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동안 진심과 정성을 다 하라
논어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첫 번째 문장 날마다 베우고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知之爲不知 不知爲不知 是知也
아는 것은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知者
학문을 알기만 하는 사람은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남는 것이 없고,
생각만하고 배우지 않는다면 위태로워진다.
두 번째 문장 멀리서 벗이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세 번째 문장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 하지 않으니 군자가 아니겠는가?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증자 왈[曾子曰] (증자가 말씀하시기를)
"[吾日三省吾身]하노니 (나는 매일 자신을 위하여 하루 세 번 내 몸을 살피며 반성한다?)
[爲人謀而不忠乎]아 (남을 위해(사람을 위해) 일을 도모함을 정성스럽게 아니 하였는가?)
[與朋友交而不信乎]아(벗과 더불어 사귀되 믿음(신의)을 잃지는 않았던가?)
[傳不習乎]아"니라(스승에게 배운 것을 익히지 아니 하였는가?)“
자신의 삶에 그릇됨이 없는지 살피면서 살아야 한다.
仁은 人이다
仁은 德이요, 忍이요. 善이요. 愛이다
忍은 仁(인)과 통하고, 德이요. 善이요. 誠이요. 사랑(愛)이다
마음(心)과 통한다.
仁心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仁聞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仁政은 사랑을 존경하는 것이다
名聲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다.
不仁이면 言必死亡 반드시 죽고 망함을 말한 것이다.
사랑은 자기를 살리고 남을 살리며 세상을 살린다.
사랑이 삶의 최고 품격이다.
안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知之者不如好之者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好之者不如樂之者
즐기는 것은 부지런한 것만 못하다. 樂之者不如勤之者
부지런한 것은 사랑하는 것만 못하다. 勤之者不如愛之者
사랑이 최고의 선이다
朝聞道 夕死可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공자
誠은 마음을 바르게 갖는 正心이다.
정심은 하늘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하늘의 도를 포괄한 것을 '성(誠)'이라 하는데,
'성실함'이라는 것 이상으로 '하늘과 인간의 공통된 도(道)'라 할 수 있다.
중용이 주장하는 논리인 교육 수양의 필요성으로 성(誠)은 하늘의 도이고,
성실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도라고 가르치고 있다.
誠者 天地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참된 것은 하늘이 도리이고 참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다.
거짓이 없는 자연을 본받아 참되려고 하는 것이 사람이 행할 도리이다.)
誠은 '순수하고 참된 존재'로서의 '至誠'이다. 至誠感天이다.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에는 하늘도 감동(感動)한다.
誠心誠意 성심성의 참되고 성실(誠實)한 마음으로
정성(精誠)을 다해 자기(自己)를 바치는 것이다.
정성(精誠)은 지극한 겸손(謙遜)으로 남을 섬기는 공경의 삶이다.
至誠感天이요. 誠心誠意로 못 움직일 것이 없고,
誠意正心으로 세상을 바르게 하지 못할 것이 없다.
“천명지위도(天命之謂性)이요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요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니라”고 되어 있는데,
하늘이 우리에게 명해준 것이 성품이므로 곧 천명지이고,
하느님에게서 타고난 성품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길(道)이므로 곧 솔성지위도이고,
그 성품을 따르는 도를 잘 닦아 나가 마름질해놓는 것이
가르침이므로 곧 수도지위교이다.
도를 잘 닦아 나가는 것, 즉 마름질하는 것이
하나의 교육적인 가르침(敎)이 되는 것이다.
성(性) ․ 도(道) ․ 교(敎), 여기에서 시작하는
중용을 공부하다보면 안으로 정신집중이 잘된다.
그래서 중용의 핵심을 ‘정성 성(誠)’ 한 글자로 표현하는데,
이렇게 해서 의 선(善)과 중용의 성(誠)은 겉과 속이 된다(內誠外善).
날마다 공부하는 것은 正見, 正思, 正行하는
善과 誠의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을 한다.
誠에 대해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는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그 정성스러운 마음을 간직하여라(閑邪存其誠)”
≪논어≫ 학이편(學而篇)에는 ‘충신(忠信)’이라는 글이 있는가 하면
≪맹자≫ 진심장(盡心章)에는 “자신을 반성하여 성실히 하면(反身而誠)”이라
박학(博學)과 심문(審問)은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는다'는 것으로 외부로부터 얻어지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고,
신사(愼思)와 명변(明辨)은 '신중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판단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의 내적 사변(思辨)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학문이 지식적인 면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중요함으로 인해 마지막 항목이 篤行,
바로 '충실한 실천'을 하여야 배움에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知行合一)
사는 동안 진심과 정성을 다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