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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카복음 11,29-32
요나는(오늘 1독서)
니네베로 가서 예언자직을 수행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는데 거부하고 도망가지만 하느님께서 태풍을 일으키시고 큰 물고기를 시켜 그를 삼키게 하지요. 그리고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서 지낸 후 마침내 하느님께 굴복하여 니네베로 갑니다.
마태오복음사가는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사흘만에 풀려난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죽음에서 사흘만에 풀려날 것이라는 표징으로 인용, 해석합니다만 오늘 루카복음에서는 부활사건 보다는 예수님의 가르침, 설교의 표징으로 해석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임, 들음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것이지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29)
예수님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고 꾸짖으십니다.
왜 이 세대를 악하다고 하셨을까요?
그들이 표징을 보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듣지 않으면서 보기 원하면 악한 것입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한다는 것은
증거를 대보라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를 낫게 하시고 죽은 이까지 살리시고 오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는데도 불신은 여전합니다.
자기의 불신을 깰 무엇을 보여달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증거를 보여주면 의견을 바꿀까요?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할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고 귀를 막아버린 사람을 바꿀 표징은 없습니다.
우리는 과연 듣습니까?
들음은 관계의 출발이며 믿음의 출발입니다.
무엇을 보기를 원하기 보다는 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기적을 보아야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들어야 생깁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다음 주일 복음)
보는데 취해 있는 제자들에게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듣기 시작할 때 비로소 참기도가 시작됩니다.'(안드레아신부)
3월12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루카 11,29-32
표징은 지혜를 찾는 이들의 것이다
요즘 저희 성당에 저에게 안수받겠다고 많은 분이 타본당에서도 찾아오십니다.
저는 책도 좀 읽으라고 하지만, 말을 듣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안수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아지는 것이 없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책을 너무 안 읽는 것 같습니다. 저도 책을 싫어하기는 하였습니다.
그래도 어떤 성당 성물방에는 읽을 책이 한 권도 꽂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표징만 요구하고 지혜는 추구하지 않는 모습과 다를 게 없습니다.
레지오도 교본에 영적독서를 하라고 하는데, 그냥 교본공부만 하고 영적독서는 하지 않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 11,29)
예수님께서 표징만을 요구하는 이들을 악하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참된 사랑과 신뢰 없이 결과만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찾지 않고 표징만 바라는 것은 복권을 사지 않고 당첨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1950년대 초까지 육상계는 "인간은 절대 1마일(약 1.6km)을 4분 안에 달릴 수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기록은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는 벽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육상선수 로저 베니스터(Roger Bannister)는 그 벽을 깨기 위해 도전했습니다.
베니스터는 1929년 영국에서 태어나, 육상선수로서뿐 아니라 의사로서의 꿈도 키우며
학업과 운동을 병행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체력과 호흡법을 연구했고, 특별히 과학적 훈련 방법을 고안해 반복적으로 시도했습니다.
바쁜 의대 생활 속에서도 매일 시간을 쪼개 훈련하며 한계를 극복할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1954년 5월 6일, 마침내 베니스터는 옥스퍼드의 한 경기장에서 역사적인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초반부터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페이스메이커의 도움을 받아 달렸습니다.
마지막 한 바퀴를 남기고 그는 모든 힘을 쏟아부었고, 결국 3분 59.4초의 기록으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며 세계 최초로 '1마일 4분 벽'을 깨뜨렸습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불가능의 벽을 뛰어넘은 베니스터의 지혜와 노력이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의 성공 이후 1년 동안 여러 명이 같은 벽을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그 모든 것으로 깨달음을 얻어라." (잠언 4,7)
기적은 먼저 지혜를 구하는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지혜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참된 행복과 성취는 즉각적인 결과가 아니라 지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저는 키가 작습니다.
"키가 크면 믿겠습니다."라고 하느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히려 건강하게 몸을 관리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제가 찾아야 할 지혜입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 수천 번 실패를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그의 노력 끝에 마침내 전구가 세상을 밝혔습니다.
전구를 개발하게 해 달라고 기도만 한다면 그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원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면서 청해야 합니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와 여우는 서로 관계를 맺는 지혜를 배웁니다.
어린 왕자는 관계에서 오는 행복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사막 여우를 만나려고 그 먼 길을 여행한 것입니다.
무조건 "자기 별에 있는 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면, 하느님을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해 주는 심부름 센터로 여기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기적은 '용서'입니다.
용서의 기적을 얻기 위해 어린왕자처럼
노력한다면, 용서할 수 없는 이를 용서하게 되는 참다운 표징을 가지게 됩니다.
마치 고정원 씨처럼. 이것이 하느님의 표징을 체험하는 방식입니다.
먼저 지혜를 얻으려고 해야 합니다.
이 지혜가 저로서는 '하.사.시.'였습니다.
이 지혜를 찾지 않았다면, "다~주었다."라고 하시는 분을 절대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표징은 지혜를 찾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리고 가장 완전한 표징이 용서 되지 않는 사람이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표징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충분한 사랑과 자비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표징만 바라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찾는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과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2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11,29-32
잘 나갈 때 조심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요나가 찾아간 니네베는 당시 아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서울 비슷한 대도시였습니다.
웅장한 궁전과 사원들을 둘러싼 성벽은 그 위로 마차 3대가 동시에 달릴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23미터였는데,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 앞에는 너비가 24미터인 방어용 연못까지 건설할 정도였습니다.
