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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두 번째 답변 2
합 2:12-20
12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3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14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15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6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
17 이는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죽인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
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19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합 2:12-20 / [셋째 저주] 너희가 살인과 강탈로 돈을 벌어다가 성읍들을 건설하였으니 죽음과 멸망의 저주를 받아라! 13) 민족들이 불에 타없어질 것들을 위하여 피곤하게 일하고 나라들이 공허한 것들을 위하여 국력을 다 쓰게 되는데, 이런 것들이 바로 온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너희는 눈치 채지 못하느냐? 14) 바다가 물로 가득히 덮이는 것처럼 온 세상이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찰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15) [넷째 저주] 너희가 이웃 백성들에게 너희의 분노를 포도주처럼 마시게 하고 거기다가 너희의 독까지 섞어서 취하게 만들고 그들이 벌거벗고 실신해 있는 모습을 고소하게 바라보았으니, 죽음과 멸망의 저주를 받아라! 16) 너희는 영광이 아니라 수치로 포식하였다. 너희도 이제 마시고 비틀거려라! 여호와께서 자기의 오른손에 든 진노의 잔을 네게도 마시게 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너를 지극히 깊은 수치 속으로 떨어뜨리신다. 17) 너희가 레바논산의 나무들을 폭력으로 부러뜨렸으니 이제는 너희도 부러뜨려질 것이다! 너희가 숲속의 들짐승들도 씨를 말려 놓았으니 이제는 너희도 씨가 마를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모든 나라와 모든 도성에 들어가서 흘린 사람들의 피와 주민들에게 행한 폭력 통치에 대하여 보복을 받을 것이다! 18-19) [다섯째 저주] 너희가 나뭇조각들을 향하여 `깨어나소서!' 하며 말없는 돌멩이들을 향하여 `일어나소서!' 하고 호소하였으니, 죽음과 멸망의 저주를 받아라! 그런 것들이 무엇을 가르쳐 줄 수가 있느냐? 그런 것들은 비록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꾸며 놓았으나 그 속에는 생명도 없고 정신도 없다. 나무나 돌멩이로 사람들이 우상을 새겨 만들지만, 그것들이 무슨 유익을 줄 수가 있느냐? 금속을 녹여서 만든 신상과 거짓된 예언이 무슨 유익이 있느냐? 그것을 만든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의지할 수가 있느냐? 인간은 말도 못하는 무익한 우상들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20)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 계신다. 온 세상에 있는 너희 인간들아, 너희는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잠잠하여라!'
본문은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바벨론의 죄악들을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피 흘림의 죄(12-14) 바벨론은 정복지에서 끌려온 포로들의 강제 노동을 통해 성을 건축하고, 건축 자재들도 주변 국가들로부터 약탈해 온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는 것도 미워하시지만, 그렇게 모은 재물을 불의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더욱 가증히 여기십니다(렘 22:13-14; 미 3:10). 결국은 그들의 노력과 수고가 불에 타고 헛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침략과 살인, 폭력과 불의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바벨론의 멸망을 통해 만국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하에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이 서로 존중하며 사랑과 평화와 정의로 이 땅을 채워갈 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웃을 취하게 하여 수치를 주는 죄(15-17) 바벨론은 이웃이 수치를 당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이웃'은 바벨론에 의해 정복당한 속국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취하게 하여 자신들이 범한 죄악과 동일한 죄악으로 오염시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에 처하는 수치를 당하도록 만듭니다(15-16). '더러운 욕'이라는 단어는 수치, 모욕이라는 뜻으로 극도의 치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모든 악행에 대하여 속국들보다 더 큰 수치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기 위해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시1:1-2)하고,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지혜자의 삶을 살아서 궁창의 빛 같은 빛이 됩시다(단12:3).
우상 숭배의 죄(18-20) 우상 숭배는 바벨론이 지은 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나무'와 '돌'은 생명력이 없는 것으로 우상의 무가치함을 표현합니다. 그 위에 금과 은으로 덧입혀 화려하게 장식한 우상이라도 아무런 생명력을 갖지 못합니다. 이러한 우상 앞에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죄악입니다(시 135:15-18; 합 2:18; 롬 1:23).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아무 힘도 도움도 될 수 없는 손으로 만든 우상도, 귀인들도, 인생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소망을 두고 오직 하나님을 경배합시다(시 146:3-5).
