우를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아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해서 박해를 받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기뻐할 일이고 자랑할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교회도 욕을 먹고 예수님까지도 욕을 먹게 만든다면
그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고, 예수님께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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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물 안에 주는 사람이 들어있다 >
오늘 인터넷 검색어 1위가 가수 장윤정씨였습니다. 가을쯤에 KBS 아나운서 도경완씨와 혼인하기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두어 달쯤 전에 자신의 통장을 찍어보았는데 10년 동안 번 돈이 다 사라지고 빚이 오히려 10억이 찍혀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어머니에게 자신이 번 돈을 모두 맡겼었는데 어머니가 장윤정 남동생의 사업에 몽땅 쏟아 부어 탕진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장윤정의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해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소송중이라고 합니다.
장윤정 하루 수익은 평균 1000만원으로 보고 있고 그렇다면 어머니는 수백억의 돈을 아들을 위해서만 써버린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장윤정은 어머니 건강을 위해서 집에 찜질방까지 마련하는 등 어머니를 믿고 사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장윤정은 도 아나운서와 상견례를 할 때에도 어머니와 남동생을 빼놓고 아버지와 회사 대표만 모시고 나갔습니다. 이제 가정의 화목이 돈 때문에 깨지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귀한 것을 믿고 맡기는데 그것을 마치 자기 것인 양 낭비해 버린다면 믿고 맡기는 입장에서는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맡긴 것 안에 자신의 존재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이 결국 낭비된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던 사례지만 다시 떠오릅니다. 전에 중동에 나가있는 남편이 붙여주는 돈을 한 남자의 아내는 제비의 유혹에 넘어가 다 탕진해 버리고 다른 남자의 아내는 그것을 잘 모아두어, 결국 남편이 돌아오는 날 한 아내는 자살을 하고 한 아내는 통장을 가지고 공항에 나갔다고 합니다. 언젠가 하느님도 우리에게 주신 것을 어떻게 사용하며 살아왔는지 한 번 보자고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신 시간을 낭비하며 살았다면 우리 자신도 주님 앞에 감히 서지 못하고 쥐구멍을 찾아 어두운 곳에 숨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은 생명과 몸을 포함해 모든 것입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도로 바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그것을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인간 구원을 위해 바치셨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과의사이면서 경제평론가로 활동 중인 박경철씨를 알고 있습니다. 그의 한마디에 수십만 명이 주식을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합니다.
그는 매일 아침 2시간씩 라디오 방송, 주 1회 TV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방송인이고, 신문과 잡지에 고정적으로 기고하는 칼럼만 15개가 넘습니다. 그리고 전국을 누비며 해야 하는 강의가 월 평균 30건이고, 토요일엔 반드시 안동 병원으로 내려가 환자진료를 합니다. 그리고 그는 매년 1권 이상의 책을 내는데 항상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굵직한 책들입니다.
그는 어떻게 한 사람이 한 달 동안 하기도 힘든 일들을 하루에 다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2000년 0시를 기해 전 다섯 가지를 끊었습니다. 술, 담배, 골프, 유혹, 도박입니다. 이 중 금연이 마지막까지 잘 안 되더군요. 그래도 술 안 먹고 골프 안 하고 딴 마음 안 먹으니까 시간이 많이 남아요. TV는 원래 안 보았고요. 그 시간에 책 보고 글 쓰고 하는 거죠. 책은 하루에 한 권 정도 읽어요. 화장실, 이동하는 차 안 등 토막시간마다 책을 펼치죠. 매년 10월에 책 한 권씩 내는 게 목표이기 때문에 매일 200자 원고지 20~30장 분량의 글을 써서 저장해둡니다. 이렇게 생활하다 보면 1인 다역을 할 수 있어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시간 없다’입니다.”
저도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시간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도 의미 없이 인터넷을 하든가 술을 마시며 보내는 시간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하느님이 주신 것을 아직은 아낄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7번방의 선물’에서 박스 안에 봉구의 딸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선물 안에는 그 주는 사람의 존재, 혹은 그 사람 자체가 들어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 받은 것을 오로지 바치시는 분이시기에 단 한 순간도 의미 없게 허비하지 않고 받은 모든 것을 도로 바쳐드릴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살게 하시기 위해 주시는 오늘 하루도 그분 존재가 들어있는 소중한 선물입니다. 이 주님께서 주신 하루가 1000만원이라면 나는 주님을 위해서 하루 얼마를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그것이 선물을 주시는 분에 대한 우리 사랑의 척도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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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사랑으로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거나 선에 대치되는 꿈과 희망은 결코 현실화 될 수 없습니다.” 꿈은 크게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룰 수 있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바라는 것에 걸 맞는 노력과 정성이 함께한다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대한 꿈을 지니되 선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모 그룹 재벌회장이 술집에서 폭행을 당한 아들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여 보복을 하였다는 얘기가 떠들썩하였습니다. 결국 그 아버지는 구속되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고귀한 마음은 나무랄 수 없지만 선에 대치되는 방법을 선택하였기에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빌미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선생님을 폭행한 학부모도 있습니다. 폭행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녀 교육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자녀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방법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내세우며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을 자기사람으로 만들고 그것을 즐깁니다. 옳고 그렇지 않고는 상관없이, 좋고 싫고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그것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미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두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곧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증거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움을 당하는 것은 악에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실 사악한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그들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조직폭력배와 공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이들은 누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구애 없이 선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뽑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삶이 우리 믿는이의 삶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면 더 큰 사랑으로 되 갚아주시길 다짐하며……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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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체계를 다진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는 이유가 현실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종교가 하나의 진통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마르크스의 주장은 그릇된 것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따를수록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믿음이 진통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안겨다 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세상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가르침이 세상의 가치관과 다르고, 세상의 그릇된 가치관과 결코 타협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세상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미국의 흑인 차별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였던 킹 목사도, 중미의 엘살바도르에서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섰던 로메로 대주교도 살해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세상의 가치관 때문에 미움을 받습니까, 아니면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타협하면서 마음 편히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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