요나 예언서도 니네베라는 도시의 규모와 위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요나 3,3)
예언자로 불림받은 요나가 요리조리 도망 다니다가, 마침내 주님의 손아귀에 잡혀 최초로 파견된 도시가 바로 그 잘 나가던 도시, 당시 최강대국의 수도 니네베였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니네베 성안으로 들어가는 요나 예언자의 모습이 참 딱해 보입니다.
성안으로 들어가 하룻길을 걸은 요나 예언자가 마침내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
니네베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요나 예언자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외쳐본 들 뭐하겠어? 귀여겨 듣지도 않을 니네베 사람들인데...그래도 주님께서 외치라 하시니, 일단 한번 외쳐나 봐야겠다.
안 그러면 주님께서 내게 또 어떤 끔찍한 조치를 취하실지 모르니...’
그런데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 예언자의 말을 귀담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했습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자루 옷을 입었습니다.
왕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 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습니다.
그런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을 돌리시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집단적 회개 사건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또 다른 잘 나가는 우리들의 대도시를 향해서도 강력히 회개를 촉구하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돈과 명예, 소비주의와 향락주의에 물든 거대 도시민들의 집단적인 회개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렇게 번창했고 잘 나갔던 대도시 니네베는 기원 전 612년, 자취도 없이 이 지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멸망의 이유는 아시리아 제왕들의 잔혹함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발굴된 오벨리스크나 벽화에는 저마다 새겨놓은 무용담이나 왕에 대한 두려움을 자아내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짐은 잔인하고…전쟁에서는 앞장서 달리는 온 천하의 왕이며…무릎 꿇지 않는 적들을 짓밟고
온 세상을 손아귀에 넣었노라. 나는 들판을 피로 물들이는 무시무시한 태풍이로다.”(아슈르바니팔 왕).
교만과 사악함, 사치와 게으름에 빠져 있던 아슈르바니팔 왕은 연합군이 바빌로니아를 앞세우고 쳐들어오자 궁에 불을 질렀습니다.
궁녀와 시종들 그리고 자신까지 불길 속으로 내던지며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거대했던 도시 니네베는 폐허로 바뀌었습니다.
수천년간 사막 바람이 뜨거운 모래와 먼지 구름을 몰고 와 폐허를 덮자, 왕성은 큰 둔덕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끝도 없이 군사력을 증강시키면서 지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몇몇 강대국들, 앗시리아와
니네베의 멸망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두려워할 줄 모르며, 약소국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라들의 회개가 절실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1주간 수요일 강론>
(2025. 3. 12. 수)(루카 11,29-32)
<회개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구원의 표징이신 분입니다.>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29-32)”
1)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표징만 요구하지 말고 회개부터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하지 않고 표징만 요구하는 것은,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라는 말씀은,
“회개는 하지 않고 신기한 기적만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는 요나 예언자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살아난 일을(요나 2장) 뜻하는데, 여기서는 요나 예언자의 선포를 듣고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한 일을 뜻하기도 합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은, “요나의 선포가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에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표지판 같은 역할을 한 것처럼”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의 복음 선포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에서 구원으로 인도하는 표지판 역할을 하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그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구원 쪽으로 가면 구원받을 것이고, 다른 쪽으로 가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2) 요나서를 보면, 요나는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라고 선포했습니다(요나 3,4).
그리고 요나는 자기가 예언한 대로 니네베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멸망이 내리지 않자
하느님께 화를 냈습니다(요나 4,1).
요나서에는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신 하느님께서 마음을 돌리셔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나 3,10),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결정을 취소하신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에, 아마도 요나에게 선포하라고 시키신 일은, 단순한 멸망 선포가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면”이라는 조건이 붙은 멸망 선포였을 것입니다.
“사십 일이 지나도록 회개하지 않으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그런데 요나가 자기 마음대로 ‘회개하지 않으면’을 빼고 멸망만 선포했을 것입니다.
원래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입니다(마태 18,14).
요나서에 있는 다음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잘 나타냅니다.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1)”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은, ‘어린이’를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멸망을 선포하게 하신 것은, 단순히 멸망을 예고하게 하신 일이 아니라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바라신 대로 회개를 했고, 그래서 멸망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렇게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오늘날에도.
3)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의 죽음과 부활은,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표징’이 될 것이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표징이 될 것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령 강림 때에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또 그 예수님이 바로 주님이시고 메시아라는 것을 증언하자, 그날 삼천 명가량이 그 증언을 믿고 새로 신자가 되었습니다(사도 2,41).
‘삼천 명’은 대단히 많은 수인데, 아마도 안 믿고
그냥 가버린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4)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최후의 심판 때,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이 세대는 유죄다.’ 라고 니네베 사람들이 증언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낯선 외국인 예언자의 한 번의 선포만 듣고서도 회개했는데, 이 세대 사람들은 메시아 예수님의 말씀들을 들었으면서도, 또 메시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았으면서도, 믿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변명할 여지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성탄절이 국가 지정 공휴일이고, 매주 ‘주님의 날’을 공휴일로 지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몰라서 못 믿었다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성탄절이 무슨 날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방 여왕에 관한 말씀은 니네베 사람들에 관한 말씀과 뜻이 같은데, 그 여왕은 메시아 예수님의 복음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닌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왔다가 직접 보고 직접 듣고 나서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1열왕 10,9).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