적용: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공의의 심판자이심을 믿습니까? 당신 삶에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섭리되고 있음을 믿을 때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불평과 원망과 두려움이 지나치면 복을 받을까요? 우리는 주님 믿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려움 속에서도 담대히 전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일이 잘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신다고 생각하고, 일이 잘 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까? 아닙니다.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꿈과 환상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삶이 힘들어도 다시 한번 따뜻한 시선으로 내 삶을 바라보고 꿈을 잃지 마십시오.
< 설 교 >
온 땅은 그 앞에 잠잠할지니라
합 12:15-20, 행 11:18 / 이성희 목사(2008년)
오늘은 해방기념주일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지 63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일본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이 되기 전에는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봅니다. 독도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냄비같이 대응하지 말고 지속적이고 논리적인 대응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중국이 이어도를 자기 국토라고 시비를 건답니다. 이어도는 마라도 남쪽 149km에 있는 수중암초입니다. 중국에서 제일 가까운 섬인 퉁다오섬에서는 275km라고 하는데 이 수중암초가 자기 땅이라니 그 큰 땅을 가진 중국이 욕심 부릴 걸 부려야지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그제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을 잠시 보았습니다. 중국은 참 거대하고 무서운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바벨론이나 바사는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정말 거대하고 망하지 않을 것 같은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지배하고 핍박하고 안하무인격으로 탄압했습니다. 그들의 오만의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여지없이 없어지게 하셨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경제대국인 일본과 깨어나는 사자 같은 인구대국 중국, 그리고 세계 열강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생존법칙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F-22 랩터’는 미국이 개발한 최신예 전투기입니다. 스텔스 기능을 갖추고 있는 무적의 전투기입니다. 최근 괌 미 공군기지에 배치한 미 공군의 자랑입니다. F-22보다 성능은 약하지만 파리까지 떨어뜨릴 수 있는 우리나라가 개발한 자랑할 만한 무기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F 킬라’랍니다. 그런데 현재는 F-22가 엄청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최신예기이지만 얼마쯤 지나면 이 보다 더 뛰어난 전투기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자랑할 것이 무엇이며 그 자랑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자랑은 인간에게 오히려 올무가 됩니다. 높이 올라간 비둘기가 독수리의 밥이 됩니다. 아름다운 왕관 같은 뿔을 가진 사슴이 그 뿔이 걸려 붙잡히게 됩니다. 인간사에도 자랑은 헛된 것이고 자랑이 올무가 됩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보세요. 마지막 1시간을 남겨놓고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은 이 비유의 주인공이지만 아무 말이 없습니다. 이 품꾼은 주인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1시간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포도원에 들어오라고 합니다. 1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12시간 일한 사람과 같은 품삯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할 말이 없습니다. 주인 앞에서 잠잠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래야 합니다. 아무 말이 없었던 품꾼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한 가지만으로 아무 것도 한 것 없지만 같은 삯을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무익한 종이라”고 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은혜가 넘치는 자, 감사하는 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세요. 세리는 기도할 때에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나는 죄인입니다” 이 말만 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을 보세요. 그의 기도는 자랑으로 꽉 차 있습니다. 내용도 기도가 아니라 자랑이며 보고입니다. 이런 기도는 참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 이 바리새인은 할 말이 너무 많습니다. 흔히 투정하듯이 자랑한 것 있지 않습니까? “우리 남편은 내가 그렇게 싫다는데도 또 진주 목걸이 사왔어”라는 투의 말입니다. 하나님께도 우리는 아무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잠잠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유대인 랍비 마빈 토케이어는 “학식을 남에게 내비치며 자랑해서는 안 된다. 많이 배웠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많이 배운 만큼 겸허한 마음과 지혜가 풍성한 품성이 자랑인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지성을 자랑하는 지식인은 자신의 넓은 독방을 자랑하는 죄수와 같다고 합니다. 참 군인은 갑옷을 입을 때에 자랑하지 아니하고 갑옷을 벗을 때에 자랑하는 법입니다. 갑옷을 벗기 전까지는 누구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갑옷을 벗을 때까지 가 봐야 그가 한 일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 13:5에는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고 합니다. 참 지혜 있는 자만이 잠잠할 줄 압니다. 지혜 없는 자는 잠잠하지 못하므로 자기 입 때문에 낚입니다. 물고기는 입으로 낚인다는 말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왜 온 땅은 하나님 앞에서 잠잠해야 합니까? 왜 하나님 앞에서 떠들 이유가 없습니까?
