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54) 숙종 2
*동요하는 고려사회
숙종은 자신은 왕위를 빼앗다시피 물려받았지만, 그의 동생 부여후 왕수가 세력을 키운다는 등, 다음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한다는 등의 소문이 무성하자 그를 역모죄로 잡아 들여 귀양을 보내버리고 왕수는 귀양지에서 객사하게 됩니다. 숙종 자신은 조카를 몰아내고 형의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다음 왕위는 자기의 큰아들 왕우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습니다. 사실 이 때까지도 고려에서는 형제상속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던 듯합니다.
이 때 형제상속이 자연스럽게 보인 데에는 고려 전기의 왕들의 수명이 대체로 짧았다는 점 때문입니다. 40을 넘긴 왕들이 많치 않았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사후 자식의 나이가 제위를 잇기에 충분치 못한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도 선종이나 숙종, 더 나아가 예종의 경우를 보면 정작 왕 자신은 형제상속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보다는 “내 핏줄이다” 인 셈. 자세한 경위는 기록에 없지만 왕수가 형제상속을 염두에 두고 나대기라도 했던 모양입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지금의 서울인 남경(南京]으로 수도를 이전하려는 직접적인 움직임이 있기도 했습니다. 풍수가인 김위제가 국토를 저울로, 남경을 저울추에 비유하며 천도를 주장하였고, 숙종이 직접 남경에 행차하기도 하였으나, 이 때 남경은 서경처럼 지역 세력이라든지 지역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이 크지 않아 정치적 논의만 거친 채 흐지부지 끝나고 맙니다.
다만 당시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궁궐터는 조성을 했는데, 그게 현재의 청와대 자리입니다.
그 후 300 여년 뒤 이성계가 이 터를 둘러보곤 그 남쪽에 궁을 지으니. 이 때 찍어 놓은 땅이 고려 멸망 이후 한반도의 중심지가 될 것을 당시 도저히 상상을 못했을 것입니다.
조선의 세조처럼 조카를 폐위시키고 강제로 왕위에 오른 점에서 도덕적인 면에서는 비난을 받아야 하지만, 능력 하나는 출중했던 왕 숙종은, 조선의 태종과 세종을 비교하며 세조가 훨씬 못하다고 평가받듯이, 고려사를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고려 광종이랑 비교 당하기도 합니다.
비유하지면 역시 대후배 세조처럼 광종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만하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광종은 피의 개혁을 함으로써 국가 초석의 포석을 쌓았던 반면, 숙종은 측근정치를 하여 외척이나 신권의 권한이 커지게 만들었으며 남경 건설 및 여진 정벌로 백성들을 고단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고려사에는 이때 '열 집 중 아홉 집이 비었다'라고 기록했는데, 전부 부역에 동원되거나 심지어는 부역과 징병을 피해 도망친 경우였습니다.
말년에는 고문개, 장홍점, 이궁제, 김자진의 난을 겪기도 하고, 또한 재위기간 중에 유독 우박이 많이 내려 농작물에 큰 피해를 입었고, 송충이가 들끓어 개경의 소나무가 많이 피해를 봤다고 하는데, 당시의 유학자들은 이를 두고 왕위찬탈에 대한 천벌이라고 했대나요.
재위 말기, 여진의 침략에 크게 놀란 숙종은 그에 대한 대비를 세우고 윤관을 기용해 별무반을 양성하여, 서경에 나아가 출정을 준비하려고 동명왕 사당에 참배하던 중에 병을 얻어 개경으로 환궁하다가 왕성 서문인 장평문에 도착하기 직전에 수레 안에서 죽게 됩니다.
사망 당시 52세였는데 수명 또한 대 후배인 세조와 똑같네요. 재위 년수 10년에 부인 명의왕후와의 사이에 아들과 딸 넷을 남겼습니다.
(다음 55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