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4:16-18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것은 겉 사람은 낡아지지만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기 때문이고 현재의 가벼운 고난은 무거운 영광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는 눈에 보이는 잠깐인 것을 바라보지 않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전 말씀에서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에 우리와 너희가 함께 동참하여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 세워질 것이며 이 모든 복음선포와 모든 고난은 다 너희를 위한 것이고 복음 전파로 인해 은혜가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가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라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새로워진다며 지금 고난은 영원한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본다는 내용이다.
16-17절은 지금까지 말한 것의 결론에 해당한다. 16절은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로 시작한다. 낙심한다는 단어는 영어의 in에 해당하는 전치사와 나쁘다는 단어가 합쳐진 말이다. 안에서 나빠진다는 뜻이 낙심한다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이다. 누가복음에 딱 한 번 나오고 나머지 다섯번은 모두 다 바울 서신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전부 다 환난이나 핍박 중에 낙심하지 말라는 뜻으로 쓰였다. 4:1절에서도 자격이 없는데도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직분을 갖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얻었기에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서 비록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져 간다 할지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 진다는 것이다. 겉사람은 우리의 육체를 말한다. 오래 쓴 질그릇의 귀가 떨어지고 금이가기도 하는 모양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릴적 부모님들 하시는 것을 보면 작은 그릇은 그러면 재수 없다고 버렸지만 큰 질그릇은 끈이나 철사로 동여매서 계속 사용했다. 바울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복음을 전했기에 겉모습인 몸은 금이간 질그릇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날마다 복음을 전하면서 전하는 바울 일행은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가기에 그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되는 것이다. 날마다 날마다라는 말이 고린도후서 3:18의 영광에서 영광으로처럼 단계적으로 상승한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매일 반복되는 영적 갱신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새롭게 된다는 말이 상승이 아닌 갱신을 뜻하기 때문에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된다는 말이 상승이 아닌 날마다 새롭게 바뀌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된다는 말을 점진적 진보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날마다 날마다 라는 구절을 점진적 진보 대신에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갱신을 의미한다고 몰아붙여야 할지 의심스럽다고 말하면서 점진적으로 갱신되어가라는 뜻일 수도 있고 반복적으로 갱신되어가라는 뜻일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낡아지는 것과 새로워지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동작이다. 낡아지는 것과 새롭게 되는 두 과정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 자체는 이 둘이 서로 비례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육체적으로 더많이 소모할 수도록 영적으로 더 강건함을 얻는 것 같다. 이는 마치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을 더 많이 버릴수도록 조각상은 성장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된다는 것은 날마다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길게 보면 그렇게 날마다 새롭게 되면서 점진적으로 진보하는 것이다.
여기서 새롭게 된다는 말은 신적 수동태이다. 따라서 바울이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날마다 속사람을 새롭게 갱신해 주신다는 뜻이다. 새롭게 하는 행위자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성령님이다. 속사람을 새롭개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바울의 영적 성장과 인내는 자기 힘이 아니라 성령님의 지속적 사역의 결과이다. 날마다 새롭게 되는 속사람의 과정이 누적된 결과로 3:18절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점진적 변화에 기여하는 것이다. .
17절은 두번째 낙심하지 않는 이유이다. 여기서 비교되는 것은 일시적이고 가벼운 고난과 영원하고 무거운 영광이다. 신구약 성경의 그리스어에서 영광이라는 단어는 빛나는 광채와 연결이 된다. 하지만 히브리어에서 영광이라는 단어는 무겁다는 뜻이다. 한글 성경은 가벼운 것과 큰 것을 비교했지만 원어에서 바울은 분명히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을 비교한 것이다. 가볍다는 것은 양이 적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면서 복음 전하다가 받는 고난은 잠시 이 세상을 살동안 뿐이기에 일시적인 것이다. 또 그 양은 얼마 안되기에 가벼운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대조하는 것은 현재의 고난은 잠깐이고 가벼운 것이지만 영원하고 무거운 영광과의 대조이다. 여기서 영광의 무게라는 표현은 히브리어의 영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이다. 이는 단순히 양적 무게가 아니라 엄청난 무게를 가진 충만한 영광이라는 뜻이다. 그 차이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일시적이고 적은 양의 고난은 마치 펌프의 마중물과도 같다 본인이 어릴적 쓰던 재래식 펌프에는 마중물이 필요했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은 어찌보면 버리는 것 같이 보였다 그 물을 붓고 잠깐 열심히 펌프질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물의 양은 폄프질 하는 동안 계속 나오는 것이고 그 양도 마중물과는 비교도 안된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18절에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18절에서 보이는 것은 17절에 나온 가벼운 고난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장차 나타날 엄청난 양의 영광이다. 이러한 대조는이미 실현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종말론적 대조이다. 위의 것 보이지 않는 것이란 어떤 것은 이미 현재 존재하지만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은 것이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완전히 상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미 실현된 것이고 마지막 때에 완전하게 완성되는 것을 볼 것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비교는 마치 바가지에 담긴 마중물은 눈에 보이는 것이다. 땅 밑에 흐르는 엄청난 양의 지하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도 같다 현재 손에 들고 있는 한 바가지의 물을 보면서 벌벌 떨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땅밑에 흐르는 거대한 지하수를 바라볼 줄 안다면 눈에 보이는 한 바가지의 물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고난은 잠깐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영원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은 그 가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보물이다. 그 보물이 바울의 몸 안에만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안에 담겨져있다. 사도들은 그 엄청난 보물을 간직하고 증언하다가 글로 남겨 놓은 것이 바로 신약성경이다. 그러나 인쇄되어 있는 책 자체는 빛이 아니다. 질그릇 같이 연약한 우리의 몸 안에 담겨져 우리의 삶을 통해 보여질 때 빛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말씀을 통해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여 우리 마음에 그 빛을 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담기만 하고 뚜껑을 닫아 놓아버리면 아무도 볼 수 없다 더구나 땅에 묻어버리면 정말 아무도 볼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세상이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우리도 역시 뚜껑을 열어야 한다. 먼저 교회 안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들 안에 빛나는 보물을 담게 되면 그 영광이 우리 교회 안에 흘러 넘치게 되는 것이다. 흘러 넘친 그 보물이 교회 밖의 세상으로 흘러나가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질그릇과 같은 겉모습을 자랑한다. 믿는 자들 중에도 이러한 겉모습을 자랑한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얼마나 엄청난 보화를 담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보물을 깨닫고 있다면 현재 우리가 겪는 어떤 고난도 가볍게 여기며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