첫째, 생명이 없는 일을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는 자의 생명 없는 일을 보세요.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고 음란한 행위를 조장합니다. 생기도 없는 새긴 우상을 섬깁니다. 이런 자들은 잠잠해야 하는데 늘 입을 벌리고 삽니다. 이런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책망하십니다. 이방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을 침략하여 여인들에게 강제로 술을 마시우고 추행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이 다 생명이 없는 일입니다.
술에 대한 가르침을 디모데전서 3장에 보세요. 감독들에게는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집사들에게는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술 그 자체가 절대적인 악은 아닙니다. 그러나 술의 습성이 취하게 하고, 이성을 상실하게 하고, 실수하게 하고, 남에게 폐가 되게 합니다. 쾌락을 좇고, 음란하고, 포악한 것은 항상 함께 따라다닙니다. 이 모든 것이 생명이 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이 없는 일이란 죽은 일이라는 말입니다.
악마의 윤리 신학은 ‘쾌락은 죄다’라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쾌락은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쾌락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육체적인 쾌락만 추구하고, 쾌락에 빠지면 죄가 됩니다. “모든 죄는 쾌락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쾌락이란 좋은 것이지만 여기에서 생명을 빼면 추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쾌락주의(hedonism)란 말은 원래 좋은 말입니다. 이 말은 원래 로마서 7:22의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런데 육적 즐거움만 추구하면 쾌락주의가 됩니다. 쾌락과 쾌락주의는 그 근본이 차이가 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의 주인이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내 영혼의 선장이 아니었고 나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쾌락이 나를 지배하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끔찍한 수치감 속에서 내 인생은 끝나 버렸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나 자신의 주인이 아닌 것, 내 영혼의 선장이 아닌 것, 쾌락에 지배되는 것, 수치감 속에 끝나 버리는 인생,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까? 생명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쾌락만 따라가다 보면 생명을 잃고 이렇게 삽니다.
보톨도 지오바니는 미켈란젤로의 스승입니다. 미켈란젤로가 14살에 보톨도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지오바니는 미켈란젤로에게 재능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너는 위대한 조각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기술을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지오바니는 “네 기술만으로는 안 된다. 너는 네 기술로써 무엇을 위하여 쓸 것인가를 먼저 분명한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는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두 곳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처음 그가 데리고 간 곳은 술집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스승님, 술집 입구에 아름다운 조각이 있어요”하고 말했습니다. “이 조각은 아름답지만 조각가는 술집을 위해서 이 조각을 사용했다.” 지오바니는 다시 미켈란젤로를 거대한 성당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너는 이 아름다운 천사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아니면 저 술집 입구에 있는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똑같은 조각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또 하나는 술을 마시는 쾌락을 위해 세워졌다. 너는 네 기술과 재능을 무엇을 위하여 쓰기를 원하느냐?” 어린 미켈란젤로는 세 번씩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쓰겠습니다!”. 우리의 몸과 시간과 기회를 무엇을 위해 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아니면 쾌락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면 모두 다 쾌락이 됩니다.
디모데후서 3:4에는 말세의 사람들의 모습을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합니다. 말세의 사람들은 생명 없는 것에 생명을 걸고 살아갑니다. 요즘에 보세요. 얼마나 중독이 심한지 모릅니다. 약물중독, 일중독, 성중독, 마약중독, 술중독, 성형중독, 게임중독 등 중독의 종류도 많아졌습니다. 이런 것 외에도 중독되기 쉬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쾌락으로 빠지면 중독이 됩니다. 중독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욕망에서 가장 강력한 심리적인 적입니다. 그러므로 중독은 마귀가 우리를 옭아매기 위해 동원하는 가장 흔한 수법입니다.
이런 중독들을 매일 조금씩 끊어가야 합니까? 아닙니다. 매일 조금씩은 끊지 못합니다. 아주 단숨에 끊어야 합니다. 물론 끊기 힘듭니다. 내가 끊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성령님께 맡기세요. 단번에 중독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단숨에 하나님이 끊게 해 주셨다고 고백을 합디다.
사람은 살아 있는 영입니다. 생령입니다. 사람은 생명이 있는 영입니다. 죽은 영이 아닙니다. 생명이 사람이 사람 되게 합니다. 생명 없는 것들에 빠지지 말고 생명 있는 것에 빠지세요. 하나님께 빠지고, 말씀에 빠지고, 은혜에 빠지세요. 그러면 쾌락에 빠지지 않습니다. 새긴 우상은 생기가 도무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생명이 없는 사람이 생기가 없는 우상을 섬깁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생명 있는 사람은 생명이신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리고 생명으로 즐거워하며 쾌락에 빠지지 않습니다.
둘째, 여호와는 생명이시고 성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20절에는 말씀합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우상 앞에서는 잠잠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상 앞에서는 많이 떠듭니다. 무당들을 보세요.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귀신들은 요란한 색깔과 시끄러운 소리를 좋아해요. 내림굿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귀에 방울소리 같은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온대요. 그러나 하나님의 유일성과 절대성 앞에서는 소리칠 수가 없습니다. 잠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성전이라고 합니다. 이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하늘의 보좌입니다. 시편 11:4에는 “여호와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라고 합니다. 성전이 보좌라고 하십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성전을 더럽히고, 성전 기명들을 훔쳐갔지만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서 인간계를 지배하십니다. 바벨론을 위시한 온 천하는 여호와의 위엄 앞에 잠잠해야 합니다. 스가랴 2:13에는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40:34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라고 합니다. 역대하 7:2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라고 합니다. 에스겔 10:4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와 성전 문지방에 이르니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며”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한 것은 여호와께서 성전에 계시므로 그의 영광이 가득한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우리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는 것은 물고기가 “물이 어디 있지?”라고 묻는 것과 같고 새가 “공기가 어디 있지?”라고 묻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떤 어린이가 교회학교에 오면서 봉헌을 동전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이 아이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께 봉헌을 드리려고 동전을 삼켰습니다. “하나님 받으세요” 그랬답니다. 어느 인도의 여 선교사는 선교 사역 가운데 너무 힘이 들어 탈진하였습니다. 산에 올라가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하고 울다가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I need you)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랬더니 잠시 후에 메아리가 되어 “나는 당신이 필요해”(I need you)하고 들려왔습니다. 이 선교사는 자신의 소리가 메아리쳐 왔지만 이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로 들렸습니다. 눈물을 닦고 힘을 내어 소리치며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필요하시데.” 하나님은 성전에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나를 듣고 계시고 나를 필요로 하십니다.
시편 139:8에는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십니다. ‘전재’(全在)하십니다. 이전에는 ‘무소부재’라 했습니다. 모든 곳이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모든 곳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 시대를 ‘유비쿼터스’(Ubiguitous)시대라고 합니다. 이 말은 신은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입니다. 원래 신학적인 용어이지만 이제는 정보 용어로 사용됩니다. 1991년 미국의 마크 와이저박사가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유비쿼터스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아는 일입니다.
오래 전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에 제가 다니던 교회가 레이크 애비뉴 회중교회(Lake Avenue Congregational Church)였습니다. 그 교회는 당시에 장년이 4,000명 이상 모이는 큰 교회였습니다. 저는 그 교회의 한국인 회중을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폴 시다 목사님이셨는데 장로교 목사님이셨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이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셨습니다. 식사 자리에서 목사님은 한국교회가 기도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고 하시면서 자기 교회의 직원, 장로들을 다 모아놓을 테니 한국교회 기도에 대하여 강의를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가서 새벽기도, 철야기도, 산기도, 금식기도 등 기도에 대한 강의를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너무 좋아하시면서 자기 교회도 산기도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달 동안 산기도를 했습니다. 두 달 후에 다시 점심을 먹자고 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더 이상 갈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없으면 보내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산기도를 잘 하는데 왜 우리는 안 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한국 산에는 산신령이 있지만 미국 산에는 산신령이 없지 않습니까?” 그 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은 모든 곳에 다 계시는데 왜 우리가 산에까지 가야 합니까?”라고 하면서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다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산에 대한 신령감 때문에 산기도가 잘 됩니다.
사도 바울은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의 최고학파가운데 하나인 힐렐 학파의 기둥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요즘 서울대학교와 비교할 바가 안될 만큼 굉장한 학교입니다. 세상의 명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던 가문이었습니다. 사울왕의 가문인 베냐민지파 출신입니다. 히브리인 중에서도 순수한 히브리인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빌 3:3-9). 하나님 앞에서 자랑 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자랑할 것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잠잠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은 한참 이동전화로 전화하다가 갑자기 “잠깐만”하더니 소리가 없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전화를 합니다. “왜 그래?” “응, 경찰이 있어서”. 경찰은 이렇게 무서워하면서 하나님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이 두루 살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며 모든 곳을 두루 살피십니다. 온 천하가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우리가 있는 자리가 하나님의 어전입니다. 바로 내 삶의 터전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곳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잠잠합시다. 하나님의 어전에서(코람 데오) 사는 자세로 잠잠합시다.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찬송가 79장 2절을 보세요.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 번 발하시면 천하의 모든 것 망하겠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는 우리들입니다.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큰 소리 칠 것도 없습니다. 잠잠해야 합니다. 오만, 교만, 자랑 이런 말들은 다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소리치면 모든 것이 다 망합니다.
결 론
아들자랑이 요즘 세상에는 헛것이랍니다.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면 4촌이 되고, 아들이 대학생이 되면 8촌이 되고, 아들이 장가가면 사돈이 됩니다. 아들이 공부를 잘하고 일을 잘하면 나라의 아들이 되고, 아들이 돈을 잘 벌면 장모의 아들이 되며, 아들이 백수가 되면 평생 끼고 살아야 한답니다.
자랑할 때는 바울처럼 약한 것을 자랑하세요. 주안에서 자랑하세요. 명철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세요. 내 자신 말고 하나님만을 자랑하세요. 이것이 참으로 잠잠한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하여 잠잠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두 가지 삶의 원리와 두 가지 약속
합 2:12-20 / 피영민 목사
서 론
하박국 선지자가 던지고 있는 질문은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품고 있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전능하시며 지금도 살아계시고 통치하신다면 어찌하여 세상에 악이 존재하느냐? 어찌하여 사탄이 멀쩡하게 지금도 존재하며 일하고 있느냐? 어찌하여 악이 때로는 선을 이기느냐? 어떻게 사악한 바벨론 군대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유다 백성을 죽이고 포로 삼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이런 것이 궁금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 마음속을 살펴보면 비슷한 질문이 다 있습니다. 이런 질문과 관련된 내용을 종교철학자들은 ‘신정론’이라고 합니다. ‘신정론’은 아무리 악이 이기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옳다라는 것을 옹호하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역사의 문제’(Problem of history)라고 하는데 역사의 진행 과정에 대한 인간의 의문을 뜻합니다.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 중에 왜 악이 선을 이기느냐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질문하고 성루에 서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보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묵시로 응답해주셨습니다. 얼마나 확실하고 분명하게 응답하셨는지 하박국에게 그것을 판에 기록해서 고속으로 달리면서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미래에 일어날 일을 보여주실 수가 있었느냐? 하나님께서는 천 년, 만 년 후의 미래도 다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 하고 인류의 미래를 알고 싶어 합니다. 미래를 알고 싶어서 점쟁이한테 가서 돈 주고 점을 칩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다고 점을 쳐서는 안 됩니다. 미래를 모른다고 귀신한테 가서 물어보면 되겠습니까?
미래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다 말씀해주셨습니다. 성경은 우리 개인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이고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가장 정확하고 확실하게 예언하고 있는 책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생과 천국을 누리게 될 것이고 안 믿는 사람은 지옥의 형벌을 영원히 받게 될 것이라고 확실히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미래를 아신다고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다니엘서를 연구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미래를 보여주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후대에 다니엘이 꾸며내서 기록한 것 아니냐는 식의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억만년 전 과거도 아시고 억만년 후의 미래도 다 아시는 분입니다. 미래를 아시기 때문에 미래의 일을 묵시로 보여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박국 선지자가 받은 묵시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Ⅰ. 모든 인간의 두 가지 삶의 원리
하박국 2장 4절을 보면 두 종류의 인간이 등장합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 하나는 교만한 사람 즉, 바벨론 사람들의 사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의인 즉,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사는 방식입니다. 하박국 2장은 두 가지 삶의 원리의 대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 교만한 자의 삶의 원리와 그 결과입니다. 바벨론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예표하는 단어입니다. 창세기에서도 바벨탑을 쌓을 때 하나님을 대적했고 요한계시록에서도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기중심적인 세력을 말합니다. 하박국 2장에서는 이들을 두 가지 그림으로 묘사를 하고 있는데 첫째, 그들은 교만합니다. 그런데 영어로 ‘proud’를 쓰지 않고 ‘puffed up’을 사용했습니다. ‘puffed up’은 풍선에 바람이 가득 들어갔음에도 계속해서 바람을 집어넣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바람을 넣다 보면 풍선이 부풀다가 결국 터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 가스통을 들고 다니면서 풍선에 바람을 넣어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면 바람을 많이 넣어서 터질까 불안합니다. 바람이 가득 들어간 풍선은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둘째, 술 취한 사람입니다. “그는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합 2:5). 술 취하면 주사를 부리는데 그중에서 그냥 누워서 자는 사람은 민폐를 끼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술만 마시면 가만히 있지를 않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불안합니다. 돌아다니면서 부딪치는 사람마다 시비를 걸고 잘못해서 개천에도 빠지고 전봇대에 부딪치기도 합니다. 바람이 가득 들어간 풍선, 술 취해서 돌아다니는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은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은 불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박국 2장은 바벨론 원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다섯 가지 화를 예언합니다. 다섯 가지 화의 예언은 이들의 삶의 원리를 말하고 이 원리를 따를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제국주의적 원리입니다. “그는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만국을 모으며 만민을 모으나니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합 2:5~6). 바벨론 사람들은 남의 것을 빼앗습니다. 얼마나 많이 빼앗는지 무거운 짐이 될 때까지 빼앗습니다. 부유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 부가 자신에게 부담이 되고 짐이 된다면 그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을 채우는 것을 제국주의적 원리라고 합니다. 이들에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느냐? “너를 물 자들이 홀연히 일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에, 성읍에, 그 안의 모든 거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리라” (합 2:7~8). 남의 것을 빼앗으며 살았지만 나중에는 남들에게 자신의 것을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방어의 원리입니다.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의 이를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합 2:9). 재앙을 피하기 위해 높은 곳에 살려고 하고 출세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 국회의원이 됐는데 왜 국회의원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자기가 검사를 할 때 깡패를 많이 잡았었는데 그들이 자신을 협박했다고 하면서 그들에게 협박받지 않기 위해서 국회의원이 됐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느냐? 그것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높은 권세를 가져서 남들이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잣집의 특징은 담이 엄청나게 높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담 위에 유리병을 깨뜨려 놓고 철조망도 쳐놓습니다. 그런데 시골에 가보면 담이 없습니다. 농사지으러 가도 문을 활짝 열어놓습니다. 도둑이 와도 가져갈 것이 없으니까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재앙을 피하고자 높은 권세를 얻고 높은 곳에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권세와 집을 유지하기 위해 뇌물을 받아 챙긴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방어의 원리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방어할 때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하박국 2장 10~11절에 나와 있습니다. “네가 여러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너로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합 2:10~11). 집에 들보와 돌을 엄청나게 쌓아놓았는데 그만 지진이 나서 들보와 돌이 무너지고 가정이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잔인성의 원리입니다. “피로 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합 2:12). 바벨론 사람들의 특징은 마을을 건설해도 피로 건설하고 성을 건설해도 불의로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피라미드를 어떻게 지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옛날에는 기중기도 없었고 굴착기도 없었는데 그 어마어마한 돌은 어떻게 날랐겠습니까? 노예들을 시켜 돌을 운반한 것입니다. 그러니 돌을 운반하다가 몇 명이 깔려 죽었겠으며 얼마나 다쳤겠습니까? 이것이 ‘잔인성의 원리’입니다. 바벨론의 원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많은 노예의 목숨을 희생시키면서 성읍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의 결과는 어떻게 되느냐?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열국이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 아니냐” (합 2:13). 성읍을 건설한 것이 다 불타버려 결국 헛된 일이 되고 결국 그것이 자신을 곤비하게 만드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집을 크게 지어서 마당도 엄청나게 크고 잔디도 깔아놓으면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걸 관리하려면 얼마나 힘들까?’ 하지만 25평 아파트에 살면 청소하기도 간단하고 얼마나 간편합니까? 성읍을 높게 건설한 것 때문에 결국 자신이 곤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방탕과 타락의 원리입니다.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케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합 2:15). 술만 먹으면 되지 왜 술만 먹으면 그 하체를 드러나게 합니까? 이렇게 방탕하고 타락한 자들은 남을 수치스럽게 한만큼 자신도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우리라” (합 2:16).
다섯째, 우상숭배의 원리입니다. “나무더러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더러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합 2:19). 나무나 돌을 깎아서 우상을 만들어 거기다 아무리 말해도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합 2:18). 말도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제국주의적 원리, 자기방어의 원리, 잔인성의 원리, 방탕과 타락의 원리, 우상숭배의 원리 이 다섯 가지 원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결국 패망하여 영원히 존재조차 찾을 수 없게 됩니다. 바벨론이라는 엄청난 제국도 메디아와 페르시아 연합군에 의해 B.C. 539년 완전히 멸망해서 지금은 사라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중심의 원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결국 멸망하고 지옥의 영원형벌을 받습니다. 이것을 우습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의인의 삶의 원리와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교만하고 바벨론의 원리를 따르는 사람들과 대비되는 말씀이 하박국 2장 4절 후반에 나옵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 이 말씀은 신약성경에 3번(갈라디아 3장 11절, 히브리서 10장 38절, 로마서 1장 17절) 인용됩니다.
첫째, 이신득의의 원리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갈 3:11). 사도 바울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죄인이 의롭게 되는 방법은 오직 믿음 한 가지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죄인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99.999% 의롭고 0.001% 죄지었다고 해도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처럼 천국은 완전한 의인만 들어갈 수 있는데 완전한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 죄인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에게는 의의 옷을 입혀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루터와 칼빈이 발견한 이신득의라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둘째, 약속을 믿고 인내하는 원리입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0:38). 히브리서에서는 악인이 승리하는 현실에도 좌절하거나 물러나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악인은 결국은 패망하고 의인은 승리한다는 것을 믿고 좌절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믿음으로 인내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번 부흥회 때 강사님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천국이 있으니 지금 어려워도 버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인생이 시궁창에 거꾸로 박혀있는 상태라도 조금만 버티면 좋은 세상 온다는 것입니다.
셋째, 일관성의 원리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일관성 있게 살아야 합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고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으면 우리의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가서 천국의 삼층천에 거하다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생명의 부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죽지 않는 몸, 썩지 않는 몸, 쇠하지 않는 몸, 추하지 않은 몸으로 부활해서 영생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하면 어디서 사느냐?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아 그곳에서 영원히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번 부흥회 때 들었던 예화 중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렸는데 이 이야기만큼은 생각납니다. 어떤 사람이 1억 원을 빌려주고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강사님은 100만 원이라고 했지만 저는 1억 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사람이 1억 원을 빌려준 사람을 볼 때마다 속이 상해서 힘들어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로또 복권을 샀습니다. 그리고 1000억 원이 당첨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사람이 1억 원 받지 못한 것을 신경 쓰겠습니까?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1억 원 갚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서 2억 원 줄 테니까 똑바로 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1000억 원 로또 복권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은 것입니다. 이것을 약속받았으니 현세를 살아가는 동안 조금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러려니 하십시오. 또 누가 여러분들을 속이고 악을 행했는데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때도 그러려니 하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악인은 이기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영원한 승리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Ⅱ. 의인이 믿어야 할 두 가지 약속
하박국 선지자는 의인들이 믿어야 될 하나님의 두 가지 위대한 약속을 하박국 2장에서 말씀했습니다.
첫째, 미래적인 약속입니다.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합 2:14). 언젠가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가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동서남북을 보아도 갈대아 군대가 휩쓸고 다니지만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폴레옹, 히틀러의 군대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 땅의 어떤 세력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세력이 하나님의 교회를 다 집어삼킬 만큼 커져도 결국 그들은 망하고 온 세상을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시대에 점진적으로 실현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입니다. 이 땅을 누가 차지합니까? 온유한 자가 차지합니다. 의인들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하고 만복을 누리며 살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현재적인 약속입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합 2:20). 이 세상에서 악이 이기는 것 같고 하나님께서는 무관심한 것처럼 보여도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성전에서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악인이 잠시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하나님께서 다 통치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반대하고 데모하다가 끌려가서 맞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수님께 물어봤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랬더니 교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데모하다가 죽을 각오가 되어있으면 반대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라.” 그래서 저는 술만 마셨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그것이 제가 짊어질 일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다 알아서 진행하시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어떤 사건도 하나님의 주권과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건도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없고 무관심하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현재의 고난으로 너무 고민하지 말고 미래에 대해서도 불안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보좌에 앉으셔서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결 론
이 두 가지 약속을 받은 하박국은 위대한 확신을 보입니다. “선지자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 (합 1:12).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갈대아 군대가 와서 우리를 치더라도 우리는 죽지 않고 멸망하지도 않고 도리어 영원한 승리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죽질 않습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영원한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런 믿음이 하박국 1장의 의문을 하박국 3장의 기쁨과 확신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론의 원리를 따라 살다가 영원히 멸망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최후 승리와 영원한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
하박국 2:18-20 / 이한규 목사
< 우상을 의지하지 말라 >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어 의지하면 아무런 유익이 없고 화가 있다고 하셨다(18-19절).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상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쓸모없는 것이지만 유일하고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 잠잠해야 한다(20절).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승리와 성취의 제일 비결이다.
세상이 혼란해도 마음은 혼란해지지 말라. 지나친 추측을 삼가라. 말을 한 마디 줄이고 말하는 것도 한 템포 늦추라. 선한 거짓말도 주의하라. 선한 거짓말도 자주 하면 진짜 거짓말도 쉽게 하게 되고 나중에는 의도적인 악한 거짓말도 쉽게 하게 된다. 거짓으로 남을 선동하고 거짓 증거까지 하면서 사실을 조작하면 결국 어느 순간에 무섭게 추락한다.
표현된 해석도 잘해야 하지만 표현되지 않은 이해를 앞세우라. 이해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할 때 잠잠히 기다릴 수 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라. 하나님 앞에서 너무 소리를 내지 말라. 겸손하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 하나님 앞에서 높아지면 결국 무섭게 추락한다. 바벨론의 비극적인 결말은 그 사실을 잘 말해준다. 인생이 바벨론 인생이 되지 않도록 늘 삼가고 주의하고 절제하고 잠잠하라.
<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 >
예전에 미국의 케네디 전 대통령의 아들 존 에프 케네디 주니어가 경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을 때 전 세계가 떠들썩했다. 케네디 가의 비극은 그의 할아버지의 언행에 비춰볼 때 어느 정도 예상된 비극이었다. 조지프 케네디는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으로 탁월한 수완을 발휘해 30대에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리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재정후견인 역할도 했고 증권거래위원장 및 영국대사도 역임했다. 엄청난 부와 화려한 경력에다가 자녀도 9남매를 두어 외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어느 날 한 신문사 기자가 질문했다. “정말 훌륭한 자녀들을 많이 두었네요. 어떻게 그렇게 많이 낳아 기르셨습니까?” 그때 그는 저주가 깃들 수 있는 섬뜩한 대답을 했다. “우리 같은 우수한 종자는 아이를 많이 낳아 퍼뜨려야 합니다.”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그의 대답은 누군가에게는 그의 가정에 임할 저주처럼 들려졌을 것이다. 비극적인 사건의 핵심 원인은 인간의 교만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해결 받지 못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축복도 마찬가지다. 축복의 원인은 은밀한 기도와 정성의 뒷받침 때문인 경우가 많다. 기도와 정성과 헌신의 효과를 잊은 채 회의에 빠지 말라. 물론 간절히 기도한다고 해서 기도한대로 내가 원하는 시간에 하나님이 기계적으로 응답해 주시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누구나 다 기도할 것이다. 일주일 작정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이 백만 원 주시고 40일 작정 기도를 할 때 하나님 천만 원 주시고 100일 작정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이 일억 원을 주시는 정찰제라면 작정 기도 하려는 사람이 무수히 생겨날 것이다.
하나님은 기도와 헌신과 정성에 대한 보상을 ‘정찰제’로 운영하여 주시지 않고 ‘믿음제’로 운영하신다. 당장의 보상이 없어 보여도 나의 기도와 헌신과 정성은 결코 헛되지 않다. 하나님은 내 기도와 정성과 헌신을 하나님의 은행에 있는 내 이름으로 된 영적 계좌에 쌓아 두셨다가 나의 뜻을 초월한 방법으로 가장 적절한 때에 보상하신다. 심지어는 내 후대에 이르러 보상이 이뤄질 때도 많다.
내가 아무리 멋대로 살아도 하나님이 잠잠히 계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의 피로 그 죄와 허물이 가려지지 않으면 언젠가 상응한 대가를 치른다는 사실을 알고 늘 겸허한 마음을 가지라. 반대로 내가 아무리 기도하고 헌신해도 하나님이 잠잠히 계신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의 기도와 정성과 헌신이 보이지 않게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졌다가 언젠가는 눈에 보이는 큰 축복으로 드러남을 믿고 하나님을 추구하라.